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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7화

Author: 십일
그 눈빛에는 부러움과 존경, 그리고 닮고 싶은 마음까지 담겨 있었다.

‘언제 나도 그런 높이에 설 수 있을까? 실력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남들의 질투를 자아낼 자격.’

정은은 한숨을 쉬었다.

‘노력이 부족한 거지...’

재석은 향후 10년간 자신이 집중할 연구 방향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신개념 양자 얽힘’, ‘자유공간 채널에서의 양자광 간섭’, 그리고 ‘양자광 기반 3차원 영상화 기술’을 핵심 주제로 제시했다.

남자는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며, 목소리가 낮고 듣기 좋았다.

내용도 전문성을 고루 돌보는 동시에 통속적이고 알기 쉬운 표현방식으로 기타 전문분야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의 재석은 스스로 후광을 띠고 있어, 사람을 탄복하게 하는 강대한 매력을 드러냈다.

정은은 무대 아래에 앉아 미리 준비한 공책을 꺼냈다. 그녀는 들으면서 펜으로 필기를 했다.

이 강연에 정신을 집중한 게 분명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마찬가지로 무대 아래에 앉아 있는 수아는 무대 위의 양복차림을 한 재석을 보면서, 그가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이미 홀딱 반했다.

남자의 그 잘생긴 얼굴을 보며, 수아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

지식은 흐르는 물처럼 수아의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새어나갔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수아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미 자신이 아직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오직 이 순간에만 수아는 거리낌 없이 재석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를 생각하며, 자신의 가장 진실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매 강의가 끝나면, 30분의 질문을 주고받는 시간이 주어진다.

또한 포럼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항상 다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처럼.

의문을 제기한 이는 국민대학교에서 생명과학과 물리학의 융합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교수, 도하빈이었다.

“말씀처럼 전문성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물리학 같은 전공 중심 학문만 의미 있고, 융합이나 다학제 연구는 쓸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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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8화

    정은은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자리에 앉으려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재석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조금 전 말씀하신 견해를, 생물학과 물리학 간 융합 연구 사례를 들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정은은 순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심지어 오미선조차도 무대 위에 선 재석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연구 현장의 실천 사례를 바탕으로 자신의 관점을 설명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기회였다.정은에게는 명백히, 자신의 연구 주제와 방향을 대중 앞에서 소개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셈이었다.이 자리는 많은 연구자들이 꿈꾸는 무대였고, 재석은 그 기회를 아무런 조건 없이 정은에게 넘겨준 것이다.문제는, 정은이 과연 그 기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정은은 눈빛이 복잡하게 변하더니, 저도 모르게 재석을 다시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녀는 재석의 눈빛에서 격려와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선배님은 날 믿기에 이런 기회를 준 거야. 그렇다면...’정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빛이 확고해졌다.‘선배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물론입니다. 제 연구 분야는 생물학적 데이터 기반의 모델링 및 그 응용입니다. 실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특정 패턴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분석을 이어간 결과, 해당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실험실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이 바로 이 순간 빛을 발했다.정은은 수많은 실험 절차, 데이터 분석 결과, 수치 조정 과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덕분에 막힘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녀는 핵심을 조리 있게 정리하며, 실험 과정 전반을 논리적으로 풀어냈고, 군더더기 없이 명확한 결론으로 마무리했다.답변을 마칠 즈음, 정은은 정확하게 다음 발표 순서 시작 시간에 맞춰 사회자에게 침착하게 마이크를 넘기고 자리에 앉았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장내는 큰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심지어 가장 까다롭기로 알려진 도하빈조차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9화

    ‘나야말로 조 교수님과 한 팀인데, 이런 주목받는 기회가 소정은에게 돌아갔다니. 이거 명백한 편애 아니야!’오전 포럼이 끝나고, 점심은 호텔에서 단체로 식사를 한 뒤, 한 시간 휴식을 가진 후 다시 오후의 일정이 이어졌다.같은 절차지만, 발표자와 주제 분야는 모두 달랐다.정은은 펜을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작은 공책은 어느새 빼곡히 채워졌다.뒤로 갈수록 학문 연구의 놀라운 연결성과 상호작용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마치 하나의 음악회 같았다.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하모니, 플루트와 쟁의 울림, 가야금과 하프가 어우러진 선율처럼, 서로 다른 분야가 어우러져 하나의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내는 듯했다.‘이것이 바로 융합 연구의 매력이구나. 지식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랄까...’정은은 그렇게 느꼈다.늘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해 왔던 정은에게, 천체물리학, 응용화학, 의생명과학 같은 낯선 분야와 갑작스레 마주한 그 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아직은 정리하고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분명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기분이었다.오후 5시, 포럼이 마무리되었다.정은은 오미선과 함께 회의장을 나와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오미선은 외투를 갈아입고 머리도 정성스레 손질했다.“정은아, 준비해. 이따 나랑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가자.”“네? 호텔에서 안 드시고요?”“예전의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야. 간만에 얼굴 좀 보려고.”정은은 잠시 망설였다. “이런 자리에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잖아. 선배님들에게 인사도 할 겸, 가자.”그 말은 곧, 정은에게 인맥을 넓혀줄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오미선이 그녀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단순한 식사 때문이 아니었다.“네, 알겠어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그래, 천천히 해, 서두르지 말고.” 오미선은 흐뭇하게 웃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정은은 재석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오미선이 들어서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0화

    “하하... 그래! 당연하겠지!”“어머, 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군. 미선아,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정은이도 함께 앉아야지...”정은은 이런 학계의 비공식적인 자리엔 처음이었고, 평소 근엄하기만 했던 교수나 학자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유쾌한 농담, 어쩌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오가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는 모습들이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연회가 이어지는 중, 오미선은 보기 드물게 먼저 잔을 들었다.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건 정은을 위한 행동이란 것을.정은도 그걸 알았기에, 몇 잔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술잔이 세 바퀴쯤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한 베테랑 교수가 정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둘은 전공 이야기에서 시작해, 꿈에 대한 이야기, 논문, 실험 이야기도 나누며 점점 대화를 깊이 이어갔다.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교수의 눈빛에는 감탄과 호의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하하하...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머리가 참 잘 돌아가네! 내 제자 중엔 왜 이런 애가 하나도 없는 거야? 아이고, 사람은 비교하면 안 된다더니, 진짜 열받네!”그러더니 오미선을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오 교수, 이런 학생을 어디서 발굴한 거야? 왜 좋은 인재는 전부 너한테만 가는 거지?”“정말 우리에겐 숨통도 안 틔워주는구나.”오미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글쎄... 아마 내가 보는 눈이 좀 있는 모양이겠지?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이렇게 귀한 인재는 딱 보면 알겠더라고.”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교수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내가 네 제자 데려갈 것도 아닌데, 누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옆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고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지난번엔 누가 자긴 눈도 안 좋고 나이도 많다고, 제가 2년간 아껴둔 와인을 억지로 가져가신 거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1화

    복도에서, 오미선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재석은 팔에 걸쳐 있던 정은의 숄을 건네주며 말했다.“괜찮아?”정은은 재석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숄을 받으며 웃었다.“걱정 마요. 나 안 취했어요.”“그럼 다행이네.”“선배님, 오늘 오전에 고마웠어요.”재석은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고맙다고? 내가 너에게 질문을 부탁한 거잖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지.”“질문은 어렵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도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날 불러줘서 내가 대답할 수 있었던 거예요.”“내가 기회를 준 건 맞지만, 그걸 잡은 건 너야. 그러니까 나보다 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지.”정은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나 자신에게요?”“그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평소에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집중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하면 돼. 정은아,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거야.”“네, 맞아요.”“이제 들어가. 오늘 일찍 쉬고, 내일 하루 더 남았으니까.”“네.”재석은 정은이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 그녀가 문을 꼭 닫은 걸 확인하고서야 룸카드를 꺼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수아는 문구멍을 통해 이 모든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재석이 정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굴던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준 차가운 태도가 겹쳐지자, 수아는 입술을 거의 깨물 뻔할 정도로 질투를 느꼈다.그때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수아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잽싸게 집어 들었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손태민’이었다.그녀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침대에 내던졌다.“왜 또 쟤야? 정말 짜증나 죽겠네!”“하루 종일 연락을 하다니, 지치지도 않나 봐!”수아는 차갑게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계속 울리는 진동음을 그대로 두었다. 결국 화면은 꺼졌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는 눈을 감았다.그 전에,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래, 이제 실컷 울려봐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2화

    무엇보다 생명과학 분야는 오미선의 대표적인 인맥 기반이었다.누구나 정은이라는 젊은 후배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선보이기 마련인데, 그것도 다 같은 전공에서 이어져온 인연 덕분이었다.우수한 학생을 싫어할 선생님이 어디 있겠는가?비록 정은이 직속 제자는 아니더라도, 생명과학계에서 보기 드문 유망주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그다음은 물리학 분야였다. 다른 요소를 다 떠나서, 재석의 신뢰와 명성만으로도 정은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이 친구는 소정은이라고, 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예요...”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소개했다.말하는 도중, 자연스레 두 사람의 관계가 언급되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난 재석이 누굴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거 처음 보네. 오늘 제대로 구경을 좀 하는구나, 하하하!”재석은 차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전에 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거든요. 정은이랑은 사실 선후배 사이고요. 그게 뭐 문제 될 거라도 있나요?”“아니! 전혀. 네가 좋다면야 뭐든 좋은 거지.”재석은 어이가 없었다.수아는 기회를 엿보며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지만, 재석의 소개도, 옹호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조롱거리 같았다.국제 영화제에 자비로 입장해 레드카펫에 슬쩍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플래시가 아무리 번쩍여도, 그것은 수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오전의 네트워킹 세션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었다.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버스를 타고 한 어촌 마을로 이동했다.이곳은 M시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어촌’으로 불린다.10여 년간의 보호 및 개발 정책을 통해 전통 어업 기반에서 관광 및 체험형 마을로 점진적인 전환에 성공했지만, 가능한 한 어촌 고유의 생활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이처럼 수준 높은 포럼이 열릴 때면, 지역 지자체에서는 인문학적 탐방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곤 한다.일종의 힐링이자, 참가자들에게 새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3화

    정은은 정말 조개를 주웠다.무슨 조개인지 모르지만, 보랏빛에 주황색이 섞여 있어서 정말 예뻤다.그녀는 기뻐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리 와서 봐요!”마치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재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정은의 곁으로 다가갔다.정은이 손바닥을 펼치자, 조개 하나가 드러났다.“예쁘죠?”재석은 정은의 들뜬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그럼... 신발 벗고 같이 놀아볼래요?”남자는 순간 놀란 듯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다음에.”정은은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봐, 정은이도 다음에 나와 같이 바다에 올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두 사람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닷물이 때때로 정은의 종아리까지 차올랐다.재석은 해변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선배님, 계속 걸어가면... 끝은 어디일까요?”정은은 뒤로 걸으며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고개를 돌려 물었다.여유롭고 편안한 자세였다.재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해변의 끝은 모래사장이고, 모래사장의 끝은 바다겠지.”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정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웃음을 터뜨렸다.“난 또 선배님이 정색하면서, ‘해안선은 해양과 육지의 경계선이고, 대조평균고조면을 기준으로 정의돼. 조석이나 풍랑에 따라 달라지는 고정되지 않은 선이 아니라, 띠처럼 형성되는 공간적 개념이지. 물리적으로 접근하면 말이지...’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요.”그녀는 재석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진짜 베테랑 학자처럼 그럴듯한 모습을 보였다.재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미 답을 다 생각해놓고, 나한테 왜 묻는 거야? 그래도 듣고 싶다면 물리학적으로도 설명해줄 수 있어.”정은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바닷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몇 가닥이 뺨을 스쳤다.“아니에요. 난 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4화

    “이건 뭐죠?”정은은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감정을 억누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스태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정은 씨, 오늘 저녁 학술 만찬에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정말 뛰어난 연구자시네요.”그 말을 끝으로 스태프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정은은 손에 든 초대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지더니, 놀람과 당황이 스치고 지나간 끝에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매년 열리는 정상희의가 끝나면 ‘학술 만찬’가 열리는데, 포럼 기간 동안 뛰어난 성과를 보인 연구자들이 초청된다.그 만찬의 입장권이 바로 이 붉은 초대장이었다.오미선과 재석처럼 뛰어난 학자들은 포럼 첫날에 이미 초대장을 받았다.예년처럼 초대장 한 장으로 본인 외의 다른 한 사람만 초대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다.오미선은 정은과 미리 약속해두었다.“포럼 마지막 날 밤, 너 나랑 같이 가자.”정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그런데 다음 날, 재석이 또 찾아와 물었다.“나랑 같이 갈래?”‘앗!’정은은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교수님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그렇겠지.”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오 교수님이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널 안 데려가실 리 없지.”사실 정은도 의아했다.애초에 재석은 수아를 데리고 포럼에 참석했으니, 당연히 그녀와 함께 만찬에 갈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자신에게 물어보다니.‘만약 내가 동의한다면, 이수아 선배는...’‘어휴, 생각만 해도 괜히 민망해지네.’그런데 이번엔 정은이 자신의 성과로 초대장을 받았다.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들뜨지 않을 수도 없었다.비록 초대장은 별거 아니지만, 정은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이건 ‘소정은’이라는 이름 자체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뜻이고, 단순히 ‘오미선의 제자’라는 이유로 인정받은 게 아니란 것이다....하지만 수아는 운이 그리 좋지 않았다.포럼 내내 존재감 없이 지냈으니 당연히 단독 초대장을 받을 리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재석이 초대장을 가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5화

    밤은 깊어졌고,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만찬은 호텔의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리며, 참석자들은 잠시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올 수 있게 했다. 레드카펫도, 꽃도, 고급 차도 없고, 열어놓은 술장과 음식 코너만으로 만찬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진다. 대부분 남성들은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간단한 셔츠를 입고 이번 만찬에 참석했다. 상대적으로,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은 좀 더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머리는 깨끗이 감은 데다가 옷차림도 단정했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한복을 입은 사람도 있으며, 일부 교수들은 새로운 한복을 곁들은 패션을 선호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자 교수는 여자 교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은 자신이 따르는 교수나 연구원을 따라 참석한 이들로, 이번 만찬을 통해 학문적 시야를 넓히고 싶어했다. 정은은 초대장을 들고 재석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오미선은 먼저 도착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재석은 여전히 양복을 입었고, 너무 격식을 차린 느낌보다는 약간 캐주얼한 디자인이 가미되어 있어 좀 더 자유롭고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정은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을 위해 립스틱을 발랐고, 카멜색 외투에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단순했지만, 엄청나게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오히려 돋보였다. 너무 젊어서 이런 만찬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믿는 이가 대부분이었고, 또한 정은이 학문과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도 드물었다. 재석은 살짝 기침을 하며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정은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오미선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긴장돼?” “조금이요.” “걱정 마, 이따가 내가 사람 소개해줄게.”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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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6화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5화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4화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3화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2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1화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0화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9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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