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은 무려 10페이지에 달했고,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고발자는 다름 아닌 송지혜의 제자인 진일이었다. 그는 송지혜가 논문을 조작하고, 사적으로 대학원생을 선발하며, 뇌물을 받고 외부 기업과 결탁한 것은 물론, 조카인 지예를 위해 대필 논문까지 작성하게 했다고 폭로했다.게시글 말미에는 PDF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를 열어보면 총 30여 페이지가 넘는 송지혜의 비리와 부정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증거 자료까지 포함된 이 문서는 단순한 의혹을 넘어선 확실한 폭로였다.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학생들을 착취하고 각종 선물을 요구한 정황.][제자들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하며 강압적으로 일을 시킨 사례.]가장 충격적인 것은, 송지혜가 진일의 연구 성과를 가로채고, 이를 지예의 성과로 둔갑시킨 것이었다.이 모든 내용은 명확한 증거와 함께 공개되었고, 서비대학교의 사이트는 순식간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세상에, 30 페이지가 넘다니. 정말 충격이야.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한데?][요약해 줄 사람 없나? 너무 길어서 다 읽긴 힘든데.][이건 명백한 교수님의 권력 남용이애. 제자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걸 보면, 얼마나 참다가 폭로한 것이겠어.][헉, 고등학생 때부터 이런 짓을 해왔다고? 그럼 특혜며 대학원 진학까지 다 부정입학 아니야?][천재 소녀? 웃기지 마. 부정행위로 쌓아 올린 가짜 성공이겠지!][그런데 교수님의 제자가 직접 폭로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 보통은 익명으로라도 조심스럽게 올리는데, 실명으로 터뜨린 걸 보면 진짜 궁지까지 몰렸던 모양이야. 만약 이게 사실이 아니면, 이 학생도 정말 악인이 다름없어!][읽다가 소름 돋았어. 매일같이 교수한테 갈굼당하는 나로선 너무 공감돼서 눈물 날 지경이야... 난 이런 용기가 없지만, 그래도 남진일을 응원하겠어!][와, 진일 선배 정말 너무 비참한대?][진짜 최악이다. 연구 성과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조카 대신 논문을 써주게 했다고? 이 정도면 범죄 아니야?]
“험난한 선택이요?”민지는 이해하지 못했다.“고발은 어렵지 않을 텐데. 증거만 충분하면 여론을 이용해 직접 송지혜 교수님을 무너뜨릴 수 있잖아요. 이게 정식으로 법적 절차를 밟는 것보다 훨씬 빠를 텐데.”여론이 커지면 학교도 모른 척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효율만 따지면 고발이 가장 빠른 방법이지. 하지만 그 게시물을 다시 한번 자세히 봐봐.”“봤어. 몇 번이나 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진일 선배는 실명으로 고발했어.”“그래서?”민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서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민지는 지금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학생이 교수님을 고발하면 두 가지 결과뿐이야. 첫째, 성공해서 교수님이 처벌을 받는다. 둘째, 실패해서 교수님은 여전히 멀쩡하다. 하지만 어떤 결과든 학생의 입장에 있어 이후의 상황은 지옥과 다름없어.”민지는 눈살을 찡그리며 물었다.“실패하면 교수님한테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건 이해해. 그런데 왜 성공해도 마찬가지란 거야?”서준은 조용히 되물었다.“그런 성공했다고 치자. 그다음은?”“당연히 그 교수님이 해임되거나, 감옥에 가겠지!”“맞아. 그럼 교수님이 해임되면, 그 학생은?”서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특히 진일 선배처럼 마지막 1년을 앞둔 사람이라면? 곧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지도교수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민지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했다.교수가 해임되면 진일은 제때 졸업할 수 없게 된다.설령 학교 측에서 지도교수를 바꿀 기회를 준다고 해도, 몇 년 동안 연구한 분야가 바뀌면 주제 자체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그렇게 되면 지난 3년 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졸업을 하지 못 한 대학원생이 학부생과 뭐가 다를까?아니, 어쩌면 학부생보다도 더 못할 수도 있었다.동기들 중 학부생들은 나이도 더 어리고, 앞으로 기회도 많았다.한참 동안 침묵하
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안 되는 건 아닌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해.”정은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러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뭐야...”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둘 다 날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정은 언니, 좋은 방법 좀 생각해 봐요. 우리 같이 진일 선배 도와줘요. 이건 선배의 힘을 빌려 송 교수를 처치하는 거잖아요. 기왕이면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요. 후배들이 피해 보는 걸 막아야 하니까요.”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그동안 우리도 당한 게 많으니까, 이번엔 송 교수가 죗값을 치를 차례예요.”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민지야, 진일 선배한테 전화 걸어. 그리고...”...정말 정은과 서준의 예상대로였다.글이 처음 올라왔을 땐 반응이 뜨거웠다.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고, 조회수도 10만을 돌파했다.하지만 학교 측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송지혜 또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점차 흥미를 잃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그와 함께 게시물의 열기도 식어갔다.이렇게 되면 며칠 안으로 이번 논란은 조용히 사그라들 것이고, 결국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이다.“풉.”송지혜는 사태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마치 자신이 고발당한 게 아닌 듯, 오히려 비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이 같은 상황에서, 지예는 달랐다.진일이 글을 올린 순간부터 그녀는 멘탈이 무너질 지경이었다.사흘 내내 울기만 했다.눈물로 흠뻑 젖은 뺨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눈물이 흘렀고, 그 와중에도 휴대폰을 붙잡고 미친 듯이 사이트를 확인했다.댓글 속 끝없는 비난과 조롱을 보며 결국 또 울음을 터뜨리다 기절해버렸다.그 모습을 본 송지혜가 혀를 차며 소리쳤다.“쯧, 한심한 것! 내가 죽기라도 했어? 벌써부터 상이라도 지내는 거야? 날 저주하는 거냐, 아니면 내 속 뒤집히게 하려는 거야?”말을 마치자마자 송지혜는 성큼성큼
짝짝짝-송지혜가 박수를 쳤다.“그런데 넌 잊었니? 내가 네 지도교수야. 내가 무너지면, 네가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아?”“사제 간의 정을 봐서 기회를 줄게. 이번 일은 네가 꾸민 자작극이었다고 인정한 뒤 나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해. 그러면 난 이 일을 없던 걸로 해줄 수도 있어. 넌 정상적으로 졸업할 수 있고.”진일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구부렸다.“이미 결심했기에 후회 같은 건 없어요.”충혈된 눈, 지친 얼굴.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그리고 한가지 여쭤보고 싶어요. 교수님은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하세요. 제가 신고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으세요?”송지혜가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그게 뭐 중요한데? 좋아, 네가 끝까지 버틴다면 나도 사제 간의 정을 고려하지 않겠어.”진일은 우습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사제 간의 정?’그녀에게 있어, 진일은 언제나 부르면 오고, 필요 없으면 버리면 되는 존재였다. 애초에 사람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물론 진일은 침묵할 수도 있었다. 단지 6개월만 버티면 되니까. 졸업장을 들고 이곳을 떠나면, 송지혜라는 이름도 다시는 들을 일 없을 것이다.‘하지만 내가 떠난 뒤 남은 사람들은 어떡하지?’재운 같은 피해자는 또다시 생길 것이고, 이런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그는 졸업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그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그 아이들은 결국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는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진일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그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진일은 이제야 깨달았다.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을.누군가는 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꼭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전에 진일은 정은의 용기에 탄복한 적이 있는데, 지금, 그는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결국 불쾌하게 헤어졌다.떠나기 전에 송지혜는 매섭게 경고했다.“나도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야. 넌 얼른 내가 말한 대로 해.
[이 순간부터 공부의 의미가 이미 변했어.]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나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어.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어. 그 친구들은 오랜 시간 노력했고, 먼 길을 걸어 마침내 최고의 학부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도 내게 그곳에 깊고 어두운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어.][나는 일반 대학 출신이라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할 수가 없군. 그렇지만, 그래도 뭔가 남기고 싶어.][이번만큼은 꼭 이겨라.][나는 실패자일지 몰라도, 그 아이는 아니야. 그 아이는 내가 어릴 때부터 동경해온, 노력으로 빛나는 사람이니까.][난 진일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남진일, 네 앞날이 밝고 찬란한 길이 되길 바랄게. 너의 인생이 눈부시게 펼쳐지길.][시든 꽃잎을 모아 엉성한 시집을 만들지 말고, 세상을 뒤흔드는 책 속의 가장 뜻깊은 한 장을 써 내려가야 해!]...정오 12시, 진일의 두 번째 게시글이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다.이번엔 10분짜리 녹음 파일이었다.진일은 재운의 일을 해결하러 교수 사무실을 찾았으나, 문 앞에서 뜻밖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송지혜와 서지예.이모와 조카의 대화를.진일은 그 녹음을 그대로, 한 치의 편집도 없이 올렸다.자동 생성된 자막이 전부였다.오후 1시.[서비대 학생, 자신의 지도교수를 고발하다.]이 태그가 순식간에 주요 SNS을 독차지하며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수많은 네티즌이 서비대학교 공식 사이트로 몰려가 고발 방법을 찾았고, 결국 서버가 붕괴되었다.학교 공식 계정 역시 ‘폭격’을 당했다.댓글 창은 온통 진일을 위한 댓글로 뒤덮였다....한편, 휴가 중이던 교내 주요 부서의 책임자는 긴급 복귀하여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송지혜! 또 송지혜야!” 이제 사람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국내 최상위권 명문으로 손꼽히는 서비대학교,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지닌 학교가 한 사람으로
서비대학교 본부 행정실에서.“이제 우리 학교 공식 입장을 발표한 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 지금 여론의 흐름은 어떻게 됐어?”비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왜 대답이 없지?!”그게...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습니다.”행정실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결국, 고발 사건이 이렇게까지 커졌으니, 학교 측의 공식 입장이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반응은?”“별로 좋지 않습니다.”“그게 무슨 뜻이지?”“네티즌들은 전부 남진일 학생이 어떻게 될지, 예정대로 졸업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행정실 실장은 순간 얼어붙었다....한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망했어... 이제 끝장이야...”지예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황급히 핸드폰을 내던지고 침실로 뛰어들었다.“이모! 이모! 빨리 일어나세요, 큰일 났어요!”송지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조카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몸을 살짝 움직였을 뿐 눈조차 뜨지 않았다.“이모! 진짜 심각한 일이에요!”지예는 다급하게 송지혜를 흔들며 깨우려 했다.그러자 송지혜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반사적으로 지예의 손등을 탁 하고 내려쳤다.“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 거야! 좀 편하게 자게 놔둘 수 없어?!”지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손등을 감싸 쥐었다. 맞은 곳이 따끈하게 아팠고, 가슴은 더욱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울먹이며 외쳤다.“이모, 큰일 났어요!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송지혜는 짜증 난 듯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내가 몇 번을 말해, 침착하라고! 침착 좀 해! 너 지금 거울로 네 꼴 좀 봐!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아니면 소파에 바짝 붙어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나...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이모! 남진일이 또 신고했어요!”지예는 다급하게 발을 굴렀고, 눈물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다.그러자 송지혜는 비웃듯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하! 학교 사이트가 자기의 것이라도 되
지예의 시각에서, 상대방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를 잃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게 굴며 태연하고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공포와 혼란,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바뀌었다.“아, 아니... 말도 안 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지예는 비웃듯이 말했다.“여론은 원래 순식간에 변하는 법이죠. 이모가 어제 밖에서 돌아와서 곯아떨어지는 동안,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겠죠.”“남진일 이 빌어먹을 자식! 학교 사이트에서 난리 친 것도 모자라, 감히 이 일을 SNS에 올리다니?!”“왜 못 하겠어요?” 지예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모는 졸업을 빌미로 협박까지 하셨잖아요. 이미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상황에서, 당연히 죽기 살기로 덤벼들겠죠. 가만히 앉아서 당할 바에야 어떻게든 발버둥 치는 게 낫지 않아요?”찰싹.손바닥이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끈거리는 느낌이 얼굴에 퍼졌다.“너, 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송지혜가 격분하며 소리쳤다. “내가 무너지면, 넌 멀쩡할 것 같아?!”그러나 이번에 지예는 울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그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맞은 볼이 붉게 부어오른 채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송지혜는 정말 손에 힘을 주었다.“왜... 왜 그렇게 날 쳐다봐?”그 눈빛이 섬뜩했는지, 송지혜가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뒷걸음질쳤다.지예의 목소리는 싸늘했다.“당연히 이모가 겁에 질려 허둥대는 모습,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 높은 곳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거겠죠. 그리고, 스스로 초래한 파멸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걸 깨닫는 모습까지요.”“너...” 송지혜는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하지만 이번엔 지예가 먼저 움직였다.번개처럼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힘껏 밀쳐 벽으로 내던졌다.쿵.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이제 두 번 다시 저를 때리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지예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나는 이모의
학교 측은 진일이 고발 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진일은 자신의 연구 방향에 따라 새로운 교수님을 선택할 수 있으며, 학교 측도 최선을 다해 양측이 원활히 소통하고 협의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두 번째는 송지혜의 제자들이 경진대회 중 다른 팀원의 과제 보고서를 바꿔치기한 사건으로, 그 조사 결과, 제보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었다.이에 따라 관련자는 해임되었으며, 대학원생 지예는 즉시 제적 조치되었다.세 번째는 조사 과정에서 학교 측은 송지혜가 불법적으로 뇌물을 받고 학생을 선발한 사실을 확인했고, 이에 연루된 학생 세정 또한 제적 처리되었다.마지막으로, 학교 측은 송지혜의 심각한 학문적 부정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파장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동시에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또한, 이를 계기로 내부 조사를 더욱 철저히 진행하고, 제도적 허점을 보완하며, 건강한 학문계와 올바른 교육 환경을 확립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당신들은 누구죠?”진호는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멍을 때리고 있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컴퓨터와 서류를 옮기는 것을 바라보았다.서정은 잽싸게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가로막았다.“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송지혜 교수님의 사무실 맞죠?”“알고 있으면 다행이군.”“계속 옮겨!”서정은 눈을 부릅떴다.“당신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누가 이 자료를 건드리라고 했어? 이건 과제팀 외에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기밀 서류야! 만약 손상되거나 유출되면 그 책임질 수 있어?”그녀는 손을 뻗어 자료를 빼앗으려 했다.그러나 상대방은 단호했다.“넌 송지혜 교수님의 학생이지? 우리는 조사팀인데, 오늘 이 자료들을 확보해서 증거로 제출해야 하니 방해하지 말고 비켜요.”“조사팀?”서정은 멍한 얼굴로 상대방의 말을 되풀이했다.그때, 진호가 휴대폰을 들고 갑자기 외쳤다.“이거 봐!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서정은 다가가서 진호의 핸드폰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