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스타팅 블록의 페달이 발바닥을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대운동장 메인 트랙 5레인.
채아는 양손을 흰색 출발선 바로 뒤에 짚은 채, 거칠게 요동치려는 호흡을 아랫배 깊은 곳으로 가라앉혔다.
옆 4레인에 엎드린 최수아의 날카로운 숨소리가 귓전을 찔렀다.
수아는 턱을 비틀며 채아를 째려보았지만, 채아의 시선은 오직 100미터 전방의 붉은 피니시 라인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차려(Set)."
스타터의 구령과 함께 엉덩이가 번쩍 들려 올라갔다. 온몸의 근육과 인대가 팽팽한 활시위처럼 응축되었다.
피니시 라인 인근에 모여든 육상부 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동기 진희는 주먹을 꼭 쥔 채 발을 동동 굴렀고, 4학년 선배들은 팔짱을 낀 채 최수아의 압승을 당연시하는 표정으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수아 선배는 지난주 측정 때 11초 50까지 찍었잖아."
"채아가 악바리처럼 덤벼도 4학년 관록을 어떻게 이겨. 게다가 신발까지 급하게 바꿨는데."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스타팅 블록까지 낮게 깔렸다.
하지만 5레인에 엎드린 채아의 귓가에는 그 어떤 잡음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서민경 코치가 손수 갈아 끼워준 7밀리미터 세라믹 피라미드 핀의 단단한 지지력과, 자신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박동만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출발 총성을 기다리는 짧은 정적.
탕-!
귀를 찢는 출발 총성과 함께 하얀 화약 연기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스타트 반응 속도 0.128초.
수아의 반응 속도 0.164초를 압도하는 완벽한 반사신경이었다.
채아의 몸이 용수철처럼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콰아앙!
블록을 밀어낸 힘이 첫발로 이어졌다. 낯선 신발 안에서 발이 헛돌지 않았다.
7밀리미터 세라믹 피라미드 핀이 우레탄 트랙 표면을 빈틈없이 물고 뜯으며 폭발적인 추진력을 뿜어냈다.
낮게 깔린 상체, 블록을 끝까지 밀어낸 첫걸음.
새벽 훈련에서 번번이 먼저 들리던 상체가 이번에는 버텼다. 채아는 그 감각을 놓치지 않고 다음 발을 내디뎠다.
10미터, 20미터, 30미터!
옆 4레인의 최수아가 악에 받친 기세로 치고 나갔지만, 채아의 가속은 이미 다른 차원의 궤도에 올라서 있었다.
수아의 상체는 15미터도 채 지나지 않아 조급하게 솟구쳐 올랐고, 발목이 좌우로 흔들리며 지면 반발력을 허공에 흩뿌렸다.
반면 채아는 30미터 지점까지 낮고 날카로운 전방 경사를 유지하며 에너지를 고스란히 전방으로 쏘아 올렸다.
지면 접촉 시간 0.082초.
스피드를 낭비하지 않는 가장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주법이었다.
40미터 지점.
상체가 자연스럽게 기립하며 메인 가속 주로로 전환되는 순간, 채아는 수아를 반 보 차이로 제치고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갔다.
타타타탕!
스파이크 핀이 트랙을 타격하는 파열음이 기관총처럼 이어졌다.
관중석 난간에서 지켜보던 차도현의 귀에, 채아의 규칙적이고 날카로운 발자국 소리가 벼락처럼 꽂혀 들어왔다.
도현은 곁에서 들리는 코치의 짧은 탄성에 귀를 세웠다. 두 선수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가 결승선 쪽으로 멀어졌다.
누가 얼마나 앞섰는지는 눈으로 볼 수 없었다. 도현은 난간을 쥔 채 결과를 기다렸다.
50미터, 60미터!
채아와 수아의 격차는 1미터, 이내 1.5미터로 벌어졌다.
수아의 눈동자에 당혹과 공포가 서렸다.
‘말도 안 돼! 신발도 제 것이 아닌데 왜 저렇게 빨라?’
수아가 기를 쓰고 따라붙으려 팔을 마구 휘둘렀지만, 그럴수록 턱이 들리고 보폭이 엉키며 스피드가 죽어갔다.
70미터를 통과하는 순간, 채아의 다리에도 피로가 찾아왔다.
지난 1년간 무너졌던 근력 밸런스 탓에 80미터 구간에서 골반이 살짝 뒤로 처지며 킥 파워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지지 않아!’
채아는 턱을 강하게 당기고 양팔의 스윙 각도를 칼날처럼 유지했다.
몸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피니시 라인에 쏟아부었다.
눈앞에 하얀 결승 테이프가 다가왔다.
채아는 가슴을 내밀며 결승선을 갈랐다.
콰아아앙!
채아가 통과하고 약 0.12초 뒤, 수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늦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메인 피니시 라인에 설치된 전자 계측기 전광판에 선명한 숫자가 떠올랐다.
[서한체대 여자 100m 공개 테스트 공식 기록]
1위: 5레인 윤채아 - 11초 46 (개인 최고 기록 갱신)
2위: 4레인 최수아 - 11초 58
- 풍속: +0.2m/s (공인 기준 적합)
대운동장 전체에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11초 46.
채아의 기존 최고 기록인 11초 48을 0.02초 단축한 대학부 최정상급 기록이었다.
반면 최수아는 11초 58로 완패했다.
트랙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30여 명의 선수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11초 46……? 미쳤다, 윤채아!"
"남의 신발 빌려 신고 개인 최고 기록을 깼다고?"
"최수아 선배보다 1미터 넘게 앞서서 들어왔잖아!"
수아는 트랙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전광판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자신이 걸려 넘어진 참담한 패배였다.
전자 계측기 뒤에 서 있던 마정호 감독의 얼굴 역시 썩은 흙빛으로 굳어졌다.
그 어떤 핑계도, 관행도 통하지 않는 정직한 숫자의 심판.
채아는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른 뒤,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일어섰다.
비록 후반 30미터에서 근지구력이 떨어지는 숙제를 확인했지만, 자신의 두 발로 당당하게 쟁취한 완벽한 승리였다.
서민경 코치가 성큼성큼 걸어와 채아의 어깨에 두툼한 스포츠 타월을 덮어주었다.
서 코치의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에는 구간별 정밀 스플릿 타임이 떠 있었다.
"채아야, 30미터 스플릿 4초 12, 60미터 스플릿 7초 18이다. 초반 가속 구간 반발력은 내가 현역 때 뛰던 수치보다 더 날카로웠어."
서 코치의 눈가에 벅찬 자부심이 어렸다.
"다만 70미터 이후 지면 접촉 시간이 0.082초에서 0.091초로 늘어났다. 둔근 피로도 관리와 후반 상체 밸런스만 보완하면, 춘계 본선에서 11초 3대 진입도 충분히 가능하다."
"네, 코치님! 가르쳐주신 대로 끝까지 보완하겠습니다!"
채아는 씩씩하게 고개를 숙이며 환하게 웃었다.
채아가 관중석 쪽으로 걸어가자, 난간을 잡고 서 있던 도현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채아야, 기록이 어떻게 나왔어?"
도현의 목소리에 긴장과 기대가 서려 있었다.
채아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말아 올리며, 전생의 그 어떤 순간보다 맑고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채아, 11초 46이요. 제가 1등 했어요."
자기 이름 석 자를 가장 먼저 앞세운 선언.
도현의 굳어 있던 입술에 안도와 벅찬 미소가 번져 나갔다.
"축하한다, 윤채아."
***
그날 저녁, 학교 앞 조용한 덮밥집.
채아와 도현은 창가 구석 테이블에 마주 앉아 따뜻한 소고기 덮밥을 먹었다.
도현은 숟가락으로 밥을 뜨며 채아의 훈련 리듬에 대해 진지하게 물었다.
"80미터 구간에서 발소리가 살짝 무거워지던데, 햄스트링 피로 때문이었어?"
"네. 전반 40미터에 힘을 너무 몰아 썼더니 후반 탄성이 떨어지더라고요. 보강 운동 더 해야 해요."
도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채아의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채아는 밥을 한술 더 뜬 뒤, 마지막 구간에서 버틴 느낌을 손짓까지 섞어 설명했다.
그때 채아의 스마트폰으로 서민경 코치의 다급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채아야, 1학년 후배 민지가 양심선언 했다. 오늘 새벽 6시 10분에 최수아가 커터칼 들고 라커룸 들어가는 거 직접 봤다고 서면 진술서 써줬어. 도현이가 확보한 CCTV랑 출입 로그까지 감사실에 정식 접수했다.]
문자 메시지에는 민지가 작성한 자필 진술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진술인: 1학년 김민지 / 진술 내용: 오늘 오전 6시 10분경, 라커룸 복도에서 최수아 선배가 검은색 커터칼을 쥐고 윤채아 선배의 사물함 쪽으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선배들의 보복이 두려워 망설였으나, 정정당당하게 달리는 채아 선배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어 진실을 밝힙니다.]
후배의 용기 있는 고백과 명백한 전산 로그.
채아는 진술서의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혼자 찍어둔 훼손 사진 옆에 출입 기록과 후배의 목격담이 놓였다. 이제 누가 무엇을 봤는지 차례로 물을 수 있었다.
채아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채아는 민지의 이름이 적힌 부분에서 한참 손가락을 멈췄다. 제 기록이 좋아서 웃었던 저녁이었다. 이제는 자신 때문에 용기를 낸 후배가 내일 무슨 말을 듣게 될지도 신경이 쓰였다.
아침 7시 30분, 제주 서귀포 전지훈련 선수단 식당.전지훈련에 참가한 각 대학 육상부와 실업팀 선수들로 식당 안은 이른 아침부터 왁자지껄했다. 배식대의 갓 구운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와 계란 프라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고, 그 옆에는 신선한 과일 샐러드가 놓여 있었다.식판을 들고 테이블 구석 자리에 앉은 채아는 젓가락으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연신 헛기침을 삼켰다.맞은편에 앉은 차도현 때문이었다.도현은 언제나처럼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주변 테이블의 다른 대학 선수들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역시 서한체대 차도현 선배 포스는 장난 아니다"라며 수군거릴 만큼 차갑고 서늘한 간판스타의 위압감 그대로였다.하지만 테이블 위의 실제 상황은 정반대였다.도현은 제 식판의 계란을 주겠다고 했다. 채아가 그릇을 가까이 가져오자 손끝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계란 프라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옮겨주었다.탁."선배……?"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도현이 헛기침을 하며 덤덤하게 속삭였다."단백질 보충해라. 오늘 오전 훈련 인터벌 빡빡하다며.""나 이미 달걀 두 개 받았는데요?""그럼 배고프면 먹어. 더 먹으라고 억지로 주는 건 아니고…… 네가 좋아하는 반숙이길래."도현의 무심한 말투와 달리, 선글라스 너머 그의 귀 끝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손끝으로 사과의 껍질을 정
처마 끝을 타고 흘러내리던 굵은 물방울이 점차 가늘어지더니, 이내 뚝, 뚝 소리를 내며 멎어 들었다.서귀포의 여름 소나기는 요란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밤하늘 너머로 물러났다.빗줄기가 말끔히 씻어내린 밤공기 속에서 짙은 흙내음과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한층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물기를 머금은 아스팔트 위로 목조 가로등 불빛이 길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처마 아래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두 사람의 숨결은 여전히 가빴다.도현의 엄지손가락은 여전히 채아의 이마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빗방울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던 손길이 귓가를 스쳐, 가느다란 턱선 쪽으로 아주 느리게 미끄러져 내렸다.스프린터 특유의 거친 굳은살이 박인 도현의 커다란 손바닥.그 손바닥이 살갗에 닿는 순간, 채아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어 숨을 깊게 들이켰다."비…… 완전히 그쳤네요."채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빗소리가 멎어버리자 자신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요란한 심장 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도현의 귀에 닿을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도현이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조금만…… 더 걷다 들어갈까.""네."두 사람은 처마 밑을 빠져나와 촉촉하게 젖은 해변 산책로로 걸어 나갔다.바다 위로 먹구름이 걷히며 은빛 달빛이 수평선 가득 부서져 내렸다.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모래톱에 맺힌 빗방울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밤 9시의 서귀포 해변 산책로는 한산했다.철썩, 철썩.검은 현무암 갯바위를 부드럽게 핥고 물러서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채우고 있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함께 불어오는 밤바람이 낮 동안 훈련으로 달아올랐던 대지를 서늘하게 식혀 주었다.숙소 방을 나서기 전, 룸메이트 이진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채아의 후드 집업 옷깃을 털어주며 신신당부했었다."야, 윤채아. 도현 선배가 밤에 산책 가자고 불렀는데 너 설마 훈련용 삼선 슬리퍼 끌고 나가려는 건 아니지? 제발 예쁜 흰 운동화 신고 나가라. 둘이 오늘 분위기 장난 아닐 것 같으니까!""진희야, 그냥 산책이라니까.""그냥 산책은 무슨! 서한체대 최고 철벽남이 밤바다를 걷자는데 그게 그냥 산책이냐? 응원한다, 우리 챔피언!"진희의 장난기 가득한 배웅을 뒤로하고 나온 채아는, 산책로 입구의 목조 가로등 아래에서 바닥의 조개껍데기를 발끝으로 툭툭 굴리고 있었다.사촌 에이전트 차진우는 구속되었고, 마정호 감독도 더는 두 사람의 훈련을 좌우할 수 없었다. 남은 절차까지 끝난 건 아니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오롯이 서로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밤이었다.탁, 탁.모래알이 섞인 보도블록을 짚는 단단한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다.채아가 고개를 들었다.가로등 불빛 속으로 차도현이 걸어오고 있었다.훈련용
며칠 뒤, 서울 수서경찰서 경제범죄수사팀 앞.검은 마스크를 푹 눌러쓴 차진우가 수사관들의 손에 이끌려 호송차로 향하고 있었다. 횡령 및 업무상 배임,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신청된 사전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전격 발부된 것이었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진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치듯 얼굴을 가렸다.도현의 망막 질환을 약점 잡아 치료비를 가로채고, 조작된 대포폰 가짜 메신저로 채아를 파멸시키려 했던 파렴치한 사기꾼의 말로는 비참했다. 대학 커뮤니티 에브리타임과 포털 뉴스에는 채아를 향한 비난 대신, 사기꾼 에이전트의 구속 소식과 함께 두 선수를 향한 응원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동시에 서한체육대학교 총장 직속 감사실에서도 단호한 처분이 내려졌다. 마정호 감독은 감사실 회의실 책상 앞에 불려 가 서늘한 처분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마정호 감독. 최수아 선수의 스파이크 훼손 사건을 무마하려 한 직권남용과, 차진우의 허위 언론 플레이를 알고도 묵인·방조한 사실이 특별 감사를 통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감봉 3개월 및 육상부 선수 지도 및 엔트리 전결권을 전면 박탈합니다."감사실장의 냉정한 선고에 마 감독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더 이상 항변할 명분은 없었다.체육관 로비 게시판에는 윤채아 선수의 명예 회복과 차도현 선수의 T11 국가대표 도전을 전폭 지지한다는 학교 본부의 공식 공고문이 내걸렸다.선수 지도와 출전 결재는 서민경 코치에게 일원화되었다. 채아는 게시된 공고를 사진으로 남겼다. 누가 책임지고 답해야 하는지, 이번에는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도현은 강 변호사의 법률 사무소에서 새로운 표준 선수 매니지먼트 계약서에 자필 서명을 남겼다.과거 사촌 진우에게 백지위임했던 계약의 효력과 대리권은 정리되었다. 원본은 이후 책임을 묻는 데 필요해 법률 사무소에 보관했다.새 계약서는 결정권과 대리 업무의 범위를 나눠 적었다. 도현은 항목을 읽어주는 음성을 멈추고, 본인 확인 없이 바꿀
화요일 오전 9시 5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대기실.두꺼운 방음문 너머로 수백 명의 취재진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송사 중계 카메라의 삼각대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플래시 충전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거울 앞에 선 차도현은 단정한 검은색 수트의 옷깃을 조용히 바로잡았다.눈을 가린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미세하게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주먹을 쥔 손가락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가이드 러너 한태준이 도현의 넓은 어깨를 툭 쳤다."긴장하지 마, 도현아. 네가 트랙에서 흘린 땀은 우리가 알잖아.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준비한 얘기부터 차근차근 해."도현의 법률 대리인인 강 변호사 역시 두꺼운 서류철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서 차진우 씨의 사설 대포폰 가상 계정 생성 IP와 계좌 추적 영장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아펙스 코리아 측에서도 법무팀 명의의 공식 지지 성명서를 회견에 맞춰 전달해 왔습니다.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도현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자."오전 10시 정각, 대기실 문이 열리고 도현이 회견장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수십 대의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번뜩이는 백색광 속에서도 도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마이크 앞에 섰다.웅성거리던 장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도현이 마이크를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단거리 육상 선수 차도현입니다."낮고 차분한 중저음이 스피커를 타고 회견장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최근 언론에 보도된 저의 건강 상태와 사적인 논란에 대해, 당사자인 제가 직접 진실을 밝히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 몸의 상태와 선수로서의 진로는 그 누구의 왜곡된 대변이 아닌, 오직 저 자신의 목소리로 밝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도현은 단상 스크린에 한국대학병원의 의학 진단서를 띄웠다."저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습니다. 주변 시야뿐 아니라 중심
체육지원처 대회의실의 블라인드 틈새로 정오의 따가운 햇살이 비쳐 들었다.본관 정문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취재진과 방송 카메라 플래시가 번뜩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을 뒤덮은 악의적인 찌라시 기사 때문이었다.[단독] 차도현의 눈먼 사랑? 후배 Y선수, 수천만 원 훈련비 요구 의혹…… 지인 메신저 대화 폭로캠퍼스 안은 수군거림과 호기심 어린 시선들로 들끓었다.전생이었다면 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선배 곁에 있어서 선배를 망치는 걸까'라는 자책감에 질식하며, 세상의 비난을 홀로 뒤집어썼을 터였다.하지만 지금의 채아는 달랐다.서민경 코치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실로 향하는 채아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훈련 일지와 통장 사본, 경찰청 접수증을 단단히 챙겨 든 손끝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여기서 답할 필요는 없어. 질문은 모아서 받고, 확인한 내용만 얘기하자. 힘들면 내가 옆에서 끊어줄 테니까.""네, 코치님. 준비 다 끝냈어요."채아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출발선을 지키기 위해선 어떤 진흙탕 싸움도 피하지 않을 각오였다.회의실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도현의 메인 후원사인 대기업 스포츠 브랜드 '아펙스 코리아' 마케팅 총괄팀장과 사내 법무팀 변호사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사촌 에이전트 차진우가 후원사에 긴급 제출했다는 40페이지짜리 정산 감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선수의 심신미약 상태를 악용한 후배 선수의 부당한 금전 편취 및 계약 위반 정황 보고.'보고서 표지에 박힌 자극적인 문구를 전해 들은 도현의 턱선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아펙스 마케팅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서류철을 톡톡 두드렸다."차도현 선수. 우리 브랜드는 지난 3년간 차 선수의 성실함과 투지를 믿고 매년 수억 원대의 훈련비와 전용 장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시각 질환을 숨긴 것도 모자라, 후배 선수에게 거액의 훈련 지원금을 빼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