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옥상 문을 열자, 상수는 난간에 기대어 탁 트인 도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오의 햇살이 그의 날렵한 콧날과 턱선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혜연이 다가오는 구두 소리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왔네요. 생각보다 빨리.”
“착각하지 마세요. 상수 씨가 오라 가라 한다고 오는 사람 아니니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예요.”
혜연은 상수와 서너 걸음 이상의 거리를 둔 채 멈춰 섰다.
"어제 일은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소영이 안 마주치고 조용히 넘어갔네요."
상수가 여유를 부리려 하자, 혜연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여유 부릴 상황 아니에요, 상수
혜연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미안해, 엄마. 정말 미안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근데 이제 나, 그 사람 없이는 안 돼. 그 사람이 내 무너지는 세계의 유일한 기둥이야. 나 그 사람 사랑해, 엄마.""아이고, 이 미친년아!"혜연 엄마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세상에 많고 많은 남자 중에 하필 그놈이냐! 네가 그렇게 선보고 만나라는 놈들은 다 마다하고, 하필 네 제일 친한 친구 가슴에 못을 박고 그놈이냐고! 네가 소영이 얼굴을 평생 어떻게 보려고 그래!"혜연은 식탁에 엎드려 폭풍처럼 오열했다."미안해, 엄마. 미안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혜연 부가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당신도 그만해. 애 죽겠어."혜연 아빠의 시선이 바닥에 엎드린 딸에게 향했다.그의 눈에도 슬픔이 가득했지만, 혜연 엄마와 같은 서슬 퍼런 분노는 아니었다."너 잘못 아니야. 사람 마음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되면 세상 참 쉽겠지.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다들 아프고 힘든 거 아니겠어.""여보! 당신 지금 애를 두둔하는 거야?""두둔이 아니야. 사귀는 사이에 끼어들어서 뺏은 것도 아니고, 이미 헤어진 뒤에 만난 거라며. 그것도 오래전에 헤어진 거라며. 누군가한테는 도의적으로 비난 받을 일인 건 알지만, 우리까지 애한테 그러지 마. 혜연이가 지금 제일 힘들 거야. 자기 자신을 제일 증오하고 있는 건 혜연
퇴근 직전 걸려 온 엄마의 전화는 단 한 마디였다."너 오늘 당장 집으로 와. 잔말 말고 와."평소의 다정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정적은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진공 상태처럼 혜연의 숨통을 조였다.혜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챙겼다.사무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 화려한 도심의 네온사인이 일렁거리며 혜연의 눈을 찔러댔다.'별일 아닐 거야. 그냥 소영이가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돼서 부르시는 걸 거야.'스스로를 다독여보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한 연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상수였다.[상수: 퇴근했어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상수의 다정한 문장을 보자 혜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이 아수라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해 주는 사람.혜연은 잠시 멈춰 서서 답장을 적었다.손끝이 파들거려 오타가 났지만 수정할 겨를도 없었다.[혜연: 지금 본가로 가요. 엄마가 갑자기 오라고 하시네요. 별일 없겠죠? 가끔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르실 때가 있거든요. 너무 걱정 마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혜연은 알고 있었다.엄마의 그 서늘한 명령조는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는 것을.상수는 즉시 답장을 보내왔다.[상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
한 시간쯤 흘렀을까.소영 아빠가 다시 혜연의 집을 찾았다.거실은 여전히 깨진 유리 파편들과 혜연 부모님의 충격으로 엉망진창이었다.혜연 아빠는 창백한 낯빛으로 소파에 주저앉아 있었고, 혜연 엄마는 거실에 주저 앉아 넋이 나간 듯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소영 엄마는 좀 괜찮아?”혜연 아빠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소영 아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식탁 의자에 무겁게 앉았다.“그냥 뭐… 머리 싸매고 누웠죠. 제정신이 아니에요. 소영이가 전화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 저 사람도 눈이 뒤집힌 거죠. 뭐 이미 다 지난 일이라지만, 저도 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소영이가 죽고 싶다고 저러니 가슴이 찢어집니다.”“대체 무슨 일인지… 자세히 좀 말해봐요. 우리 혜연이가 정말 그랬다는 거야?”혜연 아빠가 묻자, 소영 아빠는 소영에게 들은 전말을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혜연과 상수가 6개월 전부터 남몰래 만나왔다는 사실, 프로젝트를 핑계로 소영을 속여왔다는 점, 그리고 어젯밤 카페에서 소영이 두 사람의 불륜 현장을 직접 덮쳤다는 이야기까지.소영 아빠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가 혜연 부모님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다.이야기를 듣는 내내 혜연 부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혜연 엄마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20년 지기 친구 딸이 내 자식 같았고, 내 자식이 그 집 딸 같았는데. 그 믿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거실의 정적보다 더 크게 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울음이라기보다 짐승의 비명에 가까웠다.소영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찢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엄마… 나 어떡해? 혜연이가… 박혜연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상수 오빠랑… 둘이서 나를….”휴대폰을 쥔 소영 엄마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거실의 적막 속에서 새어 나오는 딸의 절규는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엄마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팠다.평소 누구보다 당당하고 밝았던 딸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목소리에 소영 엄마의 눈등이 붉게 달아올랐다.옆에서 그 소리를 함께 듣고 있던 소영 아빠의 얼굴도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그는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한 채 마른세수를 반복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전화가 끊겼다.거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뗄 수 없었다.20년이다.제 자식처럼 예뻐하며 키웠던 친구의 딸 혜연, 그리고 8년 동안 당연히 사위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딸의 전 연인 상수.그 두 사람이 가장 소중한 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그 정적을 깨고 소영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입술은 분노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가만 안 둬. 이 배은망덕한 것들, 내가 그냥 둘 줄 알아?”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현관으로 향하는 아내를 소영 아빠가 다급히 붙잡았다.“여보, 진정
혜연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도면 수치들은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점심시간부터 수십 번도 더 윤소영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들여다보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게시물 없음]검은 화면 위에 뜬 차가운 문구. 20년간 쌓아온 두 사람의 역사, 함께 해외여행을 가서 찍은 웃음 섞인 영상들, 서로의 생일을 제 일처럼 축하하던 기록들이 단 한순간에 증발해 있었다.마치 박혜연이라는 존재가 윤소영의 생애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영은 정교하게 추억을 도려냈다.'차단한 걸까? 아니면 정말 홧김에 다 지운 걸까?'혜연은 떨리는 손으로 소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사과를 하든, 무릎을 꿇고 빌든, 아니면 뺨이라도 맞든 일단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소영의 침묵이 불러오는 온갖 끔찍한 상상력이 혜연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연결되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안내음뿐이었다.불안은 이내 지독한 걱정으로 변질되었다.소영은 감정이 격해지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아이였다.혹시나 어제의 충격으로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혜연의 심장을 조였다.고민 끝에 혜연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소영과도 자주 어울리는 민주에게 연락을 취했다."민주야, 나 혜연이야. 혹시 소영이랑 연락돼? 인스타가 갑자기 다 없어졌어. 무슨 일 생긴 거 아닐까 해서..."반대편에서 돌아온 민주의 목소리는 의아함과 밝은 기운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 선 혜연의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평소와 다를 바 없는 동료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오늘따라 유달리 날카로운 금속음처럼 고막을 긁어댔다.탕비실 쪽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웃음소리조차 마치 자신을 향한 조롱이나 비릿한 수군거림처럼 들렸다.'다들 알고 있는 걸까? 소영이가 벌써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한건가?'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생경했다.겹겹이 덧바른 화장으로 가린 수척함 뒤로, 지워지지 않는 배신자의 낙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것만 같아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문이 열리고 사무실로 향하는 짧은 복도가 마치 단두대로 향하는 길처럼 아득하고 위태롭게 느껴졌다.자리에 앉았지만, 모니터 속의 글자들은 제멋대로 일그러지며 기괴한 춤을 췄다.혜연은 몇 번이나 마우스를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평소라면 10분이면 끝냈을 기획안의 서두조차 한 단어도 채우지 못했다.머릿속은 온통 어젯밤 소영이 남기고 간 서늘한 저주와, 상수의 체온이 뒤섞여 진창이 되어 있었다.그때, 책상 파티션 너머로 화살 같은 시선이 꽂혔다.눈치 빠른 동기, 혜연이 유일하게 의지한 김민지 과장였다."박혜연, 너 오늘 제정신 아니지?"민지의 낮은 목소리에 혜연은 어깨를 크게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민지는 특유의 예리한 눈미로 혜연의 파들거리는 손끝과 퀭한 눈동자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아냐... 별일 없어.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