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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태겸. (2)

last update Veröffentlichungsdatum: 10.10.2026 13:08:44

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부딪쳤던 순간.

넘어질 뻔한 서지원을 붙잡았던 순간.

그녀의 허리를 받쳐 주었던 자신의 손.

태겸은 천천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

신기하게도 그 감각이 아직도 선명했다.

원래 여자 허리는 그렇게 가는 건가?

무게도 생각보다 너무 가볍던데.

잘 안 챙겨 먹나?

일이 바빠서 그런가?

아니면 원래—

그 순간,

태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치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그는 손바닥 위에 떨어지던 빗방울을 툭툭 털어내고는,

거의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확 닫아버렸다.

쾅!

창문이 닫히자 거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태겸은 젖은 손을 목욕가운에 대충 문질러 닦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무슨 그런 생각을 해?

미쳤어?

어이가 없네,

진짜.”

태겸은 한 손으로 짚은 이마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고개를 들자 통유리창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창문 속 자신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허,

너.

너 말이야.

참나,

미쳤냐고.

야,

아주 요즘 편한가 봐?

어?

남의 허리가 가늘든 말든,

밥을 굶든 말든 네가 왜 신경을 써?

네가 무슨 보건복지부 장관이야?

으이그,

인간아!

정신 차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지 태겸은 숨을 헉 몰아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리창을 향해 카운터펀치를 날리듯 손가락질했다.

“안 되겠다.

일이 부족해서 뇌가 딴짓을 하네.

일을 더 잡아드려?

밤샘 확정이야?

차암나,

에라이!”

펄럭!

목욕가운 자락을 요란하게 털어낸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의 한심한 잡생각을 완벽하게 지워버리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서재를 향해 쾅쾅 걸어 들어갔다.

지금 당장 밤을 새워 일이라도 끝장낼 사람처럼.

쾅.

서재 문이 닫혔다.

태겸은 책상 앞으로 걸어가 노트북을 열었다.

그래.

일.

일을 해야지.

내일은 쉰다지만 일요일에는 유럽 본부와 영상 회의도 있다.

검토해야 할 자료도 많고,

밀린 보고도 있었다.

태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메일함을 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보고서를 클릭했다.

“…….”

몇 줄 읽지도 못했다.

“하…….”

태겸은 아래턱을 살짝 내민 채 천장을 노려봤다.

길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내렸다.

집중.

집중하자.

그 순간,

시야 한쪽에 익숙한 장식장이 들어왔다.

향수 라인 미니어처가 전시된 유리 장식장.

태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P라인 No.5]

“…….”

괜히 인상이 구겨졌다.

저거,

다 저거 때문이다.

원래도 제일 좋아하는 라인이었다.

비누 향,

머스크 향,

깔끔하고 단정한 향.

딱 그 정도였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서지원의 체향과 체온에 닿으면 무섭도록 제 취향이 되어버리는,

그야말로 마약 같은 향수였다.

이 제품은 향수 라인 중에서도 매출 10위 안에 들 만큼 사용자가 많았고,

특히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제품이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이 향수를 뿌린 것을 맡아봤다.

그런데 서지원에게서 나는,

이 향수와 섞인 그 잔향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는 게 문제다.

그도 그럴 게.

서지원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 향수를 사용했다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오랜 시간 체향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마치 원래부터 그 사람 향이었던 것처럼.

“…….”

잠시 생각하던 태겸의 표정이 점점 구겨졌다.

그리고 결국 폭발했다.

“아니,

이 사람은 이걸 왜 그렇게 일찍부터 오래 써 가지고,

어?”

태겸은 장식장을 향해 손짓까지 해 가며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막 살냄새처럼 느껴지고,

더 달콤해지고,

더 익숙해지고,

더—”

태겸은 입을 다물었다.

“…….”

정적.

그 순간,

장식장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밤중.

목욕가운 차림.

향수 장식장 붙잡고 화내는 남자.

“…….”

태겸은 그대로 굳었다.

“……뭐 하고 있냐.”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순간 현실이 몰려왔다.

태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 사이로 손을 쑤셔 넣어 거칠게 헝클었다.

그리고.

“아...

진짜.”

낮게 내뱉은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태겸은 결국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덮고 서재를 나온 그는 머리를 말린 뒤 침실로 들어갔다.

시간은 아직 그리 늦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다시 일을 하거나 책을 펼쳤을 시간.

하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넓은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한쪽 팔을 머리 뒤로 받친 채 천장을 바라봤다.

고요했다.

익숙한 밤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태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실 창문 너머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태겸은 한참 동안 그 풍경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살짝 열었다.

스르륵.

순간 서늘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촉촉한 빗냄새,

차갑지만 기분 좋은 밤공기,

선명하게 들려오는 빗소리.

“…….”

태겸은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었다.

이상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비 냄새도,

밤공기도,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그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시끄럽던 머릿속이 조금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태겸은 창가 옆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비가 내리는 밤을 바라봤다.

후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고.

몇 번을 반복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문득,

태겸의 입가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이런 느낌인가.”

서늘한 공기,

잔잔한 빗소리.

생각보다 괜찮았다.

태겸은 작게 기지개를 켰다.

“으으…….”

그대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창문은 닫지 않았다.

빗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채로,

태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윤태겸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들었다.

귀국 후 숨 가쁘게 이어지던 일정도,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생각들도 잠시 내려놓은 채.

내일은 오랜만에 아무 일정도 없는 주말이었다.

윤태겸에게도.

서지원에게도.

연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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