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공항에서.도겸은 VIP 대합실에 앉아 SNS를 보고 있었다.탑승까지 아직 30분이 남았는데, 그는 시간이 너무 느린 것만 같았고, 지금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이때, 도겸은 갑자기 멈칫하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현빈이 어제 SNS에 해변의 사진,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그리고 보기 좋은 노을을 올렸다.[몰디브는 날씨가 좋네. 무엇보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더 좋아.]아래는 댓글이 줄줄 달렸다.[형 몰디브에 가서 헌팅이라도 하려고요?]현빈은 댓글에 답장했다.[헌팅은 그물을 치는 것이고, 넌 정확하게 사냥감을 잡는 거야.][현빈아, 너 여자친구라도 생긴 거야?]현빈은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도겸은 댓글을 보면 볼수록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참이나 댓글을 읽었지만, 그는 여전히 다 읽지 못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빈이 사랑에 빠졌다고 추측하고 있었다.‘이 나쁜 자식, 나한테 거짓 정보를 알려주고는, 혼자 몰디브로 달려가 정은을 찾아?’이때 마침 탑승 안내가 울렸다. 도겸은 핸드폰을 거둔 다음, 외투를 들고 일어나 VIP 대합실을 떠났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연희가 들어올 줄이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문을 밀려는 동작을 포옹으로 바꾸었다.도겸은 연희의 포옹에 제자리에 멍해졌다.“오빠 정말 너무 다정하시네요. 전에 제가 무심코 몰디브에 가 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걸 줄곧 기억하실 줄은 몰랐어요.”그녀는 손에 든 탑승권을 가리켰다.“그곳의 호텔은 문을 밀면 바로 바다가 보인다고 들었어요. 파도 소리와 함께 잠을 자고, 눈을 뜨면 일출을 볼 수 있다니. 그리고 아름다운 모래사장도 있잖아요.”도겸은 미간을 찌푸리며 연희의 말을 끊었다.“나 화장실 좀.”말을 마치자 그는 성큼성큼 떠났다. 그리고 차가운 얼굴로 구석에 가서 태명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이 시간에 벌써 비행기에 탑승하셨을 텐데?’“임 비서, 일 그만두고 싶다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대표
도겸은 어제 잠을 잘 자지 못했기에, 지금 좀 졸렸다. 하품을 하며 고개를 들자, 연희가 자신을 찍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안색이 즉시 어두워지더니 핸드폰을 가렸다.연희는 멍해졌다.“오빠, 우리 처음으로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거잖아요. 사진 한 장 찍지 않을래요?”도겸은 담담하게 설명했다.“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말을 마치자, 그는 눈을 붙였다.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엄청 흥분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찬물을 맞은 것 같았다.몰디브는 하늘이 푸르렀고, 바다가 넓었다. 헬리콥터에서 내리자마자, 직원이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두 사람이 입주 수속을 밟은 뒤, 직원은 직접 그들의 짐을 책임졌다. 도겸은 피곤함을 느끼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다가, 문득 심현빈을 발견했다.현빈은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는데, 그는 특별히 꽃무늬 셔츠에 같은 색깔의 반바지를 매치했다.몸매 비율이 너무 좋거나,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인지, 이런 알록달록하고 촌스러우며 또 느끼한 차림새는 오히려 그에게 나른하면서도 존귀함을 도해주었다.현빈도 가장 먼저 도겸을 발견했다. 그는 멈칫하더니, 은근히 웃으며 도겸을 향해 걸어갔다. 손가락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어, 무척 소탈해 보였다.“도겸아, 여행하러 왔어?”도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응, 너도?”현빈은 미소를 지었다.“이게 바로 인연일까? 그런데 너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야? 난 너보다 하루 일찍 도착했는데.”이 일을 생각하자, 도겸은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누가 준 가짜 정보에 속아서 시간이 좀 걸렸어. 그런데 넌 하루 일찍 도착해도 아무런 수확이 없는 것 같은데?”현빈은 말을 하지 않았다.“네가 수작을 좀 부려서 여기까지 쫓아오면, 정은이 감동받을 것 같아? 난 정은을 너무 잘 알고 있지. 내가 있는 한, 두 사람 절대로 애인으로 될 수 없어.”도겸은 아주 자신감이 넘쳤다.그와 정은은 사귄 적이 있었기에, 설령 헤어졌다 하더라도, 현빈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현빈은 눈빛이 어두
“가면무도회?”“응, 호텔의 전통인데, 반년에 한 번씩 열려. 매번 주제가 달라. 지난번에는 분장쇼였고, 지난번에는 할로윈 파티였어. 이번의 주제는 나름 평범했기에, 사람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아마 오늘 밤에 사람이 많을 거야.”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호텔 곳곳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수 있었고, 색등까지 걸려 있어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수민이 말했다.“나 방금 밖에서 들어왔는데, 웨이터들 전부 가면을 쓴 거 있지? 엄청 재미있을 거야!”수민은 정은에게 여우 가면을 골라주었지만, 자신에게 숲의 여왕인 사자 가면을 골랐다. 그 이유도 단지 사자가 멋있기 때문이었다!정은이 물었다.“왜 늑대를 선택하지 않은 거야?”“늑대?”“네가 바로 늑대잖아?”“야, 너 얻어맞고 싶어?!”정은은 가면을 들고 도망쳤고, 달리면서 얼굴에 썼다.“빨리 서둘러, 늦겠다!”“야, 너 거기 안 서! 누가 늑대냐고?! 네가 더 늑대 같잖아!”...23층 연회장에서.엘리베이터를 나서자, 정은은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사실 사람이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가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순식간에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수민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사람들을 뚫고 바에 도착했다.“마티니 한 잔이요. 정은아, 넌 뭐 마실래?”“난 레몬물.”수민은 어이가 없었다.“뭐? 다시 한번 말해 봐?”“레몬...”수민은 직접 그녀의 말을 끊어버리며 바텐더를 향해 말했다.“내 친구에게는 블러디 메리 한 잔이요!”바텐더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정은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어두운 곳에 처한 누군가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고, 시선을 떼기조차 아까웠다...독염은 연회장 문 앞에 서 있었고, 벽에 기대며 수시로 손목시계를 보았다.그는 유나리아 가왕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블랙과 골든의 충돌에 불규칙한 음표까지 더하니, 차갑고 우아해 보였다.특히 도겸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
남자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아이스 블루의 커프스 버튼이 무척 눈에 띄었다. 옅은 색의 파텍필립은 복고풍의 느낌을 주고 있지만, 또 오늘 그의 가면인 오페라의 유령과 아주 잘 어울렸다.정은은 웃음을 머금은 남자의 눈을 마주한 순간, 바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심현빈이었어!’“미안해요, 난 춤을 출 줄 몰라서.”현빈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학교 백스테이지에서 까치발을 하고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거짓말이 들통나자, 정은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현빈이 말한 것은 바로 정은이 대학교 4학년 때, 졸업식에서 미처 추지 못한 그 솔로 댄스였다. 정은은 두 달 동안 연습했지만, 종아리를 다쳐 결국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나 자신조차 잊을 뻔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이때, 무대 위의 사회자가 무슨 말을 하자, 팔로 스폿이 여러 사람들 머리 위를 비추었다.현장의 환호성도 점차 커졌다. 그 하얀 빛이 두 사람에게 떨어지자, 그들은 같은 동그라미 안에 갇혔다.현빈은 웃으며 말했다.“무도회의 규칙은 팔로 스폿이 비춘 남녀가 반드시 춤을 춰야 한다는 거야. 하나님도 내가 거절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나 봐. 그런데 넌 모두를 실망시킬 건가?”말을 하는 동시에, 그는 몸을 굽히더니 손을 내밀어 정은을 초청했다.주위 사람들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동의해! 동의해!”“한 곡 춰! 한 곡 춰!”정은은 이를 악물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현빈은 바로 그녀를 데리고 무도장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는 앞으로 다가간 다음 뒤로 물러서며, 회전을 한 다음 또 정은을 가볍게 안았다. 마치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오페라의 유령이 교활한 작은 여우 한 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남자의 양복바지와 여자의 치맛자락이 뒤엉켜, 눈이 마주칠 때, 현빈은 유쾌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정은은 춤을 출 줄 알 뿐만 아니라 아주 잘 추었다.이는 어릴 때 정은의 어머니가 교육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그럼.”“금융 회사는 연말에 가장 바쁘지 않아요?”“꼭 그런 건 아니야.”현빈은 웃으며 말했다.“사람에 따라 일정이 바뀌는 법이야. 중요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이 있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한가해도 상대하기 귀찮거든.”현빈의 말은 분명히 다른 뜻이 있었지만, 정은은 자세히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불빛이 반짝이더니, 이제 파트너를 교환해야 했다.불빛이 희미한 가운데, 한 사람이 이쪽으로 던져졌다.두 사람이 바뀌는 순간, 정은은 연희가 충격에 휩싸인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고, 남자의 다른 한 손은 정은의 허리를 세게 쥐고 있었다.도겸은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현빈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정은과 눈을 마주치자, 그의 눈빛은 또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정은아, 아직도 삐져있는 거야?”“내가 며칠 전에 네 집에 찾아갔는데, 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거야?”도겸은 좀 억울해하고 있었다.“심현빈이 일부러 네 항공편의 정보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나도 진작에 널 찾았을 텐데.”정은은 눈을 드리우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내가 늦게 와서 화난 거야?”도겸은 고개를 숙이고 정은을 바라보았는데,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온화해졌다.방금 팔로 스폿이 그들을 비출 때, 도겸은 단번에 그 두 사람이 바로 정은과 현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심지어 무도장에 들어가서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현빈은 정은의 가녀린 허리에 손을 얹었고, 매력적이면서도 다정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가끔 귓속말을 했고, 또 시선까지 주고받았는데, 이를 본 도겸은 하마터면 화를 낼 뻔했다.‘심현빈, 넌 무슨 자격으로 정은을 껴안고 있는 거지? 난 정은과 6년을 사귀었는데도, 같이 춤을 춘 적이 없는데...’그래서 파트너를 교환할 때, 그는 망설임 없이 연희를 내팽개쳤다.이번에 정은이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도겸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전에 그들이 무수히 다퉜던 것처
두 사람이 불쾌하게 헤어진 것을 보고, 현빈은 기분이 좋았다.‘강도겸, 이제 네 수단도 쓸모가 없는 것 같군.’지금은 비록 사이가 틀어졌지만, 전에 두 사람은 사이가 엄청 좋은 친구였다.도겸이 여자를 달래는 그런 수단들에 대해, 현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비싼 선물을 사주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부드럽게 여자를 달래는 것뿐이었다.아쉽게도 그런 수법은 더 이상 정은에게 먹히지 않았다.“현빈 도련님, 기분이 좋으신 거예요?” 이때, 연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고, 표정은 애꿎으면서도 단순했다.“당연하지.”“도겸 오빠가 정은 언니에게 거절당해서요?”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처음으로 연희를 자세히 바라보았다.“이것도 네가 보고 싶은 결과잖아?”연희는 대범하게 인정했다.“그래요, 전 평생 도겸 오빠와 함께 하고 싶거든요.”“그럼, 두 사람 행복했으면 좋겠어.”말을 마치자, 현빈은 연희를 놓아주며 뒤로 물러섰다.연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현빈 도련님도 하루 빨리 정은 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좋겠네요.”‘쯧쯧!’현빈은 몸을 돌렸다. 동시에 그는 도겸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악독한 뱀이었다니. 그것도 독이 있는 코브라.’두 남자가 어깨를 스친 순간, 도겸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여전히 그 말이지만, 정은에게서 떨어져.”현빈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나도 여전히 그 말이야, 넌 이 말을 할 자격이 없어.”“적어도 난 명실상부한 남자친구였지. 그러는 넌 뭔데?”도겸은 현빈을 바라보더니, 속이 좀 통쾌했다.“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넌 절대로 정은을 알지 못했을 거야. 정은도 너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고.”“이 말을 하기 전에, 너도 지금 나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 넌 전 남자친구, 난 정은 씨에게 구애하고 있는 사람.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남이잖아.”도겸은 차가운 눈으로 현빈을 바라보았지만, 현빈은 더 이상 말하
현빈은 오히려 웃었다.“그건 내 마음이니까 상관하지 마. 시도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 결과를 알 수 있겠어?”정은이 물었다.“그 결과가 당신을 크게 실망시키더라도?”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럼 나도 받아들여야지.”정은은 그의 고집이 이렇게 셀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빈은 정은의 감정을 알아채며, 말을 잇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 함께 파도 소리를 감상했다.한밤중이 되어서야 현빈은 이곳을 떠났다.정은은 방금 그가 소리 없이 고집을 부리며, 꿋꿋이 버티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사실 현빈은 분수가 있고 또한 남들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은을 강요하지 않았고, 경솔하게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될수록 그녀에게 번거로움을 안겨다 주려 하지 않았다.도겸과 전혀 달랐다. 전에는 정은의 뒤를 맹렬하게 쫓아다녔는데, 지금은 걸핏하면 성질을 부리곤 했다. 정은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가 남이 뭘 하려는지를 상관할 필요가 어딨겠어.’‘나 자신만 처신을 잘하면 돼.’정은이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문득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어두운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귀신이야 뭐야...’정은은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어두운 그림자가 어두운 곳에서 나오자,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고, 정은도 점차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강도겸,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한밤중에 여기 서 있으면서 소리조차 내지 않으니, 정말 무섭단 말이야!’정은이 중도에 퇴장하자, 도겸은 무도회가 재미없다고 느꼈다.줄곧 쫓아 나왔지만, 또 줄곧 사람을 찾지 못했다.연희는 거머리처럼 매달리며, 배가 고프니까 뭐 좀 먹고 싶다고 했다. 도겸은 인내심이 순식간에 바닥나더니 짜증이 났다. 그는 웨이터를 불러 연희를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가라고 했다.호텔의 비밀유지 조치가 엄격했기 때문에, 도겸은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야, 정은의 룸 번호를 알 수 있었다.그리고 즉시 그녀를
이 말을 듣자, 도겸의 안색은 약간 누그러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은의 목소리가 또다시 울렸다.“너도 마찬가지야.”“지금 시간도 이미 늦었으니, 만약 계속 여기서 발광을 하고 싶다면, 난 지금 바로 집사에게 연락해서 경호원을 부를 거야.”도겸은 계속 말하고 싶었다.“정은아-”“셋까지 세겠어. 하나, 둘...”정은은 핸드폰을 꺼내, 키패드를 클릭했다. 이제 1만 누르면, 집사가 바로 나타날 것이다.도겸은 달갑지 않았지만, 또 다른 방법이 없었다.“내일 다시 찾아올게.” 이 말만 남기고, 그는 성큼성큼 떠났다.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연희는 조용히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숨겨진 그녀의 표정과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다.다음 날, 날이 밝자, 수민은 마침내 돌아왔다.정은은 우유 한 잔을 마시며, 손에 빵까지 들고 있었다. 금방 먹자마자, 누군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울렸다.수민은 이미 다른 치마로 갈아입었고,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탁자 위의 샌드위치를 보자, 그녀는 걸어와서 입에 넣었는데, 빵이 고소하고 바삭바삭하게 잘 구워졌기에, 수민은 또 한 입 먹었다.정은은 맞은편에 앉아 기분이 상쾌한 수민을 바라보며, 웃으며 입을 열었다.“어제 아주 즐거운 밤을 보냈구나?”“그럼.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정말 오랜만이었어.”어젯밤을 언급하자, 수민의 표정은 좀 이상해졌다. 감탄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또 음미하는 것 같기도 했다.“든든한 허리, 복근도 탄탄해서 정말 명품 몸매였지.”연하남은 H국의 사람이었기에, 그 얼굴은 확실히 잘생겼다. 게다가 그 나라는 헬스에 깊은 중시를 돌리고 있어, 수민은 어젯밤에 만진 복근이 단련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이렇게 잘 맞는 파트너는 정말 오랜만인데.’특히 아침에 깨어났을 때, 남자는 뜻밖에도 아직 떠나지 않았다. 새하얀 피부에는 모두 수민이 남긴 키스 자국이었고, 촉촉한 눈동자는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했다. 그 순간, 그녀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