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넌 성질도 더럽고 기억력도 나쁘네. 대체 어떻게 된 거야?”수민은 동건을 향해 베개를 던졌다.“입 닥쳐!”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여유롭게 피했는데, 이미 이런 공격에 익숙해진 것이었다.수민은 또 다른 베개를 들려고 했지만 동건은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뭘 찾는 거야? 그 베개 나한테 있어.” 수민은 어안이 벙벙했다.“그게 어떻게 거기에 있는 거지?”‘기억력도 너무 안 좋네.’“아가씨, 넌 이미 날 한 번 때렸고, 이번이 두 번째야.”“아.”‘꽤 어색하군.’수민이 물었다.“지금 몇 시야?”“10시 30분.” 그녀는 동건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뭐야, 시간이 아직 이르잖아. 미래의 시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니, 정성껏 꾸미느라 시간이 좀 오래 걸린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동건은 말을 하지 않았다.“물 좀...”동건은 얼른 말을 이어받았다.“물을 마시고 싶은 거지?”말이 끝나자, 그는 화장대에서 컵 하나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이미 물이 담겨 있었다.“빨리 마셔. 그리고 얼른 일어나서 화장한 다음 나가자고!”수민은 물을 받았는데, 손이 닿자마자 바로 이상함을 알아차렸다.“따뜻한 물이야?”“응!”‘수민이는 여자니까 따뜻한 물을 마셔야겠지?’“얼음물로 바꿔줘.”“아니, 아침부터 차가운 물을 마시겠다고?” 동건도 아침에 일어나서 얼음물을 마셨지만, 수민은 여자였다.“뭐?” 수민은 눈을 부라렸다.“누가 나 따뜻한 물 마신다고 했어? 정신 나간 거야 뭐야!”“아니, 내가 아는 여자...” “아, 네 전 여자친구들?” 수민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어받았다.동건은 말을 하지 않았다.“이 바보야!”“아니, 넌 왜 자꾸 욕을 하는 거야?”“네 전 여자친구들은 밀크티 마셔? 일식 먹어? 시원한 칵테일 좋아해?”“그런 게 왜 궁금한데?”“이거 다 차가운 음식이잖아. 게다가 생것도 있네. 그럼 여자들은 아예 손도 안 대는 거야?”‘엥!’동건은 말문이 막혔다.수민은 편안하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
“야, 왜 멍을 때리고 있는 거야? 물 줘.”모든 아름다운 장면은 여자가 입을 여는 순간에 툭 하고 깨졌다.동건은 어이가 없었다.“내 요구 하나 들어주면 안 돼?”“말해봐.”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니 수민은 기분이 상쾌해졌다.“나랑 얘기할 때 말투가 좀 부드러웠으면 좋겠어. 우리는 커플이지 원수가 아니잖아. 이러면 우리 엄마가 걱정하실 거야.”“뭘 걱정해?”“자신의 아들이 너한테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하시겠지!”수민은 말을 하지 않았다.“자기야, 이렇게 말하라는 거야? 이 치마 어때? 어머님께서 좋아하실까? 나 엄청 오랫동안 골랐단 말이야...”동건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그 뭐지. 그냥 예전처럼 말해, 그래, 사나운 네가 더 보기 좋아.”‘사나운 수민이가 정상이지.’방금 그녀가 애교를 부릴 때, 동건은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다.“다시 한번 말해 봐? 누가 사납다는 거야?”“넌 조금도 사납지 않아.”“너 계속 이 단어를 쓰고 있잖아?!”수민은 가장 빠른 속도로 옅은 화장을 했다.“자, 이제 갑시다.”동건은 어안이 벙벙했다.“화장을 한 거야?”“어때? 아주 자연스럽지? 이건 일부러 민낯처럼 화장을 하는 기술인데, 얼핏 보면 마치 화장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거야. 너 같은 남자를 속이기에 딱이라고. 괜찮지?”이미 여러 번 속은 동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왜 자꾸 날 욕하는 느낌이 들지?’두 사람이 동건의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12시가 다 되어 갔다.송보미는 문앞에 서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마침내 동건의 차를 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달려가서 웃으며 맞이했다.수민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송보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수민이 왔어? 얼른 들어와. 햇볕 너무 많이 쬐면 안 좋아.”말하면서 수민을 끌고 안으로 데려갔다.‘엄마 아들인 난 어떡하라고?’“어머님, 죄송해요. 어젯밤에 야근을 해서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거든요. 또 옷을 고르느라 시간이 한참 걸렸어요. 정말 죄송해요.”동건은 집에 들어서자
“엄청 오래 기다릴 줄 알았는데, 동건이 그 녀석이 이렇게 빨리 여자친구를 찾을 줄은 정말 몰랐어. 이제 드디어 내 며느리에게 줄 수 있다니.”‘역시, 경매장에서 찍으신 거구나. 적어도 몇 억, 심지어 수십 억이 들지도 몰라.’“안 돼요, 어머님, 저는 이 팔찌를 가질 수 없어요.” 수민은 즉시 거절했다.만약 그녀가 동건의 진짜 여자친구라면, 아무리 비싼 팔찌라도 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수민이 가짜 여자친구였던 것이다.‘가짜인 내가 수십억짜리 팔찌를 받다니, 쯧쯧... 그건 너무하지.’“팔찌 하나일 뿐, 뭐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안심해, 이건 너희들에게 압박을 주는 것도, 결혼하라고 재촉을 하는 것도 아니야. 난 단지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을 뿐이야.”송보미는 팔찌를 상자에서 꺼내 직접 수민에게 끼워 주었다.“크기가 딱 맞네. 어머, 네 피부톤과 너무 잘 어울린다.”“최고급 비취 팔찌이니 당연히 잘 어울리겠지!’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동건은 소파에 앉아 히죽거리며 물었다.“무슨 얘기를 방에 가서 한 거야? 그것도 이렇게 오랫동안 얘기를 하다니...”“됐어, 내가 네 여자친구를 빼앗아갔다고 질투하는 거지? 지금 돌려줄게.”송보미는 웃으며 수민을 밀었다.“엄마, 저한테 그런 누명 씌우지 마세요. 전 그런 뜻이 없었단 말이에요...”동건은 턱을 들더니 은근히 부인했다.오후에 수민은 편안하게 마사지를 받았는데, 바깥의 미용실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그녀는 물을 마시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는데, 수민은 물컵을 들고 거실 창문 앞으로 가서 받았다.“여보세요?”[날 기억하시나요? 진성후예요.]수민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날 밤 호텔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웃으며 물었다.“당연하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그날 이후로 나한테 연락도 안 했으니까요. 난 누나가 날 잊어버린 줄 알았어요.]남자가 억울해하며 말하자, 수민은 마음이 약해졌다.“너도 전화번호를 안 남겼잖아?”[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수민과 동건을 주시하고 있었다.송보미가 입을 열었다.“어머, 두 사람 얼마나 달콤한지 좀 봐요!”“저는 도련님께서 이렇게 주동적으로 한 여자에게 다가간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수미가 일반 여자아이겠어요? 출신이든 교양이든 모두 훌륭하단 말이에요. 이 녀석도 마침내 제대로 된 신붓감을 찾았네요.”“도련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으셨죠.”“이대로 수민이와 결혼을 할 수 있다면, 난 자다가도 행복해서 일어날지도 몰라요.”“어? 그런데 도련님의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시죠?”“그래요?” 송보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바라보았다.“정말이네요... 수민이의 몸이 좀 뻣뻣해 보이지 않아요?”‘두 사람 분명히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는데, 이상하다...’아래층에서 동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움직이지 마, 우리 엄마는 이미 의심하기 시작하셨어.”“언제부터 그곳에 서 계셨죠?”“네가 전화를 받을 때부터.”‘망했네.’송보미가 말했다.“왜 껴안기만 하고 진도를 안 나가는 거죠?”수민은 이 말을 똑똑히 들었다.그녀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해결할 줄 알았다.수민은 동건을 바라보며 말했다.“키스해줘.”“뭐?”“왜 멍을 때리고 그래? 빨리!”동건은 침을 삼키더니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마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맹렬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다음 순간, 동건은 여자의 가녀린 허리를 포악하게 감싸더니 강렬하고 거친 키스를 했다.축축하고 건조하며 입술과 혀가 얽히고설켰다.“어머! 키스하고 있는 것 좀 봐요. 이모님, 우리 얼른 피해야겠죠? 아이들이 난처함을 느낄지도 몰라요.”“그러니까요.”송보미가 떠났다.찰싹!깔끔한 소리가 울려퍼졌다.동건은 영문을 몰랐다.“아니... 왜 내 얼굴을 때리는 거야?”수민은 다리가 나른해졌다.“너 왜 진짜로 키스하는 건데?”게다가 수민은 동건의 얼굴을 때린 게 아니라 그저 가볍게 밀어냈을 뿐이었다.따귀와는 그래도 차이가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안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정은은 그제야 한동안 재석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외출하는 시간이 많이 비슷해서 전에 자주 마주쳤지만, 최근에 정은은 재석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너무 바빠서 그동안 실험실에서 지냈겠지.’정은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저녁에 그녀는 도서관에서 잠시 책을 보다가 돌아왔는데,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8시였다.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뒤에 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재석이 조깅을 하고 있었다.정은은 재빨리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선배님.”그러나 남자는 못 들은 것처럼 곧장 지나갔다.‘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거나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그런가?’정은은 집에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나가서 몇 바퀴 뛸 작정이었다.마침 재석에게 CPRT의 구매 경로를 물어볼 수도 있었다.사실 기계를 사겠다고 할 때, 정은은 가장 먼저 재석과 오미선을 떠올렸다.오미선은 최근에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늘 병원에 찾아갔다. 그래서 정은은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이 자신의 돈으로 기계를 산 일이 터진다면, 송지혜가 악의적으로 실험실을 강점했다는 사실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이다.‘아마도 병원에서 직접 뛰쳐나와 송지혜 교수님과 학교를 찾아가서 따지시겠지.’그러나 현재 학교는 분명히 송지혜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 오미선이 찾아가도 아무런 좋은 점을 얻지 못할 것이다.‘괜히 화를 내시면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그냥 말을 하지 말자.’그래서 재석을 찾는 게 최상책이었다.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정은이 문자를 보내고 또 전화를 걸어도 재석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너무 바빠서 핸드폰을 볼 시간이 없는 거겠지.’그러나 재석을 찾으려 했지만, 오늘에야 결코 만났던 것이다.원래 정은은 이미 현빈에게 연락했는데,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재석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그녀도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분석해 본
진욱이 물었다.“너 요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무슨 일 있었어?”재석이 대답했다.“그건 네 착각이야.”말을 마치고 휴식실로 걸어갔다.그는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왔는데, 서랍에 넣으려 했다.서랍은 안쪽에 있었고, 문을 열자, 정은이 전에 쓰던 접이식침대가 원래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그때 자신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왔을 때, 마침 낮잠을 자고 있던 정은과 부딪친 것을 생각하면, 재석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숨이 거칠어졌다. ‘마치 꿈속에서처럼...’재석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 순간, 괴로움과 부끄러움이 일제히 밀려왔다.이런 자신 때문에 재석은 창피함을 느꼈다.“조 교수, 내가 야식 좀 시켰는데. 같이 먹을래?” 진욱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아니야, 너 혼자 먹어.”“치킨과 족발이야, 정말 안 먹을 거야?”“응.”“이 치킨은 말이지, 그래도 정은이가 한 게 가장 맛있다고 생각해... 그나저나, 정은이 이미 개학한 거 아니야? 왜 줄곧 실험실에 놀러 오지 않았지? 다음에 정은이 만나면 자주 오라고 전해줘. 우리 모두 정은이가 엄청 보고 싶단 말이야.”휴식실에서 나온 재석은 이미 진정을 되찾았다.“그럼 네가 직접 가서 말하든가.”정은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있었다.진욱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아니, 두 사람 이웃이니 매일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냥 우리의 그리움을 전해줄 수 있잖아?”“응, 안 돼.”한참 후, 진욱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조 교수, 너 최근에 정말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 같아.”재석은 실험대 앞에 서 있으면서 들은 체 만 체했다.진욱은 계속 중얼거렸다.“설마 실연당한 건 아니겠지? 매일 엄숙한 표정으로 실험실에 나오다니. 정말 무서워 죽겠네.”재석은 고개를 숙이고 실험에 전념했다. 그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이것 봐, 또 이러네...”진욱은 혀를 찼다....다음 날 저녁, 하늘에는 붉은 구름이 떠돌았고, 푸른 하늘도 금
서준의 시선을 알아차린 현빈은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는데,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얼른 와서 앉아.”“감사합니다.”민지와 서준은 정은의 곁에 앉았다.현빈은 종업원을 불렀다.“그릇과 젓가락 두 개 가져와. 주방 쪽에 요리 두 개 정도 더 만들어달라고 하고.”“네, 어떤 구체적인 요구라도 있으신가요?”현빈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민지가 말했다. “고기요.”서준도 입을 열었다. “해산물은 안 돼요.”“네.”종업원은 나갈 때 문을 살며시 닫았다.그렇게 룸에는 네 사람만 남았다.현빈은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소개 안 해줄 거야, 정은아?”‘정, 정은아?’민지는 눈을 깜박거렸고, 서준도 눈알을 굴렸다.정은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두 사람은 내 동창생이에요. 임서준과 하민지.”그리고 현빈을 가리켰다.“이 사람은 내 친구인데, 심현빈이라고 해.”“정은이는 나와 만나자고 먼저 말한 적이 없어. 이번은 특수 상황인 셈이야. 그래서 너희들은 어떤 난제에 부딪힌 거지?”현빈은 정은이 대신 ‘너희들’이라고 말했다.그는 관찰력이 정말 대단했다.민지와 서준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지 않았다.정은이 입을 열었다.“내가 말할게요...”...“그래서, 너희들은 스스로 돈을 내서 천양 테크놀로지에게서 CPRT를 구매하고 싶은 거야?”“맞아요.”현빈은 잠시 침묵했다.“학교는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학교 측과 소통하지 않았어요.”결국 기계를 살 수 있을지조차 문제였다.“혼자 돈을 내서 사도 되고, 천양도 CPRT를 너희들에게 팔 수 있지만, 이 일은 반드시 학교에 알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트집을 잡을 거야.”민지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저희가 돈을 내서 산 것인데, 왜 오히려 남을 두려워해야 하는 거죠?”“이 기계를 사도 학교의 실험실에 두어야 하니까. 돈을 낸 사람은 너희들이지만, 그 사람들을 가만두고 싶은 거야?”민지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어떻게 그 사람들을 혼
정은이 말했다.“다른 사람 좋아할 때 되지 않았어요?”“다른 남자는 그렇겠지만, 난 정말 너한테 일편단심이야.”...레스토랑을 나서자, 정은 그들은 집이 같은 방향이었다.민지는 핸드폰을 꺼내 차를 부르려고 했다.이때, 고급스러운 벤츠 한 대가 몇 사람 앞에 세워졌다.차창이 내려오자, 현빈이 입을 열었다.“타, 내가 집까지 바래다 줄게.”민지는 정은의 ‘지시’를 기다렸다.현빈은 웃으며 계속 말했다.“여기서 택시를 잡기가 많이 어려울 거야.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적어도 두 시간 후에 집에 도착할 걸.”서준은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민지는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아마 4시간 후에 집에 도착하겠지...’정은이 말했다. “그럼 너희들도 같이 타자. 그럼 심 대표님에게 잘 부탁할게요.”현빈은 웃으며 대답했다.“고맙긴, 내 영광이야.”...네비게이션을 따라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려야 할 사람은 정은, 그 다음은 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준이 내려야 했다.그러나 한 사거리를 지날 때, 우회전을 해야 했지만 현빈이 차선을 잘못 들어간 바람에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가장 먼저 차에서 내린 사람은 민지로 변했고 그 다음이 서준, 정은은 마지막에 내렸다.차는 골목 앞에 세워졌다.현빈은 내려오더니 다른 쪽에 가서 직접 차 문을 열어주었다.“머리 조심해.”정은은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 현빈을 바라보았다.“고마워요.”“차 문을 열어줘서? 아니면 기계를 팔아줘서?”“둘 다요.”“그럼 날 집으려 초대해야 하는 거 아니야?”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농담이야, 나를 이상한 남자로 취급하지 마.”정은은 현빈을 바라보더니 정색했다.“정말 이상한 남자 아니에요?”남자는 입술을 구부렸다. “난 아니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인 것 같아. 아마도 그런 사람일 거야.”“못 알아듣겠어요.”“그럼 알려고 하지 마. 어떤 일들은 이해할 필요가 없으니까.”‘이유가 없었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