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석이 걸어 나왔다.화장실 문은 마침 옷걸이 맞은편에 있어서 두 사람은 이렇게 딱 마주쳤다.남자는 갈아입은 옷을 품에 안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축축해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렇게 입고 있던 티셔츠는 어느새 젖었다. 목과 얼굴도 축축해서 물 같기도 하고 땀 같기도 했다.정은을 본 순간, 재석의 머리는 새하얘졌다.여자아이는 검은색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타이트한 옷은 포만하고 아름다운 상반신 곡선을 그려냈다.탱크톱 끈이 좀 짧아서 허리가 살짝 드러났고 작은 배꼽이 똑똑히 보였다.가늘고 긴 팔, 뚜렷한 쇄골, 검은색에 비쳐 하얗게 빛나고 있는 피부.꿈속의 ‘정은’과 똑같았다.정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손에 티셔츠를 들고 있단 것도 깜빡 잊고 멍을 때렸다.“선, 선배님...”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즉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될수록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 결국 네 화장실 좀 썼어.”그러나 오직 재석 자신만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짧디 짧은 말 한마디 하려고 목이 얼마나 탔는지, 호흡이 또 얼마나 거칠었는지를.“두근두근.”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재석은 확실히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려 했다.깨끗한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수리기사들이 안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구식 건물은 고정된 에어컨 실외기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에어컨 실외기는 일반적으로 바깥의 벽에 걸려 있었다.마침 재석네 실외기는 화장실 밖의 벽에 걸려 있었기에, 수리기사는 이미 안전줄을 타고 화장실 창문에 매달려 실외기를 수리하고 있었다.샤워는커녕, 지금 화장실을 제대로 쓸 수조차 없었다.그래서 재석은 정은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원래 정은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침실 앞까지 걸어간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정은이를 방해하는 거 아니야? 지금 자고 있을 수도 있잖아? 어차피 빨리 씻으면 몇 분밖에 안 걸리니 공교롭게 마주칠 일은 없겠지?’그러나 두 사람은 뜻밖에도 이렇게
두 사람은 이미 여러 번 호흡을 맞추었기에 무척 능숙했다.재석은 채소를 씻고 다듬으며 정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정은은 채소를 썰고 볶는 것을 책임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 3개와 국 하나가 식탁에 놓였다.두 사람은 각자 맞은편에 앉았다. 재석은 밥 한 그릇을 담아 먼저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정은은 받으면서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분위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전의 어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밥을 다 먹은 후, 재석은 예전처럼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를 도왔다.정은은 그가 건네준 접시를 받아 수건으로 닦고 옆에 놓았다.두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아 일사불란하게 일했다.하지만 쓰레기를 정리할 때, 정은과 재석은 동시에 허리를 굽혀 쓰레기봉투를 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머리를 부딪혔다.“아...”정은은 이마를 가리고 일어서더니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미안, 정말 미안해, 주의하지 않았어...”재석은 사과하며 즉시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아프지?”말하면서 정은의 손을 살짝 떼어냈다.손톱만한 부위가 빨갛게 되었지만 다행히 붓지 않았다.“미안, 난 쓰레기를 들고 싶었는데, 너와 부딪힐 줄은 몰랐어.”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녀의 눈에 여전히 눈물이 좀 고였다.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오르니 무슨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재석은 더욱 미안해했다.“저... 선배님, 일단 나 좀 놓아주면 안 돼요?”남자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아직도 여자의 손목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미안!”그는 뜨거운 것에 데인 것처럼 손을 거두어들였고 심지어 뒤로 물러섰다.정은은 처음에 어색했지만, 재석의 과장된 반응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재석도 따라서 입술을 구부렸다.“그렇게 웃겨?”“네!”그는 한숨을 쉬었다.“그럼 됐어.”말하면서 다시 허리를 굽히고 쓰레기봉투를 묶었다....재석의 에어컨은 마침내 수리되었는데 수리기사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교수님, 와서
“응.”“그럼 오늘 밤에 달리기 하러 나갈 거예요?”“응. 같이 뛸래?”“좋아요.”두 사람은 각자의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만난 다음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달렸다.해가 이미 졌기에 하늘은 서서히 어둡기 시작했고, 대지는 점차 어둠에 휩싸였다.두 사람이 한 바퀴 뛰었을 때, 달빛이 점점 밝아지더니 별도 깜빡이기 시작했다.세 바퀴째 다릴 때, 정은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선... 선배님 먼저 뛰어요. 난 좀 쉴게요.”재석도 따라서 멈추었다.“괜찮아?”정은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힘들진 않지만 너무 더워서 그래요.”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었고, 땀방울이 볼에서 굴러 떨어져 티셔츠 속에 스며들었다.“그럼 나도 쉴게. 같이 걸을까?”정은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머쓱해했다.두 사람은 가로수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비대학교의 교문 앞에 도착했다. 재석은 편의점에 가서 생수 2병을 샀고, 한 병을 연 다음 정은에게 건네주었다.“고마워요.”앞문을 지나 또 반 바퀴를 돈 다음, 두 사람은 뒷문으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면 개방된 농구장이 하나 있었다.두 사람이 지나갈 때, 농구공 하나가 마침 정은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그녀는 이를 알아차리고 피하려 했다.그러나 재석의 반응이 더욱 빨랐다. 그는 정은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감싼 후, 다른 한 손으로 정확하게 슛을 했다.농구장에서 바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야! 기술이 아주 좋구나!”재석은 오늘 하얀 농구복을 입었는데 언뜻 보면 정말 대학생 같았다.“우리 딱 한 사람 부족한데, 한 판 할래?”재석은 그러고 싶었지만 먼저 정은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가요, 건배님. 난 관중석에 응원석에 앉아서 지켜볼게요.”‘선배님이 농구를 할 줄 알았다니...’자리에 앉자, 정은은 멈칫했다.‘방금 선배님은 왜 날 바라본 거지? 이런 일로 나에게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재
재석이 대답했다.“아직은 아니야.”“아! 알겠네! 아직 썸을 타고 있는 거구나?”그는 말을 하지 않았고, 몇몇 남자아이들은 재석이 인정했다고 생각했다.“알고 지낸 지 얼마 됐어?”재석은 잠시 생각했다.“1년 좀 넘었어.”“야, 1년이나 넘었는데도 아직 성공을 하지 못한 거야? 이건 말이 안 되지. 훤칠하고 잘생긴 사람이 왜 이렇게 굼뜬 거야!”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야,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게. 이건 99%의 여자도 당해낼 수 없을 거야...”재석은 처음에 개의치 않았지만, 상대방이 본론으로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돌아가는 길에 정은이 물었다.“선배님, 그 슛 정말 너무 멋있었어요... 그리고 그 자세도...”그녀는 걸으면서 슛을 하는 시늉을 했다.재석은 옆에서 가끔 대답을 했는데,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다.약국을 지나다가 남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깐만 기다려.”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나올 때, 재석의 손에는 소독약 한 병이 있었다.재석은 정은의 이마를 가리켰다.“여전히 좀 빨간 것 같아. 내일 멍이 들 수도 있으니까 약 좀 바르면 빨리 나아질 거야.”정은은 재석이 약국에 들어가서 자신을 위해 약을 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리 큰 상처도 아니니 내일이면 다 나을 거예요. 이렇게 번거롭게 약을 사줄 필요가 없는데.”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얼굴에 멍 들면 보기 안 좋을 텐데. 너희 여자애들은 모두 예쁜 것을 좋아하지 않니?”“너희 여자애들?” 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응, 수민이도 그렇거든.”“그럼 고맙게 받을게요.”말하면서 소독약을 받으려 했다.재석은 오히려 건네주지 않고 조용히 의료용 면봉을 꺼냈다.“지금 혼자 약 바를 수 없으니 내가 도와줄게.이것 때문에 재석은 심지어 약국에서 손을 씻고 소독수로 소독을 한 다음 그제야 약을 들고 나왔다.정은은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남자는 이미 면봉에 소독약을 묻힌 다음,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 앞의 잔머리를 가볍
“그래야만 그 여자는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근심 따윈 완전히 버리고 네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알았어?”재석은 그의 말에 아주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그중 하나는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일부러 넘어져서 키스하는 거랑 그냥 사람을 품에 안고 뜨겁게 키스하는 거... 하나는 너무 가식적이고 위험하고, 다른 하나는 건달과 다를 게 없고.’재석은 이것이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것은 여성을 무시하는 짓이었다.‘그래, 그건 정은이를 무시하는 거야!’그러나 꿈속의 재석은 오히려 정은을 제대로 ‘무시’했다.심지어 귀신에 홀린 것처럼 꿈속의 정은에게 물었다.“자기야, 좋아?”재석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괴로움에 머리를 움켜주었다.한참 지나서야 감정이 가라앉은 재석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옷장 앞으로 가서 깨끗한 속옷을 꺼내 갈아입었다.‘다 나은 거 아니었어? 왜 또 이러는 거지?’...이튿날 아침, 전진욱은 일찍 실험실에 도착했다.어제 그는 실험 결과가 나오기 전에 가버렸는데, 오늘 특별히 일찍 와서 보충하려 했다.‘만약 재석이 이 일을 알았다면 또 끝없이 잔소리를 할 거야.’그래서 진욱은 알람시계 세 개나 맞추었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차를 몰고 실험실로 달려갔다.“야! 넌 언제 온 거야?! 오늘 일요일이잖아?! 이번 주에 이틀 쉬기로 했는데, 넌 뭐 하러 왔어?!”진욱은 무척 흥분했다. 그래서 재석은 단번에 그가 도둑이 제 발 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재석은 실험대 앞에 서서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어제 데이터를 정리하지 않은 거야?”‘이런, 망했네!’“아니... 넌 집에서 쉬지 않고 왜 실험실에 온 거야?! 재석아, 넌 정말 너무 열심히 일을 하는 거 아니니? 남에게 숨 쉴 틈 좀 주라!”재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난 이미 너 대신 데이터 두 조를 계산했는데, 지금 보니 그럴 필요가 없는 건가?”진욱은 멈칫하더니 즉시 웃음을
왜냐하면 지금 정은은 이미 L시로 돌아가는 고속열차에 탔기 때문이다.소씨 가문의 3형제는 할머니 진말숙의 팔순잔치를 근사하게 치르기로 결정했다.그래서 정은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날짜는 아주 일찍 정해졌는데, 연속 3일이었다. 그러나 휴일이 아니라서 정은은 휴가를 낼 수밖에 없었다.오미선은 지금 외국의 세미나에 참가했기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시차 때문에 정은은 전화를 하지 않고 미리 이메일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오미선은 정은이 집에 돌아가는 것을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축복까지 전해 달라고 했다.오후 2시, 고속열차는 역에 도착했다.이미숙은 차를 몰고 정은을 데리러 왔다.“아빠는요?” 정은은 차에 타자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소진헌이 없는 것을 보며 그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이미숙은 면허가 있었지만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 이런 ‘막일’은 모두 소진헌이 했다.‘오늘은 왜...’이미숙은 고개를 흔들었다.“네 아빠는 시간이 없거든.”“오늘은 일요일이니 수업이 없으시잖아요.”‘그럼 뭐가 바쁘신 거지?’여기까지 말하자, 이미숙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정은은 더욱 영문을 몰랐다.“이 일은 말하자면 길어...”팔순잔치인 데다가 진말숙이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비록 잔치는 모레이지만, 고향의 친척들은 모두 이틀 앞당겨 올라왔다.십여 명이 어디서 지낼지가 가장 큰 문제로 되었다.소남진과 진말숙은 지금 첫째 소진우를 따라 별장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 별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위에 2층, 지하 1층에 잠을 잘 수 있는 방이 4개 뿐이었다.게다가 소진우는 가끔 집에서 접대를 해야 했으니, 시골 친척들이 집에 드나드는 것은 너무 말이 안 됐다.진말숙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보거라. 어차피 진우네 집은 안 된다!”가정모임에서 진말숙은 무덤덤하게 말했다.말이 끝나자, 한 쌍의 늙은 눈은 소진호와 소진헌을 바라보았다.첫째는 안 되니, 지금은 당연히 둘째와 셋째가 나서야 했다.소수정
“그러나 제가 부끄러워도 상관이 없지만, 그 친척들이 물어볼까 봐 두려워서 그래요.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사는데 왜 세탁기도 없냐고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그럼 저는 또 뭐라고 대답하겠어요.”“돈이 없다, 제 부모님은 집 살 돈을 줬으니 이미 남은 돈이 없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저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나중에 이 친척들이 시골에 돌아가서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뜨리면 어떡해요?”“저와 시율이는 상관이 없죠. 어차피 저희도 시골에 돌아갈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의 체면은요? 물론 어머님께서 이런 일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 저야 당연히 대환영이죠. 저는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니까요!”주덕순은 웃으며 말을 마쳤고, 진말숙이 말하기를 기다렸다.사실 마음속으로 그녀는 이미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웃기고 있네. 새로 이사간 새 집에 나 자신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그 촌놈들을 들여보내라고? 누가 좋다고 하겠어!’진말숙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너도 이제 겨우 이사를 간 데다가 가구도 다 사지 않았으니 그럼 됐어. 내 생일에 친척들이 세탁기도 없는 집에서 살게 할 수는 없잖아?”“그럼요.” 주덕순은 한숨을 쉬었지만 입가의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만약 부모님께서 돈을 좀만 더 주셨다면 저희도 이렇게 빠듯하게 살지 않았을 텐데... 어머, 어머님,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지금 제 부모님을 말하는 거지, 어머님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진말숙은 원래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주덕순이 이렇게 말하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진말숙은 시종 주덕순에게 새 집에 보탤 돈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주덕순은 은근히 입을 삐죽거렸다.‘정말 인색하시다니깐!’그러나 주덕순은 확실히 말을 잘 했다.적어도 진말숙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소진우는 중간에 앉아 줄곧 입을 열지 않았다.그는 매우 바빴는데, 만약 스케줄이 임시로 변동되지 않았다면 지금 이미 회사에 있었을 것이다.그의 아내 박나영이
주덕순은 웃으며 계속 말했다.“서방님과 동서가 지금 큰 별장에 살고 있지 않나요? 시골 친척들을 모두 서방님의 집으로 데려가면 되잖아요! 방도 많고 인테리어도 호화롭고, 난방이며 에어컨도 다 갖추어져 있으니 바닥에서 자도 괜찮은 것 같은데!”“십여 명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많은 사람들이 와도 될 것 같은데! 레이크 다이아 별장의 후문이 그 호텔과 아주 가깝잖아요. 걸어서 몇 분이면 도착하니 데려다줄 필요도 없고요!”주덕순은 말을 하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나 자신의 집도 그 근처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소진헌은 이때 마침내 입을 열 수 있었다.전에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했는데, 끼어들지 못하거나 입을 열자마자 바로 말 할 기회를 빼앗겼다.“저도 원래 그렇게 생각했어요. 큰형과 둘째 형이 불편하신 이상, 저와 집사람이 상의해서 친척들을 모두 저희 집으로 모시고 갈게요.”‘어차피 3일만 같이 지내면 되니까.’진말숙이 이렇게까지 말한 데다가, 주덕순은 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으니 이미숙은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시골 사람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최근에 새 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미 나석천에게 줄거리를 보냈는데 아직 좀 수정해야 했다. 이미숙은 조용한 창작 환경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님, 안심하세요. 저희가 친척분들을 잘 대접할 거예요.”...이미숙은 운전을 하면서 말했다.“지금 친척들이 모두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어. 네 아빠는 손님을 접대하느라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거든. 그래서 내가 널 데리러 올 수밖에 없었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평소에 엄마가 운전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지만, 실력이 꽤 좋네요.”이때 정은은 아직 ‘위험’을 의식하지 못했다.이미숙은 턱을 들더니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럼! 나 천재잖아!”...레이크 다이아 별장에서.“진헌아, 이거 네 집이야?! 어머, 정말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