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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

Author: 연등등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고현아는 수납장 옆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꼈다.

이미 모든 걸 다 캐내고도 굳이 이런 식으로 돌려가며 사람 속을 긁어대다니.

이 남자가 원래 이렇게 피곤한 사람이었나, 그녀는 새삼스럽게 의아했다.

“싸우러 온 거라면 사양할게요. 나 지금 그럴 기운 없으니까. 뭔가 확인하고 싶어서 온 거면 이제 다 본 것 같으니까 그만 나가주시죠.”

주강인이 물컵을 든 손을 멈칫했다. 그는 대꾸 없이 몇 초간 침묵하다가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

“다음 주 토요일에 아버지 환갑잔치야. 본가로 들어와.”

이건 통보인가?

“안 가요.”

고현아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주강인 아버지의 환갑잔치라니. 배경도 밑천도 없는 자신이 무슨 볼일이 있다고 거기까지 가야 할까? 주씨 가문 어른들의 뼈 있는 비아냥을 견뎌내라는 건지 아니면 주강인 뒤만 쫄쫄 따라다니는 순종적인 ‘사모님’ 연기를 또다시 반복하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지난 3년간 본가에 갈 때마다 늘 똑같았다. 어른들 틈바구니에 던져지면 삼촌이니 이모니 하는 사람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훑으며 혀를 찼고 대화의 끝은 늘 한결같았다.

“도대체 강인이는 뭘 보고 너 같은 애랑 결혼한 건지 모르겠네.”

매번 반복되는 그 지긋지긋한 일상이 진절머리가 났다.

차라리 그 시간에 도면을 한 장이라도 더 그리는 게 훨씬 생산적이었다.

“올해는 경섭 삼촌 내외도 귀국하셔. 아버지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라고 신신당부하셨어.”

삼촌 내외?

고현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이 두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주강인과의 결혼식 때 딱 한 번 마주쳤는데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그녀가 올린 술잔조차 제대로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주강인의 아버지 주호섭과 그의 동생 주경섭은 늘 불화가 깊었다고 하다. 주강인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주성 그룹을 큰아들 주호섭에게 물려주자 분노한 주경섭이 곧바로 해외로 떠났고 심지어 본인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주호섭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주성 그룹이 크게 흔들리자 갓 졸업한 주강인이 강제로 대표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때 주경섭이 돌아와 경영권을 빼앗으려 했고 수많은 사람들과 연합하여 본사 최고층 사무실에서 소란을 피웠다.

주강인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고현아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혼 사실이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킬까 봐 일부러 고현아를 설득하러 온 것일까?

“그럼 나한테 이득 될 건 뭔데요?”

고현아의 질문은 아주 직설적이었다.

주강인은 그녀의 솔직함에 예상치 못했다는 듯 살짝 웃음을 지었다.

“뭘 원하는데? 집, 차, 아니면 뭐 사업적인 지원이라도?”

자신을 그저 그렇게 속물적인 사람으로만 여기는 걸까.

고현아는 망설임 없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또렷하게 한 마디씩 내뱉었다.

“이혼합의서에 사인하세요.”

이 대답을 듣는 순간,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던 주강인의 손가락이 멎었다. 그의 목울대가 살짝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고 거실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고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혹시라도 토라짐이나 순간적인 감정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맑은 눈동자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호함만이 가득 서렸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떠나고 싶어 안달이라니. 단 1초라도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며칠 새 겨우 세 번 얼굴을 마주했는데 만날 때마다 이놈의 이혼 얘기뿐이었다.

잔뜩 독이 오른 눈빛과 날 선 말들, 마치 둘 사이에 씻을 수 없는 원한이라도 쌓인 것 같았다.

주강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끓어오르는 속을 억누르고 짐짓 여유로운 척 대꾸했다.

“그래, 좋아. 일 끝나면 바로 사인해 줄게.”

고현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가 이토록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

“말 바꾸는 걸 방지해야겠으니까 미리 서명해서 변호사한테 맡겨둬요. 일 마무리되면 내가 가서 받아올게요.”

“하!”

주강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번복할까 봐 걱정된다는 거야?”

이에 고현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이런 일은 확실한 보증이 없으면 안 된다. 나중에 딴소리라도 하면 그녀는 따져 물을 곳마저 없을 테니까.

주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현아에게 성큼 다가갔다.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옭아매듯 고정했고 눈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

“내가 너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 그런 거야?”

남자가 한 마디 덧붙였다.

“걱정 마. 일 끝나는 대로 바로 서명할 테니까.”

고현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또렷하게 대꾸했다.

“주 대표님께서 부디 말씀대로 해주시길 바랄게요.”

주강인은 그녀를 뚫어지게 노려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몸을 돌렸다.

쾅 하고 문이 떨어져 나갈 듯 거세게 닫혔다.

현관문을 바라보던 고현아의 얼굴에 역력한 짜증이 스쳤다.

대체 무슨 심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삶이 얼마나 불만족스러웠으면 굳이 20킬로나 떨어진 이곳으로 달려와 화풀이를 하는 건지.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녀의 분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마시지 않은 물잔을 바라보며 고현아의 입꼬리가 작게 움직였다.

사실 주강인의 요구를 받아들인 데에는 이혼합의서에 서명을 받아내겠다는 목적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주호섭의 환갑잔치에 주경섭 일가까지 귀국한다면 이번 행사는 규모가 상당할 터였다. 두천의 내로라하는 사모님들은 거의 모두 참석할 가능성이 컸다.

관례대로라면 주강인은 분명 그녀를 데리고 술자리를 돌며 인사시키고 이내 ‘사모님들 틈’에 던져 놓을 게 뻔했다.

고현아의 입가에 교활할 정도로 예리한 미소가 번졌다.

가뜩이나 자신의 브랜드를 알릴 홍보의 장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참인데 이토록 완벽한 기회가 제 발로 굴러들어오다니!

때마침 딱 맞는 장소, 더할 나위 없이 합리적인 명분, 그리고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정당성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

차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희미한 실내등이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주강인은 핸들에 두 손을 얹은 채 철제 대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집 현관을 응시했다. 시선은 한참이 지나도록 그곳에 박제된 듯 움직일 줄 몰랐다.

1층의 불빛이 꺼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

마침내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서류 두 부를 꺼냈다.

[이혼합의서.]

글자가 유독 눈을 찌르는 듯했다.

주강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며 살다 살다 ‘버림받는’ 날이 올 줄이야.

원래는 만나서 차분하게 대화해 볼 생각이었다. 문밖에서 꼬박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퇴근하는 고현아를 볼 수 있었는데 결과는?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 보지도 못한 채 그녀에게 온종일 공격만 당하다 보니 제 명에 못 살 것 같았다. 마치 화약이라도 집어삼킨 사람처럼 날이 서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합의서를 펼쳤다. 분명 이 기회를 틈타 자신에게서 큰돈이라도 뜯어내려 할 줄 알았는데 계약서의 조항들은 하나같이 지나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고현아의 말대로 딱 자기 몫만 챙기겠다는 그 단호함이란...

서류 마지막 장에는 그녀가 직접 서명한 단정한 필체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먹물은 이미 다 말라버린 지 오래였다. 주강인은 손끝으로 그 글자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사인하던 그 순간, 고현아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 합의서가 회사로 도착했을 때 바로 확인하고, 그날 당장 집에 가서 그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눴더라면 어쩌면 지금처럼 최악의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로 인한 감정 파탄이라고 적혀 있었다.

[감정 파탄]

주강인은 그 네 글자를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참나!’

파탄이 났다면 그녀 쪽에서 먼저 파탄 낸 거겠지. 다른 남자와 그렇게 다정하게 지내는 걸 보니 진작 바람이라도 피웠던 게 아닐까?

까놓고 말해서 이 합의서에는 조항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했다.

[혼인 관계 파탄의 귀책 사유가 전적으로 아내에게 있으므로 남편이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배상할 것.]

그녀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먼저 이혼을 요구한단 말인가. 정당한 피해자인 자신이 먼저 이혼을 통보했어야 마땅했다.

이혼합의서에 서명하게 강요한 것도 모자라 변호사까지 동원하다니.

자신의 신뢰도가 그렇게 바닥이라는 건가?

주강인은 이혼합의서를 쾅 덮어버리고 조수석 앞의 글로브 박스에 집어넣었다.

시동을 걸고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백미러 속으로 고현아의 집이 점점 작아져 갔다.

하지만 아까 그녀의 짜증 섞인 태도가 또다시 뇌리를 맴돌았다. 시종일관 쌀쌀맞기만 하던 그녀였다.

그래도 내심 자신을 찾아와 사업적 지원을 요구할 줄 알았다. 본가 모임에 참석하는 대가로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작은 브랜드의 홍보를 부탁할 줄 알았는데 정작 이 여자가 꺼낸 카드라곤 이혼합의서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정말 지독한 여자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토록 매정하게 끊어내다니.

가로등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거두기를 반복했다. 주강인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고 팽팽해진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일렁였다.

‘이혼이 뭐 대수라고! 내가 그런 거로 무너질 것 같아?’

녹색 신호등이 켜지자마자 그는 액셀을 꾹 밟았다. 차체는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어둠 속으로 거칠게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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