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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

Autor: 연등등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고현아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의 유품 중 병원에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디자인 시안 정리를 마치자마자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

다시 이곳에 발을 들여놓자니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욱신거렸다.

아버지가 허망하게 떠나던 그 날, 직접 아버지의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혀 드렸던 기억. 그 후로 코끝에서 떠나지 않던 낯설고도 서늘한 냄새가 다시금 밀려왔다.

입원 병동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콧날이 찡해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사흘 내내 내린 비 때문인지 바람에 실려 온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고현아는 외투 깃을 단단히 여몄다.

엘리베이터는 곧장 7층 VIP 병실로 올라갔다. 아버지가 머문 시간이 길었던 만큼 고현아도 이곳 직원들과는 제법 안면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현아 씨, 왔어요?”

알고 보니 청소 아주머니 채일화였다. 과거 고현아의 아버지가 곤경에 처한 그녀를 도와준 인연으로 채일화는 늘 고현아를 살뜰히 챙기곤 했다.

지방 출신의 채일화는 무척이나 정이 많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한 달 전쯤, 손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고향에 다녀온다며 떠났는데 아마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모양이었다.

고현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는 대걸레를 밀차에 기대어 놓고는 인자하게 웃었다.

“집에서 직접 담근 총각김치 가져왔으니 이따가 일 다 마치고 갖다 줄게요.”

고향에 다녀올 때마다 고현아와 그녀의 아버지에게 음식을 챙겨주곤 하던 아주머니였다.

“두천 같은 곳에 혼자 덩그러니 와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이잖아요.”

평생 딸 없이 살아온 채일화에게 예쁘고 다정한 고현아는 정말이지 친딸처럼 아끼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문득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202호가 비어 있던데. 새로 온 간호사들은 낯설어서 묻지도 못했네요. 현아 씨 아버님 혹시 병실 옮기셨나요?”

아주머니의 살가운 질문에 고현아의 입꼬리가 굳어졌다. 가방끈을 쥔 손끝에 닿는 감각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대답이 없는 그녀를 보며 아주머니의 눈빛에 기대가 서렸다.

“혹시 병이 다 나아서 퇴원하신 거예요? 전에 친구분이 실력 있는 의사 선생님을 소개해 줬다고 하더니 수술이 아주 성공적이었나 보네요.”

고현아는 찰나의 망설임 끝에 자신을 보며 해맑게 웃는 채일화를 바라보았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목이 멘 탓에 그녀는 차마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아주머니도 덩달아 눈시울을 붉히며 고현아의 등을 다독였다.

“너무 잘됐어요! 병원에서 그렇게 오래 고생하셨는데 이제라도 다 나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주머니는 연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현아 씨 아버님처럼 좋으신 분을 하늘이 굽어살피신 거죠.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는 고현아의 손을 놓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몸을 더 빨리 회복할 수 있는지, 퇴원 후에는 어떻게 간호를 해야 하는지 세세한 조언을 쏟아냈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고 나서야 채일화는 비로소 말을 멈추고 웃으며 제 갈 길을 향했다.

아주머니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 뒷모습이 사라지자 고현아도 비로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 모르는 게 약이지.’

자신의 처지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남에게까지 괜한 슬픔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가서 용건을 말하자 당직 간호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쪽 창고로 들어갔다.

고현아는 옆에 서서 기다렸다. 본래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팔랑귀는 아니지만, 화제의 주인공이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그녀 역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주강인 맞다니까. 전에 TV에서 본 적 있어.”

“그럼 방금 옆에 있던 분이 설마 사모님이야?”

“그런 거 같아. 3년 전에 결혼했다고는 들었는데 부인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장인어른 입원 절차를 직접 해드리다니. 잘생긴 데다 다정하기까지 해.”

그들이 말하는 사모님은 아마도 성은지일 것이다.

그녀가 아니면 주강인이 이토록 직접 움직일 이유가 없으니까.

성은지의 아버지 성철준의 수술이 끝났다고 했지. 성은지가 혼자 병간호하기엔 벅찰까 봐 주강인이 직접 귀국시켜 병실까지 잡아준 걸까?

고현아의 속눈썹이 아주 가볍게 떨렸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어차피 정리할 관계였다. 그가 누구와 무엇을 하든 이제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간호사가 건네는 봉투를 받아 든 그녀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 마침 병실에서 나오던 류태현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고현아를 발견한 류태현의 눈에 당혹감이 빠르게 스쳤다.

서둘러 병실 문을 닫았지만, 찰나의 틈새로 비친 광경을 고현아가 놓칠 리 없었다.

주강인이 깎아 놓은 사과를 반으로 갈라 반쪽은 성철준에게 건네고 나머지 반쪽은 성은지에게 건네고 있었다.

성철준이 무어라 한마디 덧붙이자 곁에 있던 성은지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나 다정하고 영락없는 한 가족의 풍경이었다.

류태현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사모님.”

그의 얼굴에 번진 묘한 죄책감이 고현아는 도리어 우스웠다.

정작 당사자인 주강인은 저기서 다정하게 사과나 깎아주고 있는데 왜 비서인 그가 먼저 가슴 찔리는 걸까?

손에 든 검사 결과지를 보며 고현아는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지나치려던 찰나, 류태현이 다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사모님, 그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본능적으로 주강인을 변호해야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두 집안이 워낙 오랜 지기라 대표님께서도 문안 인사차 들르신 겁니다. 이건... 도리상 당연한 일이라.”

도리, 그것참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3년 동안 입원해 계시는 동안 주강인은 딱 두 번 병문안을 왔었다.

그것도 본사에서 병원 실사를 나올 때, 고현아가 억지로 끌고 온 것이 전부였다.

성은지와는 세대교류가 깊은 집안, 소꿉친구 사이였고 반면 고현아와 아버지는 언제나 그들만의 리그에 끼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애초에 동등하지 않았다. 계급도, 마음도 모든 게 다...

고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아무런 파동도 없는 깊은 우물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혼합의서, 최대한 빨리 서명해서 전달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류태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그녀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고현아의 가냘픈 뒷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류태현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잘 어울리던 두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틀어진 걸까?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가녀린 흰색 실루엣이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넋을 잃고 서 있는 류태현을 발견한 성은지가 밝게 웃으며 물었다.

“류 비서님, 무슨 일 있으세요? 검사 결과에 문제라도 있나요?”

류태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니요. 지금 막 의사 선생님께 갖다 드리려던 참입니다.”

“네, 그러시군요.”

그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성은지의 온화한 미소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방금 문밖에서 본 여자, 그녀가 바로 주강인의 아내일까?

확실히 미인상은 맞았다.

사실 성은지는 예전부터 주씨 저택의 가정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주강인이 오로지 5%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그 여자와 결혼했고 그 여자 또한 주씨 가문의 권력을 좇아 결혼을 승낙한 것이라 했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강인은 끝내 성은지의 아버지를 우선시했다.

이건 즉 저들 부부 사이에 애초에 정 같은 건 없다는 뜻이겠지?

이 결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지저분한 거래였을 뿐이다.

‘고현아.’

성은지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뭘 보고 있어?”

고개를 돌리자 주강인이 병실에서 나오며 조용히 말했다.

“약 먹고 잠드셨어.”

그녀는 시선을 올리고 눈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바쁜 와중에도 직접 와서 챙겨주고 정말 고마워요, 오빠.”

한편 주강인의 말투는 담백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런 말 마. 너희 아버지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

‘너희 아버지라...’

성은지는 옷자락을 꽉 쥔 채 가슴 한구석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애써 숨기며 수줍게 고개를 떨궜다.

“그래요, 오빠...”

중학교 시절, 다친 자신을 품에 안고 양호실까지 달려가 주던 그 날부터 그녀는 알고 있었다. 주강인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 몇 년간 그녀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연락은 끊긴 적이 없었다. 주강인은 독일로 출장을 갈 때면 아무리 바쁜 일정이라도 꼬박꼬박 시간을 내어 성은지와 그녀의 아버지를 챙기곤 했었다.

이번 귀국 역시 주강인이 직접 나서서 모든 일을 도맡아 준비해 주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업무 메일을 확인했고 복도엔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류태현이 돌아와 약 처방전과 주의 사항이 적힌 서류를 성은지에게 건넸다.

“의사 선생님께서 은지 씨 아버님 회복세가 아주 좋다고 하십니다. 수치도 모두 정상 범위래요.”

성은지는 서류를 받아 들며 방긋 웃어 보였다.

“대표님...”

이어서 류태현은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채 입을 뗐다.

성은지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전 들어가서 링거 체크하고 올게요.”

주강인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 잘 챙겨둬. 간병인도 따로 붙일게.”

병실 문이 닫히자 류태현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방금 사모님을 마주쳤습니다.”

주강인은 그녀가 단순히 아버지를 돌보러 온 것이라 생각하며 곁눈질로 계속 말해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에 류태현은 심호흡한 뒤 말을 전했다.

“사모님께서 이혼합의서에 최대한 빨리 사인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업무용 메시지를 확인하던 주강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는 알겠다며 낮게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한편 병실 안쪽 문에 기대어 서 있던 성은지의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껏 움켜쥐어졌다.

‘둘이... 이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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