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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5화

Author: 십일
정은이 처음으로 ‘재석 씨’가 아닌 호칭을 썼다.

“자기야.”

단 한 마디.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은 크고도 깊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은의 말.

“내 마음마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정말 기뻐요.”

정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데 우린 이제 연인이잖아요. 일상을 함께 나누고, 자주 마주하는 사이니까... 서로한테 솔직해야 해요.”

“달래거나 감추거나, 그런 거 없이... 그래야 오래, 편하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재석은 단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정은은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연애가 처음인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맑았다.

“오히려 6년을 만난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더 잘 알아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작은 틈이 생기면 그게 나중에 얼마나 큰 벽이 되는지요.”

“정은아...”

재석이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절대 그런 벽을 만들지 않을 거야. 나는...”

정은이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그래서 말인데... 우린, 지금만 보는 게 좋겠어요. 지금 이 순간을 아끼고 즐기면서, 그렇게 가보는 거... 괜찮죠?”

그녀는 정말로 과거의 소문에 휘둘리지 않았다.

세영이라는 이름 앞에서도 흔들림 없었다.

질투도, 추궁도 없었다.

‘정말로, 하나도 신경 안 쓰는구나. 그게... 오히려 더 벅차.’

재석은 아직도 불완전한 사랑을 배우고 있었다.

정은은 여유롭게 발을 빼는 법을 알았지만, 재석의 마음은 계속해서 더해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 감정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싶은데... 정은은 오히려 내려놓고 있구나.’

정은은 그 눈빛의 무게를 읽었다.

하지만 말 대신 작게 웃으며, 조용히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재석의 입술에 가볍게... 아주 짧게 입을 맞췄다.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재석의 눈썹 사이에 가득 맺혀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어졌다.

‘괜찮아요. 나는 자기를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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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34화

    재석의 탄탄한 가슴팍은 그 자체로 열기가 느껴질 만큼 뜨거웠고, 정은의 얇은 옷 한 겹 사이로 고스란히 체온이 전해졌다.남자의 숨결은 뜨겁고, 피부에 닿는 공기는 축축했다.‘더워 죽겠는데 왜 안 놔...’정은은 약간 불편했다.재석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러고 나서 이렇게.”정은은 작게 혀를 찼다.“진짜, 눈치 없이 들이대네요?”“내 여자 친구 안아주는 건데, 눈치 볼 게 뭐 있어?”“그러면 내 부모님 앞에서도 해보시죠? 어때, 한번 해볼래요?”재석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그건 아직 무리.”정은은 더운 날씨에 땀이 배기 시작했고, 재석의 품은 너무도 꽉 조여와 숨이 찰 지경이었다.그런데도 그는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자기야... 조금만 풀어줄래요?”“응?”“뭔가... 자꾸 눌려서 불편하거든요.”재석은 전기라도 통한 듯 화들짝 손을 떼고, 급히 옆에 걸려 있던 가운을 집어 몸에 둘렀다.그리고 매듭을 매면서도 등 돌린 채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진정해, 조재석. 정신 차려.’몇 번 심호흡을 한 후, 그는 다시 정은 쪽을 바라보았다.“미안, 나 그게...”“우리 아빠가 만둣국 했어요. 갖다주라고 하셨거든요.”정은은 그의 말을 끊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실 쪽으로 걸어 나갔다.“만둣국?”재석도 뒤따라 나왔다.“자, 여기요.”정은은 식탁 옆에 멈춰 서서 턱으로 그릇을 가리켰다.“우리 아빠가 만든 만두는 좀 특별해요. 시판용이랑은 달라요. 속엔 고기랑 야채만 들어가 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직접 빚은 거예요. 한번 먹어볼래요?”“좋지.”재석은 주방에서 젓가락을 챙겨 와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정은은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어때요? 맛은요?”“음, 맛있어. 생강이 들어가서 걱정했는데, 은은하게 잘 어울리네. 진짜 맛있다.”재석은 한 그릇을 싹 비웠고, 국물까지 거의 남기지 않았다.“그럼 나 먼저 갈게요.”정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재석이 급히 불렀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33화

    “잘 자요, 정은 씨.”“안녕히 가세요, 교수님.”소진헌이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본 광경은, 두 사람이 나누는 다정한 작별 인사였다.재석의 등 뒤로 집 문이 이미 열려 있었지만 불은 꺼져 있었다.이내 재석이 소진헌을 바라봤다.“아버님도 편히 주무세요.”“그래, 조 교수도 얼른 들어가 쉬어.”소진헌은 급히 대답하며 웃자, 재석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모든 게 더없이 평온하고 자연스러웠다.시선을 거둔 소진헌은 고개를 돌려 정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조 교수 참 괜찮은 사람이야. 예의도 바르고, 배려도 있고, 품위가 있어.”“그래요?”정은의 입꼬리는 분명히 올라갔지만, 말투는 너무도 단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아, 들키면 안 돼. 지금은 아닌 척, 아무렇지 않은 척.’“그럼 아니야?!”소진헌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내가 아무나 형제처럼 생각하는 줄 알아? 아무나 내 눈에 드는 줄 아냐고!” “근데 아빠, 조재석은 나보다 겨우 몇 살 많잖아요. 굳이 ‘어른’ 소릴 들어야 해요?”부녀는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소진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조재석이라고 부른 거야, 방금? 그런 말이 어딨어... 나이로 따지는 게 아니야, 서열은. 게다가 교수님은 네 스승이기도 해. 그 정도면 당연히 어른이지.”‘남자 친구면 안 돼?’정은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이미숙이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왜 이렇게 늦었어요?”소진헌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었다.“조 교수랑 이런저런 얘기 좀 나누다 보니까.”“둘이 진짜 잘 맞는군요?”소진헌은 자랑스럽게 말했다.“아까도 정은이한테 말했어. 조 교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뭐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이미숙은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소진헌을 바라봤다.그 눈빛은... 뭐랄까... 복잡하고, 깊으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동정심이 섞여 있었다.‘당신은 아직 모르지...’“아 맞다, 바둑판은 치우지 마. 그냥 거기 둬. 내일도 조 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32화

    “네, 마트에서 세제 사면 끼워주는 거였어요. 사이즈까지는 안 보고 그냥 썼는데, 어찌저찌 쓸 만한 것 같아요.” 정은은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괜찮겠지... 설마 거기서 더 파고들겠어?’ “자, 조 교수.” 소진헌이 손을 부르르 떨며 웃었다. “한 판 두실까?” “좋습니다.” 재석은 자연스럽게 수긍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국은 밤 8시 반부터 시작됐다. 9시, 10시, 그리고 11시. 정은은 옆자리에서 조용히 논문을 읽다가 벌써 몇 편째 넘겼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말없이 수싸움 중.이미숙은 처음에 십여분 정도 구경하다가 ‘길어지겠다’ 싶어 노트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설 6000자쯤 쓰고 다시 나왔을 때, 거실 풍경은 딱 그 상태 그대로였다. ‘이 사람들... 화장실도 안 갔나?’ 하지만 이미숙이 더 놀란 건... 정은이었다. “정은아, 이 시간까지 왜 거기 앉아 있어? 예전 같으면 체스든 바둑이든 3분만 지나면 바로 방에 들어갔잖아?” ‘역시 엄마는 나를 너무 잘 안다...’ 사실 예전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이춘재 집에서 재석이랑 두던 날엔 아예 중간에 올라가 낮잠까지 자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그땐 그냥 이웃, 지금은... 내 남자 친구.’ 정은은 시선을 바둑판에 둔 채 말했다. “요즘 들어 장기가 은근히 재밌어요.” “그래? 너희 아빠가 장기 몇십 년 두는 동안 단 한 번도 흥미를 보이지 않더니?” 이미숙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지만, 딱히 더 묻진 않았다. 곧이어 소진헌 쪽으로 가서 말했다. “이 판 끝나면 자자고요. 당신은 늦잠 자도 되지만, 조 교수는 내일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응, 이 판만 끝내고.” 그리고 정확히 30분 뒤, 마침내 승부가 갈렸다. 소진헌은 바둑판을 한참 들여다보다 당황한 듯 말했다. “아니... 분명히 내가 병사 두 개 세워놨는데..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31화

    “하고 싶어.” 재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다 곧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네 마음이 더 중요해. 네가 원하면 바로 공개하고, 싫다면 당분간은 우리만 알면 돼.” ‘이 사람, 늘 자기보다 내가 먼저다.’ 정은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까 현관 들어올 때... 깜짝 놀랐죠?] “놀란 정도까진 아니고, 당황은 좀 했지.” [나도 몰랐어요. 엄마, 아빠가 갑자기 연락도 없이... 나는 그냥 조용히 저녁 먹을 생각이었는데, 마침 당신도 오고...]재석은 문득 물었다. “꽃... 마음에 들었어?” [네, 보라색 너무 예뻐요.] ‘다행이네.’ 재석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정은도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내가 방에 들어가서 당신한테 전화하려고 했거든요. 엄마, 아빠가 집에 왔으니, 당황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려고요. 근데 그 몇 초를 못 기다리고... 딱 들어와 버리더라고요...] “나는 머릿속으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버님이 알아서 다 설명해 주셨어.” ‘내가 말 꺼낼 기회도 없었어...’ 정은은 피식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빠... 무슨 상상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당신을 ‘망년지우’처럼 생각하신 것 같아요. 우리가 사귄다는 거 알면, 턱 빠질지도 몰라요...]“계속 ‘아버님’이라 부르고 있는데, 왜 자꾸 날 형 동생 하려고 하시는 건지...” 재석이 어이없는 듯 답하자, 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문득, 장난스럽게 물었다. [근데... 당신도 우리 아빠 처음 만났을 때, 바로 ‘아버님’이라고 불렀잖아요. 설마... 그때부터 나 좋아했던 거예요?] 그 말에 재석은 숨도 안 쉬고 곧장 답했다. “응.” ‘헉...’ 정은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니, 이걸 이렇게 바로 인정해?’ 잠시 정적이 흘렀고, 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공개해요, 괜찮죠?] 그 순간, 재석은 숨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30화

    정은이 잔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소진헌은 재석에게 술을 따라주며 한참 좋은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밥상 분위기는 예상보다 훨씬 ‘훈훈’했는데, 적어도 소진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터였다.술이 석 잔, 네 잔 오가자 소진헌의 말투도 점점 느긋해지고, 분위기엔 살짝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 교수, 내가 좀 속내를 잘 안 드러내는 편인데 말이지.” 소진헌이 잔을 들며 진지하게 운을 뗐다. “사람이 좋아 보여도, 진짜 마음 열고 지내는 친구는 몇 안 돼.” “근데 이상하게 조 교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좀 다르더라고. 말로 설명은 안 되는데, 그냥... 뭔가 통하는 느낌? 이게 뭐랄까, 인연이지 인연.” “그게 말이야... 그냥 딱 느낌 오더라고. 나이 차이는 좀 있어도, 말도 잘 통하고 마음도 맞고! 그냥... 오래된 친구 같아. 우리, 진짜 그런 사이 되는 거지?”재석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아, 저는 그렇게까지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 안 했는데요.’‘이거... 분위기 어떻게 빠져나가지?’이미숙은 잔을 탁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여보, 또 시작이에요? 술만 마시면 꼭 말이 많아진다니까요. 이번엔 또 뭔데요? 의형제라도 맺자는 거예요?”소진헌은 곧장 손을 번쩍 들었다. “나야 좋지! 언제든 가능!” 재석은 더욱더 불안했다.‘이거 술자리지, 무협 소설 실사판 아니죠...?’ 이미숙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 교수, 신경 쓰지 마. 저 사람, 술만 마시면 저래. 평소엔 멀쩡한 사람인데...” ...식사가 끝나고, 정은이 일어나 식탁을 정리하려 하자 재석도 자연스럽게 일어나 소매를 걷었다. 마치 수백 번 함께 해본 듯 척척 맞는 타이밍과 손놀림. ‘이 집 풍경이 왜 이렇게 익숙하지?’ 정은은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조 교수, 앉아계셔. 손님이신데 내가 치울게.” 소진헌이 나섰다. “정은아, 그만하고 조 교수랑 거실 가서 텔레비전이나 봐. 이건 아빠가 할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29화

    ‘어...?’ 재석은 문을 닫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식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있던 두 사람. 소진헌과 이미숙. 둘의 시선이 정확히 재석에게 꽂혀 있었다. ‘지금... 뭐야?’ 재석의 머릿속에서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사고가 멈췄다. ‘어떻게 된 거지...? 이 집에... 왜 정은이 부모님이...?’‘아니... 그럼 아까 내가 문 열고 했던 말은...?’ ‘‘정은아... 나 왔어’라니... 죽여줘...’ 이 어색한 기류를 깨준 건... 다행히도 정은이었다. “아, 교수님 오셨어요? 엇... 이 꽃은...?” 정은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재석이 안고 있던 보라색 튤립 꽃다발을 힐끗 바라봤다. 재석은 반사적으로 꽃을 내밀었고, 정은은 급히 미소를 띠며 받았다. ‘이걸로 위기 탈출...은 무슨.’ 그 순간, 소진헌과 이미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조 교수님! 퇴근하셨어요?” 소진헌이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바로 정은을 향해 한마디. “얘 봐라. 내가 오늘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더니, 이 녀석이 오히려 날 놀라게 하네? 밥까지 다 해놓고, 거기다 조 교수까지 초대해? 완전 뒤통수 맞은 느낌이야, 하하하!” 이 말에 정은은 좀 당황스러웠다.‘아, 아빠... 아니, 그건 아니야...’ 재석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 초대받은 거였어? 지금?’‘그럼 왜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했...’ “자자, 조 교수, 여기 빨리 앉아! 우리 이제 막 먹으려던 참이었어. 정은이가 미리 말만 했어도 상 차리는 거 좀 도와줬을 텐데...” 소진헌은 반쯤 강제로 재석을 식탁 쪽으로 끌고 갔고, 그 등엔 어느새 가벼운 ‘찐한 환대’의 손이 얹혔다. “그리고 이 꽃! 아이고, 정은이 엄마가 보라색을 진짜 좋아하거든. 그 얘기 들었나 봐? 이렇게 예쁜 꽃까지... 괜히 돈 썼네.” 재석은 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28화

    ‘하... 진짜 어이없네.’ 태민은 어제 수아에게 받은 전화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통해 재석에게 접근하려 했기에, 그 계산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얼굴 하나 믿고 사람을 대상으로 계산기 두드리는 거, 진짜 구질구질하네.’ 태민은 조용히 복도 끝 구석으로 가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수아의 번호를 차단 목록에 등록해 버렸다. ...오후 5시. 진욱은 의자를 밀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 끝났다 끝났어!!” 퇴근 모드 ON. 그때, 재석이 핸드폰을 들고 진욱에게 다가왔다. “이 중에 뭐가 나아 보여?” “뭔데?” 진욱이 힐끗 보더니...“어라...?” 무려 꽃다발 사진. 무려 여섯 개. “꽃 사는 거야? 정은이한테 주려고?” “아니면 누구 주겠냐.” ‘아, 맞네.’ 진욱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거 어때? 보라색 포인트 있는 거. 딱 정은이 스타일이야. 무조건 좋아할걸?”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거 고르려던 참이었어.”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다시 손에 쥐고 걸음을 옮겼다. 진욱이 속으로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뭐야, 그냥 확인받고 싶었던 거야...?’ ...방학 첫날. 정은은 오랜만에 알람 없이 푹 잤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오전 10시가 가까워진 시각. 그녀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장을 보러 나갔고, 오후엔 집에 틀어박혀 논문 수정에 열중했다. ‘잠깐 본다고 했는데, 벌써 세 시간?’ 노트북을 덮고 스트레칭을 한 뒤 주방으로 가서 저녁 준비에 돌입했다. 오후 6시 30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은은 팬을 흔들던 손을 멈칫했다. 지금 막 채소를 볶던 중이라 직접 보러 가긴 어려웠다. “왔어요?” 정은은 대충 손을 털며 주방 안에서 소리쳤다. 30초쯤 지났을까... 발소리가 조용히 다가오자, 정은은 타이밍 맞춰 팬을 내려놓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27화

    거의 잡초가 자랄 정도로 방치된 학교 홈페이지. 아무도 자주 들여다보지 않는 그곳에, 그날따라 이상하게 시선이 쏠렸다. 서비대학교의 간판 교수, ‘역대급 얼굴 천재 과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조재석 교수의 강의 중단 공지가 올라온 것이었다. 내용은 단출했지만, 파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캠퍼스 커뮤니티는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자유게시판] [정보공유. 여러분, 와... 이거 발견한 사람은 내가 처음일 듯... 링크 여기 있어.][??? 조재석 교수 강의 중단됨? 이게 무슨 일이야? 교수님 서비대 떠나는 거야?][윗분, 제목 제대로 읽으세요. ‘강의 중단'이지 ‘직무 중단' 아니에요. 말 그대로 수업만 안 하신다는 거.][헐... 이번 학기 완전 재밌게 들었는데, 다음 학기에 또 들을 생각이었단 말이야!][생명과학대 학생들 부럽다. 조 교수님, 우리 과엔 수업 안 열어주심. 작년에도 생과대가 전공 두 개나 가져갔잖아...][조 교수님 왜 이렇게 생명과학대만 챙기심? 생과대에 누가 있나...?][난 수업 안 하시는 거 좋아. 이러면 다들 못 듣는 거지, 나만 손해 보는 거 아니니까.][근데 이렇게 되면 다음 학기 인기 강의 하나 줄어드는 거 아님? 수강 신청 경쟁률 좀 내려가겠네.][갑작스럽긴 하네... 뭐 때문이지? 몸 안 좋으신가? 아님 연구에 집중하시려나? 수업 빼면 시간 많이 나긴 하잖아. 학교 입장에서도 논문 많이 나오면 랭킹에도 좋고.][익명의 제보인데, 조 교수님 여자 친구가 서비대 대학원생이라서... 괜히 말 나올까 봐 수업 접는 거래. 피하신 거지 뭐.][와... 익술이냐? 낮술 마시고 커뮤 왔냐?][무슨 조 교수님한테 그런 말을 해! 어디 감히! 실명 까고 말해보시지?][이런 글 보고 있으면 진짜 말세다. 뭐든 소설 써서 퍼뜨리면 되는 시대네.][다음 댓글...‘사실은 제가 교수님 여자 친구예요’ 이런 거 나오는 거 아님? 개웃겨!][...]그 와중에, 전진욱은 자신이 단 댓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26화

    서준은 더 이상 그 여대생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민지의 손을 꼭 잡고,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간다며? 장소는 정했어?” “정했지!” 먹는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는 민지. “Cici 레스토랑 가자! 올해 새로 인기 맛집 리스트에 올랐어! 근데... 좀 멀긴 해.” 그 순간, 그리 크진 않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 둘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먹고 또 먹고, 그냥 돼지네.” 서준의 걸음이 멈췄고, 민지는 재빠르게 서준을 잡았다. “괜찮아. 난 신경 안 써.” 하지만 서준은 단호했다. “난 신경 쓰여.” 그렇게 말하곤 민지의 손을 놓고 돌아섰다. 그 여대생은 예상치 못한 서준의 반응에 잠깐 눈이 반짝였다. “서...” “사과해.” “뭐...?” 서준은 또박또박 말했다. “내 여자 친구한테, 지금 당장 사과해.” 여대생의 입꼬리에 걸린 웃음이 굳어졌고, 곧 황당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내가? 사과하라고?!” “무례하게 굴었잖아. 그럼 사과해야지.” “내 말이 틀렸나? 사실 아니야? 쟤, 돼지 맞잖아!” ‘참나...’ 서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네 부모님이 너한테 예의도 안 가르쳤구나. 괜찮아, 내가 대신 알려줄게.”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녹음 버튼을 꾹 눌러 보이며 말했다. “방금 거, 전부 녹음했어. 학교 커뮤니티에 올릴 생각인데... 대학원까지 다닌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도덕의 붕괴일까, 인성의 문제일까? 다들 궁금해할 것 같은데.” 여대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돌아서려 했다. “잠, 잠깐만!” 그제야 여대생이 다급히 불러세웠다. “미안하다고 하면 되잖아.” 그러고는 억지로라도 입을 열었다. 민지를 향해, 하지만 눈은 절대 안 마주치며... “미안...” 서준은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녹음 파일을 눈앞에서 삭제해 보였다. “다음에 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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