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갑자기 미진이 말한 것을 떠올렸다. 서비대학교 근처에는 치한이 하나 있는데, 특히 밤에 여학생을 미행하길 좋아했다.이미 한 여자애가 그 변태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경찰에 신고한 뒤 줄곧 그 사람을 잡지 못했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정은은 숨이 멎더니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하지만 뒤의 발자국 소리도 점차 빨라졌다.그녀는 손을 가방에 넣었다.비록 늘 재석과 함께 출퇴근했지만, 가끔 바쁠 때면 두 사람은 퇴근 시간이 완전히 엇갈렸다.정은은 또 혼자 살기 때문에 호신용 스프레이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자신을 지켰다.오늘 이것을 쓸 때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 사람의 그림자도 바짝 뒤쫓아왔는데, 마치 정은의 그림자를 덮으려는 것 같았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손은 이미 가방에 들어가 차가운 스프레이와 닿았다.정은이 용기를 내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 손을 쓸 준비를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은아!”그녀는 고개를 들었다.현빈이 우산을 쓰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정은의 뒤를 바라보았다.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그 사람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도망쳤다.현빈이 성큼성큼 다가왔고, 차갑던 표정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많이 놀랐지?”정은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옷이 이미 식은땀에 젖었고 손발도 나른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현빈은 정은을 부축하며 핸드폰을 꺼냈다.“응, 송 비서, 서비대 근처에 여학생을 미행하는 치한이 있으니 잘 주의해 봐... 응, 소식 생기면 나에게 알려줘.”정은은 아직도 두려움에 잠겨 말을 하지 못했다.현빈은 마음이 아파서 정은을 안으며 힘을 주고 싶었지만, 결국 손을 내려놓았다.“괜찮아?”만약 선우가 여기에 있었다면 직접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현빈은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과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정말 오래 살다 볼
“정말 멋있다, 반했다, 우리 사귀자, 내 남자친구로 되어줘... 뭐 이런 거.”“정말 갈수록 심한 말이네요.” 정은은 웃었다.“내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과감하게 생각을 하는 거야.”“그럼 생각만 해요.”현빈은 그녀의 완곡한 거절을 못 알아들은 듯 웃으며 말했다.“먼저 생각한 다음 다시 시도하자.”“꼭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정은은 일부러 그에게 찬물을 끼얹었다.“괜찮아, 노력을 해야 아쉬움이 남지 않는 법. 내가 정말 해낼지도 모르잖아?”정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현빈은 그녀를 계단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올라가.”“고마워요.”“무슨 일 있으면 나에게 전화해. 무슨 일어도 네 앞에 나타날 테니까.”“네.”“이거 봐, 또 날 얼버무리고 있잖아. 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응, 일단 동의하자. 어차피 정말 돌발 상황이 닥쳐도 심현빈에게 전화하지 않을 테니까.”정은은 입가를 실룩거렸다.“나도 네가 독립적이고, 혼자 사는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러나 가끔은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했으면 좋겠어. 가장 먼저 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쨌든 내 생각을 좀 하면 안 될까?”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이제 얼른 올라가.”현빈은 정은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녀 방의 불이 켜진 것을 보고서야 몸을 돌려 떠났다....연희는 별장에서 이주 넘게 휴양을 했고, 뱃속의 태아도 점차 안정되었다.그동안 사람들이 시중들고 연희를 돌본 데다가, 도겸이 집에 돌아가지 않아 아무도 그녀를 욕하고 모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입덧기가 지나자, 연희는 안색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3kg로 더 쪘다.그러나 서영숙은 달랐다. 종으로 부려먹으면 그만이지만, 수시로 연희의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살이 빠지진 않았지만, 안색은 무척 초췌해졌다.탈모가 심할 뿐만 아니라 밤에 잠도 잘 못 잤다.연희는 갑자기 무엇
도겸의 비서였다.도겸은 아주 중요한 서류를 서재에 두었으니, 지금 바로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상업기밀과 관계된 일인데다 또 그렇게 긴급했으니 서영숙은 얼른 비서를 데리고 서재로 갔다.“이건가?”“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그럼 됐어, 빨리 도겸에게 보내줘.”연희는 꾸물거리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과 어깨를 스치다가, 문득 서재 문이 잘 닫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좌우를 두리번거리자, 2층 복도는 조용했다. 서영숙은 이미 비서를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연희는 눈알을 굴림 그 문을 살짝 열었다...한식 스타일의 L형 책장은 위에서 아래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안에는 서류가 가득 놓여 있었다.창가에는 다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복숭아나무로 만든 다기 한 세트가 놓여 있었다.왼쪽으로 가면 옅은 색의 나무 탁자가 있었고, 위에는 필통과 몇 권의 책이 있었다.왕미자가 정기적으로 들어와 청소하는 것 외에, 이 서재는 평소에 항상 잠긴 상태였다.연희는 더욱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하지만 난 이렇게 당당하게 들어왔잖아?’여기까지 생각하자, 연희는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탁자 위에 두개의 서류 봉투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봉인이 되지 않았다.연희는 하나를 집어 들어 안에 있는 A4 용지를 꺼내 보았는데, 모두 모르는 전문 용어와 숫자들이었다.물론 그녀도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중 한 장을 꺼낸 다음 다른 한 서류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꾸몄다.이때 서영숙의 목소리가 발자국 소리와 함께 울렸다.“이모님, 서연희는요? 방금까지 여기에 있었잖아요? 또 어디 갔어요?”연희는 당황해하며 얼른 속도를 높였고, 서영숙이 찾아오기 전에 서재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왔다.그리고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는 척했다.서영숙은 눈살을 찌푸렸다.“너 방금 햇볕을 쬐러 간다고 하지 않았니? 어떻게 위층에 있는 거야?”연희는 담담하게 웃었다.“밖이 너무 더워서
서영숙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입 닥쳐, 지금 내 아들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끼어드는 거야!”그녀는 도겸을 바라보며 설명했다.“어제 난 확실히 네 서재에 들어간 적이 있어. 비서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하지만 난 정말 서랍밖에 열지 않았어. 네가 원하는 그 서류를 가져다준 다음, 다른 물건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그럼 이모님이 청소하다가 실수로 건드린 건 아닐까?”왕미자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도련님께서는 청소할 때 서재에 있는 물건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저는 이 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매번 아주 조심스럽게 청소를 했습니다.”“이모님은 아닐 거예요. 서재는 일주일에 한 번만 청소하니까요. 어제는 청소할 시간이 아니었어요.”도겸이 말했다.연희는 보신탕을 천천히 떠서 입에 넣었다.“저도 서재의 열쇠가 없으니 전혀 들어갈 수가 없죠. 그러니 저일 리가 더더욱 없고요. 이렇게 보면 아주머니일 수밖에 없네요.”서영숙은 연희가 비아냥거리는 것을 듣고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지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은 내 아들의 서류이니, 내가 왜 함부로 건드리겠어? 난 바보도 아닌데, 이렇게 하면 나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냐고?”연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그걸 누가 알겠어요? 어차피 제가 한 건 아니에요. 게다가 며칠 전에 누군가 일부러 짜증을 냈잖아요?”사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작은 일이었다. 서영숙은 항상 말을 마음대로 내뱉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그런 적도 많았지만, 이 시점에서 연희가 이렇게 말하니,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도겸은 안을 살펴보았다. 서류는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마치 누군가 고의로 장난을 친 것처럼, 두 부의 서류에서 각각 한 페이지를 바꾸었다.서영숙이라고 해도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필경 그동안 도겸은 별장에 돌아가지 않았고, 서영숙의 전화도 받지 않았으니, 그녀가 마음속의 불만을 발산하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었다.“됐어요,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맙소사! 드디어 이 미친 여자에게서 벗어나는 건가? 흑흑... 하나님이시여!’사람들은 처음으로 서영숙이 최고라고 느꼈다.얼마 지나지 않아, 큰 별장에는 연희 혼자만 남았다.그녀는 텅 빈 거실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깊은 밤, 강씨 가문 본가에서.서정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서영숙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안마사가 그녀의 어깨와 목을 마사지하고 있었다.“엄마? 돌아왔어요?”“응.”“그 서연희를 모시러... 아니다! 그 여자를 챙겨주러 가지 않았어요?”‘두 주일이나 넘었는데, 왜 미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돌아온 거지? 이상해!’서영숙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여자 언급하지 마,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나니까!”“무슨 일인데요?” 서정은 그녀의 곁에 앉았다.“얼른 말씀해 보세요!”서영숙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별장에서 받은 괴롭힘을 하나하나 세어 서정에게 들려주었다.후에 안마사도 마사지를 하지 않고, 일어서서 팔을 안으며 연희를 마구 욕하기 시작했다.“그 여자보다 더 천한 것을 본 적이 없다니깐! 진작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소정은과 사귀게 내버려두었을걸!”적어도 정은은 연희보다 인내심이 있고, 소질이 있으며 단정하고 예의가 있었다.말하지 않으면 몰라도, 이렇게 비교하니 서영숙은 정말 후회막급이었다.서정은 자신의 엄마가 이토록 화가 난 것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되려 열받았다.‘지난번에 뺨을 때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나 봐. 몇 대 더 때렸어야 했는데!’“그리고 네 오빠도 그래.” 도겸을 언급하자, 서영숙은 더욱 억울했다.“뜻밖에도 그 계집애의 말을 듣고, 내가 서재의 서류를 건드렸다고 믿는 거야. 심지어 내가 발뺌을 하고 있다고 말했어! 차라리 그 천한 것을 믿을지언정 날 믿지 않다니! 난 너희들 친엄마잖아!”“오빠도 너무해요! 내가 바로 전화할게요...”말을 마치자마자 서정은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서영숙도 막지
도겸은 보드카 한 병을 주문한 다음, 한 잔, 두 잔 계속 마셨다...선우는 그가 술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렸다.“형, 이 술은 너무 독하니까 좀 적게 마셔!”‘그러다 또 병원에 들어가지 말고...’도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계속 술잔을 들고 있으며 내려놓지 않았다.“너의 핸드폰은? 이리 줘.”“내 핸드폰은 또 왜요?” 선우는 의혹을 느끼며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도겸은 바로 빼앗아오더니 즉시 정은의 번호를 눌렀다.곧 맞은편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사막에서 떠돌아다니다 마침내 수원을 찾은 사람인 것처럼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정은아, 보고 싶어...”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아... 앞으로 정은 누나는 내 전화조차 받지 않겠지?’“정은아, 돌아와, 응? 내가 잘못했어... 전에 분명히 함께 백년해로하기로 약속했잖아. 이제 겨우 몇 년이 지났다고 날 버리려는 거야? 지나간 일은 다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네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든, 일하고 싶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너와 함께 할게. 난 무조건 널 응원할 거야... 그리고 우리 작년에 약속했잖아, 같이 터키에 가서 일몰을 보고 별을 세기로. 다 잊은 거야?”도겸은 잠긴 목소리로 한꺼번에 말을 다 했고, 정말 너무나도 비천했다.그러나 맞은편은 시종 침묵하며 대답하지 않았다.도겸은 계속해서 말했다.“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야 네가 날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알게 되었단 말이야... 정은아, 사랑해, 나 정말 너 없으면 안 돼...”정은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말 다 했어?]그러나 도겸의 예상과 달리, 정은은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아빠가 된다는 소식 들었어, 축하해.]뚜- 뚜- 뚜-정은은 말 한 마디로 도겸을 철저히 지옥으로 몰아넣었다.도겸의 두 눈은 초점을 잃었고,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도 힘없이 드리워졌다.‘날 축하한대. 하하... 날 축하한다니?! 정은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어! 나
감시 화면에 나타난 시간은 오후 6시였고, 넓은 거실에서 정은은 혼자 소파에 앉아있었다.도겸은 단번에 그녀가 자신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핸드폰도 놀지 않으며 그냥 이렇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시들고 있는 장미와 같았다.원래 도겸이 좋아하던 ‘집의 느낌’은 한 여자가 하루하루 타협하고, 싫증조차 내지 않은 기다림, 심지어 자아를 완전히 포기란 희생으로 바꿔온 것이었다. 그가 언제 돌아오든 거실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다.“어렸을 때 아버지는 일하느라 바쁘셨고, 어머니는 놀러다니느라 바쁘셨어. 그럼 난 혼자 집에 남아 이모님과 함께 했지. 그래서 비록 부모님이 모두 계시고, 집안 형편도 아주 좋지만, 난 지금까지 포근하고 따뜻한 집의 느낌을 느끼지 못했어...”“정은아, 난 가끔 정말 네가 부러워... 간단하고 깨끗한 가족 관계, 한 쌍의 금슬이 좋은 부모님, 그리고 어릴 때부터 사랑으로 널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널 위한 모든 일이라면 직접 나서셨잖아...”“오늘까지도 내 부모님은 돈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셔. 돈을 쓰면 좋은 아들을 키울 수 있고. 만약 이 아이가 좋지 않다면, 틀림없이 돈을 많이 쓰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실 거야.”“정은아, 내가 널 만난 게 너무나도 큰 행운인 것 같아. 네가 나로 하여금 이런 따뜻함을 느끼게 했거든...”“너와 함께 한 후로, 내 머릿속에는 항상 이런 화면이 나타났어. 퇴근하자마자 네가 주방에서 바쁘게 돌아치는 모습, 아이가 거실에서 놀고 있는 모습. 우리 가족은 세 식구 심지어 네 식구 다섯 식구는 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있었어...”“식사를 한 후, 아이들은 정원에서 놀고, 넌 그네에 앉아 있었어. 그럼 난 네 뒤에 서서 가볍게 널 밀었고.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이 서로를 쫓아다니며 웃고 떠드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정은아, 날 믿어. 우리는 계속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늙은이가 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도겸은 최근 한 달의 감시 화면을 기록한 파일을 클릭했다.연희는 이미 잠들었다. 아래층에서 어렴풋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바로 정신을 차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떠날 때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이제 겨우 몇 시간 지났다고. 결국 이렇게 다시 돌아왔잖아? 흥, 재벌 집안 사모님도 별거 아니네! 아니면 정말 나 혼자 여기에 내버려두든가. 어차피 내 뱃속의 아이로 천 억을 바꿀 수 있으니까. 누가 누굴 무서워한다는 거야?’서영숙이 돌아오면 왕미자와 임강주 그들도 함께 돌아올 것이다. ‘마침 배도 고프니 이모님에게 보신탕 좀 끓여 달라고 해야지.’연희는 거실과 주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의혹을 느끼며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이때 연희는 현관에 남자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도겸 씨가 돌아온 거야?’생각을 하다가 연희는 얼른 침실로 돌아가서 섹시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서재로 걸어갔다.똑똑-“도겸 오빠, 돌아왔어요?”그녀는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서재의 불이 켜져 있었으니 도겸 말고 또 누가 안에 있겠는가?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연희는 흥분한 심정을 꾹 누르며 웃으며 문을 밀었다.“도겸 오빠...”도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빨간색 레이스로 된 잠옷 치마를 입고 있었다. 가슴이 푹 파인 스타일에 가느다란 끈 두 개가 새하얀 어깨에 걸려 있었다.경망스럽고 저속한 모습이었다.남자가 자신을 쫓아내지 않자, 연희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오셨어요? 또 야근하신 거예요? 이주 동안 계속 힘들게 일하셨으니 많이 피곤하시겠죠? 자, 제가 안마해드릴게요...”연희는 남자가 그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일에 적당한 핑계를 찾았다. 그리고 마치 전에 다투지 않았던 것처럼 활짝 웃었다.연희가 비위를 맞추며 가식적으로 웃는 것을 보면서 도겸은 화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