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놔요!”
고현아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손목을 조여오는 통증에 그녀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텅 빈 커다란 주차장에 여자의 낮은 신음이 울려 퍼졌다.
손끝에 닿은 화끈거리는 붉은 자국에 주강인의 턱선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잔뜩 가라앉았다. 머릿속에는 방금 복도에서 고하준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장면만 맴돌았고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에 더 힘이 들어갔다.
참다못한 고현아의 얼굴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주강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쏘아붙였다.
“주강인, 너 진짜 적당히 좀 해.”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혐오감이 잔뜩 묻어났다.
손을 뿌리치느라 주강인의 몸이 한쪽으로 휘청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고현아의 입에서 제 이름 석 자가 온전히 불린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니까. 심지어 반말까지...
결혼 전엔 ‘강인 씨’라 불렀고, 결혼 후엔 줄곧 ‘여보’ 혹은 ‘자기’라 불렀던 그녀였다.
주강인이 뒤를 돌아 고현아를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툭 내뱉는 그 불손하고 짜증 섞인 말투가 방금까지 가슴 속을 들끓게 했던 그의 분노에 찬물을 끼얹은 듯 단번에 식혀버렸다.
현장을 들킨 건 분명 그녀인데 왜 저토록 당당하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는 걸까?
하지만 고현아는 그의 물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저 욱신거리는 손목만 문질렀다. 가파른 걸음 탓에 거칠게 오르내리는 그녀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고현아는 호흡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혼합의서는 이미 받았을 테니 시간 날 때 같이 가정법원 가서 마무리해요.”
이건 마치 저녁 메뉴를 묻는 듯한 지극히 일상적이고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그 순간, 주강인의 뇌리에 사무실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스쳤다. 류태현이 ‘사모님께서 보내신 겁니다’라며 건넸던 그것, 당시는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게 던져두었던 기억이 났다.
줄곧 이어지던 회의와 프로젝트 처리 일정에 밀려 까맣게 잊고 지냈던 봉투, 그 속에 든 게 이혼합의서였다니.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과 끝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 때문에?
고하준?
주강인이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새틴 블라우스에 슬랙스를 매치한 고현아의 모습은 유달리 늘씬해 보였다. 금속 벨트로 포인트를 준 허리, 물결처럼 우아하게 흐르는 검은 웨이브 머리, 그리고 옅게 화장한 얼굴은 영락없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자세히 그녀를 본 게 얼마 만인가. 집에선 늘 편안한 홈웨어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 머리칼은 어깨 위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있었지.
퇴근 후 문을 열면 언제나 품에 안겨 와 ‘오늘 힘들지 않았어요?’, ‘속상한 일은 없었나요?’라며 나긋나긋 굴던 그 다정한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새 그녀의 다정함에 길들여진 주강인. 그래서일까, 지금 눈앞의 차가운 눈빛을 한 여자가 낯설기만 했다.
한때 온기로 가득 찼던 그 눈동자에 이제는 실망감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잊고 있었다. 그녀 역시 사람이었다는 것을. 선택받지 못한 후에 터져 나올 분노를 그녀도 분명 품고 있었다.
주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 말했다.
“우리 둘 다 감정이 격해져 있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일단 집으로 가자.”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순간 고현아가 뒤로 물러나며 날렵하게 그 손길을 피했다.
마치 독사라도 마주한 듯 몸을 피하는 모습이 주강인의 눈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허공에 멈춰버린 그의 손이 갈 곳을 잃고 굳어버렸다.
“거긴 강인 씨 집이지 내 집이 아니에요.”
고현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시야가 흐려지며 코끝이 찡해졌고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나한텐 이제 돌아갈 집이 없어요.”
그래, 그녀에겐 더 이상 집이 없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 이 세상에 혈육이라곤 단 한 명도 안 남았다.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찬 거대한 두천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한때 고현아는 참으로 순진했었다. 주강인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매사 살뜰하게 굴고 흠 잡힐 곳 하나 없이 완벽하게 처신하려 애썼다. 낯설고 서툰 다도를 배우고 까다로운 집안 법도를 익히며 오직 이 남자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깎고 다듬었다.
지키고 싶었다. 아버지의 뜻도, 덧없는 이 결혼 생활도. 하지만 결국 남은 건 이런 비참한 결과뿐이었다.
그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한 자신은 그저 쓸모없는 존재였다.
고현아는 솟구치는 통증을 필사적으로 짓눌렀다. 흐르려는 눈물을 악착같이 삼키며 주강인에게 이런 나약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안 가요. 짐은 진작 다 뺐고 강인 씨 물건은 하나도 안 가져갔으니까 걱정 말아요.”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혼합의서에 적힌 조건들은 전부 합리적인 선이에요. 그저 내가 가져가야 할 몫만 챙겼어요.”
고현아의 입에서 나온 ‘강인 씨 물건’, ‘가져가야 할 몫’이라는 단어들이 주강인의 심기를 제대로 긁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작정하고 선 긋네? 너한테 3년이란 이 시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래였어?”
“그럼 아니에요?”
그녀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 나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관계의 밑바닥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애초에 나랑 결혼한 것도 강인 씨 할아버지의 지분 때문 아니었나요? 우리 사이에 누가 더 고상할 것도 없잖아요.”
순간, 주차장을 감싸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삼 초가 흐른 뒤, 주강인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허공에 멈춰 있었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말 한번 잘했네.”
그 말은 날카로운 침과 같아 주강인의 체면을 꿰뚫어 버릴 기세였다.
남자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현아를 자신의 그림자 안으로 끌어들였다.
방금까지의 여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난 사인 안 해. 그때 왜 너랑 결혼했는지 잘 생각해 봐.”
주강인은 늘 그렇듯 거만하고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우리 사이의 시작과 끝은 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 이게 바로 진짜 주강인이지!
다정함은 가면일 뿐 이해관계가 얽히면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꾼으로 돌아온다.
고현아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내가 강인 씨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주강인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비웃듯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 자신감 끝까지 유지할 수 있길 바랄게요.”
더는 실랑이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녀는 차 키를 꺼내 제 차로 향했다. 표정 또한 소름 끼칠 정도로 평온했다.
주강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끝내 입을 열었다.
다만 목소리가 상상 이상으로 쩍쩍 갈라졌다.
“그 자식이랑 무슨 사이야?”
고현아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알 바 아니에요.”
“아직 이혼 안 했어. 넌 여전히 우리 집안 사람이라고.”
“곧 끝날 거잖아요.”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 순간, 그녀가 덧붙였다.
“합의서는 변호사를 통해 다시 재촉할게요. 우리 이참에 깔끔하게 정리해요.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차 문이 닫히고 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 켜진 전조등이 주강인의 옆얼굴을 환하게 비췄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차는 미련 없이 속도를 높였고 이내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강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곁으로 내려뜨린 그의 손끝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라이터를 세 번이나 눌러대고서야 겨우 담배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피어오른 연기가 그의 짙은 눈매를 흐릿하게 가렸다.
희뿌연 연기가 채 걷히기도 전, 주강인의 시선은 뒷좌석 거울에 고정되었다.
룸미러에는 작은 부적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지난해 2월 2일, 고현아가 그를 위해 절에 가서 직접 받아온 것이었다.
그날은 폭우가 쏟아져 산길이 끊길 정도였다. 그녀는 주강인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고 했고, 절 아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커다란 인공 버섯 조형물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주강인이 나타나자 고현아는 사고라도 친 아이처럼 배시시 웃으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었다.
주머니 속에서 꺼낸 부적을 의기양양하게 내밀며 이건 고산 스님이 직접 만든 거라며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절에 온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 중에서 오직 자신만이 뽑혔다며 아이처럼 기뻐하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차 안의 조명을 켜자 빗물에 흠뻑 젖어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은 그녀가 보였다. 몰골은 영락없는 길고양이처럼 볼품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두 눈만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주강인은 평소 직접 운전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동이나 대외적인 자리는 늘 류태현이 동행했고 차도 자주 바뀌었기에 차 안에 무엇이 늘고 무엇이 사라졌는지 따위는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
이 평안 부적이 언제부터 달려 있었던 걸까? 그날 밤이었나 아니면 그 이후 어느 날이었나?
손끝에서 타들어 가던 담배 끝의 붉은 불씨가 살을 파고들었다. 화끈한 통증이 느껴지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든 주강인은 손을 뻗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한참 후,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고하준 조사해봐!”
위장이 뒤틀리듯 쥐어짜는 통증이 밀려왔다. 주강인은 핸들에 머리를 박고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분명 무언가가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