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대학교 본부 행정실에서.“이제 우리 학교 공식 입장을 발표한 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 지금 여론의 흐름은 어떻게 됐어?”비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왜 대답이 없지?!”그게...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습니다.”행정실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결국, 고발 사건이 이렇게까지 커졌으니, 학교 측의 공식 입장이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반응은?”“별로 좋지 않습니다.”“그게 무슨 뜻이지?”“네티즌들은 전부 남진일 학생이 어떻게 될지, 예정대로 졸업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행정실 실장은 순간 얼어붙었다....한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망했어... 이제 끝장이야...”지예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황급히 핸드폰을 내던지고 침실로 뛰어들었다.“이모! 이모! 빨리 일어나세요, 큰일 났어요!”송지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조카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몸을 살짝 움직였을 뿐 눈조차 뜨지 않았다.“이모! 진짜 심각한 일이에요!”지예는 다급하게 송지혜를 흔들며 깨우려 했다.그러자 송지혜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반사적으로 지예의 손등을 탁 하고 내려쳤다.“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 거야! 좀 편하게 자게 놔둘 수 없어?!”지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손등을 감싸 쥐었다. 맞은 곳이 따끈하게 아팠고, 가슴은 더욱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울먹이며 외쳤다.“이모, 큰일 났어요!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송지혜는 짜증 난 듯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내가 몇 번을 말해, 침착하라고! 침착 좀 해! 너 지금 거울로 네 꼴 좀 봐!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아니면 소파에 바짝 붙어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나...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이모! 남진일이 또 신고했어요!”지예는 다급하게 발을 굴렀고, 눈물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다.그러자 송지혜는 비웃듯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하! 학교 사이트가 자기의 것이라도 되
지예의 시각에서, 상대방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를 잃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게 굴며 태연하고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공포와 혼란,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바뀌었다.“아, 아니... 말도 안 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지예는 비웃듯이 말했다.“여론은 원래 순식간에 변하는 법이죠. 이모가 어제 밖에서 돌아와서 곯아떨어지는 동안,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겠죠.”“남진일 이 빌어먹을 자식! 학교 사이트에서 난리 친 것도 모자라, 감히 이 일을 SNS에 올리다니?!”“왜 못 하겠어요?” 지예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모는 졸업을 빌미로 협박까지 하셨잖아요. 이미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상황에서, 당연히 죽기 살기로 덤벼들겠죠. 가만히 앉아서 당할 바에야 어떻게든 발버둥 치는 게 낫지 않아요?”찰싹.손바닥이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끈거리는 느낌이 얼굴에 퍼졌다.“너, 대체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송지혜가 격분하며 소리쳤다. “내가 무너지면, 넌 멀쩡할 것 같아?!”그러나 이번에 지예는 울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그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맞은 볼이 붉게 부어오른 채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송지혜는 정말 손에 힘을 주었다.“왜... 왜 그렇게 날 쳐다봐?”그 눈빛이 섬뜩했는지, 송지혜가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뒷걸음질쳤다.지예의 목소리는 싸늘했다.“당연히 이모가 겁에 질려 허둥대는 모습,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 높은 곳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거겠죠. 그리고, 스스로 초래한 파멸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걸 깨닫는 모습까지요.”“너...” 송지혜는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하지만 이번엔 지예가 먼저 움직였다.번개처럼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힘껏 밀쳐 벽으로 내던졌다.쿵.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이제 두 번 다시 저를 때리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지예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나는 이모의
학교 측은 진일이 고발 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진일은 자신의 연구 방향에 따라 새로운 교수님을 선택할 수 있으며, 학교 측도 최선을 다해 양측이 원활히 소통하고 협의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두 번째는 송지혜의 제자들이 경진대회 중 다른 팀원의 과제 보고서를 바꿔치기한 사건으로, 그 조사 결과, 제보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었다.이에 따라 관련자는 해임되었으며, 대학원생 지예는 즉시 제적 조치되었다.세 번째는 조사 과정에서 학교 측은 송지혜가 불법적으로 뇌물을 받고 학생을 선발한 사실을 확인했고, 이에 연루된 학생 세정 또한 제적 처리되었다.마지막으로, 학교 측은 송지혜의 심각한 학문적 부정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파장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동시에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또한, 이를 계기로 내부 조사를 더욱 철저히 진행하고, 제도적 허점을 보완하며, 건강한 학문계와 올바른 교육 환경을 확립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당신들은 누구죠?”진호는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멍을 때리고 있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컴퓨터와 서류를 옮기는 것을 바라보았다.서정은 잽싸게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가로막았다.“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송지혜 교수님의 사무실 맞죠?”“알고 있으면 다행이군.”“계속 옮겨!”서정은 눈을 부릅떴다.“당신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누가 이 자료를 건드리라고 했어? 이건 과제팀 외에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기밀 서류야! 만약 손상되거나 유출되면 그 책임질 수 있어?”그녀는 손을 뻗어 자료를 빼앗으려 했다.그러나 상대방은 단호했다.“넌 송지혜 교수님의 학생이지? 우리는 조사팀인데, 오늘 이 자료들을 확보해서 증거로 제출해야 하니 방해하지 말고 비켜요.”“조사팀?”서정은 멍한 얼굴로 상대방의 말을 되풀이했다.그때, 진호가 휴대폰을 들고 갑자기 외쳤다.“이거 봐!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서정은 다가가서 진호의 핸드폰
“얘 좀 봐, 가라면 가. 네가 대학원에 합격했다고 해서 이런 인간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성적이 아직 남의 손에 달려 있으니, 선물 좀 보내도 나쁠 것 없잖아. 지난번에 보낸 생선과 팔찌도...”“선물, 선물, 선물! 엄마는 맨날 선물 얘기만 하잖아! 그거 뇌물이라고! 몰라?”서정은 결국 폭발하며 소리를 질렀다.서영숙은 순간 얼어붙었다가 이내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세게 찔렀다.“이 망할 계집애! 내가 누구를 위해 선물하는 줄 알아? 내가 바보라서 이렇게 좋은 물건들을 남한테 퍼준 줄 알아? 이런 거 없었으면 네가 교수님 앞에서 그렇게 잘 보일 수 있었을 것 같아?”“하, 하하, 정말 나를 위해서라고요?”서정은 비웃듯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서영숙은 당황했다.“너... 너 왜 그래? 엄마 놀라게 하지 마...”“그냥 인정해요, 엄마.”서정은 서영숙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엄마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 자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잖아요! 엄마의 체면을 위해서, 엄마가 못 이룬 걸 내가 대신 이루길 바라는 거잖아요!”“엄마는 명문대를 못 나왔고,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진출해서 나중에 아빠랑 결혼했지만, 학벌도, 출신도 변변하지 못하니까 할머니한테 인정받지 못했잖아요!”“그래서 어릴 때부터 나랑 오빠한테 성적을 강요했죠. 명문대 가야 하고, 유학 가야 하고, 대학원도 가야 하고, 박사까지 따야 한다고!”“하지만 난 그게 잘 안 돼요! 1등도 못 하고, 대학원도 못 붙고! 엄마처럼 나도 공부랑은 안 맞단 말이에요! 그래서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고요!”“이제 다 밝혀졌어요! 송지혜 교수님도 조사받고, 내가 선물했던 것도 다 드러났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날 퇴학시키려고 해요! 이제 됐죠? 이제 만족하는 거예요?”성공도 선물 덕, 실패도 선물 탓.서정은 울면서 위층으로 뛰어갔다.서영숙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얼굴에 붙이고 있던 마스크팩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손에 들고 있던 안마기도 힘이 빠지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졌다
“좋아.” 진일은 시원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자, 그는 마치 한숨을 돌린 듯했다.재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의혹을 느꼈다....학교 밖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테이크아웃 커피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 다소 시끌벅적했다.정은과 민지가 도착했을 때, 진일은 이미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안녕하세요!” 민지가 다가가 먼저 인사했다.진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바라보며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뭐 마실래? 내가 살게.”두 사람은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아이스 버터 라떼, 설탕 넣지 말고요.” 민지가 말했다.“아이스 오렌지 아메리카노, 사이즈는 라지요.” 정은도 덧붙였다.“알았어.”두 사람이 말하는 동안 진일은 이미 앱에서 주문을 완료했다.하지만 곧바로 결제하지 않고, 할인 쿠폰을 찾아 결제 버튼을 눌렀다.순식간에 가격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그 사이 진일은 맞은편의 두 사람을 힐끗 살펴보았다.하지만 정은과 민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그의 이런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경멸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오히려 민지는 그에게 ‘꿀팁’을 하나 더 전수했다.“다음엔 할인 쿠폰 찾기 전에 다른 앱으로 가격 비교해 봐요. 가끔 가격이 엄청 낮은 할인권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러면 1000원으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어요!”아무래도 평소에도 이렇게 주문한 듯했다.“아, 그래?”진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의 어색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요 며칠 잘 지내고 있었어요?”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결과는 대충 예상했던 대로야. 다만, 학교 측 대응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 최소 이주 정도 걸릴 줄 알았는데.”“사회 뉴스로 커졌으니 학교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민지가 콧방귀를 뀌었다.“공식 입장을 발표하여 이미지를 유지하는데는 ‘골든 4시간'이란 법칙이 있어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론은 분노가 쌓이기만 하지, 나중에 아무리 멋진
“불, 불만이 아니야...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좀 믿기지 않아... 이렇게 좋은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그럼, 받아들이겠다는 거네요?”진일은 확신이 서지 않아 다시 한번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야?”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이에요. 교수님께서 인터넷에서 뜬 선배 이야기를 보고 바로 나에게 연락하셨거든요. 그리고 선배를 위해 일부러 귀국까지 하셨고.”오미선은 이렇게 말했다.[진일이라는 아이가 참 힘들게 버티고 있더군. 내가 도와주고 싶어.]진일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그래. 정말 고마워, 교수님한테도, 너희들한테도...”“내일 오후에 교수님께서 선배를 집으로 초대하셨어. 함께 식사하자고.”“이거 정말 괜찮을까?”진일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송지혜도 가끔 밥을 사 주긴 했지만, 늘 레스토랑에서였다.그녀의 집에 간 적이 있긴 해도, 주로 택배를 받아오거나 집안일을 돕기 위해서였다.논문을 내기 시작하면서부터야 진일은 그런 잡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민지는 의아함을 느끼며 말했다.“뭐가 문제죠? 나랑 서준이도 여러 번 가 봤어요. 교수님 댁의 이모님은 요리를 엄청 잘하시는데. 특히 족발이랑 탕수육은 진짜 최고예요! 먹어보면 알게 될 거예요!”진일은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정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교수님은 선배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주제를 그대로 이어가면서 우선 졸업 논문을 완성하길 바라고 있어요. 무엇보다 6월 졸업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그 후에 박사 과정을 고민해도 늦지 않아요.”“교수님께서는 원래 더 이상 대학원생을 받지 않겠다고 학교 측에 말씀하셨지만, 이렇게 직접 석사나 박사 과정을 수여받은 경우는 예외예요. 먼저 오 교수님의 연구실로 소속을 옮기면, 이후 박사 과정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어요.”“만약 네가 학업을 이어가고 싶지 않고 취업을 원한다면, 교수님께서도 전적으로 지지하실 거예요. 선택은 다 선배에게 달려있어요.”오미선은 진일이 앞으로 어떤
“무한 실험실에서 선배가 직접 실험대를 갖고, 연구 주제를 선정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자신만의 연구팀을 서서히 구축할 수도 있어요.”“내가 선배를 초청하는 이유는 연구 방향을 우리와 맞추도록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더 나은 연구 환경과 풍부한 자원을 제공해 줄 테니, 선배가 원래 가고자 했던 학문의 길을 더 멀리, 더 넓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예요.”“물론, 나도 단순히 선의로만 이런 기회를 주는 건 아니에요.”‘드디어 나왔군!’진일이 가장 궁금해했던 문제가 이제야 밝혀졌다.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치 정은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너희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지?”“선배가 우리 실험실에 합류한다면, 앞으로의 연구 성과는 여전히 선배의 것이에요. 하지만 실험실 명의로 발표해야 해요. 이것은 실험실의 명성을 쌓고, 나아가 연구 자금과 지원을 끌어오기 위한 것이니까요.”융합 연구소, 특히 다학제적 연구소가 성장하고 세계적인 입지를 확보하려면 탁월한 학문적 성과가 필수적이었다. 단순히 논문의 수를 늘리는 것만이 아니라 연구의 질, 학문적 영향력, 그리고 국내외 학계에서의 위상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선배가 말씀하신 것처럼, 연구 방향이 다르다는 점이 오히려 무한 실험실이 단일 연구 분야에서 융합 연구소로 도약할 기회가 될 수 있어요. 결국, 이 선택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선배는 실험실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계속할 수 있고, 실험실은 선배를 통해 연구 분야를 확장하며 더 큰 성장을 도모할 수 있죠. 그리고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한 가지.”정은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진일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강조하듯 말했다.“선배의 논문 중 한 편의 감사 인사에서 이런 문구를 인용했더군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라고.”“나는 실험실이 있고, 연구 자원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그저 손에 쥐고 있는다
진일은 정은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민지는 얼른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환영해요!”“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어...”정은은 바로 대답했다.“재운이를 말하는 거예요?”진일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어떻게 알았어?!”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선배가 꼭 고발할 결심하게 된 이유,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만약 서지예가 재윤의 이름을 빼지 않았다면, 선배는 아마도 계속 참았을 거예요. 갑자기 감정이 터지지도, 송 교수를 고발할 결심도 하지 않았을 테고요.”진일은 눈을 드리웠다.“재윤이 그 녀석은, 정말 쉽지가 않아. 우리와 같은 시골 출신 애들은 다 힘들어. 나야 이미 송 교수의 도구가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그 녀석만큼은 나와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어.”“정작 본인은 새로운 교수님을 구하지 못했으면서도, 날 걱정해서 여기저기 교수님들에게 메일을 수십 통이나 보냈어. 내가 졸업할 수 있게, 연구를 이어갈 있게 말이야...”진일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이 부탁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혹시 재운도 오 교수님 밑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을까?”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요. 오기 전에 이미 교수님께서 말씀드렸고, 재운도 함께 교수님의 연구실로 들어오게 했어요. 재운은 오 교수님을 우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아요? 앞으로는 그 우상의 제자가 될 거예요.”진일은 자신이 오미선의 학생으로 되었단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뻐하며 외쳤다.“대박! 저 바보는 꿈에서라도 웃으며 깨어나겠는데?!”“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게 있어요. 선배가 직접 재운에게 전해 주고요. 재운은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무한 연구실에 들어올 순 없어요. 하지만 노력한다면, 언젠가 자격을 갖추고 다시 들어올 기회가 생길 거예요.”진일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그리고 재운이도 이해할 거야. 절대 불평하지 않을 거라고.”“그럼 됐어요.”정은은 손을 내밀었다.“앞으로 잘 부탁해요. 함께 연구하고, 학문을 쌓고, 꿈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