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는 멍해졌다.“이럴 수가?”서준도 몇 번이고 명단을 훑었지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조급해하지 말고 1, 2, 3등 수상자 명단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알겠어.”10분 후.민지는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명단을 다섯 번이나 확인했는데, 우리의 이름이 없어.”즉, 최우수상은커녕 그들은 1, 2, 3등상 중 그 어떤 것도 받지 못했다.서준은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미간은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그때, 민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말도 안 돼!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서준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했다.“경쟁에서는 운이 중요하기도 해. 누구도 자신이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하지만...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최우수상을 못 받더라도, 최소한 장려상을 하나쯤 받을 법한데. 어떻게 명단에 아예 이름조차 없을 수 있지?’“정은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요?”두 사람은 동시에 정은을 바라보았다.민지가 명단을 클릭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확실히 이상해.”민지는 손바닥을 쳤다.“봐! 정은 언니까지 이렇게 말하잖아!”“그렇다고 해도... 이미 명단이 발표됐는데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주최 측을 찾아가서 ‘이 결과 인정 못 하겠어요'라고 따질 순 없잖아?”그녀는 그냥 툭 내뱉은 말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모든 팀이 자기들이 상을 못 탔다고 항의하기 시작하면, 대회가 아수라장이 될 게 뻔했다.정은이 말했다.“일단 학교 측을 찾아가서 확인해 볼게. 가능하면 우리가 제출했던 연구 보고서를 돌려받아서 체크를 해봐야겠어. 데이터 오류나 연구 방향 같은 원칙적인 문제가 있었는지부터 먼저 확인해야 해.”대회 규정에 따르면, 특정한 문제가 있을 경우 자동으로 0점 처리될 수도 있었다.만약 0점이라면, 당연히 수상할 리가 없었다....방학 기간이었지만, 학교 행정 사무실에는 당직자가 남아 있었다.정은의 말을 들은 담당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맞아
교수님의 얼굴은 순간 굳어졌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컴퓨터 화면부터 확인했다.‘분명 최소화해서 숨겨 놨는데, 어떻게...’동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섰다.“아니, 괜히 그 아이를 건드려서 뭐 하려고 그래? 논리력, 사고력, 말솜씨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그런데 저 여학생, 말투가 참 매섭네. 대체 정체가 뭐야? 너 아는 사람이야?”“생명과학대학에서 소정은 학생을 모르면 간첩이지. 혼자서 두 명의 동창을 데리고 스마트 실험실을 설립했고, 그것도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잖아. Science 학술지에 논문도 냈고, 네이처 잡지에도 논문을 실었어. 우리 학과 내년 연구 실적의 절반은 다 그 학생한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런데도 몰라?”“아... 이름은 들어봤는데, 이렇게 생긴 줄은 몰랐어...”‘이거 참!’“그래도 뭐 별거 아니잖아? 그렇게 대단한 논문을 썼다면서 정작 대학생 대회 같은 소규모 대회에서조차 상 하나 못 탔다니? 본인이 직접 그러던데?”동료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왜 우리 사무실을 찾았겠어?”“그야... 보고서를 돌려받으려는 거겠지?”“맞아. 그런데 왜 돌려받으려는지 생각해 봤어? 보고서가 조작됐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는 거야.”“하, 웃기네. 누가 그럴 시간이나 있대? 자기들이 못 해서 떨어진 걸 괜히 트집 잡는 거지!”“그럴 수도 있지만, 더 큰 가능성이 하나 있어.”“뭔데?”“보고서가 제출 과정에서 변조됐을 가능성. 제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하려는 거야.”“쳇, 누가 심심해서 그 보고서에 손을 대겠어? 정말 웃겨.”“그래, 누가 그랬겠어. 하지만 만약 제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게 밝혀지면, 학교 사무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거야. 보고서를 거친 사람들 모두 조사 대상이 되겠지. 내가 너라면 지금 웃음이 나오지 않을 거야.”보고서를 거친 사람들 중, 마침 이 사무실에 있는 그 교수님이 있었다.그러니 그녀는 계속 웃을 여유가 있을
“여전히 똑같아, 아무도 받지 않아.”“좋아! 책임을 미루는 학교 측, 죽은 척하는 주최 측. 이 안에 문제가 없다고? 절대 믿을 수 없어!”정은은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떠올랐다.“이런 전국적인 대회에서는 심사위원이 보통 해당 분야의 대학교수들로 구성돼. 내가 알기로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했을 텐데. 우리 학교 교수님이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자.”민지는 곧바로 노트북을 켜고 빠르게 검색한 뒤 외쳤다.“찾았다!”하지만 정은이 직접 확인한 결과, 심사위원 명단 어디에서도 서비대학교 교수님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서준이 설명했다.“서비대랑 연성대는 매년 강력한 경쟁 학교로 꼽혀, 수상자 절반이 이 두 학교에서 나오니까요. 그래서 공정성을 위해 주최 측은 원칙적으로 두 학교 교수님들을 심사위원으로 위탁하지 않았던 거예요.”즉, 문제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민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다른 학교 교수님들은 아예 아는 분이 없잖아. 어떻게 연락하지?”설령 연락한다고 해도 그들이 응답해 줄지는 미지수였다.정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우리는 몰라도, 교수님들끼리는 알고 지낼 수도 있어.”“그게 무슨 뜻이에요, 정은 언니?”“오 교수님께 여쭤보면, 명단에 있는 교수님 중 아는 분이 계실지도 몰라.”하지만 오미선은 지금 해외 학술 세미나 참석 중이었다. 시차 때문에 전화 통화가 어려웠기에, 정은은 메일을 보내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그날 밤, 오미선이 답장을 보냈다.그녀는 정은의 결정을 지지하며 반드시 연구 보고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또한, 앞으로 24시간 동안 핸드폰을 켜두겠으니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가 바로,명단에 오미선이 아는 교수가 있었던 것이다.다만 안면이 있는 정도였고, 개인 연락처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교수는 재석과 친분이 있었다.그래서 그날 밤, 함께 러닝을 하던 중 정은이 재석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대략 이런 상황이에요. 지금 주최 측과 연
정은은 의혹을 느꼈다.“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될 거야.”10분 후, 커다란 그림자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나타났다.“안녕, 재석아.”정은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예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이건... 믿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눈앞의 노은, 아니, 그의 옷차림만 보면 도저히 ‘노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GAP 맨투맨에 Levi’s 청바지, 그리고 Moncler 패딩까지 걸치고 있었다.거기에 챙이 푹 눌린 캡모자로 희끗희끗한 머리를 가린 데다가, 깊게 팬 주름을 가린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이건... 나이를 어떻게 짐작하라는 거야?’그러니 재석이 장학경을 마음이 젊고, 젊은이들 못지 않게 트렌드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건 그냥 트랜드를 넘어섰잖아!’“장 교수님, 또 뵙네요.”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눈 뒤, 옆에 앉아 있는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소개할게요. 제 친구 소정은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장학경 교수님이셔.”“안녕하세요, 장 교수님.”“안녕, 아가씨! 자, 어서 앉아.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난 엄숙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커피 마시고 이야기하면 돼. 굳이 나를 선배 대하듯 깍듯이 모실 필요 없어. 난 그런 거 안 좋아하거든.”이야기를 나누던 중 정은은 장학경이 M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키가 그렇게 큰 데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사실 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얼마 전, 두 명의 친구와 함께 팀을 꾸려 대학생 대회에 참가했었어요. 그런데 어제 발표 결과에서 저희 팀은 수상을 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제라도 저희의 과제 보고서를 받고 싶은데, 학교 측과 대회 주최 측 모두 별다른 답을 주지 않더라고요.”“교수님은 심사위원 경험이 많으시잖아요. 대회 참가자가 사후에 자신의 과제 보고서를 받
“이번 대회를 말하자면, 요즘 학생들이 예전과 달라진 건지, 아니면 전체적인 교육 환경이 변해버린 건지 모르겠어.”“제출된 과제 중 50%는 허황된 내용이고, 나머지 40%는 앞뒤가 안 맞아 말도 안 되더군. 겨우 10%도 안 되는 과제만이 그나마 볼 만했지.”장학경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씁쓸하게 말했다.“정말 세대가 갈수록 퇴보하는 걸까? 전의 세 번의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학생들은 하나같이 Science나 네이처 잡지에 논문을 발표한 유력한 인재들이었는데, 지금은... 하아.”더 이상의 말은 없었고, 그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올해는 그래도 뜻밖에 괜찮은 과제가 하나 있긴 했어. 바로 너희 학교의 학생들이 낸 과제였는데, 제목이... , 조장 이름은 아마도... 서지예라고 한 것 같은데?”“그 과제는 최우수상을 받았지. 연구 주제 선정부터 실험 방식, 그리고 최종 완성도까지 기대 이상이었어. 심사위원들도 만장일치로 학술지 Science에 투고해도 무난히 통과할 수준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으니까!”“심사 끝난 후, 몇몇 교수님들이 서지예 학생에 대해 알아보더군. 들리는 말로는 대학원 입학하자마자 이미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고 하던데, 너희 생명과학대학에서도 꽤 유명한 천재 소녀라더라. 저 나이에 대단하긴 하지...”정은은 장학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그가 지예와 이라는 것을 언급한 순간부터, 정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왜냐하면 그 과제는 분명 그들 팀의 연구 과제였으니까.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지예의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일까?머릿속은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지만, 짧은 충격이 지나가자마자, 정은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진일은 금방 밖에서 돌아왔다. 피곤에 찌든 허리와 어깨는 뻐근했고, 이마 한가운데엔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과로와 지나친 집중으로 인한 피로감이었다.올해 겨울방학, 송지혜
재운은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사실 그는 자신이 지예 그들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줄곧 알고 있었다.그들도 재운을 배척하는 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는데, 아주 티를 냈다.재운은 어설프게나마 그들과 어울리려 애를 썼고, 결국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이런 환경에서 뭉칠 수 있다면, 혼자 남는 일은 없었다.이익을 쫓고 손해를 피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재운도 예외는 아니었다.하지만 재운은 곧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볼 뿐,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호의를 베푼 적이 없다는 것을.그제야 재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세상에는 아무리 애써도 호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결코 녹아들 수 없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그래서 그는 더는 애쓰지 않기로 했다.그냥 혼자 유유히 지내기로.경진대회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누구의 팀에 끼는 것보다, 자신이 어떤 과제를 할지, 누구와 함께할지 먼저 고민했다.어차피 지예가 자신을 초대할 리 없으니, 재운은 처음부터 단념하고 있었다.기대하지 않으면, 배척도 고립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그런데 뜻밖이었다.지예가 먼저 찾아와 손을 내밀 줄이야.재운은 당황해서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보고, 지예는 그가 얼떨결에 기뻐하는 줄 착각하더니,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재운은 이틀을 고민했다.결국 용기를 내어 거절하기로 했다.하지만 거절하기도 전에, 자신의 이름이 이미 팀 명단에 올라가 있었다.“뭐야, 그 표정은? 널 받아준 건 네 능력을 인정해서야. 싫다고 거절하지 마.”진호도 거들었다.“그러니까! 원래 넌 안 끼워주려고 했는데, 같은 반이라고 봐줘서 넣어준 거야. 감사히 생각하라고!”거절할 기회조차 없이, 재운은 지예의 팀원이 되어버렸다.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어차피 이렇게 된 일이라면, 제대로 하는 게 맞다고. 그래서 재운은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논문 자료를 모아 오라는 말에 이틀 밤을 꼬박 새웠고, 간신히 자료를
재운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아니요... 못 받았어요...”진일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당황하지 말고 기숙사에서 기다려. 내가 직접 확인하고 올게.”말을 마치고는 곧장 기숙사를 나와 송지혜의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일은 멈칫했다.송지혜가 말했다.“이번에 꽤 잘했어. 첫 도전인데도 최우수상을 받아왔잖아.”이 성과는 학과에 명예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도 긍지를 안겨주었다.몇 달간 쌓였던 울분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송지혜는 만족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지예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사실, 이 모든 게 다 소정은 덕분이에요. 이모, 그 애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 Science나 네이처 학술지 같은 곳에 논문을 쉽게 낼 수 있고, 이런 대학생 경진대회에서도 이렇게 완성도 높은 연구 과제를 내놓다니...”그녀의 말투에는 질투가 묻어 있었다.지예는 비록 정은의 연구 결과를 가로채긴 했지만, 상대의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송지혜는 차를 홀짝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그 정도가 대단한 거야? 흥, 소정은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도 할 수 있어. 그 애는 운이 좋아서 앞서 나간 것뿐이야. 언젠가 너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지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소정은을 따라잡는다고? 허, 그런 생각은 꿈에서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한때 ‘천재 소녀'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고 살았던 지예는 자신이 정말 천재라고 착각했었다.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그녀는 뼈저리게 깨달았다.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고, 자신은 그저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었다.예전의 거만함과 자만은 결국 우물 속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어리석음에 불과했다.소정은은 정말 강했고, 지예는 한없이 부족했다.하지만 어쨌든 이번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어떤 방법을 썼든 결국
“이모?” 지예는 의아해했다.“네가 일을 시켰으면서 마지막에 이름을 지워버리면, 재운이가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아?”“그렇든 말든 왜 제가 신경 써야 하는 거죠?” 지예는 턱을 치켜들었다.“겁낼 필요야 없지. 시골에서 온 가난뱅이가 뭘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생각해 봤어? 만약 재운이가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은 다 상을 받았는데 자신만 아무것도 못 얻게 되면? 그러다 네가 저지른 일을 눈치채고, 다 같이 망하자는 식으로 폭로해 버리면 어쩌려고?”“그럴 리 없어요... 그 바보가 뭘 알겠어요? 팔려 가도 돈 세며 좋아할 놈인데. 걔가 그렇게까지 똑똑할 것 같아요?”송지혜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았다. “재운 뒤에 진일이 있다는 걸 잊지 마.”지예는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 언급하지도 마세요. 생각하면 화가 나니까요. 이모, 그거 아세요? 지금 그 사람 버젓이 교외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던데요? 하루 종일 밖에서 돌아다니느라 학생답지도 않다니까요!”“지난주에 논문 두 편 빨리 내라고 했더니, 듣자마자 전화를 그냥 끊어버린 거 있죠! 점점 더 건방을 떠는 거 같아요. 교수님인 이모를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고요.”송지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지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채질했다. “게다가, 걔 소정은 팀들과 꽤 친한 사이 같던데요?”“누가 그래?”“그건 굳이 남한테 들을 것도 없죠. 눈으로 보면 다 아는 걸요! 보통 사이였으면, 아니, 아예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면, 소정은이 실험실 완공 기념으로 따로 초청장을 보냈겠어요?”“뭐라고? 진일이 초청장을 받았다고?”“어머, 이모, 모르셨어요?” 지예는 일부러 놀란 척하며 속삭였다. “이거 이미 학교에 다 퍼졌어요. 다들 진일 선배가 대단하다니, 얼굴값 한다니, 아무튼 난리도 아니에요!”“이 자식이!”지예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아까 재운이 이름을 지웠다고 했지? 걔는 지금 조용하니?”“네. 찍소리도 못 하고 있어요. 지금쯤 어딘가에서 몰래 울고 있겠죠?”
아침 일찍, 정은은 알람도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몸이 먼저 하루를 시작하려는 듯 움직였다. 그녀는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머리를 정리했다.오늘 오전 수업은 조금 늦게 있어서, 평소와 달리 부엌부터 들렀다. 전날 밤부터 저온 조리기에 찬물로 불려둔 죽이 잘 끓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뚜껑을 여는 순간, 뜨겁게 올라오는 김이 정은의 얼굴을 감쌌다. 쌀과 잡곡이 어우러진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정은은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한 입 떠먹어봤다. ‘음... 달지도 않고, 너무 퍼지지도 않았어. 딱 좋아.’ 이어서 전원을 끄고, 불도 내렸다. 그리고 집에 밀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기에, 이번엔 자기만의 전병을 해보기로 했다. 정은은 먼저 매콤한 양념장을 만들었다. 양파랑 마늘은 잘게 다지고, 된장에 고추장, 그리고 약간의 물을 넣어 자글자글 볶았다. 거기에 설탕 조금과 굴 소스, 그리고 향신료를 살짝 넣어 풍미를 더했다. 양념장은 따로 식힌 정은이 밀가루 봉지를 꺼냈다. 약 500그램을 큰 그릇에 덜고, 소금을 약간 넣어 섞은 후, 젓가락으로 가운데를 십자로 그어 가르듯 나누었다. 한쪽엔 찬물, 다른 쪽엔 끓는 물을 부어가며 각각 섞어줬다. ‘반죽이 식어도 딱딱해지지 않는 비결. 할머니가 알려준 방식이지.’ 섞은 반죽은 5분 정도 숙성시킨 후, 손으로 부드럽게 치댔다.반죽은 금세 매끈하고 끈적이지 않게 변했다. 15분 정도 덮어두고 반죽을 숙성시키는 사이, 정은은 기름장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숙성된 반죽은 전기 팬 크기에 맞게 밀대로 펴고, 표면에 기름장을 바른 후, 피자처럼 8조각으로 칼집을 냈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접어가며 둥글게 뭉친 후, 5분간 더 숙성. 그걸 다시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고, 한 번 더 밀대로 펴줬다. 이제 팬 위에 올릴 차례. 양면이 노릇하게 구워지면, 양념장을 바르고 대파를 송송, 참깨를 솔솔. 정은은 전병을 두 장 부쳐서 작게 잘랐다. 한 끼
재석이 문득 물었다. “내가 왜 웃는지 몰라서 그래?” 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알아야 해요?” “우리 여자 친구랑 관련된 건데,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남자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 안에 담긴 사랑이 넘칠 듯 차오르고 있었다. ‘저 눈은 반칙이야.’ “재석 씨, 우리... 질문 게임할래요?” 재석이 눈썹을 올렸다. “어떻게 하는 건데?”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질문 하나씩 해요. 빠르게 묻고, 빠르게 답하기... 거짓말은 금지...” “좋아, 네가 먼저.” 정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몇 번째 여자예요?” 시작부터 강수였다. 하지만 재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첫 번째. 첫사랑.” ‘첫사랑...’ 그 말이 재석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낮고 묵직한 울림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섹시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톤.이미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막상 재석의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조금 놀라기도,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진짜... 한 번도 안 사귀어 봤다고?’ 재석이 질문을 이어갔다. “근데, 왜 그걸 물어본 거야? 그렇게 신경 쓰였어?”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질문이 두 개잖아요.” “그럼 두 번에 나눠서 대답을 들어야겠네.” “좋아요, 우선 ‘왜 물어봤냐’에 대한 대답부터 할게요.” 정은은 살짝 숨을 고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그전까진 재석 씨의 연애사에 관해 물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적인 영역이니까, 굳이 파고들지 않았고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연인이니까...”“그런 건,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쌓아갈지에 대한 기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재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 여자 친구 차례.” 정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요?” 재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몇 초간 고민했다. “왜 망설여요?” 그러자 그가 정은의 말을 따라 하듯 장난스럽게 말
“음... 내가 틀린 말 했어요?”정은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재석의 이마에 살짝 핏줄이 떠올랐다. 정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장은혁 씨한테 그렇게 말한 건, 화를 내거나 따지지 않고 먼저 날 걱정부터 했기 때문이에요. 그건 기본적으로 사람 됨됨이가 괜찮다는 뜻이니까요.” “그 뒤로 계속 들이대지 않고 물러난 것도, 자존심 있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죠...”“그리고 일 방면에서는... 솔직히 소재 분야에선 장은혁 씨가 겪어온 게 많아요. 그런 경험이 아니었으면, Z시 공장장이 그렇게까지 대우 안 해줬을걸요?” ‘하아... 진짜...’ 재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운전대가 삐걱하고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로.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서...”하지만 그 말은 정은의 장난기 어린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여자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으며, 눈빛에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설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뿐인데요? 일부러라니요?”“흠흠...” 재석이 괜히 헛기침했다.“그럼, 우리 여자 친구가 보기에... 나랑 장은혁 중에 누가 더 나아? 일로든, 사람 됨됨이로든.”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푸흐하하하하...”웃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터져 나왔다. 눈매가 접히고, 어깨가 들썩이고, 결국은 배까지 움켜쥐며 웃기 시작했다.“아 진짜... 그런 걸 물어요? 재석 씨, 그런 거 묻는 사람 아니잖아요! 근데 진짜 묻네요?! 아 너무 웃겨요...”재석은 억울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봐, 일부러 그런 거 맞네. 스스로 실토한 셈이지?”“푸하하하...”“아직도 웃어?” 재석은 눈을 찌푸리며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정은은 눈물까지 맺힌 얼굴로 말했다. “웃으면 안 돼요? 웃긴 걸 어떡해요? 아, 우리 남자 친구 진짜 귀엽다니까요...”‘이 사람, 질투하면서도 날 내
정은은 바로 정색하고 ‘남자 친구’에게 물었다.“몇 시에 도착했어요? 솔직히 말해봐요.”재석은 ‘10분 전’이라고 말하려다, 입술이 굳어졌다. 결국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음... 한 시간 전.”“왜 그렇게 일찍 온 거예요? 비행편도 다 보냈잖아요.”“그냥... 널 빨리 보고 싶었어.”두 사람의 시선이 딱 맞닿았다.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난 고작 3일밖에 안 비웠는데요?”재석이 바로 대답했다.“나한텐, 3일이 3년 같았거든.”“재석 씨...” 정은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진짜... 말 너무 잘하네, 이 사람.’“생각보다 말 잘하네요. 그런 거 잘 못할 줄 알았는데요...”재석은 장난기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거짓말 아니고, 그냥 진심을 말한 거야.”정은의 가슴이 너무나 설렜다.‘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하니까 더 심쿵하잖아.’‘진짜 반칙이다, 조재석.’이런 다정한 장면이, 멀리서 바라보는 은혁의 눈에는 그야말로 심장을 후벼 파는 칼날과 같았다. ‘조재석...? 그 조재석이라고?’‘병원에서 봤을 땐, 서로 어색하기 그지없던 두 사람이었는데...’ ‘분명히 그땐... 전혀 사귀는 것 같지 않았는데...’은혁의 표정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설마... 이거 다 연기인 건가? 날 거절하려고, 연극까지 짠 거야?’점점 차오르는 분노에 못 이긴 은혁은 두 사람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정은 씨!”정은은 좀 놀랐다.“네?”재석도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은혁은 정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나를 거절하는 건 괜찮아요. 근데 이런 식으로 거짓말까지 하면서, 스스로를 망가뜨릴 필요는 없잖아요.”‘스킨십까지... 괜히 헛소문만 나면 손해 보는 건 여자 쪽이라고...’은혁은 이번엔 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정은 씨가 무슨 이유로 이런 유치한 연극에 합을 맞춰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행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