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저녁 식탁에는 지나치게 맵거나 단 음식이 없었다. 담백한 흰살생선과 구운 채소, 소스가 따로 놓인 샐러드. 채원은 음식보다 맞은편 남자를 관찰했다. 도현은 식사 속도가 빨랐고, 휴대전화가 몇 번 울려도 뒤집어 둔 채 확인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차려 먹어요?”
“아니.”
“그럼 요리사에게 내 취향도 알려 줬겠네요.”
“맵고 단 소스를 싫어하고, 드레싱은 따로. 틀렸어?”
“맞아서 불쾌하다고 하면 이상하겠죠.”
“이상하지 않아.”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네가 기억하지 않는 일을 내가 기억한다고 해서, 반가워할 의무는 없으니까.”
채원은 포크 끝으로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잘랐다. 예전의 도현은 이런 문장을 한 번에 말하지 못했다. 입술만 달싹이다 노트북 화면으로 도망가곤 했다.
“많이 달라졌네요.”
“너도.”
“실망했어요?”
“왜?”
“차 대표님 기억 속 윤채원은 빚 독촉 받으면서 남의 집에 들어오는 여자는 아니었을 테니까.”
도현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 기억 속 윤채원은 서버가 세 번 끊긴 발표에서도 끝까지 투자자를 설득했어. 지금도 똑같아.”
채원의 목 안쪽이 따끔해졌다. 동정은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되고 정확한 평가였다.
“그때 일은 잘도 기억하네요.”
“잊을 이유가 없었어.”
도현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는 머신 오른쪽 두 번째 칸. 산미 없는 원두로 바꿔 뒀어. 하지만 밤 8시 이후엔 디카페인 마셔.”
“그것도 기억해요?”
“밤에 카페인 마시면 새벽까지 패션쇼 영상을 돌려 보잖아. 잠이 안 온다고 하면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무심했다. 그러나 채원은 한동안 식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8년 전 자신은 그와 많은 말을 나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필요한 기획을 설명했고, 발표를 함께 준비했고, 가끔 늦은 시간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다. 채원에게는 바닥까지 무너진 인생 앞에서 희미해진 한 계절이었다.
도현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
새벽 1시가 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채원은 물을 찾으러 나왔다가 복도 끝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았다. 서재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도현이 안에 있는 줄 알고 지나치려 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문을 닫아 주려던 손이 멈췄다.
벽면 책장 가운데 작은 액자가 놓여 있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빛바랜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8년 전 창업 동아리 단체사진이었다. 구석에는 큰 안경을 쓴 도현이 서 있었고, 가운데에는 흰 셔츠 차림의 채원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웃고 있었다.
사진 전체는 세월을 먹어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랬다. 그런데 채원의 얼굴 위만큼은 먼지 한 점 없었다. 액자 안쪽에 별도의 투명 필름까지 덧대어져 손때도 빛도 닿지 않게 보관되어 있었다.
“남의 서재 구경이 취미였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채원은 놀란 기색을 감추며 돌아섰다. 넥타이를 풀어 손에 든 도현이 문가에 서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어요.”
“봐도 상관없어.”
“다른 사람 얼굴은 다 바랬는데.”
채원은 액자를 가리켰다.
“왜 나만 이래요?”
도현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이 액자를 집어 드는 동안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채원은 물러서지 않았지만 어깨가 굳었다.
“보관할 때 필름을 새로 댔어.”
“그러니까, 왜?”
도현은 사진 속 채원이 아니라 눈앞의 채원을 보았다.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말은 보호보다 고백에 가까웠다. 채원은 액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질문을 더하면 30일짜리 거래가 견디지 못할 답을 듣게 될 것 같았다.
도현은 붙잡지 않았다. 다만 방으로 돌아가는 채원의 발끝까지 오래 시선이 따라왔다.
그날 밤, 채원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 자신만 선명하던 이유를 끝내 잠 밖으로 밀어내지 못했다.
펜트하우스를 나온 지 2주가 됐다.아르덴에서 온 메일은 투자관리팀 공용 계정으로 도착했다. 매출 정산 양식과 다음 분기 이사회 일정, 그뿐이었다. 차도현이 덧붙인 문장도, 개인 번호로 온 안부도 없었다.채원은 회신에 필요한 파일을 첨부하고 서민지를 참조에 넣었다.「확인했습니다. 요청 자료는 월요일까지 전달하겠습니다.」보내기 버튼을 누른 뒤 채원은 빈 화면을 잠시 보고 있었다. 차 대표에게도 공유해 달라는 쓸데없는 문장을 붙이지 않은 자신이 우스웠다.도현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비싼 선물도, 문 앞에 놓인 꽃도 없었다. 집의 임대차 문제는 법무 대리인을 통해 처리했고, 루네 투자 건은 한지혁과 투자관리팀이 맡았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조차 만들지 않았다.그렇게 해 달라고 한 사람은 채원이었다.그런데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켤 때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펜트하우스보다 훨씬 작은 집인데도 비어 있는 자리가 더 넓었다.비가 오면 젖은 머리를 대충 묶지 말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커피를 두 잔째 내릴 때는 도현이 말없이 디카페인 원두를 내밀던 손이 떠올랐다. 잠들지 못해 거실을 서성이다가도, 자신보다 먼저 불 켜진 서재가 없다는 사실에 걸음을 멈췄다.채무 소멸 확인서는 서랍 안에 있었고 투자 승인서는 회사 금고에 있었다. 어느 쪽도 밤마다 켜지던 서재의 불이나, 식탁 건너편에서 서류를 읽던 남자의 자리를 채워 주지는 못했다.도현이 잘못한 일은 선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건넨 모든 순간까지 거짓으로 돌리면, 펜트하우스에서 먼저 넥타이를 당긴 자신의 마음도 함께 거짓이 됐다.오후에 한지혁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번에도 공식 일정이었다. 아르덴의 이해충돌 관리와 자료 폐기 확인을 위한 면담이었다.“아르덴이 루네 투자 검토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 목록입니다. 공개 공시, 보도 자료, 유료
브리에의 판매 페이지가 중단된 뒤 루네 검색량은 이전 시즌 최고치를 훌쩍 넘었다. 관심을 매출로 바꾸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채원은 무대에서 표절 사건을 되풀이하는 대신, 루네가 다음 계절에 무엇을 만들 것인지 이야기했다.“우리는 위기 때문에 투명해진 브랜드가 아닙니다. 만드는 사람과 입는 사람이 같은 정보를 가져야 오래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부터 모든 제품 페이지에 생산 공장과 주요 수정 이력, 예상 수선 비용을 공개하겠습니다.”대형 유통망을 잃은 약점을 고객과 직접 연결되는 구조로 바꿨다. 베스타리테일과의 신규 계약, 수선 회수 프로그램, 남은 원단을 활용한 소량 주문 제작 계획이 차례로 발표됐다.행사가 절반쯤 지났을 때 채원은 객석 뒤편에서 도현을 발견했다.검은 슈트 차림의 그는 카메라도 귀빈석도 피한 채 기둥 옆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축하한다는 뜻을 그것으로 끝냈다.최종 선주문 수량은 준비한 목표치를 한참 넘어섰다. 직원들이 서로를 끌어안았고 민지는 채원의 손에 탄산수 잔을 쥐여 줬다.“이제 좀 웃어. 오늘은 네가 이겼어.”채원은 화면의 숫자를 확인한 뒤에야 웃었다.“우리가 이긴 거야.”그 순간 기둥 옆이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채원은 잔을 내려놓고 행사장 뒤편으로 나갔다.도현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 있었다. 채원의 구두 소리를 듣고 돌아섰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축하해.”“그 말만 하려고 왔어요?”“응.”“그리고 또 내 눈앞에서 사라지려고요?”도현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사라지는 게 네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했어.”“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에요. 왜 8년 전에도, 이번에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어요?”복도 건너편에서 행사 음
민지는 협상실을 나온 뒤 길게 어깨를 폈다.“나 방금 20분 동안 대표님이 투자금 걷어차는 상상 세 번 했어.”“대신 빼앗기는 계약을 맺으면 그게 더 비싸.”“알아. 그래서 안 말렸지.”채원은 수정 계약서에 자신의 펜으로 서명했다. 도현이 벌어 준 시간 위에 어떤 조건을 적을지는 자신이 정했다.곧이어 열린 채권단 협의에서도 채원은 신규 투자 계약과 선주문금 보관 내역을 직접 펼쳤다. 채권단은 18개월 안에 갚는 안을 먼저 내놓았다.“그 기간이면 내년 생산비와 원금 상환이 다시 겹칩니다. 첫 6개월은 이자만 내고, 이후 월 매출의 일정 비율로 원금을 갚겠습니다. 대신 재고와 현금흐름을 매달 공개하죠.”“3년은 너무 깁니다.”“그래서 베스타리테일 확정 발주와 선주문 계좌를 상환 근거로 가져왔습니다. 상표권 담보를 요구하시면 협의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다음 날 새벽까지 계산표가 오갔다. 채권단은 3년에 걸쳐 나눠 갚겠다는 안을 받아들였다. 첫 반년에는 생산비를 지키고, 그다음부터 옷이 팔린 만큼 원금을 줄이는 방식이었다.채원은 새 상환표의 첫 납입일에 붉은 동그라미를 쳤다. 다음 시즌을 만들 만큼 멀었고, 빚을 잊지 않을 만큼 가까운 날짜였다.그 돈은 직원들이 만든 옷을 팔아 갚을 것이다. 채원은 동그라미 옆에 짧게 적었다.첫 번째 상환.“대표님.”직원이 샘플 행거를 밀고 왔다.채원은 재킷 안쪽 봉제선을 확인했다. 긴급 생산으로 바뀐 공장이 초승달 자수를 2mm 아래에 달아 놓았다.“이대로 출고하면 움직일 때 자수가 접혀요. 오늘 물량은 전부 수정해 주세요. 납기보다 제품이 먼저예요. 고객들에게는 1일 지연 안내하고 보상 포인트를 넣죠.”“네.”판단해야 할 일이 이어졌다. 광고 문구, 플랫폼 배너 순서,
펜트하우스를 나온 지 열흘째 되는 아침, 채원은 오래 살던 집의 창문을 열었다.집주인은 여전히 도현의 개인 법인이었다. 그러나 채원이 돌아온 날 받은 것은 퇴거 통지가 아니라 주변 집들과 비슷한 보증금과 월세가 적힌 계약서였다. 1년 안에 직접 되살 수 있다는 문장도 한쪽에 붙어 있었다.채원은 계약서를 법무사에게 검토받은 뒤 서명했다. 월세 첫 회분도 자신의 계좌에서 보냈다.집 안에는 예전 가구가 그대로였지만 생활은 달라져 있었다. 새벽마다 울리던 채권자의 전화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자신이 고르지 않은 무가당 요구르트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아무도 아침을 거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채원은 식탁에 앉아 토스트 한 조각을 끝까지 먹었다. 굳이 그 남자의 말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오후의 론칭을 버티려면 필요한 일이었다.“대표님, 베스타리테일 최종 계약서 왔습니다.”전화기 너머로 민지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수료는?”“우리가 제시한 수수료로 받았어. 대신 첫 달 목표 수량은 조금 올렸고.”“받아. 해외몰은 반품 물류비 상한 조항 넣었는지 확인하고.”“넣었지. 그리고 아르덴 투자위원회 결과도 왔는데, 내가 읽어 줄까?”채원의 손이 컵 손잡이에서 멈췄다.“사무실에서 볼게.”민지가 짧게 웃었다.“사람하고 계약은 끝났어도 투자 심사는 끝까지 공적으로 보시겠다?”“공적인 걸 공적으로 보는 게 왜 흠이야.”“그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단정한 것도 흠은 아니지.”채원은 전화를 끊었지만 토스트가 전처럼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루네 사무실에 도착하자 책상 절반이 계약서로 덮여 있었다.베스타리테일은 온라인과 편집숍 유통을 맡고, 소형 공장 연합은 생산 물량을 보장했다. 외부 투자사인 서클
태준의 변호사가 먼저 자료 원본과 수집 절차를 요구했다.“독립 포렌식 업체의 원본 보존 확인서와 서버 사업자의 접속 증명입니다. 법원에도 같은 자료를 제출했습니다.”태준은 화면을 한 번 훑고 입을 다물었다. 옆에 앉은 변호사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자, 그의 손에서 여유롭게 돌던 펜이 멎었다.“8년 전 편지 건은 김혜진 씨의 사실확인서와 당시 메시지 원본으로 별도 정정 요청하겠습니다. 오늘 합의 대상은 루네의 영업비밀 침해와 판매 중단입니다.”그의 변호사가 휴정을 요청했다. 회의가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쟁점은 더 이상 ‘비슷한 유행’이 아니었다. 누가, 언제, 어떤 계정으로 파일을 가져갔는지가 됐다.***이틀 뒤, 루네의 공개회는 작은 쇼룸과 온라인 생중계로 동시에 열렸다.채원은 런웨이 대신 작업대를 무대 중앙에 놓았다. 헤진 첫 샘플부터 최종 제품까지 차례로 마네킹에 입혔다. 서민지는 파일 생성 기록과 공정 일지를 필요한 만큼만 화면에 띄웠다.“디자인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 않습니다.”채원은 실패한 소매를 들어 보였다.“이 곡선은 팔을 올릴 때 당겼고, 이 자수는 피부에 자국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버렸습니다. 오늘 보여 드리는 건 예쁜 결과가 아니라 루네가 실패를 고쳐 온 시간입니다.”그녀는 표절 피해를 호소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공장 대표를 무대로 불러 생산 순서를 함께 설명했고, 선주문 대금이 언제 공장으로 넘어가는지까지 공개했다. 배송을 지키지 못하면 자동 환불된다는 조건도 숨기지 않았다.발표가 끝난 뒤 주문이 차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두 유통 플랫폼이 포렌식 확인서와 가처분 접수증을 검토한 뒤 브리에 판매 페이지를 임시 중단했다. 원단사는 문제 제품용 납품을 보류했다.아르덴의 이름은 보도 자료 맨 아래 법무 지원사로만 들어갔다. 기사 제목과 카메라 앞
“브리에가 먼저 팔기 시작하면 우리가 뒤따라 해명하는 그림이 돼.”민지가 말했다.“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과정을 공개해.”채원은 빈 회의실을 가리켰다.“쇼룸에 작업대를 놓고 첫 샘플부터 전부 보여 줘. 완성품만 걸지 말고 실패한 소매와 자수도 같이. 선주문 대금은 제3자 보관 계좌에 묶고, 주문이 기준에 못 미치면 자동 환불.”“초도 생산비는?”“주문금이 들어온 확인서를 바탕으로 공장과 지급 일정을 다시 짤 거야. 그전까지 필요한 건 증거 보전비와 촬영비야. 오늘 잡아 둔 광고 집행을 전부 멈추면 막을 수 있어.”채원은 가장 오래 거래한 공장 대표에게 직접 전화했다. 상대는 브리에와의 분쟁을 이유로 생산 라인을 잡아 둘 수 없다고 했다.“이틀만 보류해 주세요. 주문금이 확인되는 즉시 착수금을 보내겠습니다. 못 넘기면 라인 변경 비용은 루네가 부담하고요.”“윤 대표, 지금 그 비용 감당할 수 있습니까?”“그래서 보류 시간을 이틀로 줄이는 겁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만 부탁드리는 거예요.”긴 침묵 끝에 공장 대표가 이틀을 주었다. 호의가 아니라 지난 3년 동안 루네가 납기를 어겼을 때도 대금을 미룬 적이 없다는 기록이 만든 시간이었다.아르덴에는 새벽 4시에 공식 메일을 보냈다. 디자인 유출 사실과 브리에를 인수한 태강의 관계를 알리고, 차도현을 이번 판단에서 빼 달라고 요구했다.아침이 밝을 무렵 한지혁과 아르덴 법무 책임자가 도착했다. 도현은 오지 않았다.“차 대표는 태강의 브리에 인수 금융을 멈추는 방안을 먼저 검토했습니다.”지혁이 숨기지 않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