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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와보세요. (2)

Auteur: 연이수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0-10 13:07:08

윤태겸이 묵직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규칙적인 구두굽 소리와 함께 걸어 들어온 남자의 등장에 회의실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우와,

실제로 보니까 진짜 배우 같다.'

지원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그가 바로 파리 본부에서 실무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온 아시아 총괄 이사,

윤태겸이었다.

올해 서른둘.

거적대기를 걸쳐도 완벽할 것 같은 비율에 더 완벽한 얼굴,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수트 핏을 자랑하는 남자.

존재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하는 재벌계의 아이돌 그 자체였다.

대외적으로는 감정 기복이 전혀 없는 차갑고 냉철한 완벽주의자로 통했다.

그의 바로 뒤에는 서른 살의 수석비서실장 최도하가 차분하게 서류를 들고 수행했다.

태겸의 고모 아들이자 프랑스 유학을 함께하며 그곳에서부터 태겸을 보좌해 온 수재 중의 수재였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만큼 두 사람은 친구이자 형제 같은 깊은 신뢰로 묶여 있었고,

도하는 사회생활에 훨씬 능할뿐더러 실무에서도 굉장한 능력자였다.

회의실 상석 앞에 걸어간 태겸이 자리에 앉기 전,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멈춰 섰다.

차가우면서도 깊은 눈빛이 객석을 가볍게 훑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채웠다.

"안녕하세요.

이번 신상품 론칭부터 아시아 본부 총괄이사직을 맡게 된 윤태겸입니다."

정중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실린 인사였다.

태겸은 손목시계를 살짝 내려다보더니 이내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일정이 지체되어 조금 늦었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브리핑 바로 시작하시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태도로 태겸이 상석에 앉자,

회의실에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도하가 태겸의 귀에 대고 낮고 정확한 톤으로 최종 보고를 올렸다.

"이사님,

오늘 브리핑은 밸루아 핵심 가죽 라인인 신제품 가방 론칭 캠페인 건입니다.

보고 받으신 것처럼 이번에도 대행사 MOMENT에서 진행합니다."

태겸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비즈니스 그 자체,

차갑고 빈틈이 없었다.

단상 앞에 선 지원이 곧바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조금 전 차 안에서 한숨을 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일할 때의 지원은 눈치 빠르고 감각적인 프로였다.

지원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브리핑의 시작을 알리며 청량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회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태겸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시선은 이미 앞 단상으로 향해 있었다.

단상 위로 서지원이 올라섰다.

그 순간부터 회의실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안녕하세요.

광고기획 1팀 서지원입니다.”

담백한 인사.

군더더기 없는 호흡.

그리고 이어지는 첫 문장.

“이번 캠페인은 한 가지 방향으로만 가겠습니다.

‘보여주는 럭셔리’가 아니라,

‘느껴지는 럭셔리’입니다.”

태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보통의 기획안이라면 이 단계에서 이미 수십 개의 키워드와 설명이 쏟아졌을 텐데,

지원의 설명은 이상하리만큼 절제되어 있었다.

필요한 말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비워냈다.

그 빈 공간이 오히려 설득력을 만들었다.

지원은 화면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과시,

로고,

화려함은 의도적으로 지웁니다.

대신 남는 건 ‘태도’입니다.

이 브랜드를 드는 사람의 분위기,

움직임,

그리고 공기.”

설명은 짧았지만,

그림은 또렷했다.

강한 조명 대신 흐린 오전 햇빛,

정면을 응시하지 않는 모델의 시선,

과장된 포즈 대신 자연스럽게 흐르는 동작.

태겸은 어느 순간 발표 내용이 아니라 ‘사람’ 쪽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목소리의 높낮이,

끊는 타이밍,

슬라이드를 넘기는 속도.

그 모든 것이 계산된 것처럼 정확했지만,

동시에 억지스럽지 않았다.

듣는 사람의 리듬을 먼저 생각한 발표였다.

회의실 안의 다른 임원들이 여전히 숫자와 구조를 따지며 웅성거리는 동안,

태겸의 시선은 이미 그 소음을 지나 지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센스가 있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지원은 과하게 힘을 주지도,

청중을 의식해 흔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이 만든 그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 태도는 이상하리만큼 밸루아라는 브랜드와 맞닿아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가 다시 정리될 즈음,

발표는 짧게 마무리되었다.

“이상이 최종 방향입니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화면이 꺼졌다.

잠깐의 정적.

윤태겸.

회의 내내 굳어있던 그의 미간이 스르륵 풀리며 시선이 지원의 피티자료에 완벽하게 집중됐다.

브리핑이 끝나고 회의실 불이 켜지자,

태겸이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무뚝뚝하게 초안 서류를 툭 내려놓았다.

"거기 3페이지,

초기 시안 레이아웃 배치 밸런스가 좀 애매한데.

수정된 시안 직접 볼 수 있습니까?"

말은 차가웠지만,

시선은 이미 ‘검토’가 아니라 ‘관심’에 가까워져 있었다.

태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석민 팀장이 지원의 옆구리를 찔렀고,

지원은 태블릿과 수정된 시안을 챙겨 태겸의 자리로 걸어갔다.

스캔들을 리스크로 여기며 철저히 타인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재벌 3세의 예민함이나,

그가 가진 압도적인 아우라 따위는 지원의 머릿속에 없었다.

매번 수없이 치러온 광고주 미팅이었고 늘 해오던 비즈니스였기에,

지원은 태겸의 앞이라고 해서 과하게 긴장하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그저 온통 이 자료를 어떻게 이해시킬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끼 부림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다.

태겸의 상석 옆에 다다라 멈춰 선 지원은,

앉아 있는 태겸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태블릿과 자료를 그의 책상 위에 정돈해 올렸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화면을 짚어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두 사람의 거리가 찰나에 훅 좁혀졌다.

지원이 허리를 숙이면서 그녀의 오른쪽 어깨가 태겸의 왼쪽 어깨와 거의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여기 보시는 것처럼,

처음 초안은 모델 중심 구성이 더 강했는데요.

가방 노출 타이밍을 앞당기되 과한 제품 강조는 제거했습니다.

수정하면서 가방이 시선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기억되도록 조정했습니다."

태겸은 본능적인 방어기제 때문에 반사적으로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바로 그 순간,

지원의 몸에서 피어오른 향이 공기를 타고 태겸의 코끝을 스쳤다.

지원은 태겸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열심히 패드를 짚으며 열정적인 프로의 모습으로 거침없이 설명을 이어갔고,

태겸의 신경은 온통 그 향에 사로잡혔다.

'이 향수…… 밸루아 제품이다.'

매일같이 접하는 자사 제품이었다.

은은하고 깔끔한 비누 향 라인 중 하나가 분명한데,

어딘가 달랐다.

베이스 노트부터 잔향까지 평소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느낌이 감돌았다.

순간 '우리 브랜드 제품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 미묘한 차이를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 이성을 앞섰다.

태겸은 저도 모르게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가까이 와보세요."

연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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