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고현아가 가방을 챙기려 몸을 일으키자 옆에 있던 고하준이 그녀보다 한발 앞서 움직였다.
“데려다줄게.”
이것은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통보였다.
고하준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거절해봤자 결과는 뻔하니까. 어릴 때부터 줄고 그래왔었다.
주강인이 독재자라면 고하준도 그에 못지않았다.
고현아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이 두 남자가 맞붙는다면 과연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두천의 바닥은 생각보다 좁았다.
두 사람이 룸을 나서자 복도에 흐르는 서늘한 냉기가 방 안보다 훨씬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팔을 쓸어내렸다.
바로 그때, 복도 모퉁이를 돌던 고현아의 발걸음이 돌연 멈췄다.
불과 십여 미터 앞,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룸 앞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회색 정장, 훤칠한 키, 그는 바로 주강인의 수행비서 류태현이었다.
그가 여기 있다면 주강인도 분명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뇌 정지가 온 것만 같았다.
이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고 해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 남자 누구야?’라는 주강인의 추궁은 더더욱 듣기도 싫었다.
삼 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지겹도록 반복했던 그 변명들. 고현아는 더 이상 ‘난 아무 잘못 없어요’라는 사실을 증명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더는 그 어떤 것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고 주강인과는 그 어떤 접점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고현아는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어깨가 고하준의 가슴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우리 저쪽으로 가요.”
그녀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저쪽에도 엘리베이터 있어요.”
이혼이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한편 고하준은 그녀가 왜 이러는지 단번에 알아채고는 가볍지만 단호하게 손목을 낚아챘다.
“현아야.”
머리 위로 떨어진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가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지금 뭘 피하는 거야?”
그러게, 대체 무엇을 피하고 있는 걸까?
이미 이혼을 요구했고 집도 나왔으며 법적으로도 곧 남남이 될 사이인데.
그럼에도 류태현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또 혹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뭐가 두려운 걸까?
주강인에게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
가소롭기도 하지. 고현아는 본인마저 무엇을 겁내고 있는 건지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내려 애썼다. 만약 주강인이 자신과 고하준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이혼 절차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질 것이다.
주강인은 분명 그녀가 외도라도 한 것처럼 몰아세우며 도덕적 우위를 선점하려 할 것이고 재산 분할 과정에서도 온갖 억지를 부려 발목을 잡으려 할 것이다.
그녀는 손목을 옥죄어오는 고하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더욱 강하게 조여드는 악력뿐이었다.
고하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복도 저편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끌려가는 고현아의 발걸음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있었다.
“고하준!”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거 놓으라고.”
다만 남자는 아무 대답 없이 발걸음을 늦추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하고 단호한 기세로 복도를 걸어갔다.
통화를 마친 류태현이 고개를 들었다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사모님?”
두 사람의 거리를 확인한 류태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편의 방문을 돌아보았다.
고현아는 손을 빼려 했지만, 곁에 있는 남자는 전혀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어느덧 그의 눈동자에는 노골적인 흥미가 서려 있었다.
‘이 인간 일부러 이러는 거잖아!’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곧이어 룸 문이 열리고 주강인이 휴대폰을 든 채 밖으로 나왔다.
류태현을 먼저 본 그가 시선을 따라 고현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고하준까지 보게 됐다.
고현아의 손목을 단단히 쥐고 있는 고하준의 손!
그 찰나, 공기가 얼어붙은 듯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강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가볍게 돌려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의문이 가득한 남자의 시선이 고현아에게 꽂혔다.
마치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 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고현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옆에 있는 남자의 손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복도 공기는 마치 산소를 모조리 빨아들인 듯 희박해졌다. 류태현은 숨쉬기조차 힘겹게 느껴져 아무 내색 없이 슬그머니 룸 안으로 물러섰다.
한편 고하준은 두 남녀를 번갈아 보다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데서 또 마주치네요, 주 대표님.”
주강인은 그런 고하준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저 고현아를 향해 야유 섞인 미소를 띠었다. 곧이어 얼음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리 와.”
그 세 글자가 억지로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고하준이 손을 놓자 고현아는 겨우 한숨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심장은 다시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고하준이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주강인에게 다가서더니 한층 더 경쾌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냈죠, 주 대표님?”
주강인은 드디어 고현아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자신과 키가 비슷한 남자에게 옮겼다.
그는 형원 그룹 총수 고하준을 알아보았다.
3년 전 갑자기 해외 시장에 나타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배경과 잔혹한 수단으로 급부상한 신예.
아시아 태평양 비즈니스 포럼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스쳐 지나며 ‘조만간 봬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었지.
그땐 일개 지역 총괄 이사였는데 겨우 삼 년 만에 그룹의 총수 자리에 오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래도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했다. 수완이나 속내 모두 만만치 않았다.
‘이 인간 뭐지? 지금 내 와이프 손잡고 떡하니 내 앞에 서 있어?’
“고 대표님?”
주강인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고하준을 향해 언짢으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제 와이프를 데려다주는 건 좀 부적절한 것 같은데요?”
“와이프요?”
고하준이 그 단어를 곱씹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현아가 이미 주 대표님 사무실에 이혼합의서를 보낸 거로 아는데요.”
이혼합의서라니?
주강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머니 속으로 무심결에 주먹을 꽉 쥐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부부 사이의 사소한 다툼일 뿐입니다. 고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은 아니죠.”
주강인이 성큼 걸음을 옮겨 그를 지나치려 했지만 고하준이 몸을 돌려 앞을 가로막았다.
“사소한 다툼이라고요? 장인의 의료 지원까지 끊어가며 다른 여자에게 정성을 쏟아붓고 정작 현아는 홀로 두천에 방치한 채 잠적하여버렸는데 대표님은 이런 걸 두고 사소한 다툼이라고 하나요?”
주강인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고현아를 향한 그의 눈빛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우리 와이프님께서 고 대표한테 참으로 상세하게도 말했나 보군요. 아주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털어놓은 걸 보니.”
고현아는 등 뒤로 손을 꽉 쥐고 복잡한 시선으로 고하준을 쳐다봤다.
자신이 의료 자원을 찾아다녔던 것도, 주성 그룹에 이혼합의서를 보냈다는 것도, 심지어 주강인과 이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또 뒷조사를 한 걸까?
대체 이 남자의 속셈은 뭘까?
고하준은 뒤돌아 서 있는 고현아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랑 현아의 관계는 주 대표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거든요.”
이건 누가 들어도 도발이었다. 노골적이고 오만한 도발!
주강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성이 흐려진 탓인지 그는 고현아의 흔들리는 눈빛마저 제멋대로 오해하기 시작했다.
“현아야?”
그는 으스러질 듯한 힘으로 고하준의 어깨를 짓눌렀다. 눈동자에는 상대를 당장에라도 꿰뚫어 버릴 듯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우리 이만 갈까? 먼저 갈게요, 고 대표님.”
말을 마친 주강인은 대답도 듣지 않겠다는 듯 고현아의 팔을 억세게 낚아챘다.
그녀가 뿌리치려 하자 억누른 분노가 섞인 남자의 음성이 귓가에 낮게 깔렸다.
“뒤돌아보지 마!”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고하준도 비로소 미소를 거두었다. 그는 무심한 듯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돌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랜만이야, 주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