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계약 아내가 떠났습니다!

대표님, 계약 아내가 떠났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2
By:  Noona Aurora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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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나 헤이스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약 결혼을 맺고 그저 보여주기식 아내로 살아왔다. 계약 기간이 끝나자, 시엔나는 모든 것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사랑도, 타협도 없었다. 그녀는 남편인 데미안 블랙웰의 삶에서 그저 부속품에 불과했을 뿐이다. 이혼 서류를 제출하고 그의 곁을 떠난 순간, 데미안은 비로소 상실감을 느끼며 그녀의 사랑을 다시 구하기 위해 추격하기 시작한다. 이제 시엔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1년 동안 함께 살았던 그 차가운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그를 완전히 놓아주고 평온한 새 삶을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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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장: 존재의 부재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다니, 참 허무하게도 지나갔네."

어느덧 서른. 온기라곤 없는 서막 속 결합에 갇혀 1년을 버텨낸 시엔나의 입술 사이로 야윈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는 오늘 밤, 5성급 호텔 그랜드 볼룸을 가득 채운 수도권 상류층의 경쾌한 크리스털 잔 소리와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통유리창 너머로 아득히 펼쳐진 도심의 차가운 화려함. 시엔나의 멍한 시선은 반짝이는 불빛을 허허로이 투과하고 있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짓눌림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표정 관리해, 시엔나. 웃어. 기자들 카메라가 우리 쪽을 향하고 있으니까."

낮고 서늘하게 떨어지는, 명령조의 바리톤 음성이 시엔나의 멍하던 정신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데미안 블랙웰. 그녀의 계약 남편이자 서른다섯의 차갑고 야심 찬 남자.

시엔나의 곁에 곧게 선 그가 슬며시 몸을 밀착해 왔다. 단단한 팔이 소유욕을 과시하듯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피부로 전달되는 체온은 아찔할 만큼 따뜻했으나, 가슴에 닿는 온도는 등골이 서늘할 만큼 차가웠다.

시엔나는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지만, 이내 수없이 연습했던 대로 자연스럽게 태도를 가다듬었다.

그를 돌아본 시엔나는 지난 365일 동안 완벽하게 연마하고 연기해 온 공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늘 하던 대로 해. 이사진에게 조금이라도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마."

데미안이 윗니와 아랫니를 거의 다문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짓눌러 속삭였다. 입술조차 거의 움직이지 않는 완벽한 표정 관 것이었다. 그의 시선은 전방에 서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향해 차분히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시엔나는 속으로 밀려드는 불쾌감을 누르며 입꼬리를 더 깊게 올려 보였다.

스포트라이트와 플래시 세례 속에서, 두 사람은 세상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완벽한 부부의 초상이었다.

잘생기고 단호하며 야망으로 가득 찬 블랙웰 그룹의 CEO와, 그 옆을 우아하게 지키는 온화하고 아름다운 아내.

그러나 이 화려함의 껍데기 뒤에서, 두 사람은 이 관계가 한 줄의 계약서로 묶인 거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년 전, 성당 제단 앞에서 맹세를 나누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1년짜리 계약에 불과했던 것이다.

데미안에게는 CEO 자리를 공고히 하고 신축 쇼핑몰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이사진을 안심시킬 ‘안정적이고 가정이 있는 남자’라는 이미지가 필요했다. 반면 친정 가족들의 잔혹한 횡포에 몰려있던 시엔나에게는, 돌아가신 친어머니의 유작이자 유산인 옛 저택을 되찾기 위한 데미안의 자금력과 법적 영향력이 절실했다.

취재진이 카메라를 내리고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길을 터주자마자, 시엔나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데미안의 온기는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마치 시엔나의 살결에 고압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데미안은 미련 없이 손을 거두었다. 그는 곧은 체구에 완벽하게 맞춰진 명품 슈트의 주름을 매만질 뿐, 아내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여기 있어. 괜히 서둘러 움직여서 기자들 의심 사지 말고."

데미안은 시엔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무덤덤하게 말을 던졌다.

줄곧 침묵을 지키며 미소만 짓고 있던 시엔나의 입술에서 마침내 목소리가 떨어져 나왔다.

"데미안, 나 머리가 좀—"

시엔나의 말이 공중에서 툭 끊어졌다.

데미안은 이미 몸을 돌려, 방금 입장에 들어선 상임 이사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설명을 기다려 주지도, 핏기 없이 파리해진 얼굴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데미안에게 있어 오늘 밤 시엔나의 존재는 이미 제 기능을 다한 셈이었다. 그의 명성을 완벽하게 꾸며줄 살아있는 장식품으로서의 역할 말이다.

시엔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아이보리색 비단 드레스 앞으로 맞잡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관자놀이를 타고 천천히 밀려드는 지독한 두통을 그녀는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누가 구석에 싸구려 장식품처럼 혼자 서 있나 했더니."

너무나 익숙한 비꼬는 목소리에 시엔나는 고개를 돌렸다.

시어머니인 베아트리스 블랙웰이 데미안의 여동생인 엘레나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샴페인 잔을 든 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시엔나를 훑어내리는 평가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머니, 엘레나."

시엔나는 가능한 한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블랙웰 가문 사람들 앞에서 늘 예의를 지키려 애썼다. 그들이 쏟아내는 오만함과 무시하는 눈빛을 말없이 삼켜내면서.

베아트리스가 코웃음을 치며 시엔나의 목을 감싸고 있는 가느다란 진주 목걸이에 시선을 두었다.

"블랙웰 가문이 오늘 밤 수조 원짜리 프로젝트를 따냈단다, 시엔나. 그런데 겨우 테이블 위에 놓인 샴페인 한 병 값도 안 될 법한 저 오랜 장신구를 걸치고 나온 거니? 협력사 사람들이 데미안이 아내 생활비도 안 준다고 오해하길 바라는 거야?"

시엔나의 오른손 손가락이 목에 걸린 진주를 살포시 감싸 잡았다. 그녀는 강제로 입꼬리를 올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거예요, 어머니. 이 드레스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거의 망해버린 헤이스 가문에서 오래전에 돌아가신 그 어머니?"

엘레나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잘라버렸다.

스물일곱 살의 그녀는 오만한 빛이 감도는 눈으로 시엔나의 드레스를 훑어보았다.

"오빠가 언니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라니까."

시엔나는 매번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을 때마다 가문의 은혜를 들먹이는 엘레나를 그저 침묵 속에 바라보았다.

시엔나가 받아칠 틈도 없이 엘레나의 말이 이어졌다.

"오빠가 그 무능한 언니 아빠 손에서 친정 어머니 옛 저택을 도로 사주지 않았으면, 언니는 지금쯤 길거리를 전전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양심이 있으면 염치라도 좀 알아야지. 적어도 이런 큰 행사에서 블랙웰이라는 이름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엘레나의 한마디 한마디가 시엔나의 가슴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왔다.

피는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아렸다.

시엔나는 연회장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데미안이 어느 장관과 잔을 부딪치며 나지막하게 웃고 있었다. 시엔나로서는 좀처럼 본 적 없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데미안은 다시 고개를 돌리기 전, 시엔나가 있는 쪽을 잠시 힐끔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시엔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시엔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데미안은 남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보호조차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하긴, 계약에 불과한 관계에서 대체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시엔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리를 조여오는 통증보다, 영혼을 짓누르는 피로감이 더 컸다. 지난 1년 동안 시엔나는 침묵 속에서 견뎌왔다.

블랙웰 저택 하수인들의 깔보는 눈빛, 베아트리스의 날카로운 빈정거림, 그리고 자신을 무급 개인 비서처럼 취급하던 엘레나의 철없는 행동까지.

그 모든 것을 참아낸 이유는 단 하나, 계모의 탐욕으로부터 어머니의 마지막 흔적을 지켜내 준 데미안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밤, 비즈니스 인맥을 위해 자신을彻底히 방치하는 데미안의 모습을 보며, 시엔나의 안에서 무언가가 오독오독 깨어져 나갔다. 그동안 인내라는 반창고로 겨우 붙여놓았던 균열이 온전히 무너져 내렸다.

시엔나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이전처럼 순종적이지 않았다. 여전히 앞에 서서 자신을 비웃고 있는 베아트리스와 엘레나를 바라보던 시엔나의 입가에 옅은, 그러나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서늘한 결의가 감돌았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엘레나."

시엔나의 목소리는 다정함이 싹 빠져나간 채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말투마저 완벽한 타인처럼 격식을 차리고 있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시엔나는 베아트리스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걸어 나갔다. 그녀는 단정한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조용한 여자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시엔나는 대리석 세면대 테두리를 두 손으로 짚어 내렸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직시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오른손 손가락이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를 매만졌다.

정확히 일주일 뒤면, 그 집에서 그녀가 버텨야 할 유효기간이 끝난다. 어머니의 저택 소유권 명의도 사흘 전에 이미 그녀의 이름으로 정식 이전이 완료된 상태였다.

투명 인간이자 장식품 아내로서의 의무는 이것으로 모두 끝났다.

시엔나는 작은 가방을 뒤져 휴대전화를 꺼낸 뒤 디지털 달력을 확인했다.

"이제 됐어, 시엔나. 더 이상 너 자신의 자존감을 짓밟히게 두지 마."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시엔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슬픔은 어느새 차가운 결의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한적한 복도 끝에 데미안이 팔짱을 낀 채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메인 행사가 거의 끝나가는데, 친척 어르신들한테 인사드리고 퇴장해야지."

데미안이 닦달하듯 다그쳤다.

시엔나는 데미안의 날카롭고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그녀가 지쳤는지, 머리가 아픈지, 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웠는지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가요."

시엔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 입가엔 더 이상 어떤 미소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엔나는 데미안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라는 존재를 철저히 무시한 채.

그리고 이제부터는,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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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존재의 부재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다니, 참 허무하게도 지나갔네."어느덧 서른. 온기라곤 없는 서막 속 결합에 갇혀 1년을 버텨낸 시엔나의 입술 사이로 야윈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그 나지막한 목소리는 오늘 밤, 5성급 호텔 그랜드 볼룸을 가득 채운 수도권 상류층의 경쾌한 크리스털 잔 소리와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통유리창 너머로 아득히 펼쳐진 도심의 차가운 화려함. 시엔나의 멍한 시선은 반짝이는 불빛을 허허로이 투과하고 있었다.손에 잡히지 않는 짓눌림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표정 관리해, 시엔나. 웃어. 기자들 카메라가 우리 쪽을 향하고 있으니까."낮고 서늘하게 떨어지는, 명령조의 바리톤 음성이 시엔나의 멍하던 정신을 단숨에 끌어올렸다.데미안 블랙웰. 그녀의 계약 남편이자 서른다섯의 차갑고 야심 찬 남자.시엔나의 곁에 곧게 선 그가 슬며시 몸을 밀착해 왔다. 단단한 팔이 소유욕을 과시하듯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피부로 전달되는 체온은 아찔할 만큼 따뜻했으나, 가슴에 닿는 온도는 등골이 서늘할 만큼 차가웠다.시엔나는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지만, 이내 수없이 연습했던 대로 자연스럽게 태도를 가다듬었다.그를 돌아본 시엔나는 지난 365일 동안 완벽하게 연마하고 연기해 온 공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늘 하던 대로 해. 이사진에게 조금이라도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마."데미안이 윗니와 아랫니를 거의 다문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짓눌러 속삭였다. 입술조차 거의 움직이지 않는 완벽한 표정 관 것이었다. 그의 시선은 전방에 서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향해 차분히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시엔나는 속으로 밀려드는 불쾌감을 누르며 입꼬리를 더 깊게 올려 보였다.스포트라이트와 플래시 세례 속에서, 두 사람은 세상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완벽한 부부의 초상이었다.잘생기고 단호하며 야망으로 가득 찬 블랙웰 그룹의 CEO와, 그 옆을 우아하게 지키는 온화하고 아름다운 아내.그러나 이 화려함의 껍데기 뒤에서, 두 사람은 이 관계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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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선을 긋다
블랙웰 저택 식당의 대형 통유리창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쳐 들었다.보통 아침 7시라면 시엔나가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일 시간이었다. 데미안이 좋아하는 설탕 없는 블랙커피를 딱 적당한 온도로 내리고, 그의 넥타이를 현관 근처 의자에 차분히 준비해 두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아침, 식당은 적막하기만 했다.데미안이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왔다. 셔츠 단추는 단정하게 잠겨 있었으나 목돈이 어딘가 허전했다.넥타이가 매여 있지 않은 것이다.그의 시선이 즉시 식탁으로 향했다.그곳에는 달랑 토스트 한 접시와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한 잔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주변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따뜻한 미소로 자신을 맞아주던 시엔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데미안이 의자를 거칠게 빼내며 앉자, 고요를 깨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는 팬트리 대를 정리하고 있던 집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시엔나는 어디 있지?"낮게 깔린 데미안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집사는 긴장한 기색으로 허리를 굽혔다. "도련님, 마님께서는 조금 일찍 방에서 식사를 마치셨습니다. 오늘 아침부터는 도련님의 수발을 저에게 맡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데미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마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방에서?"계약 결혼을 시작할 때부터 각자의 편의와 사생활을 위해 각방을 쓰는 것은 데미안의 요구사항이었다.하지만 시엔나는 단 한 번도 식당을 비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 집 안에서 '헌신적인 아내'로서의 역할을 늘 정성껏 해냈다. 마치 군말 없이 작동하는 완벽한 기계처럼.데미안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가, 이내 쾅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내려놓았다.너무 달았다. 집사가 설탕을 넣은 것이었다. 아침마다 데미안이 가장 싫어하는 짓이었다."치워. 다시 타 와."데미안이 차갑게 명령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시엔나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노크도 없이 데미안은 시엔나의 방 방문 손잡이를 돌려 문을 덜컥 열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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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천천히 서서히
사흘 뒤.블랙웰 그룹 대회의실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데미안 블랙웰은 회의탁자 상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임원진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남부 지역 신규 쇼핑몰 프로젝트의 시장 분석 보고서 수치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당신들이 내놓은 결과물이 겨우 이거야?" 데미안의 목소리가 단도처럼 정적을 베고 들어왔다. "이 분석에는 리스크 관리 대책이 터무니없이 부족해. 이대로 진행했다간 사업 초기 3개월 안에 블랙웰 그룹의 모멘텀을 완전히 잃게 될 거다."한 선임 매니저가 긴장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보통은…… 큰 회의를 앞두고 시엔나 마님께서 재단과 지역 사회 관점의 소비자 동향 및 보조 자료들을 깔끔하게 정돈해 주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님으로부터 전달받은 추가 데이터가 없었습니다."데미안이 멈칫했다. 은색 만년필을 쥐고 있던 그의 손끝이 공중에서 굳어버렸다.이성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이었다.지난 1년 동안 시엔나는 가문이 무너지기 전 경영학을 전공했던 바탕을 살려, 집에서 늘 데미안의 회의 서류를 함께 훑어보곤 했다.그녀는 데미안의 서재 책상 위에 가지런한 글씨체로 꼼꼼하게 메모를 남겨두었다. 데미안의 하드웨어 중심 분석 팀이 놓치기 쉬운 인도주의적이고 감성적인 시각을 채워주는 메모들이었다.투자자들 앞에서 데미안의 브리핑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은, 바로 그 자잘한 손메모들이었다."회의는 연기한다. 24시간 내로 이 보고서 완벽하게 수정해 와." 데미안이 차갑게 말을 마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사장실로 돌아온 데미안은 자켓을 소파 위로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렸다. 마음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사흘간 집에서 보여준 시엔나의 차가운 태도가 그 머릿속을 온통 어지럽히고 있었다.집은 마치 비어있는 호텔 같았다. 부드러운 발소리도, 밤마다 풍기던 카모마일 차 향기도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책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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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이혼 소장
시엔나는 문턱에 서서 숨을 거칠게 내쉬는 데미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작은 서재 안으로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시엔나는 책상 위의 서류나 발밑의 종이상자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들고 있던 책을 차분히 내려놓은 뒤, 곧게 서서 남편을 맞섰다."뒤에서 하는 짓이 아니에요, 데미안." 시엔나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동요 없는 톤을 유지했다. "내일은 우리 계약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에요. 전 그저 1년 전 서면으로 약속했던 바를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데미안이 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시엔나의 얼굴에 서린 피로함과 동시에 단단한 결의가 데미안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우리 합의는 각자의 목적을 달성한 뒤 원만하게 갈어서는 거였어." 낮게 깔린 데미안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하지만 요즘 당신 태도는 마치 내가 여기서 무슨 악당이라도 된 것 같잖아. 집 안에서 겉돌고, 내 가족을 무시하더니, 이젠 나와 내 변호사와 앉아 이야기해 보지도 않고 이 서류부터 준비해?"시엔나가 나지막하게 실소했다. 데미안의 귀에는 그 웃음이 지독하게 씁쓸하게 들렸다."앉아서 이야기요? 당신 변호사하고요?" 시엔나가 담대하게 데미안의 눈을 직시했다. "뭐 때문에요, 데미안? 당신 변호사가 내가 블랙웰 가문의 재산을 단 한 자루도 요구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조항이라도 만들어내게요?" 시엔나의 시선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가, 이내 다시 차분해졌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것 좀 보시죠."시엔나는 책상 위의 파일을 집어 들어 데미안의 가슴 앞으로 내밀었다."이미 서명했어요. 거기에 분명히 적혀 있죠. 전 혼인 이후의 모든 위자료 및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요. 블랙웰 소유의 땅은 단 한 평도 요구하지 않을 거고, 얼마 전 제가 자산 협력 서류에 관여해서 당신이 따내도록 도왔던 그 쇼핑몰 프로젝트의 이익도 단 한 푼 탐내지 않을 거예요. 전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것만 들고 나갑니다."데미안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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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마침내 떠나다
동쪽 하늘이 주황빛 물결로 물들며 아침 햇살이 막 떠오르던 시각, 블랙웰 저택 복도의 대형 괘종시계가 7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데미안은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답답함에 눈을 떴다. 밤새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이혼 소장에 적혀 있던 시엔나의 서명이 자꾸만 환영처럼 눈앞을 어른거렸기 때문이다.데미안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어지럽히는 잡념들을 억지로 털어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씻은 뒤, 출근용 셔츠를 챙겨 입고 평소보다 조금 서두르는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조안나!"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데미안이 집사를 불렀다.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저택 안은 마치 온 세간의 온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린 듯 적막하기만 했다.데미안은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조안나가 어두운 표정으로 눈시울이 약간 붉어진 채 식탁 옆에 서 있었다."시엔나는 어디 있지?" 데미안이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털어내려 애써 다그치듯 물었다.조안나는 말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이 든 집사는 그저 약간 떨리는 손 끝으로 식탁 한쪽을 가리킬 뿐이었다.데미안이 성큼 다가갔다. 매끄럽게 잘 닦인 대리석 식탁 위에 짙은 푸른색 서류 봉투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그 봉투 위에는 저택 대문 열쇠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아 비닐조차 뜯지 않은 블랙웰 그룹 명의의 블랙카드, 그리고 손글씨가 적힌 작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데미안이 메모지를 낚아챘다.[데미안.정확히 오전 7시 30분, 우리의 1년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어머니 저택의 모든 소유권 서류는 독립 법무사를 통해 법적으로 깨끗하게 정리를 마쳤으니, 추후 블랙웰 그룹에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제가 서명한 이혼 서류는 이 봉투 안에 있습니다. 변호사를 통해 법원에 제출하여 절차를 진행해 주세요. 전 그 어떤 위자료나 분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난 1년에 대한 대가로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옛집 하나면 제겐 충분하니까요.그동안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랙웰 그룹의 앞날에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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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귀향 (歸鄕)
시엔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옛 저택 앞에 도달했다.숨이 막힐 듯 답답했던 1년간의 계약 결혼을 견뎌낸 끝에 찾아온 자유. 그녀의 눈가에 감격스러운 회한이 가득 차올랐다.시엔나는 오래된 저택의 대문으로 걸어가 손에 쥐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었다.나무문이 열리자마자 퀘퀘한 먼지와 퀴퀴한 묵은 목재 향이 시엔나를 맞이했다.안으로 발을 내디딘 시엔나는 오래된 가방과 작은 상자를 두껍게 먼지가 쌓인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그녀는 거실 한가운데에 잠시 서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수년 전 하얀 천으로 덮어둔 가구들 위로 얇은 먼지 레이어가 덮여 있었다.시엔나는 숨을 깊게 내쉬며, 코끝을 자극하는 눅눅하지만 지극히 정직한 공기를 음미했다."엄마, 나 돌아왔어."시엔나가 쓰라린 통증을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제부터 그녀는 이곳에서 혼자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어떤 압박도, 자신을 옭아매며 거짓된 삶을 강요하던 그 어떤 구속도 없이.시엔나는 하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올려붙였다.이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자신의 꿈을 펼쳐나갈 근사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작정이었다.그녀는 집 안 구석구석의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몸을 고되게 움직여 그동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잡념들을 잊어버리고 싶었다.데미안의 가문에서 받았던 수많은 문제와 압박들까지도.'자존심이 짓밟히며 지치는 것보다는, 몸이 힘든 게 훨씬 나아.'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 있던 목재 탁자 모퉁이를 훔쳐내며 시엔나는 속으로 되뇌었다.정오가 가까워진 오전 11시, 시엔나는 거실 목재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의 손바닥은 비눗물과 헝겊 마찰 때문에 살가죽이 벗겨져 화끈거렸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쬐며 깨끗해진 집 안을 둘러보자 가슴속이 뻥 뚫리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더 이상 그 누구의 명령도, 비아냥도, 데미안 블랙웰이라는 남자의 차가운 기대도 없었다."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시엔나."시엔나는 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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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시엔나가 필요하다
회의실 안이 한층 더 꽁꽁 얼어붙었다. 데미안의 앞에서 흘러나온 "시엔나"라는 이름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의 스위치와도 같았다.데미안은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기획분석팀장을 노려보았다. 피 말리는 수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데미안은 굳어진 손가락으로 재킷 단추를 가볍게 정돈하며 몸을 곧게 세웠다."이 회사는 조직도에 이름조차 없는 여자 한 명한테 의존하라고 전문 인력들에게 수십억 원의 연봉을 주는 게 아닙니다."낮게 깔린 데미안의 목소리에는 서슬 퍼런 강조가 실려 있었다.두 사람의 계약 결혼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에 시엔나와의 계약이 끝났다는 사실 역시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었다.데미안이 자리에서 번개같이 일어서며 거칠게 휴대폰을 낚아챘다."회의 끝."데미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덧붙였다."더 이상 시엔나에게 의존하겠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군요. 내일 아침까지 이 보고서가 완벽해지지 않는다면, 팀장님과 분석팀 전원은 사직서를 제출하십시오."데미안은 성큼성큼 회의실을 걸어 나갔고, 그의 뒤로 두꺼운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임원 전용 복도의 대리석 바닥 위로 그의 거친 구두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넓고 화려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는 순간, 데미안은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 섰다.넓은 공간을 채운 정적이 너무나도 공허하게 느껴졌다.데미안은 정돈된 집무실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원래대로라면 책상 오른쪽 모퉁이에는, 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참고할 수 있도록 시엔나의 정갈하고 읽기 쉬운 글씨체로 적힌 차상위 분석 노트가 초록색 스크랩북에 담겨 놓여 있어야 했다.하지만 지금, 책상 모퉁이는 텅 비어 있었다.데미안은 의자에 몸을 묻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기획분석팀장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환청처럼 맴돌았다.‘저희에게는 정말로 시엔나 사모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젠장."데미안이 의자 팔걸이를 세게 쥐어틀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냈다.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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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공백을 외면하며
조아나는 데미안의 호통에 깜짝 놀랐다. 도련님이 원래 차가운 성격이긴 했지만, 시엔나 사모님이 집에 계실 때는 이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네, 도련님. 바로 만들어 오겠습니다."조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허겁지겁 주방으로 돌아갔다.데미안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재킷 단추를 풀고는, 몸에서 벗겨낸 재킷을 식탁 의자 위로 툭 내던졌다.그는 거실을 천천히 거닐며 집 안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높은 층고, 수억 원을 호가하는 미술품, 그리고 매끄럽게 빛나는 대리석 바닥.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외형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하지만 그가 지나치는 걸음마다 메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데미안은 뒷뜰 정원 근처에 위치한 작은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거 시엔나가 책을 읽거나 프로젝트 분석 자료를 검토할 때 자주 사용하던 공간이었다.슬그머니 열려 있는 문을 데미안이 느리게 밀었다.방 안은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더 이상 싸여 있는 서류 뭉치도, 책장에 꽂혀 있던 경영학 서적도, 그리고 시엔나가 이곳에 있음을 알리던 은은한 라벤더 향도 없었다.데미안은 팔짱을 낀 채 텅 빈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겨우 메모 몇 장 남겼다고 네 가치가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건가?"데미안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서 얇게 울려 퍼졌다.데미안이 얇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정(Denial)과 상처받은 오만이 가득 찬 실소였다."이건 그저 익숙함이 사라진 데서 오는 착각일 뿐이야."데미안은 스스로의 뇌를 설득하듯 말을 이어갔다."1년 동안 일관되게 수발을 들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몸의 반사 신경이 어색하게 느끼는 건 당연하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적 반응일 뿐, 내가 널 필요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시엔나.""그리고 그녀와의 관계는 어차피 끝날 수 있는 비즈니스 계약에 불과했으니까."데미안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잡았다.그래, 그의 이성적인 부정은 지극히 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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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새로운 장
고요한 도시 외곽 마을에 밤이 천천히 스며들었다.시엔나는 메인 침실의 목재 침대 끝에 앉아, 하루 종일 집을 청소하느라 뻐근해진 목을 문질렀다.캐주얼한 옷차림은 어느새 헐렁한 티셔츠와 편안한 면바지로 바뀌어 있었다.요란하게 울리는 꼬르륵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시엔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새 휴대폰을 꺼내기 위해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오늘 밤은 그냥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어야겠다."시엔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하지만 휴대폰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길이 문득 멈춰 섰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지난날의 기억 속으로 끌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위해 늘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날들, 불평 한마디 없이 순종적인 아내로 살았던 날들의 기억으로.시엔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빠르게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데미안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계약에 따라 자유의 몸이 되었고, 데미안에게 그 어떤 빚도 남아있지 않았다.'다시는 그 집을 떠올리지 마, 시엔나. 그 집은 그저 잠시 머물다 간 곳일 뿐이고, 이제 너한테는 그곳에서 했던 일들을 기억해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어.'블랙웰 저택에서의 모든 추억을 잊겠다고 스스로를 다짐한 시엔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시엔나는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손가락으로 화면을 슬라이드하려던 바로 그 순간, 오래된 저택의 정적을 깨고 현관문叩き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시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옅은 의문이 그녀의 이마를 스쳤다.데미안과의 이혼을 담당한 변호사 에드워드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오늘 이 집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변호사가 데미안에게 그녀의 위치를 알려주었을 리는 만무했다. 또한, 데미안이 그녀를 찾아올 리도 없었다.시엔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떻게 그 남자를 생각할 수 있지? 지난 1년 동안 나를 그저 하녀나 아시스턴트, 그저 보여주기식 아내로만 여겼던 그 남자를.시엔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생각들을 털어냈다.침대에서 일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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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다시 일어서다
시엔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나오미를 바라보았다."도움을 빌미로 우리를 통제하려는 울타리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어, 나오미."시엔나의 목소리는 단단하면서도 마음을 안지시키는 힘이 있었다.나오미가 멍하니 물었다. "무슨 뜻이야?""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산 중 일부를 개인 저축으로 모아둔 게 있어. 앞으로 두 달 동안의 재단 운영비는 그걸로 메울 거야."시엔나가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나도 일을 시작할 생각이야. 여러 곳에 구직 지원서를 제출해 뒀거든. 이제 직접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려고."나오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일을 한다고? 외부에서 일 안 한 지 벌써 1년이나 됐는데, 괜찮겠어?""응, 당연히 할 수 있어."시엔나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동안 썩혀두었던 경영학 학위가 있잖아. 이제는 그 자격증을 나 자신과 우리 재단을 위해 쓸 때가 된 거지.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바로 서야 해, 나오미. 블랙웰 가문의 도움 없이,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나오미는 눈을 떼지 못한 채 시엔나를 바라보았다.눈앞에 서 있는 친구의 얼굴에는 더 이상 몇 달 전 데미안 블랙웰의 그림자 아래 있을 때 보이던 망설임이나 생기 없는 순종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새장 밖으로 나와 스스로 날개를 펼칠 준비를 마친 여성—시엔나에게서는 강인한 새로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나오미의 입가에 넓은 미소가 번졌다. 시엔나의 손을 꽉 잡는 그녀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글썽거렸다."좋아." 나오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 그럼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재단을 지킬게. 필요하다면 다른 후원자도 알아볼 거고. 어때, 그렇게 하면 되겠지?"시엔나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졌던, 아주 가볍고 자유로운 웃음이었다."응, 그렇게 하면 돼." 시엔나가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며칠이 지났다.아침 햇살이 조금씩 옅어질 무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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