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앞장선 경찰은 재석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희는 이 두 사람을 먼저 데려가겠습니다.”“그래요. 그리고 두 사람의 소변 검사까지 해보는 게 좋을 거예요.”“안심하세요, 저희도 다 압니다.”서씨 형제는 안색이 돌변했고, 그제야 큰일났다는 것을 깨달았다.경찰차는 급하게 떠났다.현빈은 은근히 비웃었다.“경찰들이 이렇게 빨리 출동하는 거 처음인데.”재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민지는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제야 알아차렸다.‘교수님도 도움 청하시느라 지각하셨구나.’현빈은 조폭을, 재석은 경찰을 불렀다.‘이렇게 되면, 서씨 형제들도 더 이상 방법이 없겠지.’...저녁 무렵, 진일네는 마치 설을 보내는 것처럼 떠들썩했다.남봉수는 오후부터 바삐 돌아치기 시작했다. 닭과 오리를 잡고, 물고기를 손질했다.집안의 모든 재료를 전부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심지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둔 술까지 열었다.이것은 원래 이현이 결혼할 때 꺼내 마시려고 했던 술이었다.사람들은 저마다 나서서 남봉수를 말렸지만, 그는 전혀 듣지 않았다.오후부터 주방에 들어갔고, 해가 저물어갈 때에야 주방에서 나와 웃으며 사람들을 불렀다.“다들 와서 앉게, 음식 다 됐거든!”사람들은 식탁 앞에 앉았다.설을 쇨 때에야 쓸 수 있는 큰 식탁에는, 생선이며 고기들이 가득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보지 못한 요리들이 놓여 있었다.민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그녀는 이미 주방에서 전해오는 향기를 맡았는데, 그 맵고 향기로운 냄새가 줄곧 콧구멍을 파고들었다.남봉수가 말했다.“현지의 특색 요리를 좀 만들었어. 고추를 많이 넣지 않았으니 그렇게 맵지 않을 거야. 너희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역시 민지였다.“맛있어요! 정말 너무 맛있어요!”민지는 음식이 아주 매울 줄 알았다.전에 매운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남봉수가 만든 음식은 입에 들어가자마
재석도 흠칫 놀란 듯 했다.눈빛이 교착된 사이, 정은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이 미소에 당황한 재석은 시선을 떼지 못했고, 원래 평온하던 마음조차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에헴!” 현빈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했다.정은과 재석은 동시에 정신을 차리더니 시선을 돌렸다.‘흥! 나 몰래 시선을 교환하다니.’민지는 걱정돼서 현빈에게 물었다.“심 대표님, 왜 그러세요?”서준은 미처 민지를 막지 못했다. 식탁 아래서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좀 매워서.”“네? 이게 매워요? 난 왜 하나도 안 매운 거 같죠? 그럼 빨리 물 좀 마셔요.”“음.”‘정말 다정한 아이군!’민지가 물었다. “쮼, 너 방금 왜 내 옷을 잡은 거야? 무슨 일 있어?”서준은 말문이 막혔다.“아니야. 그럴 리가.”‘네 마음대로 해라.’...다 먹고 남봉수는 치우고 설거지하며 주방 청소하느라 바빴다.민지는 거실 의자에 앉았는데, 발 옆에 숯을 담은 대야 두 개가 있었다.그녀가 춥다는 것을 알고 이현이 특별히 민지를 위해 불을 지핀 다음 가져왔다.“민지 언니, 이거 먼저 써요, 이따가 제가 다시 숯 좀 넣을게요.”“응, 고마워 이현아, 너 너무 착하다!”이현은 부끄러워하며 침실로 달려갔다.민지는 따뜻한 숯탄 덕분에 더 이상 춥지 않았다.주방 벽에는 남봉수의 바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피곤하지도 않은 듯 이리저리 왔다갔다했고, 민지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좀 멍해졌다.‘남자들도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일 수 있구나, 처음 봐. 남자들이 주방에 들어서면 안 된다는 것도 다 뻥이었어.’더욱 놀라운 것은 진영매와 진일 남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고, 마치 이미 이런 장면에 습관된 것 같았다.서준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민지는 턱을 짚었다.“나도 앞으로 밥 잘 하는 남편 찾을 거야! 그럼 난 손을 쓸 필요도 없고, 바깥에 나갈 필요도 없이 매일 맛있는
현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아들을 해결한 이상, 이제 그 아버지를 해결해야 했다.그리고 두 사람의 아버지는 서지강 서지준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현빈은 진일에게 일찍 계획을 세우라고 일깨워주고 있었다.“현재 서씨 집안에게 있어,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바로 서지강과 서지준을 감옥에서 건져내는 거야.”“그래서 당분간 복수를 할 수 없을 거고. 그러나 서달우가 모든 방법을 다 써도 자신의 아들들을 구할 수 없다면, 너희 집안을 이용해 분풀이를 할지도 몰라.”진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지강과 서지준이 이미 끌려간 이상, 서씨 집안도 뿌리째 뽑히지 않을까요?”재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사실대로 말했다.“그건 힘들 거야. 현재 우리가 경찰에게 넘겨준 증거로 볼 때, 서씨 형제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충분하지만, 서달우를 넘어뜨릴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몰라.”만약 서씨 집안 사람들이 신중하고, 부자간의 일을 아주 분명하게 처리했다면?만약 서달우가 이 날을 위해 진작부터 준비를 했었다면?만약...아무튼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었다.재석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원래 오늘 이기면 이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다시 원래대로 조용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러나 현실은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현빈이 말했다.“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서씨 집안이 아무리 대단해도 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서달우의 복수를 피하려면, 어려운 편도 아니야.”진일은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이죠?”“이사를 가는 거야.”서씨 집안이 마을에서 날뛰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또한 그것뿐이었다.진일네 가족이 시내로 이사가면, 서달우은 아무리 대단해도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반대로 계속 마을에서 지내면, 서달우는 진일을 상대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사람 죽일 정도는 아니지만, 상습적인 괴롭힘과 욕설도 시간이 길어지
그러나 진일은 서씨 집안이 언제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할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위험에 빠지는 걸 볼 수 없었다.진일은 고민에 빠졌다.현빈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모든 사람에게는 다 자신의 운명이 있었다. 그는 지금 진일의 결정을 존중하면 됐고, 너무 많은 간섭을 할 필요가 없었다.이날 밤, 진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정은, 서준과 민지 세 사람은 재석, 현빈과 함께 마을의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조건은 아주 보통이지만, 그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행 모두 마음속으로 진일이 어떻게 선택할지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아직 안 자고 뭐해?” 정은은 홀에 앉아 창밖의 어두운 밤을 보았다. 그렇게 생각에 잠기다, 남자의 목소리에 생각이 끊겨 문득 정신을 차렸다.“선배.”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다음, 정은은 웃으며 인사했다.“선배님도 안 잤잖아요?”“잠이 안 와서.”“진일 선배 때문에요?”“너도?”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정은에게 물었다.“너 방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정은은 순간 침묵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정은은 묵묵히 입을 열었다.“나는 이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남자는 멍해졌다. “뭐가?”“우리가 진일 선배를 위해 해결책을 생각할 때, 모두 서씨 집안의 복수를 어떻게 피할지에 고려했잖아요.”“그런데 그걸 왜 피해야 하는 거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진일 선배인가요? 서씨 집안이 과수원을 빼앗으려고 폭행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피해자가 피해야 하다니. 이건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서씨 집안이지, 남씨 집안이 아니었다, 그럼 왜 그들이 도망가야 하는 것일까?정은은 현빈의 생각이 틀렸다고 느꼈다.그러나 현재 서씨 집안의 복수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하지만 이 결정은 아무리 봐도 답답했다.‘너무 억울하잖아!’재석이 대답했다.“적당히 피하는 건 도
“선배.” 정은이 갑자기 입을 열어 진일의 말을 끊었다.정은을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진일도 정은을 바라보았다.“결정하기 전에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좋아.” 진일이 정색했다.“무한 실험실에 들어온 이상, 매달 월급을 받을 거예요. 직함 등급에 따라 부동한 월급을 받을 거고요.”“연구원, 보조 연구원, 일반 연구원, 시니어 연구원으로 나뉘죠. 물론 직함은 한 편,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성과를 제출해야 해요. 이 점을 잘 알고 있겠죠?”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고 있어.”그러나 그는 정은이 왜 이때 이 일을 언급하는지 몰랐다.“실험실은 선배에게 향후 10년의 월급을 미리 지불할 수 있어요. 초보적인 계산에 따르면 8억 원 정도 될 거예요. 물론 이것은 단지 예측일 뿐이에요.”“실제 수입은 틀림없이 차이가 있을 것이고,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실험실에서 선불할 수 있는 액수가 바로 8억 원이에요.”진일은 충격을 받았다.“정, 정은아...”남봉수도 눈을 부릅뜨며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아니, 공부를 하고, 실험을 하면 이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니...’결국 전에 진일은 송지혜의 밑에서 일을 하면서, 여태껏 월급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니.정은은 계속해서 말했다.“이 돈으로 잠시 급한 불을 끌 수는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월급을 선불하는 이상, 앞으로 10년 동안 선배는 무한 실험실에 있어야 하고, 이직할 수도 없어야. 그리고 매년 일정한 성과와 그에 상응하는 직함 등급을 받아야 해요.”그래서 이것은 베푸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기껏해야 정은의 투자와 인재를 남기는 수단이었다.좋은 연구원은 얻기 무척 어려웠다. 진일처럼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특별히 노력하는 연구원은 더욱 희한한 존재였다.그의 실력에 정은은 이런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진일은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
계약서를 다 보고 난 진일은 정중하게 사인했다.그리고 두 손으로 정은에게 건네준 다음 맹세했다.“절대로 실험실 손해 보지 않게 할 거야.”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나도 나 자신의 안목을 믿어요.”정은이 진일을 도운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진일은 감격에 할 말이 많았지만,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평생 이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남봉수와 진영매는 이런 전기를 맞이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정은이 고마운 동시에, 아들에 대해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우리가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진일은 더 멀리 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아버지, 어머니, 우리에게 돈이 생겼어요.”진일은 웃으며 부모님을 쳐다보았다.그 순간, 그는 마침내 자신이 헛되게 공부하지 않았으며, 지식 덕분에 언젠가는 부자가 될 것이라 믿기 시작했다.남봉수도 엄청 기뻐했다.도시로 이사하면 진영매는 최고의 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었고, 게다가 재석이 소개한 그 전문가 덕에 건강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이현도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그 자신으로 말하자면, 도시에 가면 당연히 마을에 있을 때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었다. 남봉수는 비록 한쪽 다리를 절었지만, 아직 멀쩡했고, 간식도 좀 만들 줄 알았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꼭 돈을 벌 수 있을 거야!’그들은 바로 희망이 생겼다.이제 유일하게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뒷산의 앵두나무들은 어떡하지?”재석이 입을 열었다.“이건 간단해요. 시중에 농산물 도급회사가 있거든요. 재배지는 전국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요. 대부분 토지를 도급하여 과일과 채소를 재배한 후, 원산지에서 직접 마트나 시장에 보내는 거죠.”“제가 조사해 보았는데, Y시에 마침 이런 회사가 하나 있어요. 규모도 꽤 크고요.”“이 작은 과수원을 보고 실망하진 않을까?”외지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남봉수도 이런 도급 회사에 대해 들은 적이 있
“정말 잘 됐네요!” 진일은 기뻐서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알았어요, 아저씨. 이틀 후에 저도 부모님과 같이 시내에 갈 거예요. 그때 가서 재운이 보러 갈게요...”“네, 안심하세요. 다 해결됐어요...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서씨 형제는 어제 이미 경찰에 잡혀갔어요... 네, 만나서 다시 얘기해요.”민지는 진일이 전화를 끊은 순간 바로 물었다.“재운이에 관한 소식인가요?”진일은 즉시 재석을 보더니 눈시울을 붉혔다.“조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꼭 면전에서 고마움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감사합니다!”민지는 눈을 깜박였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방금 전화하신 분은 재운이 아버지인데, 재운이가 이미 깨어났다고 말씀하셨어.”“정말요? 잘됐네요!” 민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교수님한테 고마운 거죠?”“조 교수님이 재운이를 시내의 병원으로 옮기셨다는 거야. 또 전문가를 청해 수술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운이를 치료하셨고.”정은은 놀란 눈빛으로 재석을 바라보았다.“언제 안배한 거예요?”“어제.”“왜 이런 얘기하는 거 못 들었죠?”“오는 길에 시내 병원에 연락했거든.“그래도 교수님밖에 없네요.”현빈도 의혹을 느꼈다. ‘언제 연락한 거지? 어제 우리 두 사람은 줄곧 함께 있지 않았어? 아, 내가 구정배 찾아갔을 때 빼고... 이런! 이 기회를 잡았다니!’...몇 사람은 또 마을의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고, 이튿날 J시로 출발했다.진일은 함께 가지 않았다. 그는 부모님을 챙겨야 했고, 그 후에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그 사이, 서씨 집안이 또 다른 수작을 부릴까 봐 현빈은 특별히 두 경호원을 찾아와 진일네 집 앞을 지키게 했다.그들은 현빈의 경호원이었고, 구정배의 사람이 아니었다.민지는 매우 궁금해했다.“심 대표님, 그렇게 하신 이유가 뭐예요?”현빈은 기분이 좋아서 민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나와 그 사람은 별다른 친분이 없거든. 친구에게 부탁
정은은 그 돈을 받았다.“그러나 선배는 받지 않을 거예요.”“그냥 내가 줬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돼. 어른이 준 용돈이라 생각하면 알아서 받을 거야.”“네.”모든 일을 해결한 다음, 정은은 또다시 실험실, 학교, 집을 드나드는 생활을 반복하기 시작했다.일단 그 안에 몸을 던지면,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민지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정은 언니는 정말 날 재촉할 수 있는 존재 같아.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만 하면, 힘들어 죽더라도 억지로 따라고 싶단 말이야.”서준은 듣자마자 웃었다.민지는 눈살을 찌푸렸다.“왜 웃어? 넌 아니야?”“난 자제력이 있거든.”“아니, 그게 무슨 뜻이야? 난 뭐 자제력이 없는 줄 알아?”진일 쪽도 일이 잘 되어가고 있었다.정은 일행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진일은 부모님을 모시고 마을에서 이사를 갔다.이웃 사람들은 모두 그 앵두나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관심을 가졌다.눈독을 들이는 사람은 어찌 서씨 형제뿐이겠는가?다만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서 감히 손을 대지 못할 뿐이었다.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줄곧 탐내고 있었다.그것은 돈을 벌 수 있는 과수원이었다.이번에 진일네가 이사 간다는 말을 듣고, 또 서씨 형제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하나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매일 진일네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 남봉수에게서 정보를 알아내려 했다.진일의 말을 빌리자면, 설에도 그의 집은 이렇게 떠들썩하지 않았다.어떤 사람은 직접 남봉수에게 말했다. “어차피 너희들도 이사를 가야 하니까, 그 과수원은 그냥 나에게 줄 수 없어?”남봉수는 모두 화가 나서 웃었다.이웃 마을에서 친척이나 전에 친분이 좀 있던 사촌들조차도 모두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남봉수가 말했다.“모두들 온 이상, 나도 한마디 좀 할게. 그 과수원을 양도할 생각은 없어. 물론 공짜로 남에게 주지도 않을 거야.”“그럼, 너희들 모두 이사를 가면 누가 그 앵두나무를 키우겠어? 이렇게 내버려둘 순 없잖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