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는 화가 나서 눈물을 흘리더니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나한테 돈이 없다고! 없어! 정말 한 푼도 없다니까! 날 죽여도 돈이 없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그러나 이순정의 귓속으로 유독 연희에게 돈이 없다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돈이 없으면 남자와 자든가! 자면 돈이 생기는 거잖아?! 어릴 때부터 가르쳤던 건데, 넌 왜 아직도 그렇게 멍청한 거야?!]“남자랑 자라고? 난 이미 버림을 받았으니 누구랑 자겠어?!”연희가 소리쳤다.이순정은 눈알을 굴리며 그제야 연희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앞으로 계속 자신의 딸에게서 돈을 뜯어내야 했기에, 이순정은 마침내 카드놀이를 그만 두고 조용한 곳을 찾아 전화를 받았다.[버림을 받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그 돈 많은 남자친구는? 저번에 곧 재벌 집안 며느리로 된다고 하지 않았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람들이 후회라도 한 거야 뭐야?]연희는 이순정이 흥분해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억울함이 밀려오자, 연희는 울면서 최근 발생한 일을 전부 말했다.이순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사람들 정말 너무하네! 내 딸을 임신시켜 놓고, 이제 싫다고 바로 차 버리는 거야?]‘게다가 아무런 보상도 없다니, 이게 뭐야!’여기까지 생각하자 이순정은 눈빛이 밝아졌다.[연희야, 기다려, 엄마와 네 동생이 바로 표 끊어서 널 찾아갈 테니까! 이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어!]...정은의 논문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녀는 그동안 줄곧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조미진도 그런 정은을 보며 감탄을 참지 못했다.“넌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니!”정은은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조수도 팀원도 없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점심 시간에 정은은 점심을 먹고 평소대로 휴식실에 가서 쉬었다.아무리 바빠도 정은은 자신에게 휴식 시간을 비워뒀다. 푹 쉬어야 오후에 일을 할 때 더 효율적이었다.조재석은 오늘 수업이 꽉
점심시간이라 실험실은 무척 조용했다.재석은 자신의 휴식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먼저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또 얼굴을 닦은 다음 그제야 안쪽으로 걸어갔다.그의 옷은 모두 안방에 있었다.문을 열고 장롱 앞으로 걸어간 다음, 재석은 셔츠 단추를 풀면서 옷을 꺼냈다.정은은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 이미 잠에서 깨어났다.정은의 접이식 침대는 문 뒤에 놓여 있었는데, 문을 밀자 마침 그녀를 가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은폐하다고 해서 안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단지 쉽게 발견되지 않을 뿐,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니까.그래서 정은은 눈을 뜨자마자 남자가 셔츠를 벗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미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정은은 어안이 벙벙했다.입을 열어 상대방을 일깨워 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남자는 이미 옷을 다 벗었다.이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을 열면 두 사람은 더욱 난처해질 뿐이었다.그래서 정은은 눈을 감고 계속 자는 척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기 전에 본 그 장면은 눈앞에 훤했다. 남자의 벌거벗은 등, 튼튼한 근육,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가 걷잡을 수 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것도 아주 선명했다.정은은 문득 자신이 도둑으로 된 느낌이 들었다.재석은 깨끗한 셔츠로 갈아입고, 또 더러워진 그 옷을 잘 갠 다음 떠날 준비를 했다.몸을 돌린 순간, 그는 문 뒤에 드러난 접이식 침대의 한 모서리를 발견했다.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재석은 숨이 멎으며 몸이 뻣뻣해졌다.그는 가볍게 문 쪽으로 걸어와 천천히 문을 끌어당겼다.아니다 다를까, 정은이 접이식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도 있었다.그러나 그 모습을 보니 정은은 깨어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재석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니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소녀는 지금 한창 잘 자고 있었다. 꼭 감은 두 눈, 속눈썹은 길고 촘촘해서 두 부채와도 같았다.하지만 담요가 한쪽에 떨어져 있었다.재석은 담요를 주워 살며시 덮어주었다. 여자애의 깊이 잠든 얼
“그래, 넌 학교장보다 더 바쁜 것 같아...”“그럼 먼저 갈게.”“참, 너한테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 뭘 가지러 돌아온 거야?” 진욱은 재석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아.”...재석이 떠난 후, 정은은 다시 잠을 좀 잤다.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자지 않으면 오후에 정신이 들지 않을 것이고, 효율에 영향을 줄 것이다.오후 두 시, 정은은 일어나서 간단하게 얼굴을 씻은 다음, 실험대로 돌아왔다.미진 그들도 휴식을 마치고 다시 자리로 복귀했다.“정은아, 넌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간 거야? 더워서 그래?”‘응?’정은은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빨갛다고요? 그럼 아마도 더워서...”“안방에 에어컨을 틀지 않았어? 그런데도 더운 거야?”“오늘 깜빡했어요...”“그래, 너도 조 교수처럼 더위를 타는구나. 방금 휴식실 밖에서 조 교수를 만났는데, 더워서 얼굴이 다 빨개졌더라.”미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조 교수님의 얼굴이 빨개졌다고? 어머, 정은아, 너 얼굴이 아까보다 더 빨개진 것 같아. 태민아, 에어컨 온도 좀 낮춰...”‘내 얼굴이 빨갛다고? 에이 설마!’...그렇게 또 다른 바쁜 하루가 끝났다. 오늘 야근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정은은 제시간에 실험실을 떠났다.집에 가는 길에 먼저 마트에 들렀다. 이 시간에 시장은 이미 문을 닫았기에 채소를 사려면 마트에 갈 수밖에 없었다.채소를 산 다음 집에 돌아온 정은은 30분 안으로 두 가지 요리와 국 하나를 만들었다.정은은 핸드폰을 앞에 놓은 다음 밥을 먹으면서 소진헌과 영상 통화를 했다.“아빠, 왜 밤늦게까지 그 화초들을 정리하고 있는 거예요? 엄마한테 욕 먹는 거 아니에요?”[네 엄마는 한창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으니 날 상대할 시간이 없어.]“요즘 영감이 이렇게 많은 거예요?” 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편집장과 싸우지 않으면 기분이 좋고, 기분이 좋으면 영감도 당연히 많아지는 게 아니겠어?]소진헌은 잠시
[이 작가님은 그동안 편집장에게 아주 심하게 발목을 잡힌 셈이에요.]이 말을 들은 정은은 마음이 무거워졌다.나석천은 이미숙과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다.“제 어머니가 L시에 계신 데다가 전의 계약이 아직 만료되지 않았어요. 섣불리 알려드리다가 괜히 어머니의 창작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거든요.”나석천은 계약이란 말을 듣자마자 바로 정은에게 찍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급하지 않아요. 일단 이 작가의 계약서를 연구해 볼게요.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무슨 상황이 생겨도 난 꼭 이 작가님과 계약을 해야겠어요!]이 말을 듣자, 정은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느꼈다.그러나 상대방은 확실히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석천은 확실히 작가와 계약하지 않고 오직 작품만 보는 사람이었다.정은은 상대방이 말실수를 했거나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소진헌은 딸이 갑자기 엄숙해진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하던 일을 멈추었다.[왜 그래, 정은아? 네 엄마와 그 편집장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네, 하지만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라서 이미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일단 엄마에게 말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부의 영향을 받기 쉽잖아요.”[그래, 나도 주의할게.]통화가 끝나자, 밥도 다 먹었다.정은은 주방을 정리한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가 쓰레기를 버렸다.시간이 아직 일러서 그녀는 혼자서 근처를 돌아다니며 소화할 겸 산책을 했다.초여름의 밤바람은 촉촉해서, 얼굴에 떨어지니 무척 편안했다.그렇게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지난번에 치한에게 미행을 당한 일 때문에 정은은 아직도 많이 놀라서 감히 밖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갔다.샤워를 마친 정은은 책상 앞에 앉아 논문을 읽으면서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잠자기 전의 ‘필수 과목’이라 매일 빠지지 않았다.이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톡인 것을 보자 정은은 클릭했다.심현빈이었다.[아직도 일하고 있어?][무슨 일이죠?][심심해서 널 찾은 건데, 안 돼?]정은은 어떻게
7시 30분, 정은은 실험실에 도착했다.다른 사람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때 휴식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발자국 소리와 함께 재석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 모두 멍해졌다.재석은 자신이 어제 황급히 도망친 것을 생각하니 표정이 좀 부자연스러웠다.정은은 무심코 본 그 장면과 자는 척한 자신을 회상하며 마찬가지로 어색함을 느꼈다.“좋은 아침.”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얼른 자신의 실험대로 가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심지어 가져온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는 것을 잊어버렸다.“마침 탕비실에 가려던 참인데, 내가 냉장고에 넣어 줄게.”“고마워요, 선배님.”점심시간, 정은은 실험실을 떠났다.강의동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현빈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남자는 셔츠를 입었는데, 옷깃이 약간 열려 있는 데다가 양복 바지까지 더하니 나른할 뿐만 아니라 또 도도해 보였다.“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어요?” “나도 금방 도착했어.”“성 교수님에게 무슨 일 있는 거예요?”남자는 서류 하나를 꺼내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이건 성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낸 기말고사에 시험지야. 교수님은 게으르셔서 쓰고 싶지 않으니 나더러 문제를 푼 다음, 참고 답안까지 하나 더 내라고 하셨어. 그럼 대학원 학생들에게 채점하라고 맡길 수 있으니까.”성달수는 일을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고, 전부 현빈에게 떠넘겼다.그러나 이것은 가장 지나친 일이 아니었다. “난 문제도 다 풀었고, 참고 답안까지 냈는데 글쎄 안심할 수 없다며 네가 대신 검사를 해야 한다는 거야. 내가 한 게 틀릴 수도 있다면서!”이 문제들은 모두 지난번에 정은이 낸 것이었다.성달수는 이렇게 말했다.“정은이 자신이 낸 문제를 검사하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나 정말 똑똑하다니깐!’현빈이 물었다.“그럼 교수님이 스스로 검사해 보시면 되잖아요?”성달수는 잠시 생각했다.
정은과 현빈은 돌 탁자 앞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여자애는 표정이 엄숙했고, 남자는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현빈의 입가에 나타난 미소를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먼 거리를 두고도 남자가 여자를 꼬시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했다.재석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다음 순간, 그는 핸드폰을 꺼내 진욱에게 전화했다.[어, 재석아, 무슨 일이야?]“밀크티 마실래?”[어?]진욱은 핸드폰을 바라보더니 확실히 재석의 번호인 것을 확인했다.[무슨 일인데? 갑자기 무슨 밀크티야?]“마실 거야? 내가 살게.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봐.”진욱은 즉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조 교수님이 밀크티를 사겠다는데, 안 마시는 사람 손 들어! 좋아, 없군. 우리 모두 마실 거야.]“그래. 내가 사올게.”[아니... 그냥 배달시키면 되잖아, 아주 편리한데. 왜 직접 가서 사려는 거니?]“마침 밖에 있어서. 무슨 밀크티 마실 건데?”[어느 가게에 갈 거야?]재석은 아무 밀크티 가게의 이름을 하나 말했다.[난 스페셜 오레오 밀크티 마실래. 우유 추가하고 타로볼 넣어줘. 설탕과 얼음은 싫어. 참, 치즈 좀 많이 넣어달라고 해줘, 고마워. 미진아...]재석은 이마를 짚었다.“이거 너무 복잡해서 기억할 수가 없어.”진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장난해! 재석이 넌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기억력을 갖고 있잖아! 평소에 그렇게 복잡한 실험 데이터도 한 번 보면 머릿속에 기억할 수 있는데, 이게 복잡하다니?’“이거 정은이에게 보내. 나 방금 아래층에서 정은이 봤으니 우리 같이 사러 가면 되니까.”[알았어! 이거 좋네! 내가 바로 정은이에게 보낼게...]통화를 마친 후, 진욱은 머리를 숙이고 재빨리 타자를 했다.“됐어! 발송!”그리고 음성 문자를 보냈다.“그럼 우리 정은이가 고생 좀 해줘.”순간, 진욱은 멈칫했다.‘이건 아니지! 재석이 밀크티를 사러 갔으니, 재석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 더 편리하지 않
말하면서 정은은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다.“그럼 먼저 갈게요.”현빈은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그래. 또 보자.”“네. 가요, 선배님. 그 밀크티 가게는 마침 우리 아파트 근처에 있어요. 이 길을 건너면 바로 도착할 거예요.”‘지난번에 심현빈 씨와 얘기할 때 갔었는데.’...“밀크티 왔어요!”미진, 진욱과 태민은 이 말을 듣고 얼른 달려왔다.“조 교수 고마워, 수고했어, 정은아!”“바쁜 두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니, 정말 미안해요!”진욱은 빨대를 꽂고 홀짝였다.“캬, 맛있네.”미진이 물었다.“그렇게 맛있어?”태민은 자신과 수아의 것을 가지고 웃으며 재석과 정은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수아 앞으로 달려갔다.“수아야, 이거 네 거야.”“아.”정은이 뜻밖에도 재석과 함께 밀크티를 사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마음이 내려앉더니 입맛이 사라졌다.하필 태민은 옆에서 계속 수아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수아야, 너 왜 안 마셔?”“이따 크림이 녹으면 맛이 없을 거야.”“자, 내가 빨대 꽂아줄게.”수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정말 짜증 나네요! 계속 중얼중얼거리다니! 제발 부탁하는데, 말 좀 줄이면 안 돼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자리를 떴다.태민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입도 마시지 않은 수아의 밀크티를 보았다.“아까 물어볼 땐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는데.”‘왜 사왔는데 오히려 한쪽에 던진 거지? 이건 낭비 아닌가?’아마도 태민은 영원히 수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두 사람의 차이였다. 이런 차이는 학력과 사상에서 생기는 게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자란 환경, 가정의 교육방식이 가져다준 천연적인 차이였다.수아가 거절하지 않은 것은 밀크티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밀크티를 산 사람이 재석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그녀는 신선한 공기 좀 마시려고 복도에 나왔다.마침 핸드폰이 울렸고 수아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 수아야, 지난번에 집 좀 구해달라고 했잖아, 내가 이
“수아야?” 태민은 다시 한번 수아를 불렀다.“왜요?” “방금 부동상에게 연락해서 집을 구하고 있었던 거야?”수아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태민이 계속 물을까 봐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뭘 그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선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태민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난 네 남자친구잖아, 그러니 널 관심하는 것도 당연하지.”“내 남자친구예요 아니면 내 아빠예요? 잔소리가 왜 그렇게 많아요?”“내가 너무 잔소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말 줄일게.”태민은 수아가 자신 때문에 불쾌할까 봐 무척 조심스러웠다.그가 더 이상 집을 구하는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자, 수아는 은근히 한숨을 돌리며 말투도 누그러졌다.“이거 줘요.”그녀는 손을 내밀었다.“어?”“손에 있는 그 밀크티 말이에요, 저한테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에요?”“어, 맞아! 깜박할 뻔했네...”태민은 웃으며 말했다....또 실험실에서 일주일을 보내자, 정은은 두 조의 데이터를 완성했다.마침내 진도를 따라잡은 셈이었다.토요일, 정은은 자신에게 휴가를 주었다.“정은 씨, 오랜만이에요. 이미 날 잊은 거예요?”수민은 페라리 오픈카를 몰고 그녀의 곁에 멈추었다.창가에 손을 얹고 선글라스를 벗으니 예쁘고 고운 눈이 나타났다.바람은 수민의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불었고, 검은색 점프슈트에 개성 있는 허리띠를 하니 시크하면서도 멋있어 보였다.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며 안전벨트를 맸다.“내가 어떻게 감히 널 잊어버리겠어? 누굴 잊어도 우리 여왕님을 잊어서는 안 되지.”수민은 하얗고 여린 정은의 얼굴을 비볐다.“이주 동안 보지 못했는데, 꿀을 먹은 거야? 말을 어쩜 이렇게 잘할까?”“꿀을 먹을 필요가 없어. 나 원래 달콤해.”“네, 네! 네가 제일 달콤하네요. 자, 이 여왕님이 맛있는 거 사줄게!”“그래!”“정은아, 넌 너무 얌전한 거 아니니? 내가 남자라면 바로 너와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거야!”‘그럼 강도겸 그 찌질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