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소운은 서출 여동생과 함께 환생했다. 전생에 그녀는 아이를 낳는다는 대가로 영약을 먹었고 고통 끝에 낳은 그 아이는 훗날 천하를 거머쥘 왕이 되었다. 반면 그녀의 서출 여동생은 오직 아름다움을 위하여 미색을 돋우는 단약을 택했는데 그녀의 예상과는 반대로 궁궐의 구석에서 혼자 지내며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런 비참한 최후를 한 번 더 견딜 자신이 없었던 여동생은 이번 생에 주저 없이 영약을 택했고 그 모습을 본 온소운은 조용히 비웃었다. 그녀는 정말 자신이 낳은 아이가 온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 전생에 온소운의 아이가 왕위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녀의 희생과 노고 덕분이었다. ‘하지만 뭐...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내가 기꺼이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아이는 누가 낳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도 그 고통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단약을 집어 들었다. 오히려 절세의 미모로 후궁을 뒤흔들고 전하의 마음을 유혹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이번 생,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 부귀와 영화를 모조리 손에 넣는 것. 사랑이나 아이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원한다면 다른 이에게 모두 양보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계획과는 달리 그녀를 바라보는 왕의 눈빛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차갑고 무심하던 시선은 어느새 깊고 다정해져 있었다. 어느 날, 온소운 곁으로 다가온 왕이 낮게 속삭였다. “소운, 짐에게 입 맞춰 보거라. 그러면 중전의 자리를 그대에게 주겠다.”
عرض المزيد강규빈은 깊은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왜, 조양궁으로 가기 싫다 하느냐?”온소운은 침착하게 고개를 숙이고 진심만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신첩은 이미 전하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넘보지 않겠습니다. 여인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조양궁으로의 이주는 조정의 법도를 어지럽힐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기에 신첩이 그 영광을 탐한다면 전하의 명성이 더럽혀질 수도 있지요. 전하께서는 천하를 호령하시며 사해가 그 위엄을 따릅니다. 신첩은 누구보다도 전하께서 그 위엄을 흐리는 자로 보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신첩은 전하께서 오롯이 찬연한 군주로 남기를 바랍니다.”강규빈은 천천히 미간을 풀더니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그러고는 마치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투명하고 하얀 뺨을 슬쩍 집어보았다. 갓 껍질을 벗긴 백옥같이 부드러운 그 살결에 장난스러운 손길이 잠시 머물렀다.“조양궁에 들게 했다고 짐의 위엄이 더럽혀지느냐?”온소운은 부끄러움에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신첩은 정사를 알지 못하니 과장해서 말했을 수도 있지만 이 모든 말은 진심입니다. 신첩은 감히 요망한 여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강규빈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품에 안았다.“우리 귀인은 어쩌면 이리도 귀엽게 말을 하는 것이냐?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한 것이지? 짐이 그 입을 찢어줄 것이다.”온소운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그럼 전하께서는 신첩이 요녀가 아니라 생각하십니까?”언제나 절제되었던 강규빈은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장난을 받아주고 싶어졌다.“당연하지.”그러자 온소운은은 입술을 삐죽이며 애교 섞인 투로 말했다.“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신첩이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무슨 소리냐?”“책에서는 요녀들은 모두 눈부시게 아름답다 하였습니다.”강규빈은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우리 소운이도 그에 못지않은 절세가인이란 말이지.”
강규빈의 품에 살포시 기대어 앉은 온소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전하께서는 참 다정하십니다.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주시니. 이 감동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강규빈은 그녀의 뽀얀 옆얼굴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너는 짐의 귀한 후궁이다. 짐이 너를 아끼지 않는다면 누구를 아끼겠느냐?”그 말에 온소운은 고개를 들어 조용히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그렇다면… 신첩도 평생 전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그녀의 말투는 꿀처럼 달콤했고 그 순한 음색은 강규빈의 심장에 잔잔히 번져갔다.그의 시선이 문득 책상 위를 스쳤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먹 향기가 그 위를 감돌고 있었고 한 장의 펼쳐진 화선지가 눈에 띄었다.“방금은 무엇을 그리고 있었느냐?”마치 마음속을 들킨 소녀처럼 온소운은 깜짝 놀라며 부끄러움에 볼을 붉혔다. 그녀는 강규빈의 품에서 살짝 몸을 빼내더니 손을 뻗어 그 그림을 등 뒤로 감추며 수줍게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강규빈은 얄밉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감춰져 있던 화선지가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그는 긴 팔을 뻗어 그 그림을 집어 들었다. 온소운은 당황하여 그림을 뺏으려 했지만 그의 키는 그녀가 따라잡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발끝까지 들어 올려도 닿지 않는 손에 속수무책이 된 그녀는 결국 고개를 떨구며 투정하듯 말했다.“전하, 너무하십니다. 늘 신첩을 놀리시기만 하시니.”강규빈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그림에 시선을 돌렸다. 그 화선지 위에는 오늘 오전 자신이 높은 단상에서 온소운에게로 급히 걸어가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왜 이 장면을 그린 것이냐?”온소운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그 순간은 제 꿈에서만 존재하던 일이었거든요. 전하께서 저를 향해 다가오시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잊을 수 없었습니다.”그녀의 말은 담담했으나 그 진심은 강규빈의 굳어 있던 결
오늘 하루, 후궁에서 일어난 파문만으로도 그의 신경은 이미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더구나 자신이 명한 조양궁 거처 하사의 일은 어찌 된 일인지 곧장 조정 원로들 귀에 들어가 아첨도 아닌 충언이랍시고 한 사람에게만의 총애는 삼가시라는 말부터 군심을 다잡기 위해서는 서 귀비에게 더 큰 은전을 베풀라는 말까지 줄을 이었다.하루 종일 이어진 정무는 그에게 깊은 피로를 안겼고 그 모든 말들이 전부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득 서 귀비에 대한 피로와 권태를 자각했다. 아무리 사랑하고 총애하라 해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전하 오늘은 거처를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양궁으로 가실 건가요 아니면 중화궁에 홀로 거처하실 건가요?”곁을 따르던 노 내관이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조양궁은 후궁과 함께 잠자리를 할 때 찾아가던 곳이고 중화궁은 전하 혼자 묵을 때 찾는 궁이었다.잠시 망설이던 그는 물었다.“완 귀인은 조양궁으로 옮겼는가?”“아직은 아닙니다. 몸이 허약하여 아직 이사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그 말에 강규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다른 여인들이었다면 아마 아침이 밝자마자 거창하게 이삿짐을 꾸려 떠났을 텐데 어째서 그녀는 이토록 조용한 것일까?“짐이 직접 가보겠다.”“전하, 숙 귀인마마께서 오늘 하루에도 여러 번 기절하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혹 가시는 길에 그리로 먼저…”“짐은 의원이 아니다.”단호한 그의 대답에 노 내관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바로 목단원으로 가시겠습니까?”“허약한 몸이라 하지 않았느냐? 굳이 놀라게 할 필요는 없다. 조용히 다녀올 것이다.”해가 완전히 지기 전, 온소운은 한동안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이번 생의 중전은 어쩐지 전생의 기억과 달라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흔들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강규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뒤따라온 내관들 또한 그의 손짓에 조용히 물러났다. 조용한 발소리가 다가오자 온소운은 눈꺼풀을 아주 조금만 들었다. 그러고는
운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마마, 이건 전하께서 내리신 은총인데 왜 마다하시는 건가요? 혹시 다른 빈궁들이 시기할까 염려되십니까?”온소운은 침상에 느긋이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강규빈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치의 틈도 허락지 않는 원칙주의자이며 무엇보다 ‘규범’이라는 두 글자를 중히 여기는 군주였다. 조양궁은 역대 임금의 전용 거처였고 그곳에 빈궁이 머문 전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하물며 자신은 지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런 때에 대놓고 조양궁에 입주한다면 그 비난의 화살은 곧장 자신에게 꽂힐 것이었다. 전조의 신료들은 물론, 후궁들, 그리고 궁궐 밖의 세상까지 온갖 혀끝의 독이 그녀를 향해 쏟아질 터였다.그리고 그 모든 소문이 결국은 강규빈의 귀에도 닿을 것이다. 하룻밤의 감정이든 한순간의 연민이든 정무의 무게 앞에서 언제든 휘발되는 것이었다.‘사내란 그 순간은 진심이라 해도 언제든 바뀌는 법이니까.’온소운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받아도 되는 은총이 있고 받지 말아야 할 은총이 있는 법이다. 기뻐하는 척만 해도 충분해. 그저 전하께서 기분 좋게 느끼시면 그걸로 된 거야. 하지만 선을 넘는 은총은 감당하기 힘들다.”운비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였고 운양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동그란 뱃살을 톡 건드렸다.“됐어, 마마 말씀이 옳은 거지. 우리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운비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그러고 보면 마마께서는 늘 한발 앞서서 생각하시잖아요.”운양은 온소운의 이불을 여며주며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조양궁에 안 가기로 한 이상 전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온소운은 눈을 절반쯤 감은 채 나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아까 그 내시가 뭐라 했지? 전하께서 정무가 바빠 오늘은 별도로 면상에서 사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러니 밤에 뵙고 인사드리는 걸로 하자꾸나.”운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그때 명 영감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홍 유모의 말이 끝나자 온하연은 흐느끼던 소리를 뚝 멈췄다.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녀의 눈에는 다시 음울한 계산이 번뜩였다.“그래 맞아.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해. 온씨 가문에서 그 계집의 이름을 지우게 만들면 끝이다. 외가라고 해봤자 기댈 곳도 없는 몰락한 집안인데 그걸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그녀는 이를 악물었다.“온씨가문의 영광, 그 더러운 여자가 단 한 치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온하연은 숨을 삼키며 머릿속을 휘저었다. 전생의 기억이 그녀의 심장을 또다시 사정없이 쥐어짰다.‘그래… 곧 진소 장군이 조정으로 돌아올 거야.’사치와 체면에 누구보다 집착했던 그 남자. 만약 부친이 먼저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얻어 개선장군으로 금의환향할 때 충분한 환대를 준비해 준다면 그는 반드시 부친을 중용할 것이다.한편, 온소운은 전하의 품에 안긴 채 목단원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사이 예소형이 그녀를 세심히 진찰해 보고는 금세 진상을 눈치챘다.“전하, 완 귀인께서는 놀라서 잠시 기절한 것뿐입니다. 지금은 큰 문제 없으니 잠시 혼자 쉬게 하는 게 낫겠습니다.”전하의 눈빛에는 묘한 그늘이 깃들었다. 오늘 하루, 그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보았고 지나쳤으며 또 참아야 했다. 하지만 고작 온소운의 붉어진 눈동자 하나가 그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땀 맺힌 이마를 쓸어내렸다.그는 목단원을 떠나며 하인들에게 간단히 명을 내렸다.“목단원 벽면은 오래되어 위험하니 손보도록 하거라. 완 귀인은 일단 조양궁 편전에 거처하게 해야겠다.”그 말에 노 내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전하, 조양궁은 자고로 임금의 침소입니다. 후궁이 거처하시는 것은 규례에...”그러자 전하는 눈꼬리를 가늘게 치켜 올랐다.“지금, 내 명을 거스르겠다는 것이냐?”얼음장 같은 그 목소리에 노 내관은 땅에 엎드렸다.“제가 경솔했습니다. 지금 즉시 준비토록 하겠습니다.”하지만 전하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마차에 앉아 태화전으로 향하는
온소운이 소란의 중심에서 끌려 나오길 기다리며 온하연은 무겁게 드리운 상운궁 근처를 떠나지 않고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궁중의 미천한 지위로 이 일에 직접 관여할 명분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마마, 이번 일은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괜히 귀비마마를 따라나섰다가 마마만 손해를 보게 되었군요.”홍 유모가 초조하게 타일렀다.“게다가 전하께서도 그 완 귀인을 각별히 아끼시잖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봤자 오히려 역풍만 맞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온하연은 냉소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은 마치 모든 걸 꿰뚫은 자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니, 네가 몰라서 그런다. 전하가 진심으로 마음에 둔 여인은 언제나 귀비마마 한 명뿐이다. 그 외에는 다 잠깐의 흥미일 뿐이지. 온소운도 마찬가지고.”“하지만 완 귀인은 단약을 복용한 몸이잖아요. 지금 궁중에서 그녀의 미색과 견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전하도 결국은 사내인데 그런 요염한 여인을 가까이 두면서 어찌 마음이 가지 않겠습니까?”온하연은 비웃으며 턱을 들었다.“그래서 네가 보는 눈이 짧다는 것이다. 곧 알게 되겠지. 미색 같은 건 이 궁에서 가장 무의미한 재산이란걸.”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떠올렸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자신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전하는 그녀를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었고 귀비는 그녀를 마음껏 유린했다. 그것이야말로, 전하가 단순히 미색에 흔들릴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였다.온소운은 다시 되살아나지 못했기에 그 인생을 자신이 가져왔을 뿐이다. 최근 전하의 총애를 얻었다 해도 어차피 실속 없는 것. “미모 따위는 쓸모없어.”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던 찰나, 홍 유모의 다급한 외침이 그녀의 몽환을 찢었다.“마마. 완 귀인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기절한 것 같아요.”온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혹시 고문이라도 당해서 정신을 잃은 건가? 내가 뭐랬어? 전하가 그 여인을 아끼긴 뭘...”그 뒷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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