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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백은영
그때가 오면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온소운의 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겨 몸에 남은 채찍 자국과 피멍 자국을 보여주리라. 그렇게 된다면 온소운은 궁중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온소운의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시선뿐이었다. 그 날카로움에 온하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녀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온소운이 자리에 앉는 틈을 타 소매를 접어올렸다. 그 순간 그녀가 준비해 둔 조롱 섞인 말들은 모두 목구멍에 걸린 듯 막혀버렸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상처는 어디에도 없었다.

‘말도 안 돼…’

온하연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궁녀들과 후궁들은 그녀의 돌발 행동에 모두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혜 상재는 눈썹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 언니,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 언니 몸에는 흉터가 없는 겁니까?”

온하연은 고집스럽게 물었다. 온소운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 속에는 조롱도 분노도 아닌 비웃음만이 담겨 있었다.

“왜 흉터가 있어야 하지?”

온소운은 가볍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온하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전하께서 분명...”

왜 서 귀비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은 걸까? 그녀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수줍게 웃던 소 답응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하연 언니도 참, 어젯밤 소운 언니는 처음으로 전하와 동침하셨잖아요.”

“그럴 리 없어! 전하께서 저런 여자를…!”

그녀는 격앙된 목소리로 속에 있던 말을 내뱉었다. 온하연은 자신이 실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설령 서 귀비가 그녀를 혼내지 않았다고 해도 온소운은 결코 여의채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전생에 그녀도 전하가 하사하신 부채는 받지 못했기에 온소운의 결과도 똑같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던 찰나, 한 줄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침전된 공기를 찢고 들어왔다.

“성지(聖旨) 낭독이다!”

모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고 곧이어 전하 곁을 모시는 내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운 상재는 어젯밤 동궁에 머물러 왕을 모셨으니 오늘부로 귀인으로 책봉한다. 운 귀인은 왕의 은혜를 마음속 깊이 새기고 몸조심하며 내명부의 예에 따라 후궁의 도리를 다하도록 하거라.”

그 순간, 방 안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궁녀가 여의채를 받들며 들어오자 운양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정중히 그것을 건네받았다. 반면 온하연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째서? 채찍도 환약도 아닌 책봉인 거지?

늘 태연하던 위 귀인마저 고개를 들고 내관을 바라보았다. 방금 막 입궁한 이가 중전에게 인사도 하기 전부터 귀인으로 책봉되다니...

온소운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성은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 책봉은 은총이면서도 동시에 경고였다. 서 귀비의 일을 외부에 흘리는 순간 전하는 그 위계도 한순간에 거두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내관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운 귀인, 큰 복을 받으셨습니다. 참으로 경하 드릴 일이옵니다.”

“고맙습니다, 내관.”

말을 마친 내관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운양은 조심스레 그의 뒤를 따르며 작은 주머니 하나를 쥐여주었다.

“추운 날씨에 수고 많으셨어요. 따뜻한 차라도 한잔 하시길.”

내관은 기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인마마는 참으로 인심도 후하시네요.”

혜 상재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은 연이어 온소운의 곁으로 다가와 축하를 건넸다. 허나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아닌 묘한 복잡함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온하연과 그녀 뒤에 서 있던 홍 마마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창백한 안색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궁중의 예법을 잊고 실례를 저지를 뻔했다.

그때, 위 귀인이 온소운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운 귀인께서는 참으로 능하십니다. 겨우 하룻밤의 동침으로 전하의 마음을 움직이다니요. 내일 중전마마께 알현 드릴 때 궁 안의 아무도 귀인을 가볍게 보지 못할 겁니다.”

온소운은 눈웃음으로 가볍게 화답했으나 그 미소 아래에는 감정의 물결이 숨죽이고 있었다. 전하가 그녀에게 하사한 지위는 궁중의 권위 그 자체였고 내무부는 빠르게 움직여 목단원을 정비해나갔다. 궁인들은 귀인만 누릴 수 있는 온갖 기물과 장식들을 방 안으로 들여놓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온하연은 손에 쥔 손수건을 거의 찢어낼 기세로 꼬아 쥐고 있었다. 홍 마마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잃었다.

‘저 아이가 정말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온소운의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보며 홍 마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그때, 온하연이 단약을 복용했다면 지금 저 자리는 그녀의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하나둘 축하를 마치고 물러나자 온하연은 질투심 가득한 눈으로 온소운을 노려보았다.

목단원 마당은 여전히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전하께서 하사한 물건들을 받아드는 여섯 궁녀와 내관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온하연의 눈에는 심장에 박히는 비수 같았다.

“언니, 전하께서 진심으로 언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전하의 마음속에는 서 귀비밖에 없습니다. 언니는 그냥 일시적인 장난감일 뿐이에요.”

온소운은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온하연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총애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죠? 울어서 눈도 퉁퉁 부었잖아요.”

온소운은 조용히 웃었다. 그 미소는 봄날 햇살처럼 부드럽고 화사해서 온하연의 마음까지 뒤흔들어 버렸다. 잠시 머뭇거리며 시선을 피했던 그녀는 곧 자신이 어떤 자리를 노리고 있는지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자신이 왕자의 생모가 될 운명을 쥐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누가 전하께서 나를 총애하지 않았다고 말한 거지? 성은을 엿보는 일이나, 전하의 뜻을 함부로 헤아리는 일은 모두 중죄란다.”

온하연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홍 마마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다그쳤다.

“아가씨, 제발 조심하세요. 궁 안에서 폐하의 뜻을 가늠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대죄입니다.”

그 말에 온하연도 깜짝 놀라 정신을 되찾았다. 홍 마마는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며 말했다.

“운 귀인, 저희 아가씨가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회랑으로 나와서야 온하연은 홍 마마의 손을 뿌리쳤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난 인정 못 해!”

전생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환약을 먹은 뒤 신체가 급격히 나빠졌고 누구 하나 돌보는 이 없이 혼자 쓸쓸히 냉궁에서 죽어갔다. 그런데 왜 온소운만은 다른 걸까? 홍 마마는 암울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아가씨는 능력도 좋으세요. 그저 몇 날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전하의 마음을 얻으셨으니…”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온하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내일 중전마마께 알현을 드리고 나면 곧 새로 입궁한 후궁들의 봉침이 이어질 겁니다. 그때 전하의 마음을 사느냐 마냐에 따라 아가씨께서 운 귀인 위에 설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은 무엇보다 침착하셔야 합니다.”

온하연은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전하의 마음을 얻어낼 것이다. 부모님께서 더는 실망하지 않도록 말이야. 오늘 저 아이가 누렸던 모든 것을 빼앗아 오겠어.”

그녀의 눈은 분노와 질투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내일도 잘난 척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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