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피스텔에 도착한 것은 밤 아홉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사실 일부러 비를 맞으며 걸어온 이유가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꼭 하는 자신만의 작은 의식.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좋아하는 향을 맡으며 반신욕을 하는 것.
어차피 집으로 가려면 한 정거장 전에 있는 단골 바디샵에 들러야 했다.
지원은 매장 앞에 멈춰 섰다.
‘오늘은 시트러스 향으로 골라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역시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하나만 사려고 했건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양손 가득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아...
또 잔뜩 샀네.”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아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벗어던지듯 벗은 지원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욕조에 물을 틀어 놓았다.
새로 사 온 입욕제를 조심스럽게 뜯어 물속에 풀자 은은한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지원은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향수 상자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자 반짝이는 유리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원은 향수를 화장대 위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올려두었다.
조명 아래에서 유리병이 은은하게 빛났다.
“예쁘네.”
작게 중얼거린 지원은 자연스럽게 카드로 시선을 옮겼다.
짧은 문구가 적힌 작은 카드.
지원은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가방에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다이어리를 꺼냈다.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적고,
메모하고, 자료를 붙이고, 생각을 정리하는 공간.언제나 함께하는 다이어리였다.
지원은 맨 뒤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작은 스티커를 꺼내 카드를 정성스럽게 붙였다.
마치 마음에 드는 엽서를 보관하듯 모서리 하나 뜨지 않도록 꼼꼼하게 눌러 붙인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완벽.”
지원은 다시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얼마나 물이 찼는지 확인했다.
아직 조금 더 받아야 했다.
그사이 주방으로 향한 지원은 반신욕을 하며 먹을 떡볶이 밀키트를 꺼냈다.
“계란은 세 개 삶아야지.”
냄비에 계란을 넣으며 중얼거렸다.
“떡은 열 개만 넣고.
나머지는 다음에 떡라면 해 먹어야겠다.”어묵 봉지를 뜯고,
대파를 한 움큼 더 썰어 넣었다.“파는 많이 넣어야 맛있지~.”
혼잣말조차 신이 나 있었다.
보글보글.
냄비에서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원은 주방 앞 작은 창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비 때문에 살짝 차가워진 공기가 실내로 스며들었다.
상쾌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지원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내일은 주말이다.
그냥 주말이 아니었다.
쉬는 주말.
정말 아무 일정도 없는 주말.
지원은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생했다,
서지원.”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했다.
태겸이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내일은 푹 쉬십시오.”
“...”
태겸은 대꾸하지 않고 도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요일은 일하셔야 됩니다.
오전에 유럽 본부랑 영상 회의 있으니까요.”“알고 있어.”
“알고 계시겠죠.”
도하는 피식 웃었다.
태겸은 순간 경계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하지만 도하가 꺼낸 말은 예상과 달랐다.
“아,
맞다.”“...”
“지난번에 형이 추천한 위스키.”
“응.”
“생각보다 괜찮던데요.”
“...”
“형 취향 인정.”
태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걸 이제 말하냐.”
“바빴잖아요.”
“핑계는.”
“진짠데.”
둘 사이에 짧은 웃음이 흘렀다.
오랜 시간 곁에서 일해 온 사람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
잠시 후,
도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번 휴가 때는 어디 안 가십니까?”
“안 가.”
“또 일만 하시게?”
“집에서 쉴 거야.”
“그 말 믿는 사람 없어요.”
태겸은 피식 웃었다.
“운전이나 해.”
“넵.”
도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량은 어느새 태겸의 집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도하가 말했다.
“들어가서 푹 쉬십시오.”
“너도.”
태겸은 짧게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고,
차량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그 순간 태겸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다행이네.
최도하가 오늘은 별말 안 해서.’태겸은 작게 실소를 흘리며 집으로 올라갔다.
샤워를 마친 태겸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냈다.
목욕가운만 걸친 채 거실로 나온 그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칙.
가볍게 캔을 딴 뒤 소파에 몸을 기댔다.
통유리창 너머로 한강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불빛들이 강물 위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저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가만히 바라보게 됐다.
태겸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통유리 옆 창문을 살짝 열었다.
서늘한 밤공기와 함께 빗소리가 스며들었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태겸은 무심코 왼손을 밖으로 내밀었다.
톡.
톡.
톡.
차가운 빗방울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
왜 그랬는지 본인도 몰랐다.
그저 버스 정류장 아래 서 있던 서지원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우산 밖으로 손을 내민 채,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마치 비를 맞는 게 즐겁다는 사람처럼 웃고 있던 모습.태겸은 맥주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웃었다.
“훗.”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태겸은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한참 동안 빗방울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왼손에 멈췄다.
: )
지원은 무심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어?” 지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 벌써 오후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이사님.”“네.”“벌써 3시 다 되어 가는데 일정 없으세요?” 태겸은 물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답했다.“네, 없습니다.” 지원이 눈을 깜빡였다.“정말요?”“네.” 그 순간 지원의 어깨가 눈에 띄게 풀어졌다.“휴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는 모습에 태겸의 눈가가 살짝 휘었다.“차장님은요? 일정 없으세요?”“저요?” 지원은 활짝 웃었다.“네!” 그러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질끈 감았다.“저 진짜 몇 달 만에 쉬는 주말이에요~” 투덜거리듯 늘어진 목소리. 그 순간만큼은 기획사 AE도 아니고 차장도 아니었다. 딱 스물일곱 살의 서지원이었다.“몇 달이요?”“네.”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진짜예요.” 그러다 순간, 지원의 표정이 굳었다.“…어.” 뭔가 잘못 말했다는 얼굴이었다. 지원의 시선이 천천히 태겸에게 향했다.“…”“…” 짧은 정적. 지원이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아! 그게!” 태겸은 눈꺼풀과 턱을 조금 위로 올리며 ‘오호라’ 하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미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지원은 눈을 크게 뜨며 억울하다는 듯 황급히 말을 이었다.“밸루아 신상 론칭 때문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그… 제가 하는 일이 원래 어떤 프로젝트든 하나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는 좀… 그런 거라는 말인데……” 지원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내렸다. 태겸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입꼬리가 한쪽으로 슬쩍 올라갔다.“네.” 그리고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밸루아 때문에 몇 달 동안 주말도 없이 일했다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지원의 표정이 굳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도 찡그려졌다. 정확히 ‘아, 망했다’라고 얼굴에 써 있는 표정이었다. 태겸은 그런 지원을 바라보다가 결국 나직하게 불렀다.“차장님.”“네…”“표정이
윤태겸은 말없이 제육볶음을 조금 덜어 지원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해물파전까지 한 조각 옮겨 놓았다. 지원은 눈을 깜빡였다.“앗, 감사합니다.” 지원은 곧바로 제육볶음을 집어 들었다. 한 입. 그리고.‘…!’ 또다시 지원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확 구겨졌다. 방금 전 수제비를 먹었을 때와 똑같은 ‘진실의 미간’이었다. 지원은 열심히 씹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해물파전으로 손을 뻗었다. 바삭한 가장자리와 오징어가 함께 들어간 한 조각. 한 입 베어 문 순간, 이번에는 눈까지 감겼다. 지원은 입을 꾹 다문 채 몇 번 씹더니 작게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마치 너무 만족스러운 무언가를 만났을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반응 같았다.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 태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 좋으면 좋은 티가 났고, 맛있으면 맛있는 티가 났다.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맛있습니까?” 지원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큰일 났어요.” 태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뭐가요?” 지원은 제육볶음을 한 점 더 집으며 말했다.“저 여기 자꾸 생각날 것 같아요.” 순간, 지원의 그 말에 태겸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원에게 향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한 사람의 얼굴, 그 자체였다. 눈은 반쯤 접혀 있었고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태겸은 몇 초간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다행이네요. 마음에 들어서.” 담담한 목소리였다. 태겸도 앞접시에 덜어 놓은 음식을 한 번 집어 먹고는 이내 덧붙였다.“형한테 전해 두겠습니다.” 지원이 눈을 깜빡였다.“사장님이랑 진짜 친하신가 봐요.”“네. 학교 선배거든요.”“아.” 지원의 눈이 커졌다.“그럼 같이 파리에서 공부하신 거예요?”“네.”“우와.” 순간 감탄이 흘러나왔다. 태겸
주문을 마친 뒤 태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잠시 실례하겠습니다.”“아, 네.”태겸이 화장실 쪽으로 향하고, 지원은 혼자 창가 자리에 남았다.창밖 풍경은 여전히 좋았다.흐린 하늘 아래로 펼쳐진 초여름의 녹음. 과하게 꾸미지 않았는데도 묘하게 기분이 편안해지는 풍경이었다.지원은 무심코 휴대폰을 꺼냈다.찰칵.창밖 풍경도 찍고.찰칵.정겨운 메뉴판도 찍었다.‘여기 진짜 괜찮다.’나중에 친구들이랑 한 번 더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사진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마음에 듭니까?”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들자 어느새 태겸이 돌아와 있었다.“아, 네.”지원이 활짝 웃었다.“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좋아요.”태겸은 자리에 앉으며 손에 남은 물기를 가볍게 털었다.그 순간이었다.지원의 시선이 그의 소매 끝에 멈췄다.화사한 민트색 니트의 잔털 위로 작은 물방울 몇 개가 맺혀 있었다.“어?”지원이 무심코 말했다.태겸이 시선을 내렸다.“네?”지원은 별생각 없이 테이블 위의 냅킨을 한 장 뽑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이사님, 잠시만요.”“……”태겸이 반응하기도 전에 지원의 손이 그의 소매 끝으로 향했다.꾹. 꾹.냅킨이 니트 위의 물방울을 조심스럽게 흡수했다.“니트에 물 튀었어요.”지원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이런 거 자국 남으면 은근히 신경 쓰이잖아요.”태겸은 순간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던 오랜 습관이었다.누군가가 이렇게 거리낌 없이 자기 몸이나 옷에 손을 대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하지만 몸을 물리려던 움직임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지원에게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 정말 순수하게, 그냥 물이 묻어 있으니 닦아준 것뿐이었다.태겸은 결국 그대로 굳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물방울을 닦아주는 지원의 얼굴에 꽂혔다.잠시 후, 지원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됐네요.”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의자
검은 세단은 도심을 벗어나 조금 한적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지원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했던 방향과 달랐다.솔직히 말하면 호텔 레스토랑이나 회원제 다이닝 같은 곳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차는 번화가를 지나 조금 더 조용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태겸의 차가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지원은 창밖을 바라봤다.“…어?”예상과 전혀 달랐다.크지 않은 건물, 1층 전체를 사용하는 식당이었다.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나무와 돌이 적절히 섞인 인테리어가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무엇보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이 좋았다. 과하게 꾸미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예쁘다…”지원의 솔직한 감탄에 태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마음에 듭니까?”“네.”지원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했던 곳이랑 달라서 더 좋은 것 같아요.”태겸은 대답 대신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지원의 팔꿈치 아래를 받쳤다.“조심.”“아, 네. 감사합니다.”두 사람은 나란히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맑게 울렸다.딸랑.카운터 쪽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순간 환하게 웃는 얼굴.“오랜만이네요, 이사님.”태겸이 피식 웃었다.“형. 또.”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이사님을 이사님이라 부르는데 뭐가.”“듣기 싫습니다.”“그럼 자주 와.”지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처음 보는 태겸의 표정이었다. 딱딱한 비즈니스 미소가 아니라 정말 편안한 얼굴.그 모습을 보며 지원도 괜히 따라 웃었다.그때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향했다.“안녕하세요.”지원이 먼저 꾸벅 인사했다.“서지원이라고 합니다.”남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시원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부드러운 인상인데 이상하게 눈에 띄는 분위기가 있었다.“구자언입니다. 여기 주인입니다.”“아, 네 안녕하세요~.”지원은 순
지원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게 말려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그때, 태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갑시다.”“아…….”“배고픕니다.”그 덤덤하고도 인간적인 한마디에, 지원은 멍하던 표정을 갈무리했다.그리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보였다.“아, 배고프셨구나.”“네.”“그럼 빨리 가야겠네요.”태겸은 별말 없이 지원의 보폭을 맞췄다.지원이 조금 느려지면 같이 속도를 줄였고, 지원의 발목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팔꿈치를 받쳐 준 손에 은근한 힘이 더해졌다.강하게 잡지도, 억지로 끌지도 않았다.그저 그녀가 절대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든든하게.VIP룸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에게 멀찍이 대기하고 있던 지점장과 백화점 직원들이 서둘러 다가왔다.태겸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담백하게 고개를 숙였다.“가보겠습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저도 너무 감사했습니다.”지원이 옆에서 함께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지점장과 직원들이 일제히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안녕히 가십시오, 이사님.”인사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일반 고객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VIP 전용 통로로 이동했다.두 사람만을 태운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사방이 고요해지며 다시금 밀도 높은 정적이 찾아왔다.태겸은 엘리베이터에 탄 후에도 여전히 지원의 팔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다.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뭉근한 감각이 전해져 오자, 지원은 귓가가 조금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괜히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정작 태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덤덤하고 고요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층수 표시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두 사람의 숨소리만 작게 울리는 밀폐된 공간.그 안을 감도는 묘한 공기 속에서,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을 향해 부드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태겸의 차량이 주차된 VIP 전용 구역으로 향했다.넓고 한적한 주차 공
태겸의 낮은 중얼거림이 VIP룸 안에 아주 짧게 떨어졌다.“환장하겠네.”“네?”“아, 아닙니다. 아무것도.”분명 ‘환장하겠다’고 하신 것 같은데……?바쁘실 텐데 나 때문에 괜히 시간을 뺏기고 계시는 건가 싶어, 지원은 혼자 생각하며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그 순간,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똑똑. 이사님, 지점장입니다. 의무실에서 오셨습니다.”“들어오세요.”태겸의 대답과 함께 백화점 의료 스태프가 들어왔다.중년의 간호사가 지원 쪽으로 다가왔다.“어디 다치셨어요?”“아, 발목이 좀…… 접질린 것 같아요.”지원이 말하자, 간호사가 무릎 앞에 쪼그려 앉아 발목을 살폈다.“많이 붓진 않았네요. 다행히 심하진 않아요.”그 말에 지원이 팽팽하게 굳어 있던 어깨를 살짝 내렸다.“휴…… 다행이다.”그 순간이었다.지원의 발목이 살짝 들려 있는 상태에서, 태겸의 시선이 그쪽으로 굳건히 고정됐다.아까부터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은, 무거울 정도로 깊은 시선이었다.간호사가 발목을 가볍게 돌려보는 순간,“아.”지원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아프죠?”“아, 네…… 조금요.”태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변화는 거의 표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간호사는 테이핑을 준비하며 말했다.“다행히 심한 염좌는 아닌데, 당분간 무리하면 안 돼요. 오래 걷지 마시고요.”“네네. 알겠습니다.”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이 정도면 뭐…… 그냥 좀 불편한 정도지.’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아까부터 태겸의 존재감이 너무 선명해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태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분위기 자체가 VIP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간호사가 테이핑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일단 한번 걸어보실게요.”지원이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한 발.테이핑이 단단하게 받쳐주니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욱신거리는 느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