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빈은 하예정이 자신을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몸이 아픈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이모 품에 기대고 싶었다.“이모, 죽 먹고 싶어요.”유치원에서도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아이였다.그런데 이제 열이 내리고 나니 허기가 밀려왔는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죽이 먹고 싶다고 한다.하예정은 아이를 살포시 품에 안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다.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와 체온계를 꺼내 들고는 주방에 일러 죽을 준비하게 했다.“이모가 미리 죽을 끓여두지 못했네. 우빈아, 죽은 좀 기다려야 해.”우빈은 그녀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고 힘없이 속삭였다.“근데 저 너무 배고파요. 이모, 과자 먹어도 돼요?”하예정은 고개를 들어 옆에 있던 정겨울을 바라봤다.“감기 걸린 아이가 과자 조금 먹는 건 괜찮을까요?”“조금은 괜찮아요. 대신 너무 많이 먹이면 죽은 못 먹으니까 적게 먹여요.”하예정은 작은 조각의 과자를 하나 집어 아이에게 건넸다.그러자 우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이 말했다.“이모가 먹여줘요.”“그래, 이모가 먹여줄게.”아이는 아플 때마다 이렇게 한없이 애교가 많아졌다.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스스로 하려 하지 않고 꼭 품에 안겨 있으려 했다.우빈이가 태어나서부터 돌봐온 하예정은 그런 꼬마의 버릇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부드럽게 과자를 한입 크기로 떼어내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우빈은 순하게 입을 벌리고 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모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몇 분 뒤, 정겨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예정 씨, 이제 체온계 꺼내도 될 것 같아요.”하예정은 체온계를 꺼내 확인했다.“37.8도네요. 아직 완전히는 안 내려갔어요.”하예정이 건넨 체온계를 본 정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약은 아직 한 번밖에 먹이지 않았잖아요. 목이 조금 부어서 미열이 남은 거예요. 한 번 더 먹이면 금세 내려갈 거예요.”정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왔다.“우빈아, 물 좀 많이 마셔야 해.
하예정은 조카를 키워본 덕분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었다.그녀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특히 몇 개월 된 아기들을 보면 그 작고 부드러운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게 느껴졌다.정겨울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난 그게 제일 힘들어요. 울음소리... 아기들은 다 그런 거라고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계속 울면 진짜 힘들어요. 엄마 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요. 그래서 엄마 되고 나니까 스승님한테 더 감사해졌어요. 저의 스승님은 결혼도 안 하시고 자식도 없으신데 고아인 저를 거두시면서 억지로 부모가 되셨죠. 저를 키워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의술까지 전해주셨고요. 친부모보다 더한 사랑을 주셨거든요. 저한테는 그분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인이고 평생 보답해야 할 분이에요. 지금도 훈이를 봐주시고 제자를 봐주시잖아요. 용정은 거의 스승님께서 직접 가르치고 계시거든요. 제 제자지만 사실상 스승님의 제자나 다름없어요.”정겨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용정을 지도했다.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용정은 김청산과 몇몇 세외고수와 함께 지내며 그들 곁에서 배우고 있었다.하예정이 부드럽게 웃었다.“신의님은 예훈이를 엄청 예뻐하시잖아요. 예훈이도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그분도 한때 손주 안겨보는 게 소원이었을 거예요. 지금 훈이를 돌보시면서 그 행복을 느끼고 계시잖아요. 그것도 효도죠. 용정이도 잘 크고 있고 어르신들께서도 워낙 아껴주시니까 시름이 놓이지 않아요? 그리고 어르신들과 겨울 씨네 사형제자들이 다 그 아이를 사랑하잖아요. 그런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삐뚤어질 리 없어요.”용정은 어릴 적부터 김청산의 곁에서 자라났다.다시 말해 수많은 거물의 눈앞에서 성장한 셈이었다.지금부터 이삼십 년이 흘러 용정이 복수할 능력을 갖추고 돌아왔을 때 그 거물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들은 결코 손 놓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며 용정이가 다치는 일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모연정 부부가 그를 김청산에게 맡기기로 한 것은 가장 현명한 결정이다.정겨울이 미소를 지었다.“그건
“강성 쪽은 이윤미 씨가 곧 떠날 예정이래요. 언니랑 일을 빨리 인수인계하고 나면 바로 물러난대요. 이씨 그룹은 정월 초여드레부터 업무를 재개했으니까 언니가 일찍 강성으로 간 것도 그 때문이에요. 언니는 앞으로 이씨 가문을 정식으로 맡게 돼요. 그러려면 가문의 어른들과도 시간을 보내고 직접 챙겨야 할 일들이 많거든요.”하예정은 부드럽게 배를 쓰다듬었다.“나도 언니 따라가서 도와주고 싶긴 한데 지금은 이 몸이라 언니가 혼자 다 해야 해요.”이경혜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다.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하예진에게 모든 권리를 맡겨주었다.하예진이 직접 부딪히고 해결하며 이씨 가문의 일들을 감당해야 진정한 리더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시험이자 위엄을 쌓는 일이기도 했다.노동명은 몸이 불편해 동행할 수도 없었다.괜히 따라갔다가 언니의 신경만 더 쓸 일 생길 테니까.지금의 하예진은 말 그대로 혼자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정겨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실 예정 씨가 몸이 괜찮더라도 따라가는 건 좋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예진 언니가 오히려 주변 사람들한테 인정받기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 원래부터 갑자기 후계자로 떠오른 사람이니까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야 해요. 이씨 가문 안에도 젊고 유능한 사람들과 연륜 있는 어른들이 많을 텐데... 그분들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겠어요? 당장은 가문의 오래된 규칙 때문에 가만히 있지만 만약 예진 언니가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새로운 후계자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그런데 언니는 일을 잘하잖아요. 복귀한 지는 2년밖에 안 됐지만 원래 능력 있는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너무 걱정하지 마요. 스스로 잘 해낼 사람이에요. 이윤미 씨가 진심으로 가문을 넘기려는 거라면 더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사람은 생각이 올바르고 동시에 결단력도 있는 사람이에요. 게다가 옆에는 방 비서님도 있잖아요. 두 사람은 정말 완벽한 파트너예요. 이윤미 씨는 자기 아버지와 세 명의 형제를 상대로
하예정이 다가와 정겨울 맞은편에 앉았다.“형부한테 물어봤어요. 지난주 토요일에 우빈이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데리고 그분들 집으로 가셨대요. 그때 치킨이랑 감자튀김, 감자칩 같은 걸 잔뜩 먹였대요. 여긴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 음식 많이 먹으면 금세 목에 염증이 생기죠.”하예정은 결혼 전에도 가끔 햄버거를 즐겨 먹곤 했다.하지만 먹고 나면 꼭 한약방에 들러 한약재로 끓인 차를 마셨다.안 마시면 이틀도 안 되어서 목이 붓고 통증이 생겼기 때문이다.그래서 관성 사람들은 대부분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음식을 선호했다.그건 단순한 식습관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생활 방식이었다.“운초 씨는 좀 나아졌어요?”하예정이 다정하게 물었다.여운초는 요즘 몸을 조리하는 중이었고 완전히 회복되어야 정상적인 임신이 가능했다.정겨울은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올해 안으로 몸 다 회복하면 약을 끊어도 돼요. 반년 정도 조심하면 임신 준비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여운초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출산을 고려해도 서른 살 안팎이니 전혀 늦지 않았다.일에 바쁜 여성들은 대개 30대에 결혼을 생각하기 시작해 출산 시점이면 이미 고령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자녀는 한 명만 낳는다.여운초 부부는 아이를 매우 좋아했기에 정겨울은 그들이 적어도 두 자녀를 가질 것이라고 예상했다.전이진의 경제적 능력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그녀 본인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그들은 돈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잘됐네요. 운초 씨도 아이를 무척 좋아하잖아요. 도련님도 그렇고요. 겉으로는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운초 씨가 부담 가질까 봐 그런 말 하는 거죠.”정겨울이 부드럽게 웃었다.“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정말 다 좋네요.”“정겨울 씨네도 다를 바 없잖아요. 준일 씨도 좋은 사람이고요. 둘째는 생각 없어요?”정겨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저는 없어요. 예준일 씨도 둘째 생각 없어요. 저는 제
하예정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다음에 우빈을 데리러 오면 내가 직접 말씀드려야겠어요. 우빈은 체질이 약해서 간식들을 많이 먹으면 안 돼요. 조금만 먹어도 목이 염증이 생기거든요.”그녀는 우빈의 친이모로서 주씨 집안과도 오랜 세월을 연락하며 살았다.하여 그녀가 이야기하면 오히려 더 부드럽게 전해질 것이다.주경진 부부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하예정의 말을 듣고 언짢아하지는 않을 터였다.하지만 만약 노동명이 그런 말을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주씨 집안은 괜히 그가 우빈과 친가 쪽의 관계를 이간하려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우빈이 엄마를 따라 노동명과 재혼 가정으로 들어간 건 그들에게 여전히 마음속의 가시 같은 일이었으니까.물론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예전에 김은희는 아들에게 우빈의 양육권을 다시 찾아오는 건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나 주형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우빈은 엄마와 함께 있는 게 더 안정적이에요. 하예진은 경제적으로도 생활 환경도 저보다 훨씬 나아요.”결국 주경진 부부도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현실적으로 보더라도 하예진 쪽이 훨씬 나은 조건이었으니까.게다가 하예정은 여전히 관성에 남아 있었고 그녀가 우빈을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그녀는 우빈을 자기 친아들처럼 돌보았다.적어도 손자가 노동명의 집에서만 자라는 건 아니었으니까.그들은 또 알고 있었다. 하예진과 노동명이 혼인 신고를 하고도 노동명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노동명 부부는 하예진의 집에서 따로 살고 있었다.그 점도 주경진 부부에게는 묘한 위안이 되었다.노동명은 하예정이 자신을 대신해 조심스레 나서주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는 낮게 대답했다.“그래. 다음에 그분들 오시면 한마디 해줘.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먹고 싶으면 우리가 집에서 직접 만들어준다고 전해줘.”우빈이 좋아하는 음식들은 사실 대부분 사람 눈에는 쓰레기 음식이었다.하지만 집에서 직접 만들어주면 조금은
“약 먹었으면 곧 괜찮아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간호할 땐 꼭 마스크를 써. 혹시라도 감기 옮으면 안 되잖아. 넌 몸에 아기까지 있는데 감기 걸리면 더 힘들어.”하예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곧바로 동생의 건강이 걱정되었다.아들의 감기가 동생에게 옮을까 봐 불안했다.임신부는 먹을 수 있는 약이 적기에 대부분은 가벼운 감기 정도면 꾹 참고 버티곤 한다.“난 괜찮아. 몸도 튼튼해. 우빈은 아프면 유독 예민해지고 나한테만 매달려. 내가 직접 돌봐야 마음이 놓여. 태윤 씨도 그럴 거야.”전태윤은 하예정보다 훨씬 바빴기에 그녀는 이런 사소한 일로 남편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 우빈이가 나으면 바로 연락할게. 앞으로는 아무리 우빈이가 졸라도 칼로리가 높은 음식은 절대 안 먹일 거야.”“아이는 감기 한두 번쯤은 다 걸려. 너무 신경 쓰지 마. 우빈이가 열이 내리면 나한테 알려줘. 그리고 잠시 후에 동명 씨한테도 말해줘. 굳이 데리러 가지 말라고. 내가 지금 강성에 있으니까 우빈이가 너희 집에 있는 게 더 편할 거야.”노씨 가문 사람들도 우빈을 무척 아꼈지만 하예진이 강성에 가 있는 동안 우빈은 거의 하예정의 곁에서 지냈다.우빈과 노동명의 사이도 친부자처럼 좋았지만 엄마가 곁에 없을 땐 언제나 우빈의 마음은 이모 쪽으로 기울었다.이 꼬마를 키워준 건 다름 아닌 하예정이었으니까.“조금 있다가 형부한테 말할게.”주말이면 우빈은 늘 노동명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노동명은 회사를 비우고 직접 아이를 데리고 나가 놀았다.평일에는 근무 때문에 오후에 유치원에 들러 우빈을 데려오곤 했다.가끔 하예정이 먼저 데려오면 노동명에게 굳이 안 와도 된다고 문자로 알려주기도 했다.하예진이 마음 편히 강성으로 가서 이윤미와 인수인계 업무를 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렇게 도와주는 이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덕분에 하예진은 아무 걱정 없이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이제 땀이 나기 시작하네.”하예정은 다시 우빈의 이마에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