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세계 5대 명품 브랜드, 밸루아. 그 중심에는 외모와 능력까지 완벽한 윤태겸 이사가 있다. 그리고 밸루아의 광고를 맡아온 모먼트 기획1팀 최연소 차장 서지원. 어쩌면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처음부터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윤태겸의 안목. “완벽해 보이려고 노력해왔을 뿐이야. 나 원래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나 좀 안아줘.” 완벽한 듯 완벽하지 않은 클리셰 같은 로맨스. 《내가 좋아하는 클리셰》
View More창밖으로 5월 초의 싱그러운 햇살이 쏟아졌다.
완전히 더워지기 직전.
기분 좋은 바람이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초여름의 문턱이었다.
오피스텔 주차장.
서지원은 자신의 아담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과하지 않은 메이크업에 자연스럽게 묶어 올린 흑발.
베이지 톤 린넨 재킷과 화이트 셔츠, 깔끔하게 떨어지는 슬랙스 차림은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스물일곱.
광고기획사 ‘모먼트’ 광고기획 1팀의 최연소 차장.
그리고 현재, 세계 최상위 럭셔리 브랜드 ‘밸루아’의 캠페인을 전담하는 실무형 에이스였다.
오늘은 더욱 중요한 날이었다.
공들여 준비해 온 밸루아의 주력 라인인 가방 신제품 론칭 프로젝트의 최종 PT 날이었으니까.
지원은 조심스럽게 태블릿 PC와 PT 자료를 보조석에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빠진 게 있을까 다시 확인하고, 자료 순서를 한 번 더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녀는 가방에서 향수를 꺼냈다.
익숙한 듯 가볍게 손목과 목선에 뿌리자 은은한 향이 차 안 가득 퍼져 나갔다.
"좋아."
작게 중얼거리며 운전석에 바르게 앉은 순간, 자동차 대시보드 화면에 환한 불빛과 함께 전화가 떠올랐다.
[ 발신인 : 천재팀장 ]
지원은 화면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벌써 불안한데……."
블루투스를 연결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팀장님."
― 어~ 서 차장~ 우리 서 차장~ 출발했어?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모먼트 광고기획 1팀 팀장 박석민.
업계에서는 귀신같은 감각으로 유명한 천재였지만, 동시에 사람 속을 뒤집는 재주도 천재급인 사람이었다.
특히 저 목소리.
무언가 사고를 쳤거나 대형 폭탄을 떨어뜨리기 직전이면 꼭 저렇게 다정해졌다.
지원은 피로가 몰려오는 미간을 꾹 눌렀다.
"왜요."
― 응?
"왜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시는데요."
― 내가?
"네."
― 하하하하.
"혹시 또 뭐 잘못됐어요?"
― 아니~ 잘못되긴~ 그냥 작은 전달 사항 하나?
"그게 제일 무섭거든요."
― 어…… 밸루아 이사님 있잖아.
지원의 표정이 굳었다.
― 윤태겸 이사.
"네."
― 그분 이번에 아시아 본부 총괄 맡은 건 알지?
"네."
― 근데 오늘 회의부터 직접 참여하신다네?
"네?!"
지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깐만요. 그분이 직접요? 보통은 최종 브리핑 때나 본부장님들이 한번 들어오는 정도 아니에요?"
― 응, 그렇지.
"근데 왜요?"
― 나도 몰라.
"아니, 귀국한 지도 며칠 안 된 걸로 아는데요?"
― 맞아.
박석민은 남 일 다루듯 태평하게 웃었다.
― 원래 저 정도 위치면 초반 회의엔 잘 안 들어오거든?
근데 그 사람은 예전부터 그랬어. 내가 한 5년 전쯤 파리에서 밸루아 일할 때 몇 번 봤는데, 직접 회의 들어오고, 의견 내고, 질문하고…… 그땐 일 배우는 과정이라 그런가 했거든? 근데 지금 보니까 원래 성격이 그런 스타일인가 봐. 솔직히 생각보다 엄청 노력파인 것 같아."……그래서요?"
― 좀 까칠해.
"……."
― 근데 막돼먹은 사람은 아니야.
"……."
― 그리고 엄청 잘생겼어.
"그건 안 궁금하거든요."
― 진짜 비현실적으로 생겼다니까?
"안 궁금하다고요.
그리고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사진이랑 기사로 맨날 뜨는데 모를 리가 있나요."― 아무튼 긴장하지 마.
박석민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 밸루아 담당한 게 몇 년인데.
오늘도 하던 대로만 해. 너 정도면 충분해.순간 지원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팀장은 평소 장난투성이였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꼭 필요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 조심히 와.
늦지 말고. 그리고 원래도 예쁘지만 조금 더 예쁘게 하고 오고~"끊어요."
― 하하하하.
아, 맞다! 이사가 직접 회의 들어오면 그 밑은 거의 자동 출석이야. 오늘 사람 엄청 많을걸? 이따 봐~뚝.
통화가 종료됐다.
지원은 핸들을 붙잡은 채 허공을 노려봤다.
"아, 진짜…… 정보를 주려면 끝까지 주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녀는 곧 시동을 걸었다.
부드러운 엔진음이 차 안을 채웠다.
바쁜 실무자에게 재벌 3세의 사생활은 먼 세상 이야기였다.
밸루아를 오래 담당했지만 최고위 임원과 직접 마주칠 일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량 위로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도로 위 차량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합류한 지원은 핸들을 고쳐 잡았다.
"밸루아랑 몇 년째 일했는데 이사님 얼굴 한 번 본 적 없잖아."
잠시 침묵.
"소문으론 엄청 까칠하다던데……."
또 잠시 침묵.
"아, 몰라!"
지원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생각하지 말자!"
이내 그녀가 화면을 보며 음성 비서를 불렀다.
"하이픽스."
― 네.
"윤태겸 검색."
― 검색 결과를 불러옵니다.
지원은 피식 웃으며 화면을 껐다.
"어차피 회의 때나 잠깐 보는 거지.
자주 마주칠 일도 없을 텐데."사실 지원에게 윤태겸 이사는 일 잘하는 고객사 임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원의 차가 밸루아 본사를 향해 시원하게 달려갔다.
정문 앞에서 차를 발렛파킹에 맡기고 숨을 고른 뒤, 거대한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매 시즌 캠페인을 진행할 때마다 밥 먹듯 드나드는 곳이었지만, 이 정문을 통과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압도적인 럭셔리함과 웅장함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매번 와도 새삼스럽게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 최정상 자리를 지켜온 명품 하우스 특유의 묵직한 압박감과 범접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공존하는 공간.
프랑스의 유서 깊은 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밸루아'의 모태는, 놀랍게도 대한민국이었다.
조선 말기, 선견지명이 좋고 손재주가 뛰어난 동양 무역상이었던 태겸의 조상, 고(故) 윤재영 회장의 정교한 손길에서 태동한 브랜드.
가방으로 시작해 패션과 향수, 호텔&리조트 까지 전 세계를 사로잡으며 글로벌 명품 브랜드 톱 5 안에 반드시 드는 하이엔드 제국으로 성장한 것이 바로 지금의 밸루아였다.
그동안 지원의 남다른 감각을 눈여겨본 밸루아 측의 전폭적인 신뢰 덕에 모먼트는 꽤 오랫동안 협업을 이어올 수 있었다.
태겸 역시 프랑스 본사 시절 아시아 지사의 보고서를 검토하며 대행사 실무자인 '서지원'이라는 이름을 서류상으로 몇 번 보기는 했었다.
하지만 줄곧 유럽에 머물렀던 태겸이기에, 두 사람이 실제로 대면하는 것은 오늘이 완전히 처음이었다.
지원은 재킷 깃을 단정히 정리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최고층에 위치한 아시아 총괄 본사 회의실.
숨이 막힐 정도로 고급스럽고 모던한 대리석 인테리어 너머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사가 참석하는 회의이자 최종 브리핑.
정말 많은 인원이 회의실 안의 자리를 채웠다.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의 적막한 회의실 안으로 마침내 육중한 문이 열렸다.
윤태겸이 묵직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규칙적인 구두굽 소리와 함께 걸어 들어온 남자의 등장에 회의실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우와, 실제로 보니까 진짜 배우 같다.'
지원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그가 바로 파리 본부에서 실무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온 아시아 총괄 이사, 윤태겸이었다.
올해 서른둘.
거적대기를 걸쳐도 완벽할 것 같은 비율에 더 완벽한 얼굴,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수트 핏을 자랑하는 남자.
존재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하는 재벌계의 아이돌 그 자체였다.
대외적으로는 감정 기복이 전혀 없는 차갑고 냉철한 완벽주의자로 통했다.
그의 바로 뒤에는 서른 살의 수석비서실장 최도하가 차분하게 서류를 들고 수행했다.
태겸의 고모 아들이자 프랑스 유학을 함께하며 그곳에서부터 태겸을 보좌해 온 수재 중의 수재였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만큼 두 사람은 친구이자 형제 같은 깊은 신뢰로 묶여 있었고, 도하는 사회생활에 훨씬 능할뿐더러 실무에서도 굉장한 능력자였다.
회의실 상석 앞에 걸어간 태겸이 자리에 앉기 전,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멈춰 섰다.
차가우면서도 깊은 눈빛이 객석을 가볍게 훑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채웠다.
"안녕하세요.
이번 신상품 론칭부터 아시아 본부 총괄이사직을 맡게 된 윤태겸입니다."정중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실린 인사였다.
태겸은 손목시계를 살짝 내려다보더니 이내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일정이 지체되어 조금 늦었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브리핑 바로 시작하시죠."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태도로 태겸이 상석에 앉자, 회의실에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도하가 태겸의 귀에 대고 낮고 정확한 톤으로 최종 보고를 올렸다.
"이사님, 오늘 브리핑은 밸루아 핵심 가죽 라인인 신제품 가방 론칭 캠페인 건입니다.
보고 받으신 것처럼 이번에도 대행사 MOMENT에서 진행합니다."태겸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비즈니스 그 자체, 차갑고 빈틈이 없었다.
단상 앞에 선 지원이 곧바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조금 전 차 안에서 한숨을 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일할 때의 지원은 눈치 빠르고 감각적인 프로였다.
지원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브리핑의 시작을 알리며 청량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회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태겸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시선은 이미 앞 단상으로 향해 있었다.
단상 위로 서지원이 올라섰다.
그 순간부터 회의실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안녕하세요.
광고기획 1팀 서지원입니다.”담백한 인사.
군더더기 없는 호흡.
그리고 이어지는 첫 문장.
“이번 캠페인은 한 가지 방향으로만 가겠습니다.
‘보여주는 럭셔리’가 아니라, ‘느껴지는 럭셔리’입니다.”태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보통의 기획안이라면 이 단계에서 이미 수십 개의 키워드와 설명이 쏟아졌을 텐데, 지원의 설명은 이상하리만큼 절제되어 있었다.
필요한 말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비워냈다.
그 빈 공간이 오히려 설득력을 만들었다.
지원은 화면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과시, 로고, 화려함은 의도적으로 지웁니다.
대신 남는 건 ‘태도’입니다. 이 브랜드를 드는 사람의 분위기, 움직임, 그리고 공기.”설명은 짧았지만, 그림은 또렷했다.
강한 조명 대신 흐린 오전 햇빛, 정면을 응시하지 않는 모델의 시선, 과장된 포즈 대신 자연스럽게 흐르는 동작.
태겸은 어느 순간 발표 내용이 아니라 ‘사람’ 쪽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목소리의 높낮이, 끊는 타이밍, 슬라이드를 넘기는 속도.
그 모든 것이 계산된 것처럼 정확했지만, 동시에 억지스럽지 않았다.
듣는 사람의 리듬을 먼저 생각한 발표였다.
회의실 안의 다른 임원들이 여전히 숫자와 구조를 따지며 웅성거리는 동안, 태겸의 시선은 이미 그 소음을 지나 지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센스가 있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지원은 과하게 힘을 주지도, 청중을 의식해 흔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이 만든 그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 태도는 이상하리만큼 밸루아라는 브랜드와 맞닿아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가 다시 정리될 즈음, 발표는 짧게 마무리되었다.
“이상이 최종 방향입니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화면이 꺼졌다.
잠깐의 정적.
윤태겸.
회의 내내 굳어있던 그의 미간이 스르륵 풀리며 시선이 지원의 피티자료에 완벽하게 집중됐다.
브리핑이 끝나고 회의실 불이 켜지자, 태겸이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무뚝뚝하게 초안 서류를 툭 내려놓았다.
"거기 3페이지, 초기 시안 레이아웃 배치 밸런스가 좀 애매한데.
수정된 시안 직접 볼 수 있습니까?"말은 차가웠지만, 시선은 이미 ‘검토’가 아니라 ‘관심’에 가까워져 있었다.
태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석민 팀장이 지원의 옆구리를 찔렀고, 지원은 태블릿과 수정된 시안을 챙겨 태겸의 자리로 걸어갔다.
스캔들을 리스크로 여기며 철저히 타인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재벌 3세의 예민함이나, 그가 가진 압도적인 아우라 따위는 지원의 머릿속에 없었다.
매번 수없이 치러온 광고주 미팅이었고 늘 해오던 비즈니스였기에, 지원은 태겸의 앞이라고 해서 과하게 긴장하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그저 온통 이 자료를 어떻게 이해시킬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끼 부림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다.
태겸의 상석 옆에 다다라 멈춰 선 지원은, 앉아 있는 태겸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태블릿과 자료를 그의 책상 위에 정돈해 올렸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화면을 짚어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두 사람의 거리가 찰나에 훅 좁혀졌다.
지원이 허리를 숙이면서 그녀의 오른쪽 어깨가 태겸의 왼쪽 어깨와 거의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여기 보시는 것처럼, 처음 초안은 모델 중심 구성이 더 강했는데요.
가방 노출 타이밍을 앞당기되 과한 제품 강조는 제거했습니다. 수정하면서 가방이 시선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기억되도록 조정했습니다."태겸은 본능적인 방어기제 때문에 반사적으로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바로 그 순간, 지원의 몸에서 피어오른 향이 공기를 타고 태겸의 코끝을 스쳤다.
지원은 태겸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열심히 패드를 짚으며 열정적인 프로의 모습으로 거침없이 설명을 이어갔고, 태겸의 신경은 온통 그 향에 사로잡혔다.
'이 향수…… 밸루아 제품이다.'
매일같이 접하는 자사 제품이었다.
은은하고 깔끔한 비누 향 라인 중 하나가 분명한데, 어딘가 달랐다.
베이스 노트부터 잔향까지 평소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느낌이 감돌았다.
순간 '우리 브랜드 제품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 미묘한 차이를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 이성을 앞섰다.
태겸은 저도 모르게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가까이 와보세요."
순간, 팽팽하고 진지하던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얼음장 같은 총괄이사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한마디에, 회의실에 모인 밸루아 임원들과 대행사 직원들 전체가 동시에 고개를 들고 태겸을 바라보았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황당하고 의아한 표정들이었다.
지원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네?"
태겸은 그제야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하지만 재벌 3세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얼른 당황을 감추며 무심한 톤으로 말을 돌렸다.
"아, 회의실이 너무 넓어서 목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태겸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수석비서실장 도하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잠시 맛이 간 듯한 자신의 상사의 뒷모습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웬만한 미세한 소음도 귀신같이 잡아내던 사람이 저런 어설픈 변명을 대다니?
하지만 아무런 의심이 없는 지원은 진짜 마이크를 빼고 말해서 잘 안 들리나 싶었다.
나름대로 광고주를 배려한답시고 지원은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지원은 태겸 쪽으로 허리를 더 깊숙이 숙였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태겸의 왼쪽 귓가 쪽으로 방향을 가까이 틀고 속삭이듯 설명을 이어갔다.
지원의 무방비한 행동에는 어떤 흑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여기 3페이지 하단 보시면, 음영을 조절해서……."
귀로 직접 꽂히는 숨결과 더 짙어진 향에, 태겸은 본능적으로 한 번 더 흠칫 놀라며 몸을 반대 방향으로 뺐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공기가 일렁였고, 확실하고 선명하게 지원의 향수 냄새가 각인되었다.
밸루아가 자랑하는 시그니처 비누 향 제품, 'P라인 No.5'가 확실했다.
그걸 알아채자 태겸은 제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열변을 토하는 지원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밸루아 지사에 미팅 오니까 매너상 밸루아 향수를 뿌렸다?'
비즈니스적으로는 백 점짜리 외주업체 차장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분명 아는 향인데, 이 여자가 가진 고유의 체향, 살 온도가 섞이고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피어오르니 훨씬 더 달콤하고, 말랑하고, 심지어 청량하게까지 느껴진다는 게.
지극히 과학적인 현상인데도, 태겸에게는 새삼스럽게 흥미로웠다.
태겸은 저도 모르게 제 옆에 바짝 다가와 있는 여자의 가까운 옆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매끄러운 이마, 곧은 콧날, 조물조물 움직이는 입술.
전체적인 조합을 훑어내리던 태겸의 사고 회로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예쁜 편이네.'
그리고 생각과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본심을 툭 내뱉고 말했다.
"…재밌네."
콰르릉.
회의장에 다시 한번 정적이 가라앉았다.
시안 설명을 듣다 말고 뜬금없이 '재밌다'고 속삭이는 총괄이사의 모습에, 회의실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또 한 번 태겸에게 쏠렸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버전의 황당하고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지원이 설명을 멈추고 토끼 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이사님?"
그 뒤에서 수석비서실장 도하는 아예 대놓고 미간을 팍 구기며
'진짜 왜 저래?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태겸을 쏘아보고 있었다.회의실 전체의 시선이 집중되자 태겸은 밀려오는 당황스러움에 속으로 혀를 찼다.
얼른 표정을 굳히고 시선을 갈무리한 태겸이 수트를 거칠게 고쳐 잡으며 급하게 미팅을 마무리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브리핑은 이쯤 하면 될 것 같고, 더 필요한 의견이나 추가 자료가 있으면 모먼트 쪽으로 연락드려서 미팅 따로 잡겠습니다."거의 쫓기듯 회의를 끝내버리는 태겸의 태도에 지원은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프로답게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아, 네, 이사님.
알겠습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시면 일정 맞춰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지원은 깔끔하게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의 태블릿과 자료를 챙겨 담백하게 외주팀석의 제 자리로 돌아갔다.
제 자리로 돌아와 앉은 지원이 짐을 챙기기 시작하자, 박석민 팀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역시 서 차장, 아주 잘했어!
복덩이, 복덩이! 자, 가자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내 새끼들, 다들 가자!"박 팀장은 특유의 유쾌한 텐션으로 지원을 포함한 모먼트 팀원 4명을 살뜰히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주팀이 움직이자 회의실에 있던 다른 밸루아 임원들도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정작 상석에 앉은 태겸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회의가 공식적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부임한 무시무시한 총괄이사가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으니 임원들은 감히 먼저 나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다들 '왜 안 나가지?', '우린 언제 나갈 수 있는 거지?' 하며 서로 슬금슬금 눈치만 보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임원들의 속 타는 시선과 달리, 태겸은 지금 머릿속이 새하얗게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포커페이스 뒤에 숨겨진 그의 진짜 속마음은 처참했다.
'망했다…….'
첫날, 첫 공식 회의에서 여지없이 드러나 버린 제 허당미를 곱씹으며 태겸은 절망하고 있었다.
가까이 오라느니, 브리핑 중에 재밌다느니, 평생 안 하던 짓을 늘어놓은 제 꼴이 한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상황을 실시간으로 직관하던 수석비서실장 최도하가 결국 한숨을 삼키며 태겸의 뒤로 바짝 다가갔다.
도하는 마치 아주 중요한 대외비 보안 사항을 전달하는 비서처럼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태겸의 귀에 대고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완벽한 복화술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나가시죠.
다들 이사님 안 나가셔서 못 나가고 계시는데."도하의 예리한 일침에 태겸은 흠칫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얼른 특유의 냉철한 표정으로 페이스를 갈무리하며 묵직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의실 임원들을 향해 세상 매너 좋고 부드러운 꽃미소를 활짝 날렸다.
"아, 여러분.
제가 서류를 좀 더 검토하느라 지체되었군요. 먼저 나가시고 편하게 식사하러 가시면 됩니다. 오늘 회의 내용이 워낙 좋아서 한 번 더 꼼꼼히 보고 나가겠습니다."태겸의 완벽한 신사적인 태도와 눈부신 미소에 사람들은 일순 멍해졌다.
'응? 그래도 되나……? 아닌가?' 하며 잠시 주춤하며 눈치를 보던 임원들이, 이내 한 명씩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회의실의 밀도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마지막으로 외주인 모먼트 팀이 정중하게 목례를 하며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태겸은 의자에 앉아 시선을 서류에 고정하려 애썼지만, 지원이 그의 앞을 지나쳐 가는 찰나, 다시 한번 공기를 타고 그 향이 선명하게 태겸에게 파고들었다.
아는 향인데,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는 묘한 잔향.
태겸은 자신도 모르게 회의실 문을 나서는 지원의 단정한 뒷모습을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눈길로 따라가고 있었다.
모먼트 팀까지 전부 나가고 회의실에 오직 윤태겸과 최도하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문 앞까지 임원들을 매너 있게 배웅한 도하가 완전히 출입문을 닫아걸었다.
쾅, 쾅,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자마자 태겸은 꼿꼿하던 넓은 등짝을 의자 깊숙이 묻었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등으로 제 눈을 완전히 가려버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낮게 탄식했다.
"아……."
그것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섞인 탄식이었다.
의자에 파묻힌 태겸의 바로 옆자리로 걸어온 도하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도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절레절레 흔들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만 익숙한 어떤 몰캉거리는 정적 속에서, 회의실의 불이 은은하게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완벽주의자 인생 32년 만에 찾아온 최대의 위기였다.
정적을 깨고 도하가 먼저 입을 뗐다."식사나 하시죠? 아주 매운 걸 드셔야겠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게!"왠지 이를 앙다물고 도하가 말했다.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린 태겸이 도하를 올려다보며 눈을 흘겼다."아, 진짜 좀……."도하는 가볍게 그 시선을 무시하며 말을 받았다."삐진 애인처럼 째려보지 마시고 빨리 일어나세요, 배고픕니다."도하는 상사이자 사촌 형인 태겸의 어깨를 주무르며 빨리 일어나길 재촉했다.평소엔 귀신같은 감각을 자랑하는 총괄이사였지만, 지금만큼은 영락없이 풀 죽은 대형견 같았다.지하 주차장.태겸의 개인 차 운전석에 도하가 익숙하게 올라탔고, 태겸은 조용히 보조석 문을 열고 탑승했다.시동이 걸리고 매끄러운 세단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태겸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매운 거 뭐, 육개장이라도 드실래요?"도하가 차도로 진입하며 툭 던진 질문에, 태겸의 시선이 돌연 창밖의 한 지점에 딱 멈춰 섰다.'어……?'지원의 팀이었다.저 멀리 밸루아 빌딩 정문을 나서서 인도변을 따라 걷고 있는 모먼트 1팀의 무리가 태겸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태겸의 시선 끝에 서지원이 걸렸다.지원은 무어라 열심히 이야기하는 박석민 팀장의 말에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팀원들이 주위에서 그녀를 보며 "차장님 최고!"를 외치는 듯한 생생한 분위기가, 두꺼운 차창 너머로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그녀의 흑발 끝이 봄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을, 태겸은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아니, 이사님? 육개장 드실 거냐고요."답답해진 도하가 목소리를 높이자, 태겸은 깜짝 놀라 시선을 거두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퉁명스럽게 내뱉었다."어? 어…… 뭐, 네 마음대로 해.""아, 그럼 그냥 가요 진짜. 육개장집으로 갑니다?"도하가 확정 짓듯 말했지만, 태겸의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마침 앞서가던 모먼트 팀이 횡단보도 앞에 무리 지어 멈춰 섰고, 태겸의 차도 신호에 걸려 딱
창밖으로 5월 초의 싱그러운 햇살이 쏟아졌다.완전히 더워지기 직전.기분 좋은 바람이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초여름의 문턱이었다.오피스텔 주차장.서지원은 자신의 아담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과하지 않은 메이크업에 자연스럽게 묶어 올린 흑발.베이지 톤 린넨 재킷과 화이트 셔츠, 깔끔하게 떨어지는 슬랙스 차림은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스물일곱.광고기획사 ‘모먼트’ 광고기획 1팀의 최연소 차장.그리고 현재, 세계 최상위 럭셔리 브랜드 ‘밸루아’의 캠페인을 전담하는 실무형 에이스였다.오늘은 더욱 중요한 날이었다.공들여 준비해 온 밸루아의 주력 라인인 가방 신제품 론칭 프로젝트의 최종 PT 날이었으니까.지원은 조심스럽게 태블릿 PC와 PT 자료를 보조석에 내려놓았다.혹시라도 빠진 게 있을까 다시 확인하고, 자료 순서를 한 번 더 정리했다.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녀는 가방에서 향수를 꺼냈다.익숙한 듯 가볍게 손목과 목선에 뿌리자 은은한 향이 차 안 가득 퍼져 나갔다."좋아."작게 중얼거리며 운전석에 바르게 앉은 순간, 자동차 대시보드 화면에 환한 불빛과 함께 전화가 떠올랐다.[ 발신인 : 천재팀장 ]지원은 화면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벌써 불안한데……."블루투스를 연결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 팀장님."― 어~ 서 차장~ 우리 서 차장~ 출발했어?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모먼트 광고기획 1팀 팀장 박석민.업계에서는 귀신같은 감각으로 유명한 천재였지만, 동시에 사람 속을 뒤집는 재주도 천재급인 사람이었다.특히 저 목소리.무언가 사고를 쳤거나 대형 폭탄을 떨어뜨리기 직전이면 꼭 저렇게 다정해졌다.지원은 피로가 몰려오는 미간을 꾹 눌렀다."왜요."― 응?"왜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시는데요."― 내가?"네."― 하하하하."혹시 또 뭐 잘못됐어요?"― 아니~ 잘못되긴~ 그냥 작은 전달 사항 하나?"그게 제일 무섭거든요."― 어…… 밸루아 이사님 있잖아.지원의 표정이 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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