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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빌려 신은 은빛 스파이크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2 20:14:11

수아의 입꼬리에 걸린 비열한 비웃음.

마치 채아의 스파이크가 찢어졌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교만하고 뻔뻔한 태도였다.

그 뒤에 선 4학년 선배들도 팔짱을 낀 채 혀를 차며 채아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게 진작 선배들한테 양보했으면 이런 망신은 안 당하잖아."

"어디서 남 탓을 하려고 수작을 부려?"

비열한 조롱이 좁은 코치실 공기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채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손에 든 훼손된 주황색 스파이크를 책상 위에 가볍게 내려놓으며, 수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수아 선배님."

채아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제가 언제 못 뛴다고 했나요?"

수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뭐?"

"제 기권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신발은 코치님과 상의해서 해결할 테니까, 선배님은 본인 출발 준비하세요. 전 트랙에서 기다릴게요."

"너……!"

수아가 핏대를 세우며 쏘아붙이려던 찰나, 서민경 코치가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최수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트랙으로 나가서 웜업이나 해라. 테스트는 정각 9시에 시작한다."

서 코치의 서슬 퍼런 기세에 수아는 이를 갈며 뒤돌아섰다.

수아와 선배들이 나가자마자 서 코치가 연구실 안쪽 장비실 금고를 열었다.

그녀가 꺼내온 것은 짙은 네이비색 가죽 스파이크 케이스였다.

"채아야, 이리 와봐라."

케이스가 열리자, 은색 알루미늄 광택이 도는 탄소 섬유 플레이트 스파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현역 시절 마지막 아시안게임 100미터 결승에서 신었던 스파이크다. 240밀리미터, 네 발 사이즈와 정확히 같아. 밑창 강성과 탄성은 내가 직접 점검해 뒀다."

채아의 가슴이 뭉클하게 젖어 들었다.

스승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혼이 깃든 신발.

서 코치는 공구함을 꺼내 스파이크 바닥의 핀을 능숙하게 교체했다.

"오늘 트랙 상태에 맞춰 핀을 새로 끼웠다. 7밀리미터야. 먼저 신어보고 발을 밀 때 불편한 곳이 없는지 말해라."

채아가 스파이크를 발에 넣고 끈을 조였다.

발등을 감싸는 가죽의 단단한 밀착감, 그리고 발바닥 아치를 완벽하게 받쳐주는 카본 플레이트의 탄성이 온몸의 신경을 짜릿하게 관통했다.

채아는 장비실 앞 고무 매트 위에서 가볍게 제자리 점프와 3단 바운딩을 뛰어보았다.

타앙! 타앙!

뒤꿈치 힐컵이 발목을 견고하게 잡아주었고,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반발력이 용수철처럼 살아 숨 쉬었다.

"어떠냐?"

"완벽합니다, 코치님. 제 발에 딱 맞아요."

"좋다. 그래도 전력으로 뛰기 전에 몇 번 더 맞춰보자. 낯선 신발이니까 어디라도 쓸리면 바로 말해. 그놈들 때문에 네 몸까지 잃을 수는 없어."

"네!"

***

그 시각, 체육지원 행정실.

도현은 복도 창문 앞에 서서 태블릿을 쥐고 있는 행정 조교와 마주하고 있었다.

"서 코치님과 감사실에 보존 요청 접수됐습니다. 오늘 새벽 5시부터 8시까지 복도 CCTV와 라커룸 출입 기록을 따로 백업해뒀어요. 이건 감사실에 전달할 사본입니다."

조교가 조심스럽게 USB를 건넸다.

도현은 USB를 건네받아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시야는 흐릿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조교가 모니터를 도현 쪽으로 돌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선배님, 전자 도어록 출입 로그를 보니까요…… 오늘 새벽 6시 14분에 최수아 선배 학생증 카드로 여자 라커룸 문이 열린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어요."

도현의 눈썹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CCTV는?"

"복도 카메라 각도에 수아 선배가 라커룸으로 들어갔다가 3분 만에 주머니에 뭔가를 찔러 넣고 황급히 빠져나오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혔습니다."

출입 시각과 동선이 확보되었다. 이것만으로 사물함 안에서 벌어진 일까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훼손 사진과 목격 진술을 대조할 근거가 생겼다.

도현은 주머니 속 USB가 있는 자리를 눌러 확인했다. 혹시라도 자료가 사라질까 마음이 쓰여, 조교가 백업을 마쳤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기다렸다.

"감사팀장님과 서 코치님도 이 자료를 확인하실 수 있게 해주세요. 경기 뒤에 채아가 훼손된 신발을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조교님, 이 파일 원본 서버에서 삭제되지 않도록 감사팀 백업 요청 공문 올려주세요. 제가 공식 서명하겠습니다."

"네, 선배님. 마 감독님 결재 없이 올려도 괜찮으시겠어요?"

"책임은 내가 집니다. 마 감독이 손대지 못하게 감사실 담당자 이메일로 즉시 동시 발송해 주세요."

도현의 단호한 목소리에 조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돌아섰다.

도현은 주머니에 손을 얹은 채 행정실 문을 찾았다. 채아에게 알려줄 것은 누가 유력한 범인인지보다, 부탁한 기록이 지워지지 않게 보관됐다는 사실이었다.

‘채아야, 뒷문은 내가 완벽하게 막아둘게. 넌 트랙만 봐.’

도현은 케인을 짚으며 대운동장 메인 트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오전 8시 55분, 대운동장 메인 트랙.

초여름처럼 눈부신 4월의 햇살 아래, 육상부 전 선수단 30여 명과 마정호 감독, 코칭스태프들이 피니시 라인 인근에 모여 있었다.

관중석 난간에는 도현이 서민경 코치와 나란히 서서 출발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헛기침을 했다.

"오늘 100미터 공개 테스트는 춘계 대학선수권 여자 100미터 엔트리 선발을 위한 최종 점검이다. 규정대로 치러지며, 이의 제기는 없다."

마 감독의 뻔뻔한 선언과 함께 출발선으로 두 선수가 걸어 나갔다.

4레인 최수아.

5레인 윤채아.

수아는 턱을 치켜든 채 채아의 발밑을 흘깃 훔쳐보았다.

주황색 스파이크가 아닌 은색 스파이크를 신은 것을 확인하자 수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남의 신발 빌려 신고 뛰어봐야 적응도 안 된 상태일 텐데,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트랙 주변에 모여든 30여 명의 선수들은 웅성거리며 수군거렸다.

"야, 채아 신발 봐봐. 원래 신던 주황색 카본 스파이크가 아니잖아?"

"저거 서민경 코치님 옛날 현역 때 신던 은색 아시안게임 모델 아니야?"

"신발이 갑자기 바뀌면 발바닥 족저근막에 무리 가서 제 기록 절대 안 나올 텐데…… 채아 어쩌냐."

동기 진희는 발을 동동 굴렀고, 4학년 선배들은 팔짱을 낀 채 최수아의 압승을 점치며 낄낄거렸다.

마정호 감독은 전자 계측기 모니터 뒤에 팔짱을 끼고 서서 비열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신발이 바뀐 상태에서 100미터를 뛴다고? 11초 60도 어림없지. 오늘로 윤채아는 끝이다.'

하지만 5레인에 엎드린 채아의 심장은 거대한 북처럼 힘차게 고동치고 있었다.

발바닥 아치를 받쳐주는 은색 스파이크의 팽팽한 탄성.

서 코치가 직접 갈아 끼워준 7밀리미터 세라믹 피라미드 핀이 우레탄 트랙의 미세한 홈을 빈틈없이 물고 있었다.

채아는 수아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5레인 스타팅 블록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발가락 끝으로 7밀리미터 세라믹 핀을 블록 홈에 정확히 맞물렸다.

블록 전면 각도 65도.

손가락 끝에 닿는 붉은 우레탄의 서늘한 감촉.

채아는 심호흡을 하며 100미터 전방의 하얀 피니시 라인을 노려보았다.

전생에서 도둑맞았던 출발선, 그리고 오늘 아침 비열하게 잘려 나갔던 스파이크.

모든 억압과 모욕을 부수고 날아오를 순간이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채아는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벌려 흰색 출발선 바로 뒤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지면의 서늘한 감촉과 함께 온몸의 근육이 팽팽한 활시위처럼 당겨졌다.

옆 4레인의 최수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채아를 쏘아보는 살벌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채아의 시선은 오직 100미터 전방, 결승선의 붉은 계측 테이프만을 꿰뚫고 있었다.

스물여덟의 초겨울,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심장이 멎어가던 전생의 채아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속삭였다.

'채아야, 이번엔 절대로 멈추지 마. 네 트랙을 달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관중석 난간에서 지켜보는 차도현의 묵직한 존재감, 그리고 서민경 코치의 신뢰 어린 눈빛이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선수 제자리에(On your marks)."

스프린터들이 블록에 발을 대고 출발선 뒤로 손을 짚었다. 채아는 어깨의 힘을 한 번 풀고 다음 구령을 기다렸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옆 레인에서 수아가 호흡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스타터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대운동장 전체의 공기가 팽팽하게 굳어졌다.

채아는 블록에 발을 한 번 더 밀착시켰다.

이제 다음 구령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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