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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약속이니까. (1)

Penulis: 연이수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10 13:08:13

그날 오후.

점심 식사 이후의 윤태겸은 다시 평소의 윤태겸이었다.

밀려 있던 결재 서류를 처리하고,

아시아 본부 관련 보고를 받았으며,

예정된 화상 회의까지 빈틈없이 소화했다.

몇 시간 전 식당에서 허둥지둥 유턴을 시키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업무 중인 그는 냉정했고,

정확했으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창밖으로 노을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퇴근 시간.

태겸은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마친 뒤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재킷을 걸치고 휴대폰을 챙긴 그는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문 앞 데스크에 있던 비서 두 명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사님.”

태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 역시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를 걸어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도하는 태블릿을 확인하며 내일 일정을 브리핑했다.

“내일 오전 아홉 시 경영 회의입니다.”

“어.”

“열한 시 아시아 본부 실무 보고.”

“어.”

“오후 두 시 해외 지사 화상 회의 예정입니다.”

“알겠어.”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1층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대로 사옥 정문으로 향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저녁,

정문 앞에는 검은 세단 한 대가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기사는 이미 차 밖에 나와 있었다.

태겸이 다가오자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뒷좌석 문을 열었다.

도하가 마지막으로 태블릿을 확인했다.

“내일 회의 자료는 출근 전에 전달드리겠습니다.”

“그래.”

태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고.”

“들어가십시오.”

도하가 목례했다.

태겸은 차에 오르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

무언가 생각난 듯한 목소리였다.

도하가 시선을 들었다.

“네?”

태겸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열린 차 문 위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그 모먼트 팀 향수는.”

“아.”

도하가 바로 알아들었다.

“취향 취합은 끝났습니다.

매장에서 구매해서 내일 퀵으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그래요?”

태겸이 천천히 되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는 무언가를 곱씹듯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제가 직접 준비하죠.”

도하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직접이요?”

“네.”

태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제가 한 약속이니까요.”

담담한 목소리.

그럴듯한 이유였다.

“어차피 퇴근길이니 잠깐 들르면 됩니다.”

태겸은 자연스럽게 말을 마무리했다.

“매장으로 가시죠.”

기사에게 내린 짧은 지시였다.

도하는 조용히 태겸을 바라봤다.

태겸은 이미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하루 동안 가장 빠른 결정이었다.

“뭐 해요,

최 실장.

같이 가야죠.”

태겸의 말에 도하가 몇 초간 그를 바라봤다.

“……지금요?”

“왜.”

“아닙니다.”

도하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후.

밸루아 플래그십 스토어.

매장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태겸은 특유의 비즈니스용 꽃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십니다.”

짧고 부드러운 인사.

그 한마디에 직원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도하는 익숙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태블릿을 켰다.

“취합 자료입니다.”

태겸이 자연스럽게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화면에는 모먼트 팀 전원의 이름과 선호 향 계열이 정리되어 있었다.

플로럴,

머스크,

시트러스,

우디.

태겸은 진지한 얼굴로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브랜드 총괄답게 질문도 꼼꼼했다.

“이분은 왜 이쪽으로 추천했죠?”

“기존 사용 제품 계열이 비슷합니다.”

“음.”

“이분은요?”

“시향 이력 확인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넘기던 태겸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멈췄다.

서지원

• 현재 사용 제품: P라인 No.5

• 선호 향 계열: 플로럴, 머스크

• 비고: 기존 제품 재구매 예정

“……”

태겸의 시선이 몇 초간 화면 위에 머물렀다.

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재고는?”

“충분합니다.”

“최근 생산분으로 준비해 주세요.”

직원이 바로 답했다.

“네,

이사님.”

태겸은 괜히 한 번 더 화면을 내려다봤다.

P라인 No.5.

고등학교 때부터 십 년 넘게 같은 향수라니,

생각보다 오래였다.

태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사님.”

도하가 옆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물 상자는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태겸은 진열된 패키지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밸루아의 기본 기프트 박스,

시즌 한정 패키지,

VIP 전용 패키지.

잠시 생각하던 태겸이 몇 가지를 직접 골랐다.

“이분은 이걸로.”

“네.”

“이분은 리본 색상 바꾸고.”

“네.”

“이건 향 계열이 가벼우니까 밝은 색으로 가죠.”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겸은 예상보다 훨씬 꼼꼼했다.

향수만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상자 색상,

포장 방식,

리본 색상,

카드 디자인까지 하나하나 직접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기프트 카드가 준비되자 직원이 물었다.

“문구는 어떻게 넣어드릴까요?”

태겸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제가 쓰죠.”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은 만년필 하나가 꺼내졌다.

도하가 태블릿을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태겸은 아무 말 없이 카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사각.

만년필 끝이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윤태겸-

정갈하고 힘 있는 필체.

그는 같은 문구를 여섯 장 모두 직접 써 내려갔다.

직원들도 조용히 숨을 죽였다.

마지막 카드까지 완성되자 태겸이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됐습니다.”

포장도 곧 마무리되었다.

도하가 직원에게 말했다.

“내일 오전에 바로 퀵으로 보내주세요.”

“네,

실장님.”

그때였다.

“아.”

태겸이 문득 입을 열었다.

도하와 직원의 시선이 동시에 향했다.

“아니요.”

“네?”

“지금 포장해 주세요.”

태겸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내일 미팅할 일이 있어서 모먼트로 갈 겁니다.”

순간 도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직접 전달하시게요?”

“네.”

태겸은 아무렇지 않았다.

“제가 한 약속이니까.”

잠시 뒤,

포장이 끝난 쇼핑백들이 준비되었다.

두 사람은 그것들을 들고 매장을 나섰다.

차에 오른 뒤,

도하가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이사님.”

“왜.”

“배달을 가시는 겁니까,

미팅을 하시는 겁니까?”

“…….”

“미팅 일정이 없는데 미팅을 간다고 하시니까 조금 당황스럽네요.”

태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잡아줘.

미팅.”

“네?”

“내일 두 시 화상 회의 있잖아.”

“네.”

“네 시면 끝날 거 아니야.”

태겸이 계산하듯 말했다.

“모먼트까지 사십 분 정도 걸리려나.”

잠시 생각하던 그가 덧붙였다.

“다섯 시쯤 보자고 해.”

“…….”

“여섯 시 퇴근일 거 아니야.

너무 늦진 않겠지.”

도하는 몇 초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용은?”

“뭘로 잡을까요?”

태겸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때 말했던 수정안 있잖아.”

“아.”

“그거 검토한다고 해.”

“네.

알겠습니다.”

도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신호음이 이어졌다.

차 안은 조용했다.

태겸은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때.

―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최 실장님?

연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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