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 씨는 갔어?”전태윤은 아직도 연적을 신경 쓰고 있었다.“내가 왔을 때 가게에 없더라고요. 아직도 질투해요?”전태윤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너도 내 성격이 원래 이렇다고 했잖아. 앞으로 자주 질투할지도 모르겠어.”만약 소정남과 전씨 할머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무조건 비웃을 게 뻔했다. 하예정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태윤 씨 귀여운 면이 있다니까요.”하예정은 질투하는 그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너도 귀여워.““태윤 씨 입에 꿀이라도 발랐어요? 말 점점 예쁘게 하네요.”전태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는 늘 그가 애정 표현을 할 줄 모른다고 잔소리했었다. 그가 듣기 좋은 소리를 한마디 했을 뿐인데 하예정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그럼 일 봐. 이만 끊을게.”“네.”하예정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태윤은 휴대 전화 화면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원망 섞인 말투로 투덜거렸다.“보고 싶단 말 한 번도 안 하네.”그는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일에 몰두했다.대추차를 다 마신 하예정은 텀블러를 깨끗하게 씻었다. 그다음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씻은 후 과일 접시에 담았다.이경혜 모녀가 카운터 밖에 앉아있었다.“아주머니.”하예정은 과일 접시를 이경혜 앞에 내려놓았다.“과일 좀 드세요.”“고마워.”하예정이 자리에 앉자 이경혜는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예정아, 오늘 내가 왜 왔는지 너도 알겠지? 나 여덟 살 되던 해에 여동생이랑 헤어졌는데 벌써 50년이나 지났어. 50년 동안 한순간도 동생을 잊은 적이 없었어. 양부모네 집에서 잘 지내는지, 이 언니를 잊은 건 아닌지 걱정했어. 동생이 입양된 후에 보육원 원장님한테 동생의 근황을 자주 물어봤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고 능력이 된 후에 갖은 방법으로 여동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 예전에는 찾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인터넷도 발달하여 쉬울 줄 알았는데 매번 기대와 실망을 거듭했어.”하예
그녀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오는 걸 본 하예정은 재빨리 휴지를 건네며 사과했다.“아주머니, 미안해요.”“예정아.”이경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미안한 건 나야. 아주머니가 능력이 부족해서 지금까지 너희들을 찾지 못했어. 만약 진작 찾았더라면 너희 엄마도 아직 살아있었을 텐데.”만약 여동생을 찾았다면 시내로 데려왔을 것이다. 그러면 시골 도로에서 부부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아직 유전자 검사를 하기 전이지만 이경혜의 말을 들은 하예정도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엄마가 아직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엄마, 울지 말아요. 아빠가 저한테 엄마 울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어제도 종일 우셨잖아요.”성소현은 하예정이 건넨 휴지를 받고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엄마, 먼저 예정 씨랑 유전자 검사하러 가요. 만약 정말 혈육 관계라면 예정 씨랑 예진 언니가 있잖아요.”이경혜가 눈물을 쓱 닦으며 말했다.“엄마가 감정이 컨트롤 안 돼서 그래.”그때 이경혜 자매의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나이인 그녀는 여동생을 키울 능력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여동생과 헤어져야만 했다.그렇게 한 번의 이별이 50년이나 지속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겨우 소식을 찾았나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하늘나라에 갔다.아무리 강한 이경혜라고 해도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하늘도 참 무심하시지.’성소현과 하예정은 겨우 이경혜를 다독였다. 하예정은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은 후 이경혜와 함께 유전자 검사를 하기로 했다.“가게는 내가 보고 있을게요.”성소현이 자진해서 나섰다. 하예정은 차 키를 챙기고 카운터를 지나며 말했다.“그냥 가게 문 닫는 게 좋겠어요. 이따가 식사 한 끼 대접할게요.”문득 자신이 만든 공예품 생각이 난 그녀는 다시 돌아와 완성한 공예품 몇 개를 이경혜에게 선물했다.“아주머니, 이건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값비싼 건 아니지만 제 마음이니
유전자 검사 센터로 가는 길, 전태윤이 하예정에게 천만 원을 보냈다. 그녀가 받지 않을까 봐 문자까지 보냈다.“예정아, 이 돈 받지 않으면 날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길 거야. 남편은 원래 아내한테 쓰라고 돈을 버는 거야.”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한 하예정이 배시시 웃었다.‘태윤 씨 이젠 이런 말도 할 줄 아네?’그녀는 전태윤이 보낸 돈을 받기로 했다. 검사 센터에 도착한 그녀는 이경혜와 함께 피를 뽑았다.하예정은 남편이 준 돈으로 이경혜 모녀와 5성급 호텔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관성의 5성급 호텔 중에서 하예정이 가장 익숙한 호텔은 관성 호텔이었다.관성 호텔은 전씨 그룹 산하의 호텔이고 전씨 그룹과 성씨 그룹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라이벌 관계였다. 이경혜 모녀와 관성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떠올린 하예정이 미안한 얼굴로 이경혜에게 말했다.“아주머니, 다른 데로 갈까요?”이경혜는 하예정의 뜻을 알아채고는 피식 웃었다.“괜찮아,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도 여기서 바이어랑 일 얘기하곤 했어.”그러면서 딸에게 눈짓했다. 눈치 빠른 성소현은 엄마의 뜻을 단번에 알아채고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엄마,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요? 만난다고 해도 뭐 어때요?”전태윤이 결혼반지를 낀 걸 본 순간부터 성소현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그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 애를 썼다.성소현의 새언니는 이 세상에 널린 게 남자라서 성소현이 전태윤처럼 훌륭하고 그녀만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장담했다.두 모녀가 개의치 않아 하자 하예정은 마음 놓고 함께 들어갔다.호텔 매니저는 하예정을 알아봤지만 감히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친절하게 안내만 할 뿐이었다.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난 후 호텔 매니저는 돌아서다가 다시 걸음을 멈추고 엘리베이터를 보며 중얼거렸다.“방금 사모님 옆에 있던 두 분이 이경혜 씨와 성소현 씨 아니야?”낯이 익은 게 이경혜 모녀 같았다.‘내가 잘못 본 거 아니겠지? 사모님 지금 성씨 가문 사람들이랑 같이 있잖
“그래요, 알았어요. 그만 일 보세요.”전이진은 재빨리 일행을 따라가 형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형, 권 매니저님이 그러는데 형수님께서 몇 분 전에 이경혜 모녀랑 VIP 지존룸으로 들어갔대.”VIP 지존룸은 관성 호텔의 가장 고급스러운 VIP 룸인데 웬만한 사람은 지존룸을 택할 생각조차 감히 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은 이경혜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거라 지존룸을 택하는 건 당연했다.“알았어.”전태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라곤 없었다.“마주치진 않을 거야.”전태윤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평소 바이어에게는 맨 꼭대기 층의 로열 스위트룸에서 식사 대접을 한다. 지존룸과 층도 다른 데다가 전용 엘리베이터도 있어 그와 동행한 호텔 손님 말고는 누구도 그 엘리베이터에 탈 수 없었다.두 부부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딱 마주치지 않는 이상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자신만만해하는 전태윤의 모습에 전이진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어차피 가난한 척하는 사람도 형이고 형수님에게 딱 걸려서 정체를 들킨다고 해도 그건 형의 일이지 그와는 상관이 없었다.다행히 전태윤 일행은 하예정 일행과 마주치진 않았지만 전태윤이 엘리베이터에 탈 때 다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주형인과 서현주가 그를 보았다.주형인이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라고 잠깐 생각하던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아직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은 경호원들은 주형인이 문 앞에서 힐끔거리는 걸 발견하고는 일제히 주형인을 노려보았다.그 모습에 잔뜩 겁먹은 주형인은 재빨리 서현주를 끌고 호텔을 나섰다.“형인 씨, 방금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봤어요?”“방금 그 남자들 전씨 가문 도련님의 경호원들 아니야?”주형인이 서현주에게 물었다.“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전씨 가문 도련님을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경호원을 알 리가 있겠어요?”전씨 가문 도련님의 경호원을 단번에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전씨 가문 도련님을 자주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서현주는 자신이 그 행운아이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아니었다.그녀는 명
“하예정 남편이 전씨 집안과 연관이 있었더라면 우리 둘을 가만뒀겠어요? 진작 전씨 가문 도련님의 권력과 힘으로 우리한테 복수했겠죠.”자신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던 주형인은 서현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더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전씨 가문 도련님이 누구인가? 하예정이 여러 번 환생한다고 해도 전씨 가문 사모님이 될 팔자가 없을 것이다.두 사람이 애정행각을 하며 호텔을 나서던 그때 호텔 문 앞에서 하예진과 딱 마주쳤다.주우빈이 잠든 후에 주우빈을 숙희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나온 거라 홀로 주형인과 서현주를 기다렸다. 이곳에 찾아온 것도 전태윤이 건넨 자료와 증거를 토대로 주형인이 서현주와 관성 호텔에 자주 온다는 걸 분석해낸 것이었다.주형인은 그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집안일은 물론이고 그의 부모와 누나네 가족까지 챙긴 그녀에게 돈도 벌지 못하면서 펑펑 쓰기나 하고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늘 그녀를 질타했다.그리고 고작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도 하예정의 도움을 받는다면서 먹는 것밖에 모르는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비록 두 사람은 이미 감정이 틀어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왔지만 이 생각만 하면 하예진은 여전히 마음이 쓰라렸다.많이 먹지 않으면 모유가 부족하게 되고 주형인은 또 그녀에게 아들을 굶겨 죽일 거냐고 한 소리 했다. 주우빈은 첫돌이 지나서야 모유 수유를 끊었다.그는 조강지처인 그녀에게만 구두쇠였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 외식하긴 했지만 기껏해야 포장마차나 갔다. 포장마차에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얼마 되지 않았다.하지만 서현주와는 관성 호텔에 자주 다녔다. 서현주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남자였고 선물 공세도 멈추지 않았다. 그야말로 공주 모시듯 서현주를 예뻐했다.하예진을 본 서현주는 보란 듯이 주형인의 팔짱을 끼며 도발했다. 일부러 한 도발이니 못 볼 리가 없었다.주형인은 잠깐 멈칫하더니 서현주와 함께 하예진에게 다가가 싸늘하게 물었다.“여긴 왜 왔어? 우빈이는? 우빈이 너무 놀라서 너랑 안 떨어지려 한다고 했잖아.
서현주는 주형인을 잡아당기며 물었다.“저 여자랑 무슨 얘기를 더 해요?”“내가 준 이혼 합의서를 동의하지 않았어. 아무래도 이혼 얘기를 하려는 거겠지.”이혼 소송을 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주우빈이 당한 일 때문에 하예진은 한시도 기다리기 싫었다.주형인은 서현주와 함께 차 쪽으로 걸어갔다. 차에 올라탄 그는 걱정스럽게 서현주의 볼을 어루만졌다.“아파?”“형인 씨는 아파요?”주형인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대답했다.“아파. 우빈이 일 때문에 화가 많이 났나 봐. 뺨 한 대 정도는 화풀이로 맞아줄 수 있어.”서현주도 따귀 맞은 얼굴을 어루만졌다.“형인 씨, 저쪽에서 하루라도 빨리 이혼하길 원하니까 위자료를 더 적게 줘도 될 것 같아요. 그냥 맨몸으로 내쫓으면 더 좋고요. 싫다고 하면 이혼 소송하라고 해요. 한번 끝까지 가보죠, 뭐.”주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따라가서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보자.”두 사람은 하예진이 하루빨리 이혼하길 원한다고 생각하여 맨몸으로 내쫓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녀가 빈털터리로 내쫓기는 모습을 상상하던 서현주는 뺨 맞은 볼을 만지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하예진은 한 밀크티 가게에서 불륜 남녀와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녀가 자리를 잡고 주스 한 잔을 주문하고 나니 서현주가 주형인의 팔짱을 끼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일부러 애정행각을 벌이며 그녀를 자극했다.그 모습을 본 하예진은 코웃음을 쳤다. 오히려 서현주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녀 덕분에 주형인의 못된 본성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남자라면 기꺼이 서현주에게 양보할 수 있었다.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보니 테이블 위에 노란 서류 봉투가 놓여있었다. 주형인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으며 하예진에게 물었다.“이게 뭐야?”하예진은 노란 서류 봉투를 주형인에게 건넸다. 주형인은 사인한 이혼 합의서인 줄 알았지만 서류 봉투가 무거운 걸 발견하고는 절대 이혼 합의서일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서현주
“내가 어떻게 이 자료들을 구했는지는 신경 쓰지 마. 네가 리베이트 받은 일을 너희 대표님께 알리면 어떻게 될까? 계속 유진 테크에 남아서 사장직을 맡을 것 같아?”하예정은 주형인이 리베이트를 받은 증거를 다 보여주지 말고 일단 말로만 겁주라고 언니한테 얘기했었다.하예진은 아무런 단서도 없이 주형인을 겁줄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여 그녀는 전태윤의 친구가 수집한 증거 자료들을 전부 한 부씩 복사했다.주형인이 미쳐 날뛴다고 해도 그녀는 증거 자료를 계속 더 복사할 수 있다.그의 약점을 잡고 밥줄을 위협해야만 그나마 고개를 숙이고 아내와 이혼 상의를 잘할 것이다.그녀는 전태윤이 소정남에게 유진 테크에 대한 전면적인 압박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주형인과 서현주를 기다리는 것은 직장에서 잘리는 일뿐이다.주형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그는 하예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하예진은 전에 유진 테크에서 근무하며 재무 총괄 담당 직까지 올라갔었다. 당시 그녀는 주형인보다 훨씬 뛰어났다.주형인은 자신이 하예진보다 못하다는 압박감에 자존심이 타격을 입어 그녀에게 청혼했었다.두 사람은 알고 지낸 지 십여 년이 됐고 연애도 몇 년 동안 한지라 하예진은 늘 서로의 감정이 두텁다고 여겼었다.그녀도 결혼할 준비를 하고 있어 주형인이 청혼했을 때 흔쾌히 허락했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주형인과 시댁 모두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주형인은 전보다도 더 자상해졌고 드디어 결혼 후 하예진을 사직시키고 집에서 임신 준비나 하게 했다.그녀가 임신에 성공했을 때 주형인도 아이를 향한 기대감이 무척 컸었다. 한편 회사에서도 하예진과 비교당할 일이 없어져 스트레스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대표님에게 점점 잘 보여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올랐다.하여 오늘의 사장직까지 오른 것이다.다만 하예진은 그의 아내, 주우빈의 엄마로 거듭나 종일 아이를 돌보며 가정에만 충실하다 보니 예전 동료들과도 연락이 뜸해지고 점차 사회와 단절되었다.수유 기간에는 아들을 위해
다만 살이 찐 이후로 모든 게 무너졌다.아름다웠던 미모가 주형인의 손에서 전부 망가졌다.“예진아, 그래서 넌 무슨 생각인데?”주형인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녀에게 물었다.“원하는 걸 말해봐. 최대한 들어주도록 노력할게. 헤어질 땐 좋게 헤어지자. 이 물건들 원본 파일 전부 나한테 줘.”지금 그는 자산이 4억 가까이 된다.하예진과 이혼 상의가 잘되지 않아 그녀가 소송이라도 걸면 증거까지 갖고 있기에 그녀에게 매우 유리해진다. 열세에 처한 주형인은 법원의 정상 판결대로 재산의 절반을 하예진에게 나눠줘야 한다.게다가 그녀가 주형인이 리베이트를 받은 증거 자료를 그의 대표님한테 넘긴다면 해고까진 몰라도 사장직에선 틀림없이 물러나야 할 것이다.바이어의 리베이트를 받은 것 자체가 죄질이 상당하고 바이어를 도와 회사에 손해 가는 짓을 저질렀으니 위에서 조사하면 바로 들통나게 된다. 회사 대표가 홧김에 그를 해고하고 그의 만행을 널리 퍼뜨린다면 추후에 재취업하는 것도 곤란해질 듯싶다.이는 앞날이 걸린 문제였다.주형인은 자신의 앞날과 이익을 위해서 지금 이 순간, 하예진이 아무리 미워도 고개를 숙이고 이혼 상의를 잘해야만 한다.“당신 명의로 된 모든 재산, 나도 너무 많이 탐내진 않아. 딱 절반으로 갈라. 그건 내가 받아 마땅한 거야. 집과 차는 안 가질게. 그 대신 내게 따로 보상금을 줘.”하예진이 조건을 제시했다.“집 인테리어 비용도 사양할게. 내 돈으로 한 인테리어 내가 직접 거둬올 거야.”주형인이 이혼을 허락하고 이혼 절차를 밟는 순간 그녀는 사람을 보내 그 집 인테리어를 전부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벽재까지 전부 부숴버리고 애초에 그가 이 집을 샀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겠다고 다짐했다.“우빈의 양육권은 내가 가져. 당신은 달마다 양육비 60만 원만 내면 돼. 지금 수입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거 다 알아. 우빈이는 당신 아들이기도 해. 이 요구 들어줄 수 있겠지? 우빈이가 18살이 되면 그땐 양육비를 안 줘도 돼. 우빈이 만나는 횟수도
모연정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내일 옷 사러 가면서 선물도 사자.”그녀는 용정 대신 선물값을 내주겠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용정은 이미 자신만의 작은 금고가 있어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아이에게 작은 금고 관리를 맡긴 이상 스스로 돈을 내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우빈에게 줄 선물이니 당연히 그가 계산해야 했다.“우빈한테 뭘 선물하면 좋을까요?”용정은 모연정에게 묻는 듯 혼잣말하는 듯 중얼거렸다.모연정이 부드럽게 답했다.“우빈이 좋아하는 거로 골라야지.”용정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우빈은 먹는 걸 제일 좋아해요. 장난감은 이미 너무 많아서 다 갖고 있는 것 같았어요.”“그럼 음식 선물을 준비하면 되겠네.”“우빈은 입에 들어가는 건 뭐든 잘 먹어요. 죽지만 않는 음식이면 다 좋아하는데. 그러면 선물을 엄청 많이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용정은 그의 가여운 표정으로 모연정을 올려다보았다.막상 말로는 “제가 낼게요”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모연정이 대신 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사공과 모연정, 그리고 예준성도 그에게 가르치기를 장차 대장부가 될 사람으로서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했다.‘아! 분명히 대장부가 되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했지! 난 아직 어리니까 지금은 약속을 안 지켜도 되는 거 아닐까?’용정의 검은 눈동자가 말랑말랑 굴러갔다.하지만 모연정의 따뜻한 미소를 보자 결국 “돈 대신 내주세요”라는 말은 삼켰다. 그건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까.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신의와 함께 돌아오기 전에 평소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던 사공의 친구들이 선물을 잔뜩 줬던 것이 떠올랐다.스케치북이나 받아쓰기 노트 등을 선물 받았는데 방학 동안 다 완성하고 새해에 돌아가면 검사할 거라고 했다. 완성하지 못하면 새해에 세뱃돈을 안 준다고...할아버지들이 주는 세뱃돈은 유난히 두둑했다.돈을 벌어야 한다!신의기 늘 말씀하시길 용정은 커서 돈이 많이 필요할 테니 벌 줄도 알아야 하고 번 돈으로
신의는 예훈이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직 돌아오시기 전에 하루에도 수천 번씩 정겨울과 영상 통화를 하시며 예훈을 보려고 했다.정겨울은 귀찮다고 그냥 예훈을 산속으로 데려가서 키우라고 했다. 어차피 신의도 아이 키운 경험이 있으니까.정겨울도 신의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확실히 육아 경력이 있었다.하지만 예준일이 거절했다. 예훈이가 울보라 종종 그를 골치 아프게 하지만 누가 뭐래도 친아들이었기 때문에 예훈을 무척 아꼈다. 또한 신의가 사는 곳이 너무 추웠기에 어린 예훈이 견디기 힘들 거라면서 말이다.사실이었다. 신의가 생활하는 곳은 거의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고 봄, 가을, 겨울 내내 줍고 여름에만 조금 따뜻했다. 지금도 눈이 펑펑 내리는 계절이라 신의는 매일 아침 눈을 치우며 용정에게 지식을 가르쳤다.추운 날씨에 무공 연습하는 이런 힘든 삶은 어린 예훈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울 것이다.용정은 자신이 매일 운동량이 많아서 추위를 견딜 수 있지만 어린 예훈 동생이 견디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용정은 자신이 또래 중에서 제일 고생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우빈이가 얼마나 부러울까.우빈은 부모님이 헤어지셨지만 이모와 이모부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자라고 있다.용정도 양부모님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고 신의 외 다른 할아버지들도 모두 아껴주셨지만 그의 친부모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나이는 어리지만 용정이가 자란 환경과 주변의 전설적인 고수분들 덕에 녀석은 많은 걸 배웠다.용정은 가족들을 전부 잃고 유모 아주머니가 데리고 도망치다가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잃으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모연정이 용정을 주워 왔을 때 용정은 말도 제대로 못 했다.“나도 너의 스승님이 보고 싶어.”우빈은 예진 리조트에 가서 신의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장난기 많은 할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았다.용정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스승님은 예훈 동생만 생각하시거든. 난 너도 생각하고 동생들도 생각하는데. 얼른 샤브샤브를 먹으러 가. 네가 오면 내
샤브샤브 가게로 가는 길에 하예정은 모연정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전화를 받자마자 예지호의 옹알이가 들려왔다.“연정 씨, 예지호는 뭐 하고 있어요?”하예정이 웃으며 물었다.모연정은 아들을 안고 전화를 들고 있었다.“제가 전화하는 걸 보고 핸드폰 뺏으려고 난리에요. 안 주니까 소리 지르면서 어찌나 보채는지...”하예정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다.“소리 나는 장난감 핸드폰 사주면 좋을 텐데.”“있어요. 그런데도 진짜 핸드폰 보면 달려들어요. 아마 저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나 봐요.”모연정이 물었다.“예정 씨는 밥 드셨어요?”그리고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지호 좀 데리고 나가서 놀아줘요. 전화하기가 불편해요.”예지호는 울거나 소리 지르기 바쁜 울보였다. 예준일의 아들만큼이나 말이다.보모가 예지호를 데려갔고 별로 울지도 않는 예지연은 이미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었다.순하고 얌전한 예지연은 특히 사랑받았다. 예씨 가문에서 드문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우리는 지금 샤브샤브 먹으러 가는 길인데 연정 씨가 드물게 전화를 다 거네요. 제가 보고 싶었어요?”모연정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보고 싶죠. 근데 예정 씨가 안 오잖아요. 저도 가고 싶지만 이 두 꼬마를 데리고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단 말이에요.”예지연은 영리했다. 모연정이 외출하려 하면 쌍둥이 오빠 예지호를 쿡쿡 찔러 울게 했다.몇 달밖에 안 된 아기가 말은 못 해도 엄마를 부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니 모연정은 예지연이 울기만 하면 자기를 따라 나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여 외출할 때 두 아기를 함께 데리고 가게 되면 예지연은 한 번도 울지 않았다.모연정은 가능하면 두 아이를 모두 데리고 나갔고 보모까지 데리고 나가 아기들을 돌보게 했다. 하지만 혼자 나갈 때보다는 불편하고 자유롭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우빈이 옆에 있어요?”“있죠. 우빈이 찾으려고요? 용정이도 돌아왔어요?”모연정은 보통 우빈을 특별히 찾지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오니 도아영은 대화에 끼지 못했다. 결혼도 안 한 그녀에겐 너무 먼 이야기와도 같았다. 목표는 있지만 결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한참 수다를 떨던 중에 학생들이 학교 끝나면서 서점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우빈은 계산대 안쪽에서 놀고 세 어른은 바쁘게 일했다.해가 저물고 학생들이 야간자습을 위해 떠나자 하예정이 제안했다.“우리 같이 저녁 먹으러 갈까?”“나는 샤브샤브를 먹고 싶어.”심효진이 먼저 의견을 냈다.하예정이 눈살을 찌푸렸다.“또 샤브샤브? 요즘 너무 그거만 찾는 거 아니야?”“겨울엔 원래 샤브샤브가 제법이지.”도아영은 너그럽게 받아들였다.“저는 상관없어요. 언니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갈게요.”“배가 큰 임산부 의견을 존중하자. 샤브샤브 먹으러 가는 거로.”하예정이 결정하자 심효진이 빙긋 웃었다.“너도 임산부잖아. 네 배 속의 아기가 나보다 한 달 정도 늦은 것뿐이거든.”“한 달이라도 늦으면 늦는 거야. 네 아기가 먼저 태어나도 내 아기는 아직 배 속에 있을 테니까.”하예정은 우빈의 가방을 챙기며 소리쳤다.“우빈아, 가자! 샤브샤브 먹으러 갑시다!”우빈은 기쁨에 들떠 있었다. 녀석은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며 먹는 것을 좋아했다.“이모, 이모부랑 정남 아저씨 그리고 동명 아저씨도 같이 가는 거죠?”계산대를 돌아 나오던 우빈은 본능적으로 하예정에게 안기려다 그녀의 배에 아기가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더니 자기도 이제 커서 이모를 힘들게 해선 안 된다며 손을 내렸다. 그 순간 도아영이 우빈을 번쩍 들어 올렸다.“이모부네 바쁘대. 우리 넷만 가자.”우빈은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점 문을 닫을 때 그녀들은 옆 가게 사장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 동네 상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하예정과 심효진이 재벌가에 시집가는 걸 지켜본 증인들이었다.하예정 일행은 곧 차에 올라타고 떠나갔다.한 가게의 사모님이 감탄했다.“심효진 씨랑 하예정 씨는 정말 복도 많아요. 특히 하예정 씨는 정말 모두
하예정은 우빈을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바삐 돌아치고 있는 전태윤을 방해하지 않고 다시 서점으로 돌아왔다. 오늘 전태윤은 점심도 함께 못 먹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날이었다.노동명 역시 바빴다.결국 하예정은 우빈을 데리고 다시 서점으로 향했다.도아영은 여전히 서점에 남아있었고 우빈이 들어오는 걸 보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우빈아, 이리 와봐. 안아줄게.”우빈은 도아영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예정이 손을 놓자 녀석은 재빨리 도아영 앞으로 달려가 달콤한 목소리로 인사한 후 그녀의 품에 안겼다.우빈은 심효진에게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우빈이가 키 큰 것 같은데?”심효진이 우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컸어. 몸무게도 좀 늘었고. 태윤 씨가 우빈에게 많이 먹어야 방학 때 친구들 싸움에서 지지 않는다고 알려주었거든.”하예정이 대답하자 심효진은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많이 먹어야지. 키 크고 덩치 좋아야 상대방을 눌러버릴 수 있지.”“용정음 힘도 세요.”우빈이 진지하게 말했다.우빈은 용정이가 많은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태윤이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은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걸 배우고 있었다.“우빈아, 과일이랑 간식 있는데 먹을래?”도아영이 물었다.우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손가락으로 간식을 가리켰다.“먹을래요.”도아영이 간식을 주자 우빈은 조용히 그녀의 품에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우빈은 정말 착하네요.”도아영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하예정에게 말했다.“사실 저는 아이들을 별로 안 좋아해요. 시끄럽고 자꾸 울기만 하는 것 같아서. 근데 어제 우빈을 만나고 나니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우빈도 가끔 울긴 해. 하지만 금방 위로해주면 또 금세 그치긴 하지. 그리고 스스로 휴지를 가져와 눈물 닦는 걸 보면 너무 귀여운 거 있지. 우빈은 나를 닮아서 단 걸 좋아해. 지금은 좋아하는 간식 먹고 있으니 당연히 더 조용하고.”하예정이 말하자 도아영이 바로 웃으며 말을 이었
심효진의 배는 서서히 불러오고 있었다.하예정과 도아영이 펄펄 웃자 심효진은 잠시 당황하다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는 하예정의 팔을 치며 말했다.“지금 날 놀리는 거지?”“어쨌든 아영이는 너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네. 쪼끔 살쪘대...”하예정은 포크로 과일을 찍어 친구 입에 넣어주며 빙긋 웃었다.심효진이 도아영을 힐끗 보며 농담을 던졌다.“나에게 잘 보일 필요 있어? 너 자신에게 잘 보이면 되잖아.”도아영은 전씨 가문의 넷째 사모님으로 될 사람이다. 전씨 가문 자체가 도아영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는 셈이다.하예정이 눈치를 주자 심효진은 도아영과 전이혁 사이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궁금한 점은 도아영이 간 후에 하예정에게 물어보기로 했다.오후 3시 50분, 하예정은 유치원에 우빈을 마중 나가야 했다.도아영은 따라가지 않고 서점에 남아 심효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소설을 좋아하는 심효진에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말이다.심효진이 웃으며 물었다.“평소에 소설 볼 시간 있어?”심효진이 물었다.“잠들기 전에 잠깐씩 봐요. 책 읽으면 금방 졸려서 잠들기 좋더라고요.”“어떤 장르를 좋아해?”도아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여자가 남자를 쫓는 내용의 소설도 있나요?”심효진은 눈썹을 치켜들며 전이혁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음을 짐작했다.“있기는 한데 대부분 작가가 여자가 쫓는 과정은 생략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더라고. 그러다가 남자 주인공의 첫사랑이 나타나면 바로 깨지고.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야 남자가 뒤늦게 사랑을 깨닫는 그런 내용은 있는데... 볼래?”도아영은 잠시 말없이 있더니 물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여자가 적극적으로 쫓아서 결국 남자를 얻는 내용은 없나요?”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아니면 그냥 여주인공 소설을 추천해주세요. 남자 없이 혼자 천하를 호령하는 진짜 강한 여자 이야기 말이에요. 겉으로만 강한 여자 이미지이지만 실제론 남자들이 다 해결해주는 가짜 소설은 싫어요.”심효진은 생각에
하예정은 과일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심효진은 도아영을 앉히며 물었다.“아영아, 차 마실래? 아니면 그냥 물?”도아영이 먼저 “효진 언니”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보이자 심효진도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렀다.“따뜻한 물 한 잔만 주세요. 예정 언니의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 마셨거든요. 밤에 잠 안 올까 봐 차는 마시고 싶지 않아요.”심효진은 그리운 듯 말했다.“나도 몇 달째 커피 못 마셨거든. 아침에 한 잔 마시고 하루를 버티던 때가 그립네. 나도 많이 마시면 잠 안 오더라. 그땐 가게에 나와서 한 잔 정도 마시면서 오후까지 버텼었는데. 그러면 저녁에 잘 때 영향받지도 않고.”심효진은 도아영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관성에서 며칠쯤 놀다가 갈 계획이야?”심효진은 읽던 소설책의 펼쳐둔 페이지를 접어 표시한 후 덮었다.“이틀 후면 돌아갈 거예요. 회사 일도 바쁘고 해서요.”“연말이라 다들 바쁘긴 하지. 우리 서점은 다음 주면 잠시 문 닫고 방학 끝날 때까지 쉴 계획이야. 요즘은 겨울방학 문제집 사러 오는 학생들 때문에 좀 바쁘거든.”학교에서 숙제를 내주지만 학생들이 스스로 서점에서 직접 문제집을 사 가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학교는 통일로 구매해주기도 했다.“며칠 바쁘다가 학생들이 방학하면 같이 쉴 수 있어서 편하시겠어요.”도아영이 말했다.“해주시로 돌아가면 서점을 오픈할 만한 곳 찾아봐야겠어요. 나중에 은퇴하면 서점 가게나 차리면서 살까 봐요.”그녀 명의로 된 상가도 몇 군데나 있었다. 가장 큰 곳을 잘 장식해서 서점을 열어 작은 카페 공간도 마련하려 했다. 책 읽는 손님들이 커피 한 잔을 사서 마시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게끔 말이다.도아영은 그런 삶이 정말 낭만적일 것 같았다.심효진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몇 살인데 벌써 은퇴 후 삶을 생각해?”도아영도 피식 웃었다. 심효진은 계속해서 말했다.“나도 게을러. 근데 소설도 좋아해서 예정이랑 함께 이 서점 열었어. 투자한 것도 있는데 지금은 배당금만 기다리는
하예정이 회사에 출근하면 그녀의 경호원들은 회사 주변을 맴돌며 지키고 있었고 하예정이 회사를 떠나는 순간 즉시 뒤따라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길에서 하예정은 심효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서점에 도착하자 심효진이 안에서 나와 하예정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오늘은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우리 마님?”심효진은 차에서 내린 하예정의 팔을 친근하게 껴안으며 말했다.“바쁘긴... 진짜 바쁜 사람은 소현 언니지.”하예정이 웃으며 답하자 심효진은 미안한 표정을 드러냈다.“원래 우리 셋이 분담해야 할 일인데 지금은 대부분 소현 언니가 혼자 하고 있네.”도아영이 과일과 간식 봉지를 들고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심효진이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쁜 아가씨 한 분을 소개해 준다더니 사람은?”“저기, 지금 내리고 있어.”심효진은 도아영을 바라보았다.도아영은 당당하게 걸어와 자아 소개를 했다.“ 저는 해주시에서 온 도아영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심효진은 친구의 팔을 놓고 도아영과 악수를 한 뒤 그녀가 들고 있던 봉지를 건네받으며 말했다.“도아영 씨, 안녕하세요. 예정이가 저를 보러 온다고 아까 얘기해줬어요. 와주시기만 해도 고마운데 이렇게 많이 사 오시다니.”도아영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실은 제가 점심때 산 거예요. 예정 언니랑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효진 언니를 보러 가자고 하면서 들고 오라고 하셨어요. 셋이 같이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다면서요.”고아영은 당장에서 “효진 언니”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현했다.심효진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좋은 건 나누어 먹어야 제맛이지! 혼자 먹으면 살만 쪄.”심효진은 하예정과 눈길을 마주치며 도아영의 솔직한 성격에 호감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하예정이 부럽기만 했다. 시댁에 들어오는 동서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니...하예정의 동서들은 인품이 정말 훌륭했다.소정남의 형제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아 심효진은 앞으로의 동서 관계가 어떻게 될지 걱정되었다.다만 소지훈의 배우자가
“서점에 갈 거면 전부 가지고 가서 효진이랑 같이 먹자. 우리의 입맛이 서로 비슷하거든. 지금 효진은 나보다 더 잘 먹어. 배가 벌써 나왔으니까 아기가 영양분을 많이 필요로 하지. 하루에 몇 끼 더 먹는다니까.”도아영이 물었다.“그럼 살 많이 쪘어요? 우리 회사에서 임신하신 직원들을 보면 금방 살이 불어나시던데. 정말 많이 찌더라고요. 임신 초기엔 입덧으로 아무것도 못 먹다가 입덧이 끝나면 폭풍 흡입한다던데. 음식 조절 못 해서 살이 확 찐대요. 태아가 크면 엄마도 같이 살이 찐다고 하던데.”하예정이 급히 물었다.“나도 살쪄 보여?”하예정도 많이 먹는 편이었다.“아직 배가 많이 나오진 않으셔서 약간 통통해 보일 뿐이에요. 살쪘다고는 못하겠는데요.”하예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일하고 있어서... 집에서 쉬었으면 진짜 돼지처럼 뚱뚱해졌을 거야.”하예정은 임신 중에도 일을 고집했다. 단순히 사업이 바쁜 것뿐만 아니라 집에서 먹고 자기만을 반복하다 보면 정말 돼지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건강하고 무술 기본기까지 있어 일반 여성보다 상태가 좋은 편이라 8개월까지 일하다가 휴가를 계획하려고 했다.아이 낳고 나면 바로 운동 시작해서 원래 체중으로 돌아가야 한다.전태윤이 어떤 모습이 되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말했지만 하예정은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말은 가끔 듣기만 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과거 주형인도 하예진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예진이 몸매 관리를 못 하자 바람까지 피웠다.“임신이 병도 아니고. 무거운 일만 안 하면 큰 문제 없어요. 우리 회사 여직원들도 대부분 8개월까지 일하시더라고요. 제가 아는 일 중독자 한 분은 9개월 넘게 일하다가 휴가를 내자마자 일주일 만에 아들 낳았대요. 아들이 석 달 되자마자 바로 출근했고요. 육아휴직을 반년까지 줬는데도 안 받더군요.”하예정이 말을 이었다.“안 받는 게 아니라 생활하기 위해서일 거야. 너무 오래 쉬면 자리를 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