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혜는 고개를 끄덕였다.“너희들이 이미 다 준비해 두었으니 나도 안심이야. 다들 무사히 집에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야. 예정이가 그러는데 태윤이가 직접 예진 리조트에 가서 그녀와 우빈을 데려간대. 동명이도 나한테 꼭 너를 무사히 관성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 혼인신고를 하고 새해를 맞이하겠다고 집에서 기다린다더라.”이경혜는 조카딸의 손을 잡고 노동명과의 혼인 이야기를 꺼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이모는 너와 동명이가 결혼하는 모습과 예정이가 아이 낳는 것을 보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 네 엄마도 무척 기뻐하실 거다.”하예진의 얼굴이 붉어졌다.“설전에 혼인 신고 하는 건 너무 급하지 않을까요?”“그냥 혼인신고 하는 거지 결혼식을 올리는 건 아니잖아. 태윤이와 예정처럼 먼저 혼인신고를 하고 나중에 날짜를 멀리 잡아 천천히 결혼식을 준비하면 돼. 동명이가 너에게 화려한 결혼식을 선물하겠다고 했어. 절대 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이경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이모는 너희 자매가 모두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니 안심이 돼. 너희들이 선택한 남자들은 모두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니 이모도 앞으로 너희들이 힘들어할 걱정을 안 해도 되겠네. 소현이와 소현이 남자친구도 잘 어울리고. 이제 난 주현의 혼사만 걱정하면 되는구나. 네 둘째 오빠는 너와 같은 나인데 두 달 더 크잖아. 우빈이도 유치원에 다니는데 그 애는 여자친구도 없어. 다 우리가 막 키워서 그런 거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더니 항상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기만 해서 결혼을 재촉할 기회도 없었지. 그래서 지금 서른이 넘었는데도 싱글이잖아.”이경혜는 걱정스럽게 말했다.“예진아, 네 외할머니 일이 끝나고 관성에 돌아가면 너희들 모두 주현의 짝을 좀 찾아줘. 꼭 그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주렴.”하예진도 고민에 빠졌다.“이모, 제가 아는 여자애들이 너무 적어요. 좋은 애들은 이미 다 커플이 있고 안 좋은 애들은 당연히 제 사촌오빠에게 소개할 수 없죠. 오빠에게 여자친구
“이미 퇴원했지만 아직 회사에 복귀하지 않았어요. 이 가주님이 집에서 쉬라고 해서인데 사실은 회사에 돌아가 계획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죠. 저에게 다시 정보를 흘릴까 걱정하면서. 그리고 방 비서님께 약을 주며 윤미 씨에게 먹이라고 했대요. 윤미 씨가 깊은 잠에 빠지면 방 비서님이 그녀를 데리고 강성을 떠나게 하려고요. 윤미 씨를 위해 뒷길을 마련해 두었지만 윤미 씨가 거절했대요. 방 비서님도 윤미 씨를 배신할 수 없어 약을 그녀에게 건넸죠. 그리고 퇴원한 뒤로 직접 그 약을 저에게 넘기면서 검사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하예진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윤미 씨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이 가주님 곁에서 자라지 않아 가치관이 바르거든요. 그녀가 죽는 것은 저도 원치 않아요.”이경혜는 긴 침묵 끝에 말했다.“지금이든 앞으로든 윤미가 먼저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지금은 가치관이 괜찮지만 미래는 장담할 수 없어. 예진아, 사람은 변하는 법이야. 윤미는 결국 그 여자의 친딸이고 몸속에도 정군호 씨의 피가 흐르며 그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어.”하예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경혜의 말대로 이윤미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사람은 변하는 법이다.하예진은 자신도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한참을 더 걸은 하예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윤미 씨도 말했어요. 우리 외할머니가 정말 그녀 어머니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죽어도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않겠다고요. 자신의 것이 아니면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강성을 떠날 거라고 했어요. 방 비서님만 데리고 가면 된대요. 신분이 바뀌기 전부터 그녀는 이미 몇 개의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연수입도 꽤 된대요. 창업에 성공한 셈이죠. 저는 윤미 씨가 말한 대로 할 거라고 믿어요. 비록 그 여자의 친딸이지만 친엄마 곁에서 자라지 않아 모녀 간의 정이 깊지 않거든요. 이 가주님이 죽는다고 해서 복수를 할 사람이 아니에요
“이모, 정 선생님이 어떻게 손을 쓰셨는데요? 그렇게 놀랍던가요?”하예진은 정겨울의 의술이 뛰어난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녀의 무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그녀는 정겨울의 실력이 무협 소설에 나오는 실력자처럼 담장을 날아다니고 공중에서 물건을 잡으며 나뭇잎으로 상대를 해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이경혜가 대답했다.“나는 정 선생님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보지도 못했어. 그냥 그 여자와 이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쓰러지는 광경을 봤을 뿐이야. 정 선생님은 독침을 사용했다고 했는데 나는 그 독침이 어떻게 날아갔는지조차 모르겠더라고.”정말로 알아챌 수 없었다.하예진이 물었다.“독침이라고요?”진짜 무협 소설 같은 분위기였다.“아저씨는 정 선생님이 의술뿐만 아니라 독에도 능하다고 하셨어. 독을 만드는 걸 가장 좋아한대. 독으로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니까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을 거야.”이경혜는 정겨울의 능력을 생각하며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를 실감했다.“아저씨는 정 선생님이 그녀의 스승보다도 뛰어나다고 하셨어. 다행히 우리는 적수 사이가 아니야.“그러네요.”다행히도 정겨울은 그들의 적이 아니었다.모두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노년 세대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한성근의 인맥을 통해 여러 세외고수의 제자들이 이경혜 일행의 배경과 관계를 완벽히 파악한 상태였다. 그들은 한성근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평소 접하기 어려운 막강한 영향력의 인물들과 관계를 형성하게 된 셈이다.“아저씨가 오늘 그 여자를 만났어.”하예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이경혜가 말을 이었다.“아저씨는 그 여자에게 우리 엄마를 죽인 사실을 추궁하셨거든. 그녀는 당연히 부인했고 증거를 요구하더라고. 우리 손에 증거가 있더라도 묘지에서 꺼내지 않았을 거야. 빼앗기거나 파기될까 봐. 나는 그녀가 먼저 명예를 완전히 잃고 목숨으로 빚을 갚기를 원해. 비록 40년, 50년이 지났더라도 그녀가 우리 엄마를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계속 살려둘 수 없
지하 비밀 통로에는 세 개의 입구가 더 있었다. 실내 한 곳, 앞마당 한 곳, 뒷마당 한 곳.이것은 탈출 기회를 크게 높여주었다.지하 통로가 없더라도 그들은 이미 몰래 많은 인원을 투입해 두었다.이은화가 진짜 동귀어진을 선택한다면 그들의 사람들이 도혁찬과 그의 부하들을 제압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도혁찬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십 년 전 업계를 호령하던 오제당보다는 못할 것이다.비록 은퇴한 세외고수들이지만 그들의 제자들은 사방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맥을 천하에 퍼뜨렸다.이은화가 잠시 기쁨에 취해 자신의 음모가 성공할 것처럼 생각하게 둔 것뿐이다.“응, 그 여자는 거기서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엄마 묘지에 인사드리는 것도 막더라고. 감히 엄마의 묘비를 찾아가다니... 엄마는 진작 그 여자가 이렇게 냉정한 짐승처럼 변한 것을 아셨다면 개를 키우는 게 나았을 거라고 욕하셨을 거야. 진짜 배은망덕한 년이지!”이경혜는 이은화를 뼛속까지 미워했다.그녀의 행복한 가정은 이은화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유일한 혈육과도 헤어져야 했으며 간신히 여동생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죽음으로 떨어진 후였다.이 모든 비극이 바로 이은화가 만들어낸 것이다.그러나 이은화는 이경혜의 집안을 파탄 내고도 본인은 호의호식하며 살아왔다.비록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네 명의 자식을 낳았고 딸 바꿔치기 사건을 제외하면 사실 매우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그러나 이은화의 풍요는 이경혜의 가족 고통 위에 세워진 것인데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심지어 딸 바꿔치기도 이은화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이윤미는 이은화와 마음이 통하지 않았고 함께 타락하지도 않았다.세대를 건너는 복수만 하지 않는다면 이은화가 죽더라도 이윤미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현재 이윤미는 능력이 막강하고 든든한 방윤림이 곁에 있다. 이씨 가문을 떠나 강성을 벗어나도 잘 살 수 있을 터였다.이경혜는 이은화를 증오했지만 이윤미에게까지
공은호가 전호영을 훑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호영 씨도 뛰어난 사람이라 고 대표님과 잘 어울릴 것 같소.”고진호가 받아쳤다.“사돈댁 아들들도 전부 훌륭하세요. 공은호 어르신도 훌륭한 여제자들이 많다던데 사돈댁 아들 중에 어울리는 아이가 있는지 보세요.”이백훈이 말을 이었다.“이분의 여제자들은 뭐든 그의 말을 잘 듣지만 결혼 문제만큼은 안 듣는다오. 결혼을 재촉하면 ‘스승님도 평생 결혼 안 하셨는데 잘 사시잖아요. 늙어서도 걱정 없으시면서 왜 우리만 재촉하세요'라고 반박하더구먼. ‘이제 우리도 어린 제자들을 받아 자식처럼 키우고 있어요. 제자들이 커서 독립하면 우리가 늙어도 돌봐주고 죽을 때도 보내줄 건데 꼭 결혼해서 아이 낳을 필요 없잖아요'라고 말하오.”공은호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귀여운 제자가 시집가니까 한시름 놓았구먼 그러네. 윤주가 시집가기 전에도 윤주 인생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았나?”이백훈의 제자는 바로 허윤주, 현재 남씨 가문 가주의 사모님이다.“하하, 나는 이제 임무 완수했네. 이제 손주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이백훈은 꽤 잘난 체했다.노인들이 모이기만 하면 자기 자식 이야기나 언제 손주를 볼 수 있을지 같은 이야기를 하는 법인듯했다.“하예진 님 일행께서 도착하셨습니다.”집사가 고진호에게 공손한 태도로 보고했다.하예진은 이경혜 일행을 마중하러 갔다. 호텔에서 이경혜와 한성근을 위한 접대 연회를 열기로 했지만 고진호의 청으로 모두 고씨 가문 저택으로 초대된 것이다.하예진은 저택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어르신들과 함께 식사했다.“큰형님께서 드디어 오셨구나.”공은호 일행은 말을 하면서 직접 대문 쪽으로 나갔다.고진호는 이미 한성근에 관한 일을 알고 있었기에 가족들과 함께 마중하러 나갔다.누가 오든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예의였다.몇 분 후.그들은 웃음소리를 내며 호화로운 거실로 들어섰다.고씨 가문은 이미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이경혜 일행이 강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씨 가문 묘지로 향해
“너무 궁금한데, 그 할멈이 왜 소현 씨를 전씨 가문의 형제 중 하나와 결혼시키지 않았소?”전호영은 전태윤을 바라보았는데 형이 태연한 표정이길래 대담하게 말을 이었다.“소현 씨는 한때 우리 형님을 좋아했었죠. 하지만 형님은 전혀 관심이 없으셨어요. 그분의 그 감정은 관성 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 있을 거예요. 우리 큰형과 형수님이 결혼하신 후 소현 씨도 마음을 접고 우리 형에 대한 그 감정도 정리했죠. 할머니께서도 소현 씨가 우리 형을 좋아했던 사실을 알고 계셨어요. 만약 그녀를 우리 중 누구와 맺어주려 했다면 모두 불편했을 거예요. 게다가 소현 씨가 무의식중에 우리를 형님과 비교할 수도 있고요. 오히려 좋지 않았을 테죠. 우리도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형과 비교하면 아직 부족한 점이 많잖아요.”공은호는 웃으며 말했다.“그렇군. 하지만 소현 씨의 약혼자도 훌륭하던데 그녀가 예씨 가문에 시집가면 우리 큰형도 한시름 놓이겠구먼.”예씨 가문의 남자들도 뛰어났다.정겨울의 남편만 봐도 그녀의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알았고 지극정성으로 아꼈다.물론 정겨울 본인도 매우 뛰어나고 좋은 처가집을 두고 있었다.그들 모두 정겨울의 처가 식구들이었다.정겨울이든 허윤주든 시집에서 잘살고 있었고 시댁 식구들은 그들을 친딸처럼 대해주었다.남편들은 지위도 높고 아내를 아끼는 사람들이었다.앞으로 민지영도 좋은 집안으로 시집갈 것이다.자신들이 키운 제자들이 하나둘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니 공은호 일행은 깊은 감동을 했다.아, 물론 결혼할 생각도 없는 불효 제자들도 많았다.아직까지 손을 놓을 수는 없었던 터라 결혼을 재촉해야 했다.한성근의 일이 끝나면 전씨 할머니처럼 제자들의 배필을 골라주는 방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강제로 간섭하지 않으면 그들 중 많은 제자가 한성근처럼 평생 독신으로 살 가능성이 아주 컸다.그들 자신도 독신으로 살았고 삶이 꽤 자유로웠지만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다. 제자들이 결혼하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