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16화

Author: 십일
새벽 8시, L시에서 가장 큰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떠들썩했다.

“소 선생님, 또 생선 사러 오셨어요?”

“맞아요. 오늘은 농어 있어요?”

“그럼요, 있죠! 자, 특별히 선생님을 위해 남긴 거예요...”

중년 여자는 말하면서 잽싸게 저울로 무게를 잰 다음, 물고기를 손질해 부었다.

“자요.”

소진헌은 핸드폰을 꺼냈다.

“얼마예요?”

“에이, 돈은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져가서 드세요! 우리 성민이 때문에 그동안 많이 힘드셨을 텐데...”

“그건 안 돼요. 장사를 하는 분이 어떻게 돈을 받지 않을 수가 있어요?”

소진헌은 바로 6천 원을 주었다. 심지어 많기만 할 뿐, 적게 주지 않았다.

여자는 돈을 받으면서 계속 말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요...”

“돈을 받지 않으면 내가 더 미안하죠. 그럼 먼저 일보세요, 난 파 좀 사러 갈게요.”

“아, 소 선생님 잠깐만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말이에요.”

여자는 긴장해서 몸에 입은 가죽 앞치마를 꽉 쥐었다.

“우리 학교에서 매년 물리 경기 추천 정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만약 국제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서비대학교, 연성대학교 같은 명문 학교로 갈 수 있다면서요!”

소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천 정원이 있긴 하죠.”

“그럼 우리 성민이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소진헌은 잠시 침묵했다.

“성민 어머니, 우선 경기가 무엇인지부터 잘 파악하셔야 해요. 학생들이 지금 단계를 초월하는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운용하여 학과의 경기 대결을 완성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시험 문제는 평소보다 훨씬 거 어려울 거예요. 물론 학교에는 확실히 각 학과마다 모두 추천 정원이 있지만, 보통 단일 학과 성적이 특별히 뛰어나고, 학습 능력과 사고력이 강한 학생을 선발하여 참가시킬 거예요.”

여자는 조급해했다.

“우리 성민이도 성적이 아주 좋은데요! 학년에서 순위가 20등 밖으로 떨어진 적이 없잖아요, 이게 유난히 뛰어나고 능력이 강한 편이 아니라고요?”

“성민 어머니, 일단 설명 좀 들어보세요.”
Patuloy na basahin ang aklat na ito nang libre
I-scan ang code upang i-download ang App
Locked Chapter

Kaugnay na kabanata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17화

    “에이? 설마?! 공부도 안 하고, 일도 안 하면 뭘로 먹고 살려고?”“돈 많은 남자 꼬시는 거지! 누워서 다리만 벌리면 돈이 오는 게 아니겠어? 이게 얼마나 쉬워? 그러니 무슨 일자리를 찾겠어?”“쉿! 왕 씨, 이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마! 그 아가씨의 명성이 더러워지잖아!”“흥, 소 선생의 딸이 만약 정당한 일자리를 찾았다면 왜 몇 년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겠어? 창피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거지. 이 작은 곳에서 무슨 소문이 생기면 바로 쫙 퍼지니까, 소 선생도 막고 싶어서 그런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남의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겠어?”“세상에...”소진헌은 그런 말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 아마 듣더라도 그는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왜냐하면 소진헌에게 있어, 딸이 한 그런 일들은 재벌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정은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패딩을 꽁꽁 여몄다. L시는 J시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지만, 겨울의 추위는 여전했다.택시에 앉아 창밖으로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니, 기억 속의 고향이 서서히 떠올랐다. L시는 인구가 많지 않았고, 중공업이 도시 외곽으로 이전되면서 최근 몇 년간 정부는 관광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도로 양쪽에는 많은 나무와 풀을 심어 도시의 모습을 바꾸었다.작고 낡은 건물들은 새롭게 개축되었고, 공원도 새로 조성되었다. 구시가지만이 아직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대략적으로 신구 두 구역을 나누는 경계가 되었다.여름에는 사람들이 강에서 배를 띄웠고, 겨울이 되면 흐르는 물 위로 살얼음이 살짝 얹혀져, 가볍게 만지기만 해도 바로 흩어져 물결 위에서 출렁였다. 그 모습은 마치 투명한 다이아몬드처럼 밝은 빛을 발하는 듯했다.강 위에는 오래된 아치형 다리가 하나 있었고, 정은의 집은 바로 그 다리의 한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골목을 지나면 멀리서 ‘인성 고등학교 교직원 공동주택'이라는 몇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소진헌은 그 시절 연성대 물리학부를 졸업한 인재로, 특별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18화

    “누구세요?”소진헌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즉시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방금 만든 농어찜을 보더니, 그것을 조심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그제야 문을 열었다.방 안에서 꽃에게 물을 주고 있던 이미숙도 이를 듣고 정원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지? 건우 아니야?”“건우는 오늘 아침에 문자를 보냈는데, 내일 도착한다고 했어. 이 시간이면 아마도 옆집 양 씨 아주머니일 거야. 당신 요 며칠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가 아주머니에게 토종닭을 좀 사서 보내달라고 부탁했거든.”문 앞에서, 정은은 문을 열어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6년 동안 보지 못한 소진헌은 귀밑에 백발이 좀 더 많아진 것 같았고, 네모난 얼굴에도 주름이 더 많아졌다.어렸을 때, 정은은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타는 것을 가장 좋아했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늙은 데다가 등도 약간 구부러졌다. 그러나 그 두 눈만이 여전히 6년 전처럼 맑고 예리했다.“아빠...”정은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소진헌은 처음에 멈칫하더니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네가 왜 돌아온 거야?”바깥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이미숙은 잠시 기다렸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정원으로 걸어갔다. “여보,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예요? 누군데 그래요?”그러나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이미숙은 손에 힘이 풀리더니 주전자가 탁 하고 땅에 떨어졌다.정은은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로 예쁘고 우아했다. 세월은 그녀의 몸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 같았다.시선이 마주치자, 정은은 참지 못하고 불렀다.“엄마...”딸의 목소리에 이미숙은 손이 살짝 떨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벌렸지만,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일단 들어와서 얘기해요.”거실에서, 방안의 분위기는 마치 비 오는 날처럼 답답하고 무거웠다.소진헌은 소파에 앉아 무표정하게 말했다.“돌아와서 뭘 하려는 거야? 애초에 했던 말을 다 잊은 건가?”6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19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엄마와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두 분께서 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며, 제가 예전의 잘못을 메울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요.”그동안 정은은 부모님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볼까 봐 감히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꾹 참았던 것이다.그러나 현실은 그녀를 제대로 실망시켰다. 정은은 틀렸을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소진헌은 놀라서 입술이 떨렸다.‘내가 방금 무엇을 들었지? 정은이 마침내 잘못을 인정했다니?’이미숙은 오히려 가슴이 찡했다. 만약 억울함을 당하고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 그녀의 고집이 센 딸이 어떻게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너, 정말 똑똑히 생각한 거야?” 소진헌은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졌다.정은은 입술을 오므렸다.“네, 이미 똑똑히 생각했어요. 하지만 두 분께서 화를 내실까 봐 줄곧 돌아올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집에 돌아가기 전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엄마 아빠, 저 여기에 남을 수 있을까요? 저도 두 분과 함께 설을 쇠고 싶거든요.”소진헌은 얼굴을 돌리며 아내와 딸이 자신의 눈물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돌아온 이상, 며칠 있다가 다시 돌아가.”이미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렇게 서 있을 거야? 빨리 트렁크를 방에 안 갖다 놔? 음식 다 식었겠다...”정은은 꾹 참았지만, 이 말 때문에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우는 동시에 또 웃었다.“엄마 아빠,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번에 마침내 집에 돌아오는 길을 찾았어요.”이미숙은 눈시울을 붉히며, ‘잃어버렸던’ 딸을 다시 품에 안았다.6년 만에 그들 일가족은 마침내 단란하게 모일 수 있었다....6년의 시간을 거쳐 오늘 가까스로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울다가 이제 겨우 회복되었다.소진헌은 자신이 울었다는 것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20화

    저녁 무렵, 주방에서 향기가 풍기더니, 소진헌은 국을 들고 나왔다.“생선찌개인데, 내가 새로 배운 거야. 얼른 와서 맛봐.”정은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린 음식을 바라보았다. 구운 삼겹살, 야채볶음, 농어찜에 생선찌개와 갈비찜.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이미숙은 가장 연한 생선 살을 골라 정은의 그릇에 놓았다.“네 아빠가 만든 생선은 예전보다 맛이 없는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방금 맛봤는데, 네가 좋아하는 맛이야. 자, 많이 먹어.”소진헌은 바로 삐졌다.“예전보다 맛이 없다고? 그건 당신의 입맛이 달라져서 그래!”“풉-”“네, 네.” 이미숙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요리 솜씨가 뛰어나네요. 선생님으로 되지 않았다면 아주 훌륭한 셰프로 됐을 텐데. 됐죠?”“알면 됐어. 엊그저께 내가 옆집의 장 씨를 만났는데, 나한테 이 농어찜을 하는 방법까지 물어봤단 말이야! 내가 매일 당신에게 밥을 해 주고 있으니, 당신은 아주 행복한 줄 알아.”“알았어요, 난 아주 행복해요. 당신도 빨리 먹어요, 밥을 먹어도 말이 그렇게 많다니!”“어쩜 성의가 이렇게 없는 거야? 정은에게 물어봐, 내 요리 솜씨가 정말 훌륭하지 않니?”말하면서 소진헌은 또 정은에게 생선고기를 집어주었다.“자, 정은아, 아빠가 만든 생선이 어떤지 먹어봐.”정은은 부모님이 말다툼하는 소리를 듣고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숙여 고기를 한 입 먹었는데, 신선한 생선이 싱그럽고 달콤한 맛을 자아냈다.소진헌은 정은이 강한 양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아주 간단하게 생강과 쪽파만 넣어 비린내를 잡은 뒤, 젓갈을 살짝 뿌려 요리했다. 덕분에 맛은 담백하면서도 생선의 신선함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이미숙은 주방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고, 집안의 주방장은 소진헌이었다.정은은 매일 수업이 끝나면 사무실에서 소진헌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면 그는 자전거를 타고 정은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갔다.가는 길에 시장을 지나칠 때마다, 채소를 파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모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21화

    정은은 한 입 먹으면서 눈웃음을 지었다.“맛있어요.”이미숙은 정은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또 오늘 돌아왔을 때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뜨거운 손으로 정은의 손을 잡으며 정은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면서 또 자세히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살이 빠졌네.”정은은 입안에 딸기가 가득해서 볼이 불룩 튀어나왔는데,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방금 체중을 달았는데, 지난주보다 1kg 더 쪘어요. 단지 날씬해 보일 뿐이지, 제 손 좀 만져보세요. 살이 엄청 많아요.”정은은 일부러 고민하는 척했다.“지금 살을 뺄까 말까 고민 중이에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진헌은 눈살을 찌푸렸다.“여자애가 무슨 살을 뺀다는 거야? 이렇게 말랐는데, 또 빼면 뼈만 남는 거 아니야?”요즘 아이들은 인터넷을 접촉해서, 다이어트 블로거를 보면 저마다 살을 빼려고 난리를 피웠다. 일부러 굶으면 그만이지만, 또 무슨 다이어트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니 소진헌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정은은 눈빛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고, 이미숙의 손을 안으며 나른하게 엄마의 품에 기대었다.“그냥 해본 말이에요.”이미숙은 그녀의 머리를 두드렸다.“그것도 안 돼. 다음에 돌아올 때, 살 쪄서 돌아와. 알았지?”정은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알았어요.”이미숙은 몸에 기댄 딸의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빗으며 마침내 가장 묻고 싶은 말을 물었다.“그동안 밖에서 잘 지냈어?”정은은 멈칫하더니 슬프고 힘든 과거를 모두 잊으려 했다.“그럼요.”“그 누구는? 왜 너와 함께 돌아오지 않았어?”마침내 올 것이 왔다.정은은 눈을 떨구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저희 이미 헤어졌어요.”소진헌이 퇴원한 후, 이미숙은 정은을 찾아갔었지만, 그때의 그녀는 고집이 세서 이미숙도 화가 난 나머지 바로 떠났다.그날부터 소진헌은 정은과 관계를 끊었고, 6년 동안 더욱 연락을 하지 않았다.애초의 일을 말하자, 정은은 소진헌이 자신을 원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22화

    “뭐라고요? 내가 쓴 글이 말이 아예 통하지 않다뇨? 지금 작가인 날 모욕하는 거예요?!”“그래요, 당신은 편집장이라서, 나도 당신의 안목과 판단을 믿어야 하지만, 난 전혀 그런 스타일의 소설을 쓸 수가 없단 말이에요. 바꾸고 싶어도 이건 변화가 너무 크잖아요!”“우리 모두 진정해야 할 것 같네요. 난 아직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끊고 돌아서자, 정은의 의혹의 눈길을 마주한 이미숙은 웃으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야. 출판사 편집장이 날 찾아서.”“정말 괜찮으세요?”“그럼 가짜일 수 있겠어?” 이미숙은 웃으며 정은을 끌어안았다.“요 몇 년 전통적인 출판업이 불경기라서, 많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인터넷 소설을 쓰기 시작했거든. 많은 돈을 벌었다나. 물론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락된 사람도 있어. 편집장도 내가 인터넷 소설을 창작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난 아직 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거야.”“인터넷 소설이요?” 정은은 많이 놀랐다.“어떤 내용인데요”이미숙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로맨스 소설.” 이미숙은 추리 소설가로, 예전에 추리 소설이 한창 인기를 끌던 때에 『살기』라는 책을 써서 연간 50만 부 이상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해 하반기에는 스릴러 소설 『황량한 마을 학교』를 출판하며 다시 판매 기록을 갱신했다.그해는 심지어 ‘이미숙의 해’라고 불릴 정도였고, 도합 5권의 책으로 연간 도서 판매 순위 5위에 올랐다. 지금의 편집장도 바로 그때 찾아온 사람이었다.한동안 접촉하면서 이미숙은 편집장이 생각이 깊고 선견지명이 있으며, 여러 번 찾아와 준 성의에 감동해 단숨에 10년 계약을 맺었다. 이후 이미숙의 작품은 모두 이 편집장이 수정하고 출판 및 발매를 맡았다.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던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미숙은 창작의 정체기에 빠진 듯했다. 독자들의 기대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상이 줄곧 부결되거나, 겨우 구상이 통과되어 대강을 준비하려 할 때마다 편집장은 전화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23화

    그동안 이미숙은 하마터면 우울증에 시달릴 뻔했다.다행히 남편과 딸이 곁에 있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악플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후부터 이미숙은 더 이상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았고 휴대폰조차도 전화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이 10년, 청춘 로맨스 소설 한 권 외에 이미숙에게 더 이상 신작이 없었다.“아이고, 이런 말은 그만하자. 국수 맛있니?”“네, 여전히 그 맛이에요.”정은은 이미숙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국물이 좀 뜨겁네요.”“그래? 그럼 좀 더 식혀.”...새해가 다가오면서 작은 도시의 평온한 분위기도 조금씩 떠들썩해졌다. 큰길 양쪽과 길가의 가로수에는 장식들이 늘어났고, 집 근처 슈퍼마켓은 사람들로 붐볐다. 상품들도 거의 다 팔려나가서 이미숙은 아예 차를 몰고 도심의 큰 마트로 향했다.차를 주차하고 모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문 앞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설맞이 용품을 사러 온 사람들로 정말 떠들썩한 분위기였다.집에는 비록 아이가 없었지만, 설을 맞아 친척집을 방문해야 했고, 졸업한 학생들이나 근처 이웃들이 가끔 놀러 올 수도 있었기에 사탕과 과일을 준비해야 했다.간식 코너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비싼 과자들을 골랐다. 그리고 집에 기름, 소금, 간장, 식초도 거의 다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물건을 추가로 샀다.해산물 코너에서 팔딱거리는 새우를 보니 이미숙은 정은에게 새우를 살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줄곧 뒤따라오던 정은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이미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카트를 밀고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정은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들고 카트에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초콜릿은 좀 쓰지만, 집에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정말 시원하고 편안했다.정은은 몰래 두 개만 사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고, 눈을 깜박이며 불쌍한 표정으로 이미숙을 바라보았다.“두 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24화

    이미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까나리액젓 사는 것을 깜박했네. 정은아, 저기 가서 한 통 들고 와.”“네.” 정은은 이미숙이 화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정은이 가는 것을 본 이미숙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아침에 말했잖아요. 아직 생각 중이라고.”“이 일은 내가 3개월 전에 이미 말한 것 같은데요? 그때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나도 이 작가에게 생각할 시간을 더 준 거예요. 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잖아요.”이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함께 일했으니,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장르가 바로 미스터리 스릴러류의 중단편 소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대략 20~30만 자 정도이죠. 그러나 지금 갑자기 인터넷 소설을 쓰라고 하다니, 이건 아예 상관이 없는 두 장르잖아요!”“모두 소설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상관이 없을 수가 있겠어요? 문학은 모두 공통된 것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유보영은 좀 엄격해지더니 웃음을 거두었다.이미숙은 애써 설명하려 했다.“우선 인터넷 소설은 기본적으로 장편이라서, 툭하면 백만 자 이상이에요. 둘째, 인기 있는 인터넷 소설은 대부분 로맨스, 대표님과 연애하는 거죠. 이것 모두 내가 잘 모르는 장르이니 지금 어떻게 글을 쓰라는 거예요? 『풋풋한 나의 학교 시절』에서 받은 교훈이 아직도 부족한 거예요? 애초에도 장르를 바꾸었지만, 그 결과는요?”『풋풋한 나의 학교 시절』이 바로 이미숙이 비참하게 욕을 먹었던 청춘 로맨스 소설이었다.유보영은 시선을 피하더니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그 소설이 이 작가의 평판을 폭락시켰다는 거, 나도 잘 알아요. 지금까지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인터넷을...”“그래요, 이제 내가 인터넷을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왜 나에게 인터넷 독자들을 영합하는 도시 로맨스를 쓰라고 하는 거죠?”“이 작가, 일단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봐요.”유보영은 좋은 태도로 설득하려 했다.“그

Pinakabagong kabanata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2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1화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0화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9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7화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6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5화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4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Galugarin at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Libreng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sa GoodNovel app. I-download ang mga librong gusto mo at basahin kahit saan at anumang oras.
Libreng basahin ang mga aklat sa app
I-scan ang code para mabasa s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