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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약속이니까. (2)

Author: 연이수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0 13:08:19

순간 태겸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등을 등받이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도하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이고 통화 소리에 집중했다.

“아,

차장님.

네,

저 최도하입니다.”

도하가 웃으며 인사했다.

“하하,

오랜만에 연락드리죠?”

― 그러게요.

안녕하세요.

“퇴근하셨어요?”

― 아니요.

이제 막 정리하려고 했어요.

태겸의 귀가 저절로 열렸다.

창밖을 보고는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조수석을 향해 있었다.

“다름 아니라 이사님께서 오늘 말씀하셨던 수정안 관련해서 추가 미팅을 원하셔서요.”

― 아,

네~

“내일 오후 다섯 시 정도 괜찮으실까요?”

― 아,

잠시만요.

내일 다섯 시… 어,

네.

가능합니다.

“다행이네요.

갑자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내일 출발 전에 연락 주세요,

실장님.

몇 마디 더 대화가 오갔다.

도하는 끝까지 부드럽고 매너 있는 말투로 통화를 이어갔다.

“하하,

그럼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 네,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됐다.

뚝.

차 안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하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일정 잡았습니다,

이사님.”

“네.”

짧은 대답.

태겸은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한쪽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뭐야.

서지원 차장 직통 번호로 전화한 거야?’

순간 의외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곧바로 ‘뭐,

업무상 알 수도 있지’라는 상식적인 생각이 스쳤다.

생각해보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외주 책임자와 주최측 담당자가 연락처를 아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수정안 자료는 미리 받아놔요.”

태겸이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네?”

“내일 가서 보면 시간 오래 걸리잖아.”

“아.”

“미리 검토해야지.”

지극히 업무적인 이유였다.

도하가 잠시 태겸을 바라봤다.

태겸은 이미 다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조각처럼 완벽한 옆얼굴.

마치 방금 전까지 남의 통화 내용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도하가 짧게 대답했다.

검은 세단은 서울의 야경 사이를 부드럽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같은 시각,

대행사 ‘모먼트’의 사무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봬요,

차장님.”

점심 이후 시작된 격무가 끝나고 마침내 공식적인 퇴근 시간이 되었다.

서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겉옷을 챙겨 들었다.

연일 이어진 야근으로 어깨가 짓눌린 듯 무거웠지만,

이제 집에 가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밸루아의 최도하 실장이었다.

“아,

차장님.

네,

저 최도하입니다.”

도하의 매너 있는 목소리로 전달된 내용은 뜻밖이었다.

아시아 총괄이사로 새로 부임한 윤태겸이 오늘 아침에 보았던 수정안에 대해 추가 미팅을 원한다는 것.

그것도 바로 내일 오후 다섯 시에 모먼트로 직접 방문하겠다는 통보였다.

“네,

가능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지원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 버스는 이미 멀어졌다.

지원은 들고 있던 겉옷을 다시 의자 등받이 위에 툭 올려놓고,

닫았던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팀의 막내 규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어? 차장님,

안 가시고 갑자기 다시 일하시는 거예요?”

규리의 목소리에 가방을 메던 다른 팀원들의 시선도 일제히 지원에게 쏠렸다.

지원이 노트북 화면을 띄우며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밸루아 측에서 연락이 와서요.

내일 오후 다섯 시에 오늘 보셨던 수정안 자료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들어보고 싶으시다고 하시네요.

자료 좀 정리해 두고 가려고요.”

그 말에 팀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가방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오? 그래요? 같이 해요,

차장님.”

지원이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어,

아니야,

아니야! 진짜 아니야.

나 오늘 되게 빨리하고 되게 빨리 집에 갈 거야.”

“그래도 양이 좀 많지 않아요?”

“어차피 다 내 노트북 안에 있는 자료들이라서 준비하는 데 시간도 얼마 안 걸려.

오히려 다 같이 있으면 또 우리끼리 쓸데없는 농담 하느라고 시간이 더 걸려.”

지원은 장난스레 눈총을 주며 아직도 쭈뼛거리는 팀원들의 등을 한 명씩 떠밀었다.

“빨리 하고 일찍 들어갈 테니까 먼저들 가시고 내일 만나요.

어서 가,

어서.”

“……그럼 저희 진짜 먼저 갑니다? 차장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알았어,

내일 봐.”

확인사살까지 하며 팀원들을 완전히 내보낸 뒤에야 사무실에 고요가 찾아왔다.

홀로 남은 지원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아까 아침에 있었던 밸루아에서의 회의 내용을 차근차근 되짚으며 자료 정리를 시작했다.

밸루아 신제품 론칭 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주에 한 번씩은 밤도 새우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회의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하며 지냈다.

최종 브리핑을 하는 오늘 아침에는 생각지도 못하게 윤태겸 이사가 본부로 돌아와 직접 작업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슴 한구석이 살짝 긴장되기도 했다.

쌓인 피로감이 몰려오는 하루였다.

사각거리는 마우스 클릭 소리와 키보드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이 넓은 사무실을 채웠다.

두 시간 뒤.

지원은 마침내 완벽하게 정돈된 내일 미팅용 수정안 파일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사방이 컴컴한 밤이었다.

의자 위에 걸쳐 두었던 겉옷을 챙겨 입은 지원이 마침내 사무실 문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며 아직 야근으로 불이 켜진 다른 부서 직원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어,

잘 가요.

고생했어요,

서 차장.”

따뜻한 인사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지원은 모먼트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넓은 지하 주차장 한구석에 주차된 제 차 앞에 서자 비로소 팽팽했던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운전석 문을 열고 타서 문을 닫았다.

지원은 안전벨트를 부드럽게 당겨 매고,

핸들 위에 두 손을 턱 얹었다.

“아,

이제 집에 가자.”

지원이 스스로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며 시동을 걸었다.

지원의 자동차 엔진음과 함께 차체의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주차장 벽면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윽고 지원의 자가용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모먼트 회사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지원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시각.

태겸의 차 안.

윤태겸은 뒷좌석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옆좌석에는 모먼트 팀에게 전달할 쇼핑백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창밖 야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가장 위에 놓인 쇼핑백 하나를 내려다봤다.

[서지원]

작게 적힌 이름표.

태겸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

이상했다.

굳이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

최도하에게 맡겨도 됐고,

퀵으로 보내도 됐다.

그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도.

왜 직접 가겠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어울리는 향을 쓰는 사람이 반가웠다.

사람의 체온과 체취에 따라 향은 달라진다.

별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 향이 참 좋았었다.

그래서 그런 것 같았다.

제 브랜드를 사용하는 고객이 그 제품과 너무도 잘 어울려서.

반가운 마음.

고마운 마음.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준비하면서 이상하게 기분도 좋았다.

상자와 리본을 고르고,

카드까지 직접 써서 준비했다.

생각해 보니 누군가를 위해 직접 선물을 준비해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인 것 같기도 했다.

태겸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시트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쳤다.

눈을 감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선물이라…….”

피식.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검은 세단은 밤거리 속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갔다.

연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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