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의 얼굴은 순간 굳어졌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컴퓨터 화면부터 확인했다.‘분명 최소화해서 숨겨 놨는데, 어떻게...’동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섰다.“아니, 괜히 그 아이를 건드려서 뭐 하려고 그래? 논리력, 사고력, 말솜씨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그런데 저 여학생, 말투가 참 매섭네. 대체 정체가 뭐야? 너 아는 사람이야?”“생명과학대학에서 소정은 학생을 모르면 간첩이지. 혼자서 두 명의 동창을 데리고 스마트 실험실을 설립했고, 그것도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잖아. Science 학술지에 논문도 냈고, 네이처 잡지에도 논문을 실었어. 우리 학과 내년 연구 실적의 절반은 다 그 학생한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런데도 몰라?”“아... 이름은 들어봤는데, 이렇게 생긴 줄은 몰랐어...”‘이거 참!’“그래도 뭐 별거 아니잖아? 그렇게 대단한 논문을 썼다면서 정작 대학생 대회 같은 소규모 대회에서조차 상 하나 못 탔다니? 본인이 직접 그러던데?”동료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왜 우리 사무실을 찾았겠어?”“그야... 보고서를 돌려받으려는 거겠지?”“맞아. 그런데 왜 돌려받으려는지 생각해 봤어? 보고서가 조작됐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는 거야.”“하, 웃기네. 누가 그럴 시간이나 있대? 자기들이 못 해서 떨어진 걸 괜히 트집 잡는 거지!”“그럴 수도 있지만, 더 큰 가능성이 하나 있어.”“뭔데?”“보고서가 제출 과정에서 변조됐을 가능성. 제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하려는 거야.”“쳇, 누가 심심해서 그 보고서에 손을 대겠어? 정말 웃겨.”“그래, 누가 그랬겠어. 하지만 만약 제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게 밝혀지면, 학교 사무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거야. 보고서를 거친 사람들 모두 조사 대상이 되겠지. 내가 너라면 지금 웃음이 나오지 않을 거야.”보고서를 거친 사람들 중, 마침 이 사무실에 있는 그 교수님이 있었다.그러니 그녀는 계속 웃을 여유가 있을
“여전히 똑같아, 아무도 받지 않아.”“좋아! 책임을 미루는 학교 측, 죽은 척하는 주최 측. 이 안에 문제가 없다고? 절대 믿을 수 없어!”정은은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떠올랐다.“이런 전국적인 대회에서는 심사위원이 보통 해당 분야의 대학교수들로 구성돼. 내가 알기로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했을 텐데. 우리 학교 교수님이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자.”민지는 곧바로 노트북을 켜고 빠르게 검색한 뒤 외쳤다.“찾았다!”하지만 정은이 직접 확인한 결과, 심사위원 명단 어디에서도 서비대학교 교수님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서준이 설명했다.“서비대랑 연성대는 매년 강력한 경쟁 학교로 꼽혀, 수상자 절반이 이 두 학교에서 나오니까요. 그래서 공정성을 위해 주최 측은 원칙적으로 두 학교 교수님들을 심사위원으로 위탁하지 않았던 거예요.”즉, 문제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민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다른 학교 교수님들은 아예 아는 분이 없잖아. 어떻게 연락하지?”설령 연락한다고 해도 그들이 응답해 줄지는 미지수였다.정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우리는 몰라도, 교수님들끼리는 알고 지낼 수도 있어.”“그게 무슨 뜻이에요, 정은 언니?”“오 교수님께 여쭤보면, 명단에 있는 교수님 중 아는 분이 계실지도 몰라.”하지만 오미선은 지금 해외 학술 세미나 참석 중이었다. 시차 때문에 전화 통화가 어려웠기에, 정은은 메일을 보내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그날 밤, 오미선이 답장을 보냈다.그녀는 정은의 결정을 지지하며 반드시 연구 보고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또한, 앞으로 24시간 동안 핸드폰을 켜두겠으니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가 바로,명단에 오미선이 아는 교수가 있었던 것이다.다만 안면이 있는 정도였고, 개인 연락처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교수는 재석과 친분이 있었다.그래서 그날 밤, 함께 러닝을 하던 중 정은이 재석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대략 이런 상황이에요. 지금 주최 측과 연
정은은 의혹을 느꼈다.“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될 거야.”10분 후, 커다란 그림자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나타났다.“안녕, 재석아.”정은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예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이건... 믿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눈앞의 노은, 아니, 그의 옷차림만 보면 도저히 ‘노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GAP 맨투맨에 Levi’s 청바지, 그리고 Moncler 패딩까지 걸치고 있었다.거기에 챙이 푹 눌린 캡모자로 희끗희끗한 머리를 가린 데다가, 깊게 팬 주름을 가린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이건... 나이를 어떻게 짐작하라는 거야?’그러니 재석이 장학경을 마음이 젊고, 젊은이들 못지 않게 트렌드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건 그냥 트랜드를 넘어섰잖아!’“장 교수님, 또 뵙네요.”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눈 뒤, 옆에 앉아 있는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소개할게요. 제 친구 소정은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장학경 교수님이셔.”“안녕하세요, 장 교수님.”“안녕, 아가씨! 자, 어서 앉아.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난 엄숙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커피 마시고 이야기하면 돼. 굳이 나를 선배 대하듯 깍듯이 모실 필요 없어. 난 그런 거 안 좋아하거든.”이야기를 나누던 중 정은은 장학경이 M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키가 그렇게 큰 데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사실 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얼마 전, 두 명의 친구와 함께 팀을 꾸려 대학생 대회에 참가했었어요. 그런데 어제 발표 결과에서 저희 팀은 수상을 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제라도 저희의 과제 보고서를 받고 싶은데, 학교 측과 대회 주최 측 모두 별다른 답을 주지 않더라고요.”“교수님은 심사위원 경험이 많으시잖아요. 대회 참가자가 사후에 자신의 과제 보고서를 받
“이번 대회를 말하자면, 요즘 학생들이 예전과 달라진 건지, 아니면 전체적인 교육 환경이 변해버린 건지 모르겠어.”“제출된 과제 중 50%는 허황된 내용이고, 나머지 40%는 앞뒤가 안 맞아 말도 안 되더군. 겨우 10%도 안 되는 과제만이 그나마 볼 만했지.”장학경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씁쓸하게 말했다.“정말 세대가 갈수록 퇴보하는 걸까? 전의 세 번의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학생들은 하나같이 Science나 네이처 잡지에 논문을 발표한 유력한 인재들이었는데, 지금은... 하아.”더 이상의 말은 없었고, 그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올해는 그래도 뜻밖에 괜찮은 과제가 하나 있긴 했어. 바로 너희 학교의 학생들이 낸 과제였는데, 제목이... , 조장 이름은 아마도... 서지예라고 한 것 같은데?”“그 과제는 최우수상을 받았지. 연구 주제 선정부터 실험 방식, 그리고 최종 완성도까지 기대 이상이었어. 심사위원들도 만장일치로 학술지 Science에 투고해도 무난히 통과할 수준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으니까!”“심사 끝난 후, 몇몇 교수님들이 서지예 학생에 대해 알아보더군. 들리는 말로는 대학원 입학하자마자 이미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고 하던데, 너희 생명과학대학에서도 꽤 유명한 천재 소녀라더라. 저 나이에 대단하긴 하지...”정은은 장학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그가 지예와 이라는 것을 언급한 순간부터, 정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왜냐하면 그 과제는 분명 그들 팀의 연구 과제였으니까.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지예의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일까?머릿속은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지만, 짧은 충격이 지나가자마자, 정은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진일은 금방 밖에서 돌아왔다. 피곤에 찌든 허리와 어깨는 뻐근했고, 이마 한가운데엔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과로와 지나친 집중으로 인한 피로감이었다.올해 겨울방학, 송지혜
재운은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사실 그는 자신이 지예 그들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줄곧 알고 있었다.그들도 재운을 배척하는 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는데, 아주 티를 냈다.재운은 어설프게나마 그들과 어울리려 애를 썼고, 결국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이런 환경에서 뭉칠 수 있다면, 혼자 남는 일은 없었다.이익을 쫓고 손해를 피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재운도 예외는 아니었다.하지만 재운은 곧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볼 뿐,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호의를 베푼 적이 없다는 것을.그제야 재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세상에는 아무리 애써도 호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결코 녹아들 수 없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그래서 그는 더는 애쓰지 않기로 했다.그냥 혼자 유유히 지내기로.경진대회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누구의 팀에 끼는 것보다, 자신이 어떤 과제를 할지, 누구와 함께할지 먼저 고민했다.어차피 지예가 자신을 초대할 리 없으니, 재운은 처음부터 단념하고 있었다.기대하지 않으면, 배척도 고립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그런데 뜻밖이었다.지예가 먼저 찾아와 손을 내밀 줄이야.재운은 당황해서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보고, 지예는 그가 얼떨결에 기뻐하는 줄 착각하더니,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재운은 이틀을 고민했다.결국 용기를 내어 거절하기로 했다.하지만 거절하기도 전에, 자신의 이름이 이미 팀 명단에 올라가 있었다.“뭐야, 그 표정은? 널 받아준 건 네 능력을 인정해서야. 싫다고 거절하지 마.”진호도 거들었다.“그러니까! 원래 넌 안 끼워주려고 했는데, 같은 반이라고 봐줘서 넣어준 거야. 감사히 생각하라고!”거절할 기회조차 없이, 재운은 지예의 팀원이 되어버렸다.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어차피 이렇게 된 일이라면, 제대로 하는 게 맞다고. 그래서 재운은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논문 자료를 모아 오라는 말에 이틀 밤을 꼬박 새웠고, 간신히 자료를
재운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아니요... 못 받았어요...”진일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당황하지 말고 기숙사에서 기다려. 내가 직접 확인하고 올게.”말을 마치고는 곧장 기숙사를 나와 송지혜의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일은 멈칫했다.송지혜가 말했다.“이번에 꽤 잘했어. 첫 도전인데도 최우수상을 받아왔잖아.”이 성과는 학과에 명예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도 긍지를 안겨주었다.몇 달간 쌓였던 울분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송지혜는 만족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지예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사실, 이 모든 게 다 소정은 덕분이에요. 이모, 그 애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 Science나 네이처 학술지 같은 곳에 논문을 쉽게 낼 수 있고, 이런 대학생 경진대회에서도 이렇게 완성도 높은 연구 과제를 내놓다니...”그녀의 말투에는 질투가 묻어 있었다.지예는 비록 정은의 연구 결과를 가로채긴 했지만, 상대의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송지혜는 차를 홀짝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그 정도가 대단한 거야? 흥, 소정은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도 할 수 있어. 그 애는 운이 좋아서 앞서 나간 것뿐이야. 언젠가 너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지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소정은을 따라잡는다고? 허, 그런 생각은 꿈에서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한때 ‘천재 소녀'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고 살았던 지예는 자신이 정말 천재라고 착각했었다.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그녀는 뼈저리게 깨달았다.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고, 자신은 그저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었다.예전의 거만함과 자만은 결국 우물 속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어리석음에 불과했다.소정은은 정말 강했고, 지예는 한없이 부족했다.하지만 어쨌든 이번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어떤 방법을 썼든 결국
“이모?” 지예는 의아해했다.“네가 일을 시켰으면서 마지막에 이름을 지워버리면, 재운이가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아?”“그렇든 말든 왜 제가 신경 써야 하는 거죠?” 지예는 턱을 치켜들었다.“겁낼 필요야 없지. 시골에서 온 가난뱅이가 뭘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생각해 봤어? 만약 재운이가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은 다 상을 받았는데 자신만 아무것도 못 얻게 되면? 그러다 네가 저지른 일을 눈치채고, 다 같이 망하자는 식으로 폭로해 버리면 어쩌려고?”“그럴 리 없어요... 그 바보가 뭘 알겠어요? 팔려 가도 돈 세며 좋아할 놈인데. 걔가 그렇게까지 똑똑할 것 같아요?”송지혜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았다. “재운 뒤에 진일이 있다는 걸 잊지 마.”지예는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 언급하지도 마세요. 생각하면 화가 나니까요. 이모, 그거 아세요? 지금 그 사람 버젓이 교외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던데요? 하루 종일 밖에서 돌아다니느라 학생답지도 않다니까요!”“지난주에 논문 두 편 빨리 내라고 했더니, 듣자마자 전화를 그냥 끊어버린 거 있죠! 점점 더 건방을 떠는 거 같아요. 교수님인 이모를 전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고요.”송지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지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채질했다. “게다가, 걔 소정은 팀들과 꽤 친한 사이 같던데요?”“누가 그래?”“그건 굳이 남한테 들을 것도 없죠. 눈으로 보면 다 아는 걸요! 보통 사이였으면, 아니, 아예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면, 소정은이 실험실 완공 기념으로 따로 초청장을 보냈겠어요?”“뭐라고? 진일이 초청장을 받았다고?”“어머, 이모, 모르셨어요?” 지예는 일부러 놀란 척하며 속삭였다. “이거 이미 학교에 다 퍼졌어요. 다들 진일 선배가 대단하다니, 얼굴값 한다니, 아무튼 난리도 아니에요!”“이 자식이!”지예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아까 재운이 이름을 지웠다고 했지? 걔는 지금 조용하니?”“네. 찍소리도 못 하고 있어요. 지금쯤 어딘가에서 몰래 울고 있겠죠?”
게시글은 무려 10페이지에 달했고,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고발자는 다름 아닌 송지혜의 제자인 진일이었다. 그는 송지혜가 논문을 조작하고, 사적으로 대학원생을 선발하며, 뇌물을 받고 외부 기업과 결탁한 것은 물론, 조카인 지예를 위해 대필 논문까지 작성하게 했다고 폭로했다.게시글 말미에는 PDF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를 열어보면 총 30여 페이지가 넘는 송지혜의 비리와 부정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증거 자료까지 포함된 이 문서는 단순한 의혹을 넘어선 확실한 폭로였다.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학생들을 착취하고 각종 선물을 요구한 정황.][제자들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하며 강압적으로 일을 시킨 사례.]가장 충격적인 것은, 송지혜가 진일의 연구 성과를 가로채고, 이를 지예의 성과로 둔갑시킨 것이었다.이 모든 내용은 명확한 증거와 함께 공개되었고, 서비대학교의 사이트는 순식간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세상에, 30 페이지가 넘다니. 정말 충격이야.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한데?][요약해 줄 사람 없나? 너무 길어서 다 읽긴 힘든데.][이건 명백한 교수님의 권력 남용이애. 제자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걸 보면, 얼마나 참다가 폭로한 것이겠어.][헉, 고등학생 때부터 이런 짓을 해왔다고? 그럼 특혜며 대학원 진학까지 다 부정입학 아니야?][천재 소녀? 웃기지 마. 부정행위로 쌓아 올린 가짜 성공이겠지!][그런데 교수님의 제자가 직접 폭로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 보통은 익명으로라도 조심스럽게 올리는데, 실명으로 터뜨린 걸 보면 진짜 궁지까지 몰렸던 모양이야. 만약 이게 사실이 아니면, 이 학생도 정말 악인이 다름없어!][읽다가 소름 돋았어. 매일같이 교수한테 갈굼당하는 나로선 너무 공감돼서 눈물 날 지경이야... 난 이런 용기가 없지만, 그래도 남진일을 응원하겠어!][와, 진일 선배 정말 너무 비참한대?][진짜 최악이다. 연구 성과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조카 대신 논문을 써주게 했다고? 이 정도면 범죄 아니야?]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