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자동차 여러 대가 관성 중학교 정문을 지나 하예정의 서점 문 앞에 멈춰 섰다.옆집 정씨 아저씨네에서 수다를 떨던 전씨 할머니는 자동차를 보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차에서 내린 사람이 전씨 할머니를 알아보면 안 되니까.“예정 씨, 예정 씨.”차에서 내린 성소현은 하예정의 이름을 부르며 서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옆집 가게 문 앞에 있는 전씨 할머니를 발견하지 못했다.뒤따라 내리던 성문철은 눈물범벅인 아내를 부축하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유청하는 경호원들에게 문 앞을 잘 지키라고 분부한 뒤 들어갔다.한창 날개를 펼친 독수리를 만들고 있던 하예정은 성소현의 부름에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성소현을 올려다보았다.“소현 씨, 왔어요? 밥은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으면...”성문철의 부축을 받으며 눈물범벅인 채로 들어오는 이경혜를 본 순간 하예정은 바로 알아챘다.‘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왔구나.’이경혜의 표정만 봐도 그녀와 이경혜가 혈연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예정아.”이경혜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하예정을 품에 끌어안으며 목놓아 울었다.“이모가 얼마나 오래 찾아다녔는지 알아?”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고 그저 하예정을 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예정은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내 여동생 가여워서 어떡해.”일찍 세상 떠난 여동생 생각에 이경혜는 계속하여 목놓아 울었다. 하예정도 그런 그녀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심효진과 주우빈, 숙희 아주머니는 먼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 상황을 알 리 없었던 주우빈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성소현과 유청하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성문철이 앞으로 다가가 아내를 부축하며 다정하게 위로했다.“그만 울어. 조카를 찾은 건 얼마나 좋은 일인데 기뻐해야지, 울어서야 하겠어?”이경혜는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여동생과 두 조카가 그동안 겪은 고초만 생각하면 마음이 칼로 도려내듯이 아파 가슴을 마구 내리쳤다.“내가 애들
성문철과 성소현은 이경혜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유청하가 잊지 않고 검사 결과를 챙겼다.유청하가 검사 결과를 하예정에게 건넸다. 결과를 본 하예정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결과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예정아, 넌 내 조카고 난 네 이모야.”이번 생에 여동생과 만날 기회는 없지만 두 조카를 찾은 것만으로도 이경혜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그녀는 하예정의 손을 잡으며 이제부턴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다.“예진이랑 우빈이는?”이경혜는 다른 조카를 떠올렸다.“언니 점심에는 안 와요. 저녁 5시 30분에 퇴근해서 와요.”하예정은 얘기하며 심효진에게 눈짓을 보냈다. 심효진이 주우빈을 안고 오자 하예정이 주우빈을 안았다.“아주머니...”하예정이 입을 열자마자 이경혜가 말했다.“예정아, 이모라고 불러야지. 이모는 꿈에서도 너희들을 찾아다녔어. 인제 겨우 찾았는데 왜 낯설게 아주머니라고 불러.”하예정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모라고 호칭을 바꿨다.유전자 검사 결과 그녀와 이경혜가 혈연관계가 있다는 건 이경혜가 그녀의 이모란 뜻이었다.이런 드라마틱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이모라는 소리에 이경혜의 눈시울이 또 붉어지자 성소현이 재빨리 말했다.“엄마, 그만 울어요. 우빈이도 여기 있는데 엄마가 울면 우빈이 놀란단 말이에요.”심효진과 숙희 아주머니가 생수와 과일을 내왔다.이경혜가 주우빈을 안으려 하자 주우빈은 몸을 틀며 하예정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우빈아, 난 우빈이 이모할머니야.”이경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우빈을 달랬다.“이모할머니가 우리 우빈이 안아봐도 될까?”그러자 주우빈이 그녀의 손을 밀쳐내며 엉엉 울었다.“싫어요, 싫어요. 이모가 안아줘요.”주우빈의 격한 반응에 이경혜는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 주우빈이 당한 일을 떠올린 그녀가 매섭게 말했다.“그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 우빈이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절대 가만 안 둬!”큰 조카와 주형인이 이혼했고 그녀와 하예정 자매의 관계도 밝혀졌다. 이경혜는 지금이라도 나서서 뭐라도 하
그녀는 나중에서야 자신이 얼마나 재미있는 구경을 놓쳤는지 알게 되었고 자신을 부르지 않은 심효진과 하예정에게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심효진은 하예정에게 성소현을 부르는 게 어떻겠냐고 귀띔했었지만 부잣집 따님인 성소현에게 난폭한 장면을 보여줄 수 없다면서 하예정이 거절했다고 말했다.성소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부잣집 딸인 건 맞지만 난 성소현이야. 관성의 상류 사회에서 나의 명성이 좋지 않은 걸 모르나? 다들 날 무지막지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내가 난폭한 걸 두려워하겠어? 기분 나쁠 땐 일부러 난폭하게 굴기도 하는데.’“받아야 하는 건 다 받았는데 인테리어 비용만 돌려주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언니 부탁을 받고 사람을 데려다가 인테리어를 전부 다 부숴버렸어요.”이경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당연히 그래야지. 주씨 가문이 날로 먹게 해서는 안 되지.”그러더니 또 이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가 진작 알았더라면 친정집 식구로서 사람들을 데려가 인테리어 비용을 받아냈을 텐데. 이젠 명분도 있어 당당하게 요구해도 되니까.”하예정은 갑자기 성소현의 성격이 이경혜와 그야말로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예정아, 잠깐만, 이따가 가게 문 닫고 우리 집으로 가서 같이 밥 먹자. 아 참, 네 남편은 시간이 돼? 시간 되면 같이 가고.”하예정이 말했다.“남편이 오늘 출장 가서 며칠 후에 올 거예요. 남편이 오면 그때 이모 뵈러 갈게요.”“출장 갔구나. 그럼 할 수 없지, 오면 봐야지.”조카사위를 지금 당장 만날 수 없어도 이경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두 조카에게 있었으니까.조카를 찾았으니 조카에게도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이모가 생겼다. 나중에 조카사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제대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예진이가 5시 30분에 퇴근한다고 했지?”“네.”이경혜가 시간을 확인했다.“어느 회사 다녀?”“노씨 그룹이요.”이경혜가 고개를 끄덕였다.“노씨 그룹은 발전할 공간이 커. 노동명은 장사 머리가 좋
나이 많은 사람 중에 아직도 이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많다.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기에 딸에게는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아들과 손자에게만 물려주려 했다.하여 아들이 없는 집에서는 사돈의 팔촌까지 그 집 재산을 노리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이 힘들게 쌓아온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어 그렇게 아들을 낳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둘째 사촌 오빠라면 하지문?”이경혜는 하지문에 대해 인상이 조금 있었다. 그녀 회사의 계열사에서 임원 자리까지 올라 연봉이 2억이 훨씬 넘었다.그녀에게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그녀의 조카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여동생의 부동산까지 빼앗으려 하다니! 이러니 하지문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나중에 큰아들에게 하지문을 억압하여 빈털터리로 만들어버리라고 해야겠다.“네, 맞아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지문 오빠를 가장 예뻐해요. 손주 중에서 제일 잘났다면서 우리 부모님이 남긴 부동산을 물려주려고 제멋대로 우리 집안 대를 이어받게 했어요. 구정이 지난 후에 언니랑 나랑 가서 부모님이 남긴 집을 되찾으려고요. 팔아버릴지언정 절대 그 사람들한테 주지 않을 거예요.”어쩌면 또 한바탕 소송할지도 모른다. 이제 곧 구정이고 언니도 금방 이혼한 상황이라 하예정은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부모님이 남겨주신 건물은 90년대 초에 지어진 것이라 사실 별로 값어치는 없었지만 땅이 비쌌다. 땅의 규모만 해도 수백 평은 되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다른 사람과 땅을 조금씩 바꿔 모으다가 수백 평까지 모으게 되었다.어릴 적 어머니는 두 자매가 커서 능력이 되면 땅을 똑같게 나눠주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두 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게 집도 지어주겠다고 했었다.“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어. 내 여동생의 재산을 딸이 아니라 조카가 물려받는다고? 예정아, 걱정하지 마. 이모가 네 부모님의 부동산을 반드시 되찾아줄게. 아 참, 집문서는 있어?”“토지 사용증이 있는데 그건 언니한테 있어요. 하도 언니가 똑똑해서 쫓겨날 때 토지 사용증을 몰래 훔쳤거든요.”그
“너희 둘이 어디 가서 괴롭힘이나 당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걸 이모도 알아. 이모는 지금 여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거야.”하예정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온 오후 얘기를 나눴다.저녁 5시, 이경혜가 하예정과 함께 하예진을 데리러 노씨 그룹에 가겠다고 하자 하예정은 어쩔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녀는 주우빈과 이경혜 일행을 차에 태우고 호기롭게 노씨 그룹으로 향했다.심효진과 숙희 아주머니는 동행하지 않았다.한창 가던 중에 하예정은 갑자기 전씨 할머니가 떠올랐다. 온 오후 할머니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예정은 재빨리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전씨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하예정이 물었다.“할머니, 온 오후 어디 갔었어요?”“그냥 여기저기 구경 다녔어. 퇴근했어? 그럼 나도 차 타고 집에 갈게.”사실 할머니는 줄곧 정씨 아저씨네 가게에 숨어서 나오질 못했다. 혹시라도 이경혜에게 들키면 큰일이니까.“할머니,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혈연관계가 있대요. 이모가 저녁에 이모 집에 가서 밥을 먹자고 해서 지금 우빈이 데리고 언니를 데리러 가는 길이에요. 할머니랑 숙희 아주머니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세요.”“정말이야? 이모 찾은 거 축하해, 예정아.”할머니가 먼저 하예정에게 축하를 건넸다.“이진이한테 퇴근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면 되니까 나랑 숙희 걱정은 안 해도 돼. 이모 집에 오래 있다가 와. 이모가 수십 년 만에 너희들을 힘들게 찾았잖아. 이모네 집에서 자고 와도 돼. 자고 오겠으면 할머니한테 미리 알려만 줘.”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네, 이모네 집에서 자게 되면 할머니한테 연락할게요.”통화를 마친 하예정이 중얼거렸다.“온 오후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또 나가 돌아다니셨구나.”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애가 되는 것 같다.그 시각 하예진은 여동생이 보낸 문자를 받고 이경혜가 이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동생과 이경혜가 함께 데리러 온다는 소리에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그녀는 재빨리 맡은 바
하예진은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녀의 진상 시누이 주서인이었다.김은희는 딸과 함께 노씨 그룹으로 찾아왔다. 점심시간에 하예진은 회사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 후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오후에 계속 일한 바람에 회사를 나간 적이 없었다.두 모녀는 하는 수 없이 회사 문 앞에서 그녀가 나오길 온 오후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으로 이미 분노가 극에 달했다.회사에서 나온 하예진을 본 순간 주서인은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많든 적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 바람에 수많은 이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쏠렸고 어떤 이는 가던 길까지 멈추고 구경했다.하예진이 비록 재무팀의 사원이긴 하지만 노 대표가 직접 채용한 사람이라 회사 내에서 꽤 이름이 있었다.재무 총괄 담당자마저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불안해했다. 하예진이 예전에 재무 총괄 담당자 경력이 있다는 소리에 상사로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노 대표가 직접 채용한 직원이라 더더욱 경계했고 눈엣가시로 여겼다. 대놓고 하예진을 내쫓을 수 없어 몰래 손을 쓰기도 했다. 재무팀 사람에게서 듣기로 하예진의 상사가 그녀를 내쫓으려고 함정을 파놓은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다행히 전에 일한 경험이 있어 상사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피했다.“여긴 왜 왔어요?”하예진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전 시어머니와 전 시누이가 가지 못하게 그녀 앞을 막아섰다.“왜 왔냐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 거 아니야. 감히 내 동생 집을 다 망가뜨려? 당장 물어내! 인테리어 비용 물어내지 않으면 소송할 거야!”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주서인은 구경꾼들이 점점 늘어나자 일부러 더 소리를 높여 하예진이 했었던 일을 얘기했다.“이 여자 당신들 회사 다니는 하예진이라고 해요. 나의 전 동서인데 얼마나 모진 사람인지 몰라요. 결혼 후에 일전 한 푼도 벌지 못했으면서 이혼할 때 내 동생한테 2억 원
누군가 참지 못하고 주서인에게 반박했다.“그러니까 말이에요. 자기도 여자면서 예진 씨를 뭐라 하네요. 예진 씨, 아주 잘했어요. 우린 예진 씨 편이에요!”“저런 진상 시누이가 있으면 남편이 바람피우지 않아도 이혼해야죠. 저런 진상이랑은 멀리할수록 좋아요.”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을 나무라자 주서인은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게 다 하예진 때문에 창피를 당한 것이라 생각했다.그녀는 홧김에 스쿠터를 잡고 있는 하예진을 세게 밀었다. 가뜩이나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 잡고 있기도 힘든데 주서인이 확 민 바람에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돈 물어내. 네 할아버지가 우리 엄마 돈을 받고 입을 싹 다물었어. 할아버지 빚도 손녀인 네가 갚아. 당장 엄마한테 돌려줘.”주서인은 하예진을 바닥에 넘어뜨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가방으로 하예진을 냅다 내리치면서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하예진은 스쿠터를 버리고 일어서더니 주서인의 가방을 거칠게 빼앗은 후 미친 듯이 주서인을 가격했다.그동안 그녀는 주서인에 대한 원한이 쌓인 게 많았다. 원래는 이혼한 후 역겨운 주씨 가문 사람들을 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려 했지만 주서인은 트집을 잡으며 물고 늘어졌다. 사납게 몰아붙이면 다 되는 줄 아나?지난번에 하예진과 주서인이 한바탕 붙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주서인이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지금 두 사람이 또 싸운다면 김은희는 당연히 딸을 도울 것이다. 두 모녀가 힘을 합쳐 하예진을 괴롭히고 있었다.“신고해요, 신고!”누군가가 소리쳤다.“경비원, 얼른 가서 말리지 않고 뭐 해요. 저 두 여자가 우리 회사까지 와서 난리를 치잖아요.”어떤 이가 경비원에게 말리라고 하자 경비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주씨 가문 두 모녀는 마치 미치광이처럼 눈에 뵈는 게 없이 말리는 경호원들을 물고 뜯고 차버렸다. 경호원이 하예진을 잡아당긴 틈에 주서인이 발길질을 했다.그 바람에 하예진과 경호원이 바닥에 넘어졌는데 하예진이 경비원을 깔고 넘어졌다. 경비원이 거친 숨을 몰
노동명이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주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예진에게 달려들려 하자 노동명이 그녀를 확 밀쳤다. 주서인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정신 차린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훤칠한 한 남자가 잔뜩 굳은 얼굴로 하예진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남자 얼굴의 칼자국이 어찌나 무섭게 생겼는지 조금만 더 쳐다봤다간 자다가 악몽이라도 꿀 것만 같았다.겁이 덜컥 난 주서인은 더는 하예진에게 달려들지 못했다.김은희는 재빨리 딸의 옆으로 달려갔다. 두 모녀의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물론 하예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싸움을 말린 몇몇 경호원과 여직원들도 너덜너덜해졌다. 여자 셋이 싸우는데 아무리 뜯어말려도 말릴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당신은 누구야?”주서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동명에게 물었다.“난 이 회사 대표야. 당신들은 누군데 감히 내 회사에서 내 직원을 괴롭히는 거야?”노동명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하예진의 초라한 모습을 보았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졌고 옷은 먼지투성이였는데 조금 전 주서인과 바닥에서 뒹굴다가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손등과 목, 얼굴에도 긁힌 상처가 생겼고 심한 데는 피까지 살짝 나고 있었다.“신고해.”노동명이 동행한 비서에게 분부했다.“이미 신고했습니다, 대표님.”이 회사의 대표라는 소리에 주씨 가문 두 모녀는 살짝 움찔했지만 주서인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강경하게 말했다.“당신이 이 회사 대표야? 잘됐네, 그럼 당신이 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해 봐. 하예진의 할아버지가 우리 엄마한테서 1200만 원을 뜯어갔는데 돌려주지 않으려 해. 그러니 하예진한테서 받아내야지, 안 그래? 예진이가 내 동생이랑 이혼하면서 재산을 나눠 가진 건 그렇다 쳐도 내 동생이 결혼 전에 산 집의 인테리어는 왜 부숴?”그러자 노동명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예진이 할아버지가 당신들 돈을 뜯어 갔으면 신고하면 그만이지, 그게 예진이랑 무슨 상관이야? 예진이랑 가족들 상황이 어떤지 실시간 검색어에도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