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영은 그런 강서원의 태도에 익숙해져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방긋 웃기만 했다.“온종일 집에서 놀아도 심심하니,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최근 티파티가 한창 인기를 끌어서 이 주제로 정한 거예요. 형님은 평소에 이런 모임에 거의 참가하지 않으셨는데, 오늘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죠...”백지영은 말을 듣기 좋게 했고, 태도도 간절했기에, 평소에 그녀가 싫은 강서원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이윽고 서영숙도 연희를 데리고 도착했다.낯선 얼굴이 이런 자리에 나타나자, 수많은 여사님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도겸 엄마, 이 아이는 누구야?”“어디서 온 아가씨야? 정말 젊게 생겼구나!”서영숙은 오기 전에 이미 준비를 했기에 즉시 활짝 웃으며 모두들에게 소개했다.“내 친구의 딸인데, 연희라고 해. 지금 이과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연희는 바로 미소를 지으며 현장에 있던 여사님들에게 인사를 했다.“어머! 아직 학생이구나. 어쩐지 이렇게 젊고 영리하더라니.”“그래, 이과라며? 지금 이과 대학에 다니는 여자아이는 그지 많지 않잖아.”그렇다, 이과 대학은 이과 전공을 위주로 했기에, 남자에게 더 적합했고, 물론 경쟁도 많이 치열했다.이과 전공에 응시하는 여자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니 자연히 더 쉽게 붙을 것이다.이게 무슨 칭찬일까?다만 모두들 알아들었지만, 유독 서영숙과 연희만 알아듣지 못했다.다른 귀부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미소를 지으며 듣기 좋은 말을 했지만 사실 서로에게 눈짓을 하며 두 사람을 비웃었다.‘지금 입고 있는 그 치마 말이야, 3년 전의 셀린느 아니야? 시대에 뒤떨어진 옷을 어디에서 끄집어냈을까? 너무 못생겼어.’‘그래, 오늘이 무슨 자리인데, 정말 촌스럽게도 입었어.’‘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 아니겠어?’귀부인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강씨 가문의 아들이 여대생을 임신시켰다는 소문이 이미 쫙 퍼졌다.그러나 지금 서영숙은 그 여자를 당당하게 데리고 나오다니,
서영숙은 웃음이 굳어졌다.‘상대방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른 것 같은데?’“흥, 당신이 뭐라고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죠?” 강서원은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서영숙을 훑어보았다.“우리 사이가 잘 맞지 않아도, 그것은 우리 조씨 가문의 일이지, 남이 간섭할 차례가 못 돼요!”말을 마치서면 바로 일어서더니 다른 자리로 옮겨 앉았다.서영숙은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백지영은 이 장면을 눈여겨보았고, 서영숙을 향한 혐오를 감출 수가 없었다.강서원은 확실히 백지영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것은 단지 성격과 처사 방식의 차이일 뿐이었다. 비록 가끔 다른 관점으로 말다툼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한집안 식구들이었다.남과 함께 자기 가족을 욕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서영숙은 정신이 나간 거야 뭐야?’강서원은 비록 다른 자리로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면 바로 연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쭈뼛쭈뼛 맞은편에 앉아 손발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모르는 데다가, 자신과 눈을 마주하면 바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강서원은 이런 여자를 가장 싫어했다.백지영도 약간 이런 타입이었지만, 그래도 강서원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희와 같은 사람은 한 번만 더 봐도 자신의 눈을 더럽힐 것만 같았다.그래서 강서원은 시선을 돌리며 연희를 보지 않기로 했다.‘더러운 것을 보지 말자. 괜히 기분만 나빠지겠어.’이때 백지영이 강서원의 곁으로 걸어갔다.“형님, 이쪽은 등불이 어두우니 저쪽에 가서 앉으시는 건 어때요?”그렇게 강서원은 백지영이 마련해준 곳으로 갔다.‘응, 여기가 좋네. 드디어 서영숙과 서연희 그 두 여자를 볼 필요가 없어.’그녀는 백지영에게 ‘잘했다’는 눈빛을 주었다.백지영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어쩔 수 없지. 형님은 성격이 원래 그랬으니까. 큰 도련님도 형님을 아끼시고, 온 가족들도 양보를 했으니 나도 당연히 그런 형님을 많이 봐드려야지.’얼마
모두들 넋을 잃고 정은의 강의를 들었다.“백 여사, 이번에 청한 선생님은 꽤 괜찮은데? 어디서 찾은 거야? 왜 전에 그 늙은이가 온 거지?”티파티는 이미 여러 차례 열렸는데, 매번 다른 귀부인들이 책임졌다.이번에 마침 백지영의 차례가 되였고, 그 선생님은 또 마침 병 때문에 입원했기에 그제야 정은을 찾아온 것이었다.전에는 이런 ‘실수’가 없었다.다른 한 귀부인은 그 말을 듣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렇게 아름다운 선생님이 있었다면 왜 진작에 청하지 않고, 줄곧 그런 늙은이만 찾아온 거야? 이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데?”“예쁘기도 하고 목소리도 듣기도 좋네요.”“이 선생님은 정말 괜찮네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거 있죠?’연희와 서영숙은 정은이 나타난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리고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무대에 앉아 차 문화에 대해 여유롭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연희는 모두의 평가를 듣고 있었다. 모두들 정은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예쁘며 기질이 얼마나 뛰어난 지에 대한 칭찬이었다!‘왜? 왜 모든 사람들이 소정은을 좋아하는 거지? 하지만 소정은은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 위에 앉아서 아주 그럴 싸하게 이 귀부인들에게 수업을 해 줄 수 있는 거냐고? 대체 소정은이 뭔데?’연희는 마음이 불쾌해졌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질투일 뿐이었다!“잠깐만요.” 연희는 일어서더니 정은의 말을 끊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그녀에게 떨어졌다.서영숙은 연희를 막을 겨를이 없었다.백지영도 눈살을 찌푸렸다.정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연희는 웃으며 말했다.“선생님, 오늘 우리에게 차 문화에 대해 강의를 하러 오셨잖아요? 그럼 선생님은 다례사인가요? 그렇기엔 너무 젊지 않나요? 그리고 왜 당신이 한 말이 조금도 프로 같지가 않은 거죠? 심지어 다큐멘터리의 대사까지 말하시다니?”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의논하기 시작했다.“그래, 왜 갑자기 선생님이 바뀐 거야?
‘엥?’연희는 멍해졌다.그녀는 단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을 뿐이니, 정은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비록 어젯밤에 공부를 했지만, 임시로 벼락치기를 한 것일 뿐, 그 지식들을 똑똑히 기억하지 않았다.연희는 눈알을 굴리더니 다시 정신을 차렸다.“지금 제가 선생님에게 묻고 있잖아요. 다례사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화제 돌리지 마세요.”“난 지금 선생님으로서 학생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물어보며 의혹을 풀어주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화제를 돌리다뇨? 내가 프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 이유를 말해야죠. 나는 이런 터무니도 없는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이렇게 강한 정은을 연희는 당해낼 수 없었다.모두들의 눈빛이 자신에게 떨어지자, 연희는 입술을 깨물며 등을 곧게 폈다.“방금 말한 것은 확실히 큰 잘못이 없어요. 그러나 다례에 관한 상식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분들 누가 모르시겠어요? 모르시더라도 인터넷에서 조금만 찾아보면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죠. 다례사의 등급이 다르면 강의의 깊이도 분명히 다를 거예요. 설마 오늘 우리가 그런 기초 지식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세요?”일부 귀부인들은 이미 마음이 흔들렸는데, 이 말을 듣고 찬성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 아가씨 말도 맞네. 만약 자격증이 없다면 선생님이 무슨 사람인지 누가 알겠어? 만약 사칭을 했다면, 이 참에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그래, 지금 사기꾼이 그렇게 많은데. 그냥 자격증을 모두에게 보여 주는 것뿐이잖아. 그래야 모두들 안심하지. 정말 자격증이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백지영의 표정은 이미 무척 어두워졌다.정은은 그녀가 청한 사람이니, 지금 정은을 의심하는 것은 자신을 의심하는 것과 같았다.긴장과 분노를 느끼는 백지영에 비해, 강서원은 무척 여유로웠다. 그녀는 차를 천천히 마시면 이 장면을 구경했다.‘오늘 정말 잘 왔어. 구경거리가 생겼으니 정말 재밌네.’강서원은 비록 정은을 본 적이
정은은 빨간 자격증 하나를 꺼냈다.표지 위에 영문과 한글로 된 글자가 몇 개 있었는데, 고급 다례사라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이제 됐어요? 좀 가까이 가져가서 똑똑히 보게 해줘요?” 정은은 고개를 들어 연희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연희는 믿을 수 없단 듯이 눈을 부릅떴다.‘소, 소정은이 정말 이 자격증을 땄다니?!’비록 사실이 이미 눈 앞에 놓였지만, 연희는 여전히 인정하려 하지 않고 발뺌을 했다.“조작된 자격증일 수도 있죠.”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국가에서 발급한 자격증은 모두 유일무이한 번호가 있어요. 지금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체크해 봐요.”어떤 사람은 재빨리 휴대폰으로 정은의 자격증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고의로 큰소리로 말했다.“어머! 정말 나왔어! 정보도 일치하고, 등급도 일치한데, 확실히 조작하지 않았어.”연희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자격증이 있으면 또 뭐가 달라지는데요? 그렇다고 다례가 정말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할 순 없잖아요. 지금 자경증으로 남을 속이는 사람 엄청 많아요. 돈으로 고급 다례사라는 증명을 받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죠.”정은은 연희가 이렇게 말할 줄 예상한 듯 고개를 들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지금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봐요. 내가 어떻게 이 자격증을 땄는지.”말이 끝나자, 정은은 손을 움직였다.그녀는 전원을 켜고 주전자에 물을 넣으며 말했다.“차를 우려내는 과정은 총 7단계가 있어요. 우선 물을 끓이는 것이죠. 물은 차를 우려내는 것이 관건인데, 맑은 샘물이 가장 좋으며, 그 물을 끓여야 해요.”“다음은 주전자를 따뜻하게 하는 거예요. 끓는 물로 주전자를 씻으면, 주전자의 온도를 높일 수 있고, 찻잎의 향기가 퍼지는 데 도움이 되죠. 동시에 다기를 씻는 목적도 달성해서 청결을 보장할 수 있어요.”“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차를 넣는 거예요. 적당한 찻잎을 넣어야지, 너무 많이 넣으면 차가 씁쓸해질 것이고, 너무 적으면 맛이 싱거울 거예요. 따라서 찻잎을 넣을 때 양을
“‘늙으면 떠나는 친구들과 차를 함께 마실 수도 없네’, ‘양을 잡을 때 술을 마시면서 또 차를 마셔야 제맛이다’라는 위인들의 평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겠죠.”“고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여전히 모여 차를 음미하는 것은 그 속의 인생을 깨닫고, 생명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겠어요?”“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네요. 봄이 찾아와도 차가 있길 바라며, 해마다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감사합니다.”말이 끝나자, 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현장은 한순간에 고요했지만, 이어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어머!”“선생님 말씀을 너무 잘하시네!”도연 가구의 도 부인은 전에 차를 재배하고 차를 팔아서 가구 장사를 하게 되었다.그녀는 오늘 훌륭한 스승이 강의를 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찾아왔다.그러나 임시로 젊은 다례사로 바꾸자, 도 부인도 마음속에 불만이 있었다.젊으니 경험이 없을 것이고, 아는 것도 얼마 없는 게 분명했다.그러나 정은의 우아한 차를 만드는 과정과 흥미진진한 설명, 시와 옛말까지 인용하는 것을 보며, 도 부인은 정말 깜짝 놀랐다.많은 다례사들은 시작하자마자 이론과 도리를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차를 우려내라고 하면 정말 볼품도 없었다.찻잎으로 부자가 된 도 부인은 어릴 때부터 차 향기를 맡으며 자랐기에, 그런 사람이 정말 눈에 거슬렸다.그러나 정은은 달랐다!말을 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를 우려내는 기술도 대단했다.전반 과정은 여유롭고 거침이 없었으니, 매 단계를 정확하게 통제했다.‘정말 훌륭해!’정은은 무대에서 내려와 연희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이제, 내가 실력으로 자격증을 땄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지?”“너...” 연희는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쳤다.“그럼 이제 너도 네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만약 정말 내놓을 수 있다면, 저에게 어떻게 사과하라고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됐죠?”연희는
“서 여사, 당신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버릇이 없는 거야? 그럼 안 되는데. 그래도 데리고 가서 잘 가르쳐 준 다음 다시 데리고 나와. 강씨 가문의 체면이 깎여도 창피하지 않나 봐!”“나도 서 여사의 안목이 이렇게 나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대체 어디서 찾아온 사람이에요? 너무 철이 없네요!”다른 사람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는데, 연희를 바라보는 눈빛은 의심과 경멸을 품고 있었다.‘그 집안 아들은 바람을 피워도 좋은 여자를 찾지 않고, 이런 사람을 골랐다니.’연희는 이런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서영숙은 자신의 출신 때문에 줄곧 귀부인들의 무시를 당했다. 다년간의 노력을 거쳐 사람들은 가까스로 그녀를 받아들였지만, 서연희 때문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다니. 심지어 사람들의 비웃음에 서영숙은 또다시 고개를 들 수 없었다.그녀는 화가 나면서도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 아이를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잘 준비하라고 타일렀지만 이게 뭐야? 이런 식으로 준비해! 게다가 소정은을 겨냥하다고 도리어 자신이 당하다니. 정말 창피하다 창피해!’서영숙은 연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왜 가만히 있는 거야?! 빨리 사과하지 않고! 누가 너더러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게 굴라고 했니? 장소를 가릴 줄도 모르고 막말을 하다니, 교양도 없어.”연희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사슴처럼 초롱초롱한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엄청 불쌍해 보였다.그러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여자들이었고, 연희의 생쇼를 보는 남자가 없었다. 이런 모습은 심지어 대부분 귀부인들의 반감을 샀다.특히 강서원은 언뜻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서 고개를 홱 돌렸다.연희는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자, 입술을 깨물고 정은을 바라보았다.“제가 어떻게 사과했으면 좋겠어요?”정은은 아직 볼록 튀어나오지 않은 연희의 배를 바라보았다. 지금 더 이상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고, 도겸도 정은에게 있어 그저 남일 뿐이었다. 원한도 미움도 없으니
정은은 약간 어색해했다.“그게 뭐라고 자랑을 하겠어요...”정은은 도겸과 함께 6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처음 2년 동안 그녀는 대학에 다녔지만, 남은 시간은 오직 별장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매일 매일 도겸을 에워싸며 자신의 인생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사랑으로 엮은 새장으로 정은을 가두었다. 그러나 새장 속에 있으면서 정은도 나름 많은 공부를 했다.도겸의 일상생활을 돌보는 것 외에, 정은은 책을 읽고 독학하면서 여러 가지 취미를 양성했다.두 사람의 감정이 점차 사라질 때, 도겸은 집으로 돌아가는 횟수가 갈수록 적어졌고, 정은은 마침내 자신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그녀는 많은 수업을 신청하면서 자격증도 많이 땄는데, 자신의 일정을 꽉 채웠다.정은은 어릴 때부터 소정헌이 한 말을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공부는 끝이 없으니, 사람은 늙을 때까지 배워야 해.’게다가 할 줄 아는 게 더 많을수록, 미래에 선택이 더 많아질 것이다.아마도 정은은 종래로 도겸을 의지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수업이 끝나자, 정은은 아직 떠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또 이 귀부인들이 차를 끓이는 것을 지도해야 했기 때문이다.정은이 강의하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절차를 따라 차를 우려냈다.“소 선생님, 내 차가 어떤지 한 번 드셔보세요?”“내 것도 좀 드셔보세요. 평가도 좀 해 주시고요.”“나도!”어쩔 수 없었던 정은은 모든 사람의 차를 한 번 맛본 다음,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내렸다.도 부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윽한 차 향기는 뚜껑을 열기도 전에 이미 유유히 전해져 왔다.그녀는 약간 놀랐다. “이것은 용정차죠?”도 부인은 몸매가 통통했기에 웃을 때 친근감이 있었다.“맞아요, 이것은 명전 용정인데, 작년에 수입한 것들이에요. 맛이 어떤지 한 번 드셔보세요.”정은은 차 뚜껑을 열었다. 찻잎이 매끄럽고, 차의 빛깔도 밝으며 냄새만 맡아도 짙은 향기가 났는데, 이것은 특급 용정차였다.그녀는 매우 의아했다. 대부분의 귀부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