멀리서 정겨울과 허윤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경혜와 하예진은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바라보았다.고현도 함께 오고 있었다.고현은 두 아름다운 유부녀 사이에 끼어있었는데 마치 남자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하예진은 그녀들을 바라보며 이경혜에게 말했다.“고현 씨가 여자인 건 알지만 볼 때마다 남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다만 목젖만 없을 뿐이다.이경혜가 말을 이었다.“어릴 때부터 남자처럼 자라서 그래. 여자들 사이에 서면 키도 훨씬 크고 성격도 차가워서 남자로 오해받기 쉬워. 게다가 치마를 입는 것을 싫어하니까 호영 씨와 함께 다닐 때면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보잖아.”사람들은 그들을 게이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전호영이 전에 말했듯 사람들은 그들을 게이로 오해할 뿐만 아니라 전호영이 ‘여자 역할’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고현은 차가운 성격에 고씨 그룹의 대표이기 때문에 만약 그녀가 남자라면 절대 ‘남자 역할'을 하지 않고 주도권을 쥐려고 했을 것이다.그것이 고현의 일관된 행동 방식이었다.사람들은 그녀가 전호영과 결혼하여 부부 생활을 하더라도 전호영은 분명 ‘따르는 역할'이 될 것이고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으리라 생각했다.이경혜가 말을 이었다.“고현 씨가 정말 남자였다면 얼마나 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머리를 싸매고 다툴까... 여자인데도 고현 씨를 위해 다투는 여자들이 많았잖아.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무수한 여자들의 가슴이 찢어졌지. 숨어서 울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거야.”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세 여자가 저 멀리서 다가왔다.“사모님, 예진 언니.”세 사람은 이경혜와 하예진에게 인사했다.이경혜와 하예진은 미소로 답했다.허윤주가 말을 건넸다.“남자들이 모여서 큰일을 논의하고 있어서 우리 여자들은 산책하러 나왔어요. 고 대표님도 함께해 주기로 했죠.”정겨울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윤주 씨가 끌고 나오지 않았다면 저는 방에서 쉬고 싶었는데. 잘 쉬지 못했거든요.”이경혜는 사과하는 말투로 말했다.“저
윤미라 부부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막내아들이 하예진을 사랑하는 한 두 사람이 행복하기만 하면 이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어차피 노동명은 여전히 그들의 아들일 테니까.이경혜가 말했다.“너희 엄마와 나에게는 딸 세 명이 있는데 예정이는 일단 제외해야 해. 그 아이는 전씨 가문의 큰며느리고 태윤이가 전씨 가문을 이끌고 있으니 예정은 앞으로 그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잖아. 이씨 가문을 물려받을 수는 없어. 소현의 남자 친구의 부모님도 생각이 매우 개방적이라 아들이 데릴사위로 들어가야 한다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하셨어. 그런데 소현이와 예정이는 작은 사업에 투자하는 정도는 괜찮아도 가문의 일을 관리하고 사업을 운영하면서 또 이씨 가문 일까지 처리하기에는... 아무튼 소현의 성격에 맞지 않거든. 그 아이는 참을성이 부족해. 게다가 성격이 거만해서 주변 사람들을 쉽게 무시하고 자주 적을 만들곤 하지. 하지만 넌 경험도 많고 모든 면에서 소현보다 성숙해. 강성에서 지낸 시간도 길고 이씨 가문의 사람들도 점점 너를 인정하는 분위기라 네가 가장 적합한 사람이야. 이씨 가문의 문제가 해결되고 윤미가 강성을 떠나면 너에게 이씨 가문과 이씨 그룹을 맡길 거야. 모르는 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물어보면 돼. 가문 안의 젊은이 중에서도 능력 있는 이들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해 그들의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해.”“하지만 명심해. 가주의 권한은 절대 놓치면 안 돼. 그들이 성장해 역으로 너를 집어삼킬 수도 있으니까. 오래된 가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야. 이씨 가문에도 터무니없고 억압적인 규칙이 많거든. 자리를 잡은 후에 천천히 고쳐나가면 돼. 규칙은 죽은 것이지만 사람은 살아 있는 법이니까. 네가 바꾼 규칙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사람들도 너를 적극 지지할 거야. 그때 가면 너의 곁에도 특별 비서가 한 명 따를 거야. 특별 비서를 양성하는 기지는 가주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가주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특별 비서를 배정해 주거든. 특별 비서는 평생을
이경혜는 고개를 끄덕였다.“너희들이 이미 다 준비해 두었으니 나도 안심이야. 다들 무사히 집에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야. 예정이가 그러는데 태윤이가 직접 예진 리조트에 가서 그녀와 우빈을 데려간대. 동명이도 나한테 꼭 너를 무사히 관성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 혼인신고를 하고 새해를 맞이하겠다고 집에서 기다린다더라.”이경혜는 조카딸의 손을 잡고 노동명과의 혼인 이야기를 꺼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이모는 너와 동명이가 결혼하는 모습과 예정이가 아이 낳는 것을 보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 네 엄마도 무척 기뻐하실 거다.”하예진의 얼굴이 붉어졌다.“설전에 혼인 신고 하는 건 너무 급하지 않을까요?”“그냥 혼인신고 하는 거지 결혼식을 올리는 건 아니잖아. 태윤이와 예정처럼 먼저 혼인신고를 하고 나중에 날짜를 멀리 잡아 천천히 결혼식을 준비하면 돼. 동명이가 너에게 화려한 결혼식을 선물하겠다고 했어. 절대 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이경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이모는 너희 자매가 모두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니 안심이 돼. 너희들이 선택한 남자들은 모두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니 이모도 앞으로 너희들이 힘들어할 걱정을 안 해도 되겠네. 소현이와 소현이 남자친구도 잘 어울리고. 이제 난 주현의 혼사만 걱정하면 되는구나. 네 둘째 오빠는 너와 같은 나인데 두 달 더 크잖아. 우빈이도 유치원에 다니는데 그 애는 여자친구도 없어. 다 우리가 막 키워서 그런 거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더니 항상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기만 해서 결혼을 재촉할 기회도 없었지. 그래서 지금 서른이 넘었는데도 싱글이잖아.”이경혜는 걱정스럽게 말했다.“예진아, 네 외할머니 일이 끝나고 관성에 돌아가면 너희들 모두 주현의 짝을 좀 찾아줘. 꼭 그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주렴.”하예진도 고민에 빠졌다.“이모, 제가 아는 여자애들이 너무 적어요. 좋은 애들은 이미 다 커플이 있고 안 좋은 애들은 당연히 제 사촌오빠에게 소개할 수 없죠. 오빠에게 여자친구
“이미 퇴원했지만 아직 회사에 복귀하지 않았어요. 이 가주님이 집에서 쉬라고 해서인데 사실은 회사에 돌아가 계획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죠. 저에게 다시 정보를 흘릴까 걱정하면서. 그리고 방 비서님께 약을 주며 윤미 씨에게 먹이라고 했대요. 윤미 씨가 깊은 잠에 빠지면 방 비서님이 그녀를 데리고 강성을 떠나게 하려고요. 윤미 씨를 위해 뒷길을 마련해 두었지만 윤미 씨가 거절했대요. 방 비서님도 윤미 씨를 배신할 수 없어 약을 그녀에게 건넸죠. 그리고 퇴원한 뒤로 직접 그 약을 저에게 넘기면서 검사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하예진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윤미 씨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이 가주님 곁에서 자라지 않아 가치관이 바르거든요. 그녀가 죽는 것은 저도 원치 않아요.”이경혜는 긴 침묵 끝에 말했다.“지금이든 앞으로든 윤미가 먼저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지금은 가치관이 괜찮지만 미래는 장담할 수 없어. 예진아, 사람은 변하는 법이야. 윤미는 결국 그 여자의 친딸이고 몸속에도 정군호 씨의 피가 흐르며 그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어.”하예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경혜의 말대로 이윤미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사람은 변하는 법이다.하예진은 자신도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한참을 더 걸은 하예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윤미 씨도 말했어요. 우리 외할머니가 정말 그녀 어머니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죽어도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않겠다고요. 자신의 것이 아니면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강성을 떠날 거라고 했어요. 방 비서님만 데리고 가면 된대요. 신분이 바뀌기 전부터 그녀는 이미 몇 개의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연수입도 꽤 된대요. 창업에 성공한 셈이죠. 저는 윤미 씨가 말한 대로 할 거라고 믿어요. 비록 그 여자의 친딸이지만 친엄마 곁에서 자라지 않아 모녀 간의 정이 깊지 않거든요. 이 가주님이 죽는다고 해서 복수를 할 사람이 아니에요
“이모, 정 선생님이 어떻게 손을 쓰셨는데요? 그렇게 놀랍던가요?”하예진은 정겨울의 의술이 뛰어난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녀의 무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그녀는 정겨울의 실력이 무협 소설에 나오는 실력자처럼 담장을 날아다니고 공중에서 물건을 잡으며 나뭇잎으로 상대를 해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이경혜가 대답했다.“나는 정 선생님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보지도 못했어. 그냥 그 여자와 이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쓰러지는 광경을 봤을 뿐이야. 정 선생님은 독침을 사용했다고 했는데 나는 그 독침이 어떻게 날아갔는지조차 모르겠더라고.”정말로 알아챌 수 없었다.하예진이 물었다.“독침이라고요?”진짜 무협 소설 같은 분위기였다.“아저씨는 정 선생님이 의술뿐만 아니라 독에도 능하다고 하셨어. 독을 만드는 걸 가장 좋아한대. 독으로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니까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을 거야.”이경혜는 정겨울의 능력을 생각하며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를 실감했다.“아저씨는 정 선생님이 그녀의 스승보다도 뛰어나다고 하셨어. 다행히 우리는 적수 사이가 아니야.“그러네요.”다행히도 정겨울은 그들의 적이 아니었다.모두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노년 세대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한성근의 인맥을 통해 여러 세외고수의 제자들이 이경혜 일행의 배경과 관계를 완벽히 파악한 상태였다. 그들은 한성근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평소 접하기 어려운 막강한 영향력의 인물들과 관계를 형성하게 된 셈이다.“아저씨가 오늘 그 여자를 만났어.”하예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이경혜가 말을 이었다.“아저씨는 그 여자에게 우리 엄마를 죽인 사실을 추궁하셨거든. 그녀는 당연히 부인했고 증거를 요구하더라고. 우리 손에 증거가 있더라도 묘지에서 꺼내지 않았을 거야. 빼앗기거나 파기될까 봐. 나는 그녀가 먼저 명예를 완전히 잃고 목숨으로 빚을 갚기를 원해. 비록 40년, 50년이 지났더라도 그녀가 우리 엄마를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계속 살려둘 수 없
지하 비밀 통로에는 세 개의 입구가 더 있었다. 실내 한 곳, 앞마당 한 곳, 뒷마당 한 곳.이것은 탈출 기회를 크게 높여주었다.지하 통로가 없더라도 그들은 이미 몰래 많은 인원을 투입해 두었다.이은화가 진짜 동귀어진을 선택한다면 그들의 사람들이 도혁찬과 그의 부하들을 제압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도혁찬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십 년 전 업계를 호령하던 오제당보다는 못할 것이다.비록 은퇴한 세외고수들이지만 그들의 제자들은 사방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맥을 천하에 퍼뜨렸다.이은화가 잠시 기쁨에 취해 자신의 음모가 성공할 것처럼 생각하게 둔 것뿐이다.“응, 그 여자는 거기서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엄마 묘지에 인사드리는 것도 막더라고. 감히 엄마의 묘비를 찾아가다니... 엄마는 진작 그 여자가 이렇게 냉정한 짐승처럼 변한 것을 아셨다면 개를 키우는 게 나았을 거라고 욕하셨을 거야. 진짜 배은망덕한 년이지!”이경혜는 이은화를 뼛속까지 미워했다.그녀의 행복한 가정은 이은화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유일한 혈육과도 헤어져야 했으며 간신히 여동생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죽음으로 떨어진 후였다.이 모든 비극이 바로 이은화가 만들어낸 것이다.그러나 이은화는 이경혜의 집안을 파탄 내고도 본인은 호의호식하며 살아왔다.비록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네 명의 자식을 낳았고 딸 바꿔치기 사건을 제외하면 사실 매우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그러나 이은화의 풍요는 이경혜의 가족 고통 위에 세워진 것인데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심지어 딸 바꿔치기도 이은화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이윤미는 이은화와 마음이 통하지 않았고 함께 타락하지도 않았다.세대를 건너는 복수만 하지 않는다면 이은화가 죽더라도 이윤미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현재 이윤미는 능력이 막강하고 든든한 방윤림이 곁에 있다. 이씨 가문을 떠나 강성을 벗어나도 잘 살 수 있을 터였다.이경혜는 이은화를 증오했지만 이윤미에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