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권서진은 양준우가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안색이 좀 괜찮아진 걸 본 양준우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이것도 설마 아까 말한 영감의 일부예요?"권서진은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 뒤로는 노현우가 천천히 조심스레 몰았지만 워낙 굽이굽이 이어지는 악명 높은 산길인지라 김지유마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래도 다행히 저녁에 예약해둔 민박집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숙소 상태는 지난번보다 더 열악했지만 창밖으로 위풍당당한 설산이 정면으로 보인다는 게 그나마 장점이었다. 권서진은 한숨 자고 일어나더니 다시 김지유를 끌고 사진을 찍으러 나갔다.노현우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가에 기대서서 양준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예전에 여기 주둔했을 때도 여건이 이랬어요?""말도 마요, 이 정도면 우리 주둔지보다 훨씬 나은 거예요. 언제 여자를 만날 수나 있었겠어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민박집 주인아주머니가 뒤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멀리서 온 손님들을 보더니 소박하게 웃으며 말했다."여기 꽃밭에는 전설이 있어요. 꽃밭에 신기한 기운이 있어서 곁에 있는 아가씨한테 입 맞추고 싶어진다니까요."주인아주머니가 두 사람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부끄러워하지들 말아요, 손님들."분명 뭔가 오해한 눈치였다.양준우가 손에 든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불을 끄고 쓰레기통에 버린 뒤 바람막이 지퍼를 올렸다."나야 집사람 장단 맞추느라 온 거지만 노 대표는 여긴 왜 온 거예요?""기분 전환 겸 온 거예요. 아니면 여기 말처럼…… 순례라고 할까요?"노현우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간단히 말하면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업계에서 매장당하고 사업까지 엎어지면서 몸에도 사소한 문제들이 좀 생겼거든요. 우여곡절을 다 겪고 보니 인생도 참 순식간이고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투였다.지금은 노현우의 인생도 다시 제자리를 찾은 뒤였다.양준우가 따라 웃더니 권서진을 찾으러 꽃밭
날이 희뿌옇게 밝아올 무렵, 열이 완전히 내린 노준서는 더는 일행들을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현지 인솔자한테 연락해 근처 도시 공항까지 데려다달라고 했다.노현우는 차에 오르는 노준서를 보며 몇 번이고 당부했다."돌아가면 잘 해결해, 싸우지 말고. 할 말 있으면 차분하게 얘기해, 너무 서두르지 말고.""알았어, 형. 먼저 돌아가, 일행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공항 도착하면 전화해, 전화가 안 되면 문자 남겨. 네 비행기표는 이미 끊어놨고 건영시에 의료팀도 연락해뒀으니까 돌아가면 먼저 검사부터 받아.""알았어."노현우는 꼼꼼하게 모든 것을 챙겨준 뒤에야 자리를 떴다.노준서는 차 안에 앉아 멀어지는 노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송수정이라는 멍청한 여자를 곁에 뒀던 건 처음에 그나마 이용 가치가 있어서였다.송수정을 통해 송원영과 서은석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노준서는 자기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집안 배경도 없고 부모님도 다 돌아간 데다 노현우는 개인 능력은 뛰어나지만 어리석게도 굳이 계속 공익사업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그러다 결국 본전도 못 건지고 만 것이다. 형제 둘 다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할 만큼 능력이 출중하긴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건영시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변변한 집안이나 뒤를 받쳐줄 사람도 없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었다.노준서가 그토록 공을 들인 것도 자신의 입지를 더 탄탄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전에도 송수정 같은 멍청이 외에 얼마나 많은 집안 형편이 좋은 여자들한테 호감을 표시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그런데 하나같이 노준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분명 친형제였지만 노준서와 노현우는 전혀 다른 부류였다.노현우는 어릴 때부터 뭘 하든 항상 옆에 여자들이 앞다퉈 따라다니며 떠받들었다. 노준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답답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노준서가 한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아득바득 따낸 것이었다. -차는 천마 지역 깊숙한 곳으로 계속 달려갔다.
노준서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노현우가 이어서 말했다."여기 프로젝트가 네 마음에 걸리는 거 알아, 네가 참여한 부분들 다 네 노력이니까. 그래도 몸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어? 지금은 버틴다 해도 나중에 진짜 못 견디면 어떡해?""생각해볼게, 내일 형한테 답해줘도 돼?""그래. 그리고 네가 자는 동안 어떤 여학생이 전화왔었는데 다시 연락해 봐. 형은 먼저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을게."노현우도 낮엔 운전하고 밤엔 노준서를 돌보느라 많이 지쳐 있었다.담뱃갑을 챙겨 밖으로 나간 노현우는 멀리 가지 않고 바로 복도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며 고개를 들자 머리 위로 은하수가 보였다. 자세히 보면 별자리 하나하나의 윤곽까지 보일 정도였다.노현우도 사실 어릴 때 산속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그때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었다.노준서가 태어나고 선천성 심장병이라는 이유 때문에 산속 사람들은 집안이 산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수군거렸다.이후 부모님을 따라 타지로 나가 일하며 치료 받으러 다니다가 부모님이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노현우는 다시 노준서를 데리고 힘겹게 세상을 헤쳐 나가며 공부도 하고 병치료도 이어갔다.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한 탓에 이번 생에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오늘 신성한 산이 증인이니 분명 원하는 걸 다 얻고 행복해질 거라고 말해주는 여자가 있었다. 코 안 가득 퍼진 담배 냄새에 노현우는 잠시 멍해졌다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방 안에서 휴대폰 화면에 뜬 부재중 알림을 확인한 노준서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송수정이 전화를 받으며 투덜거렸다."왜 이제야 다시 전화해? 나 잠들었잖아!""나한테 무슨 일로 전화했어?""별일 아니고,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노준서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형한테 무슨 말 했어?"휴대폰에는 전에 전화를 받았던 기록이 남아 있었다. 겨우 십여 초였지만 노준서가 경계심을 품기엔 충분했다
노현우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하고 충전을 시킨 뒤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체온을 재 당분간은 열이 다시 나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지유 씨 먼저 데려다줄게요."노현우가 기어코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김지유도 거절하지 않았다.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온 김지유가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던 그때, 따뜻한 외투 하나가 얹어졌다.남자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었다.김지유가 고개를 들어 보니 노현우는 검은색 하이넥 캐시미어 이너 하나만 입고 있었는데 타이트한 이너 덕에 탄탄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이런 캐시미어 이너는 겉옷을 걸쳐야 따뜻하지 이너만 걸치면 바람이 다 스며들어 보기만 해도 추워 보였다."저한테 주면 대표님은 안 춥겠어요?""가요, 일부러 여기까지 같이 와줬는데 감기 걸리게 하면 안 되죠." 노현우가 먼저 앞서 걸어 나갔다.뒤를 따르던 김지유가 빠르게 뒤따라 갔다. 두 사람은 인적 없는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준서와 사귀는 여자 알아요?""알아요, 원영 씨네 집에서 입양한 딸이에요. 집안이 망하고 고향에서 돌아가 지낸다고 했는데 작년에 갑자기 사라져서 원영 언니도 못 찾았거든요."김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얘기했다.노현우처럼 똑똑한 사람이라면 몇 마디만으로도 대충 사정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송원영은 지금 봄날의 CEO였기에 노현우와도 왕래가 적지 않았다. 계약 때문에도 여러 번 만났으니 됨됨이는 노현우도 잘 알고 있었다.송씨 집안 일 역시 업계에 이미 다 퍼졌기에 사건의 경과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송수정이 대충 어떤 사람일지도 일단 짐작이 갔다.노현우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준서 깨어나면 제대로 얘기 좀 해봐야겠어요.""무슨 얘기요? 설마 헤어지라고 하시게요?""아니요, 연애 문제엔 관여 안 해요. 그건 준서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이니까요. 그냥 이 일에 대한 준서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그냥 재미로 가볍게 만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결혼까지
노현우가 고개를 돌려 김지유를 불렀다."우리 차에 구급상자 있는 거 좀 가져다 줘요."김지유가 구급상자를 들고 와 다친 학생들한테 약을 발라주었다. 야무진 손놀림으로 빠릿빠릿하게 소독약을 발라주었다. "심각한 건 아니에요. 돌과 풀잎에 좀 긁혔을 뿐이에요, 다행히 기온이 낮아서 벌레도 없었고요."김지유는 남은 약을 나눠준 뒤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천마 지역에 오는 거면서 어떻게 준비를 하나도 안 해왔어요? 차에 체인도 없고 지금 장난하는 거예요?"학생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 학교 주변에서는 이런 지형 볼 일이 없잖아요. 교수님이 그냥 여기 와서 합류하라고만 하셨지, 뭘 준비하라고까지는 얘기 안 하셨거든요."김지유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다들 나름 배운만큼 배운 사람들인데 이런 것까지 교수가 일일이 챙겨줘야 하다니.정말 여행이라도 온 줄 아는 걸까.노현우가 열이 나는 노준서에게 약을 먹이고 30분쯤 곁에서 지켜보자 그제야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지유 씨 먼저 데려다줄까요? 난 이따가 다시 준서보러 올 거예요. 밤사이에 열이 다시 오를까 봐 걱정돼서요.""저 혼자 가도 돼요, 별로 멀지도 않잖아요."한밤중이라 길에 사람 하나 없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새벽 바람만이 불어왔다. 노현우도 김지유 혼자 걸어가게 하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김지유가 여관 주인한테서 술을 조금 얻어 와 노현우한테 건넸다."이걸로 닦아서 열 좀 내리게 해요. 상태 안정되면 그때 제가 어떻게 돌아갈지 얘기해요.""고마워요."이런 곳에서 열이 나는 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노준서는 심장 수술까지 받은 적 있었다. 학생들은 밥을 먹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형님, 내일 준서는 그냥 돌려보내는 게 어때요? 몸도 안 좋은데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내일 상황 봅시다."노준서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노현우가 말
김지유가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설산을 가리켰다."여기 사람들은 수백 년째 존재해 온 저 산을 신성한 산이라고 불러요. 노 대표님,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인생 궤적이 비슷한 사람은 사주도 비슷하대요. 권 대표님과 생일도 비슷하지 않아요? 그럼 결국 대표님 인생도 권 대표님처럼 행복하고 원만해질 거라는 뜻이에요, 신성한 산이 증인이에요."전에 술자리에서 노현우는 권지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두 사람 생일은 확실히 며칠 밖에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다. 인생이 하늘과 땅 차이처럼 달라 보여도 어느 순간 신기할 만큼 닮아 있었다. 학교, 커리어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까지도 하나둘 다시 겹쳐졌다.어쩌면 이것도 운명 같은 인연일지도 몰랐다. 노현우가 김지유를 바라보았다.수수한 옷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새까맣고 숱 많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헤친 김지유는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노현우는 왠지 산속을 달리는 야생 동물이 떠올랐다.김지유가 깊은 산 속에서도 뛰쳐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노현우는 김지유의 뜬금없는 말에 웃음이 났다."좋은 말씀 감사해요."노현우가 고개를 돌려 설산을 바라보았다.마음속에 쌓여 있던 눈도 어느새 씻겨 나간 것 같았다.앞에 있던 요금소를 지나서 두 사람은 자리를 바꿨다.노현우가 남은 절반 여정의 운전을 맡았다.무사히 밤에 예약해둔 숙소에 도착했을 즈음, 노준서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형, 나 이제야 메시지 봤어. 우리 진짜 길을 잘못 들었는데 앞에 절벽이 있더라고. 다행히 돌무더기가 높이 쌓여 있어서 차를 무사히 멈춰세울 수 있었어. 지금 예약해둔 캠핑장으로 가는 중이야.""안전 조심해. 대충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아마 1시 지나서일 것 같아."한밤중이라 가기 힘든 데다 학생들 차는 성능도 평범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노현우는 예약해둔 민박집 주소를 물었다.한밤중이 되자 노현우는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났다.그때 마침 화장실에 다녀오던 김지유와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