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되살아난 기억에 정은은 당황하기 그지없었다.‘남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린 사람이 나라고?’남자와 눈을 마주치자, 정은은 어색해서 땅만 바라보았다.“생각났어?”“미안해요, 난...”“그런 문제를 물어볼 필요가 있겠어? 당연히 안 되지. 남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드럼도 아니고. 너도 말했잖아. 많이 두드리면 바보가 된다고.”재석의 말 한마디에 어색한 분위기가 좀 풀렸다.“그럼 왜 내 머리를 두드린 거예요...”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기억이 돌아오자, 정은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분명히 선배님이 먼저 날 건드렸는데...’재석은 정색했다.“그래도 술 좀 적게 마셔. 맛있어도 욕심 부리지 말고.”“네.”정은은 또 어찌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손을 씻고 돌아온 소진헌은 차를 들고 한 입에 마셨다.재석은 천천히 음미하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술에 관한 얘기요...”“참, 조 교수, 자네 점심에 여기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건 어떤가? 우리 술 한 잔 하자고. 지난번에 그 원자력 발전 신기술에 대해 말했잖아... 그때 얘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오늘 계속 이야기하자!”재석은 처음으로 바로 응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정은을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해?”“술, 술은 마시지 말죠?”‘술을 마시다 또 무슨 망신을 당할지도 몰라!’“선배님은 오늘 오후에 실험실에 가야 하잖아요. 그러니 술을 마시면 안 돼요. 아빠도 술 마시지 말고 그냥 식사만 하세요.”소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조 교수는 마실 수 없지만, 우리 둘이 좀 마시면 되잖아.”“어?” 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정은이는 술을 아주 좋아하나 봐요?”“그럼, 어제도 나랑 술 한잔하자고 했는데, 정은이 엄마가 못 마시게 말렸거든.”정은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아빠도 참. 내가 이렇게 눈짓을 하고 있는데! 왜 선배님한테 이런 얘기까지 하시는 거냐고!
이미숙은 어이가 없었다. ‘남을 칭찬할 때 꼭 자신을 어필한다니깐.’오후 1시, 재석은 떠날 준비를 했다.소진헌은 베란다에 앉아 계속 화분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얼른 정은을 불렀다.“정은아, 네 재석 삼촌 좀 배웅해줘!”재석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표정이 굳어졌다.정은은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섰다.“아빠,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선배님, 나 좀 기다려요...”“응.”정은이 재석을 문 밖으로 배웅하자, 소진헌은 작은 소리로 흥얼거렸다.“지난번에 조 교수를 내 동생으로 삼겠다고 했잖아. 그러니 당연히 삼촌이라고 불러야지...”...눈 깜짝할 사이에 소진헌과 이미숙은 이미 J시에서 이주 넘게 머물렀다. 정은은 때가 됐다 싶어 이미숙에게 나석천을 소개해 주려 했다.“엄마, 사실 이번에 아빠랑 같이 J시에 오라고 한 이유가 따로 있었어요.”“무슨 일인데?”정은은 서류 봉투를 꺼내 이미숙 앞으로 밀었다.“이것은 엄마와 유보영이란 사람과 체결한 계약서예요. 전에 전자판을 달라고 한 다음, 그것을 프린트해서 출판인과 지식 재산권 변호사에게 보여 줬어요...”이미숙은 가슴이 떨렸다.정은은 그녀에게 열어보라고 했다.“위에서 붉은 펜으로 표기된 곳은 모두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에요. 예를 들어, 계약상 이 출판사는 사실 유보영이 주주이고, 그 사람의 가족이 출자한 출판 스튜디오예요.”심지어 정규 출판사라고 할 수도 없었다.출판사는 정규 출판 자격이 있어야 정식으로 도서 번호를 가진 도서를 발행할 수 있지만, 이 스튜디오는 삽화, 오디오 소설, 웹 소설만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이미숙이 10년 동안 제대로 된 책을 발행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좋은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보영이 출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유보영은 이미숙이 쓴 시작과 대강을 전부 부결했던 것이다.“출판을 할 수 없는 이상, 애초에 왜 네 엄마를 찾아서 계약을 한 거야? 그것도 10년이란 계약을 체결했잖아?”이미숙은 이미 충격을 받아 멍해졌다. 소진헌은
“해외?”“네, 이 두 책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전자책 판매량과 종이책 판매량이 모두 상위권에 들어갔거든요.”이미숙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난 이 두 권의 책이 해외에서 발행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는데...”“제가 계산을 해봤는데, 그동안 『살기』와 『황량한 마을 학교』가 가져온 수익이 적어도 이 정도 할 거예요...”정은은 한 손을 내밀었다.소진헌이 말했다. “5천만 원?”“아빠, 더 대담하게 추측해 보세요.”“50억?!”정은은 고개를 저었다.“500억이에요.” 그것도 대충 계산한 결과였다.소진헌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엄마.”정은은 이미숙의 곁에 다가앉아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손을 맞잡았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이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계약이 끝난 만큼, 엄마와 유보영 사이의 10년 묵은 원한도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가 온 거예요. 지금 중요한 건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거예요.”“경제적인 손해보다도,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버린 것이 더 가슴 아픈 일이라는 걸 저도 잘 알아요. 작가에게 십 년이란 시간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시간이니까요.”이미숙은 등을 돌리더니 훌쩍거리기 시작했다.“엄마가 그동안 미처 발행하지 못한 원고를 다른 한 편집장님에게 보냈는데, 가서 한번 만나 보세요.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 거예요...”이미숙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래.”그날 밤, 작은방에서 낮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남자의 따뜻한 위로도 있었다.정은은 눈을 뜨고 천장을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튿날, 정은과 소진헌은 이미숙을 데리고 커피에 갔다.카페는 빌딩을 등지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지나자 안에 손님이 얼마 없었다.렉돌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하게 프론트에 엎드려 있었다. 딩동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고양이는 하품을 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왼쪽 창가 자리에 얼굴이 네모난 남자가
그동안 이미숙은 꿈에서도 자신의 미스터리 작품이 다시 출판되길 바랐다.유보영을 찾아 몇 번이나 상의했지만, 그녀는 항상 다른 이유로 거절했다.그러나 지금, 앞의 이 남자가 갑자기 이 작품들을 출판할 수 있다고 말하다니. 게다가 이뿐만이 아니었다.“만약 작가님께서 동의를 하신다면, 저희는 즉시 도서 번호를 신청할 것입니다. 동시에 인쇄공장과 매체에 연락하여 사전의 모든 준비를 마칠 것입니다. 그 후에는 조판, 인쇄, 홍보, 출시가 남았죠. 전체 과정은 두 달 안에 완성될 것으로 예상됩니다.”“저작권료와 후속 수입 배분에 관해서, 저희는 이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론 다 보신 후에 의견을 제출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잘 상의할 수 있습니다.”나석천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왔다.제시된 저작권료와 배당 비율도 매우 성의가 있었다. 그 외에 그는 심지어 계약서까지 들고 왔다.이미숙은 처음에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나중에는 나석천의 말을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나 선생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미안해요...”나석천은 이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제시한 조건은 이미 상당히 완벽하지만, 제 자신 때문에 그래요. 저도 잠시 냉정을 취해야 할 것 같아요...”10년 동안 자신의 작품이 매몰된 이미숙은 지금 엄청난 경계를 하고 있었다.비록 나석천이 매우 솔직하고 성의가 넘쳤지만, 당시 유보영이 찾아와서 계약을 하려 했을 때도 이랬다.그러나 그 결과, 이미숙은 지금 트라우마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나석천은 실망을 느꼈지만, 그래도 이미숙의 선택을 존중했다.“이 작가님, 지금 작가님의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누가 이런 일을 당하더라도 한동안 우울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완벽한 미스터리 추리 작가는 일반 사람보다 더 이성적이고 명석할 것이라 믿습니다.”“이것은 제 명함입니다. 위에 저의 모든 연락처가 있으니, 만약 생각을 바꾸셨다면 저와 텐스출판사가 작가님이 가장 먼저 연락하고 싶
정은과 소진헌은 카페 밖에 앉아 있었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숙이 심각한 표정을 하다가 마지막에 미안한 표정을 지은 것을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유쾌하지 않은 것 같았다.나석천은 이미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했지만, 이때 이미숙이 고개를 들어 무슨 말을 했다. 그는 마치 불과 닿은 촛불처럼 열정이 다시 넘쳐흘렀다.그리고 다시 앉아서 계속 이미숙과 상의했다.이번에 이미숙이 말이 많아졌고, 무뚝뚝했던 얼굴도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얘기를 끝낼 때, 나석천은 일어나 다시 손을 내밀었다.“이 작가님, 저희와 즐거운 협력을 하셨으면 좋겠네요.”이번에 이미숙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일어나 악수했다.“고마워요. 사실 처음부터 수정한 원고를 내놓으셨다면, 저희의 대화가 많이 순조로웠을 텐데.”그러나 나석천은 고개를 흔들었다.“글은 아주 신성한 존재입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정서를 표현할 수 있으며, 아름다움을 찬양할 수 있지만, 유독 남을 이용하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이미숙은 감탄했다.“당신은 정말 좋은 편집장입니다. 이번에...”‘또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은은 이미숙에게 나석천의 첫인상에 대해 물었다.“착실하고, 성실하고, 성의가 있어.”“그래서, 지금 얘기를 끝내신 거예요?”“응. 난 이미 희망을 품지 않았지만, 그 성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자세히 생각해 보면, 상황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거야. 그럼 서로에게 기회를 줘야지.”집에 돌아온 정은은 계약서를 뒤지다가 갑자기 감탄을 했다.이미숙은 고개를 돌렸다.“왜 그래?”소진헌은 즉시 다가왔다.“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이 계약서에는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척 평등했다. 심지어 이미숙에게 더 이롭기도 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계약서가 책 대신 작가를 체결했던 것이다.나석천이 작품만 보고 작가를 보지 않던 관례를 깨고, 이미숙과
그날 저녁, 정은의 은행카드에는 4천만 원이 더 많아졌다.그녀는 잔액 변동 알림을 받고 멍해졌다. 잠시 후, 정은은 바로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 쿵쿵거리며 옆방으로 달려갔다.“엄마, 왜 저한테 돈을 주시는 거예요?”이미숙과 소진헌은 눈을 마주쳤는데, 마치 정은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미리 예상한 것 같았다.“네 아빠와 상의를 해봤는데, 그때 너 별장을 사느라 엄청 많은 돈을 썼잖아. 전에 우리는 분담할 능력이 없었지만, 지금 돈이 생겼으니 주는 거야. 비록 여전히 부족하지만 적어도 널 도와 부담을 좀 덜어주고 싶어.”“저한테 돈 많아요!”“알아.”이미숙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도 네가 돈이 부족해서 준 게 아니야. 별장은 나와 네 아빠가 살고 있잖아. 이제 우리도 여유가 생겼으니, 집을 산 비용을 조금 분담하는 게 당연하지.”“그러나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이렇게 분명하게 계산할 필요가 없는데.”“나도 이 말에 동의해. 그래서 넌 계속 우리와 이렇게 따질 거니?”이미숙이 이렇게 말하자, 정은은 말문이 막혔다.“하지만...”“자, 이제 그만해.”소진헌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네 엄마 말 들어. 게다가, 앞으로 우리에게 돈 쓸 곳이 필요하다면, 넌 우리를 무시할 거니?”“그럴 리가요.”“그럼 됐어. 시간도 늦었군. 내일 우린 고속열차 타야 하니까 얼른 자야 돼.”“그럼 이 돈은 우선 제가 관리하고 있을게요. 돈 쓰실 곳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그래, 얼른 가서 자.”정은은 그제야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이미숙이 말했다.“우리 착한 딸이 또 잠을 설치겠어요.”“사실 정은 이런 돈에 신경을 쓰지 않을 거야...”소진헌은 정은에게 돈이 꽤 많다는 것을 대충 알고 있었다. 구체적인 액수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아마도 수백억 정도는 있을 것이다.이미숙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건 정은의 돈이에요. 우리가 준 돈이 아무리 적어도 부모님으로서의 마음이고요.”이것은 돈이 많든
이날, 정은은 일찍 일어나 먼저 학교에 가서 등록한 후, 다시 입학수속을 밟았다.개학식은 이튿날이었다.정은은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지 않기 때문에 마침 짐을 옮길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오후에 할 일이 없었다.그래서 정은은 정보학과에 가서 성달수를 찾았다.“정은아? 네가 웬일이야?!” 성달수는 바로 웃으며 말했다.“교수님 뵈러 왔죠. 아니면 제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탓하시면서 삐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일부러 저를 시험하고 싶으시다면서 사실은 기말 시험지를 준비하고 계실지도 몰라요.”“에헴!” 성달수는 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나도 시험 문제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모든 문제를 충분히 이용한 거야!”두 사람은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도중에 정은은 사무실에 오라는 오미선의 전화를 받고서야 성달수와 작별을 했다.“오미선이 부른 거야?”“네.”성달수는 콧방귀를 뀌었다.“그 사람일 줄 알았어. 남이 널 빼앗아갈까 봐 두렵긴.”‘남들이 탐낼까 봐 얼마나 잘 지켜보고 있는지 모른다니깐.’정은은 오미선의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그녀는 멈칫하더니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왔어, 정은아? 어서 들어와.”오미선은 웃으며 정은에게 손짓했다.“마침 잘 왔어. 너희들끼리 인사 좀 나눠.”오미선은 올해 도합 3명의 대학원생을 모집했는데 정은은 그중의 하나였고, 나머지는 1남1녀였다.남자의 이름은 임서준이었고, J시 사람이며 나이는 22살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대학원으로 진입했다.1미터80센티미터의 키에 잘생긴 외모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킹카가 다름없었다. 다만 표정이 차가워 보여서 쉽게 다가가면 안 되는 소외감을 주었다.맞은편에 앉은 하민지는 그의 기질과 정반대였다. 동그란 얼굴은 불그스름했고. 정은과 눈을 마주치자 즉시 활짝 웃으며 귀여운 보조개 2개를 드러냈다.통통하지만 정말 깜찍했다.“다들 서로에 대해 잘 알았겠지? 앞으로 3년 동안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민지는 말문이 막혔다.정은은 과자를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어때요? 맛있어요?”정은을 바라보는 민지의 눈빛은 기대를 머금었고, 마치 칭찬을 원하는 아이 같았다.“응, 질리지 않고 맛있어.”“그렇죠? 제가 많은 브랜드를 먹어봤는데, 이 브랜드의 초콜릿 과자가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생각하다 민지는 또 서준을 바라보았다.“너도 조금 먹을래?”“아니, 고마워. 열량이 너무 많아서 먹으면 살찌기 쉬워.”그는 다른 뜻이 없었다. 다만 최근 운동을 하고 있었기에 음식을 통제해야 했다.그러나 키 1미터6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70KG 넘는 민지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이 친구 무슨 뜻이지? 지금 날 비웃는 거야?!’정은은 얼른 입을 열었다.“민지야, 하나 더 주면 안 돼?”민지는 바로 정은의 곁에 앉았는데, 마치 억울함을 당한 작은, 아니 큰 강아지와 같았다.“정은 언니밖에 없어요.”서준은 영문을 몰랐다.과자는 어느새 바닥이 났다. 정은은 세 조각을 먹었고 나머지는 모두 민지 혼자 해치웠다.민지의 몸이 튼튼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잘 먹고 잘 웃으니 통통하면서도 귀여웠다.이때 오미선도 돌아왔다. 그녀는 세 사람의 학교카드와 학생증을 가져왔다.“5시 30분이네. 우리 같이 식당에 가서 저녁 먹을까?”세 사람은 당연히 이의가 없었다....사람이 많아서 일행은 닭볶음탕 먹기로 결정했다.식당 5층에는 큰 룸이 있었는데, 동그란 식탁에 10명 정도 앉을 수 있었다.민지는 Y시에서 왔기에, 정은은 음식을 주문할 때 특별히 달콤한 음식을 하나 시켰다.민지는 또다시 정은에게 반했다.서준은 말이 많지 않아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정은도 그를 챙기기 귀찮아졌다.오미선의 입맛을 고려하여 정은은 또 그녀가 좋아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 두 개를 주문했다.매운 음식, 단 음식이 다 있었기에, 네 사람은 모두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다 먹은 다음, 오미선은 자신의 카드를 꺼내 계산했다.“이건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