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아는 새로운 작업실 위치를 남교 세강 지구로 정했다. 고소득층이 밀집한 곳이라 교통은 편리하면서도 소란스럽지 않은 곳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디자인 시안에만 몰두했다.
고하준과 원단 공급망을 확보한 뒤, 제품 라인도 두 갈래로 명확히 정리했다. 하나는 브랜드의 격을 결정짓고 철저히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1:1 프라이빗 맞춤 라인이다.
다른 하나는 정통 궁중 드레스 패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하이엔드 기성복 라인으로 단골과 상류층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극소량만 제작한다.
물건은 귀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법. 상류층 사모님들에게 자신의 의상이 어디서나 눈에 띄는 ‘흔한 것’이 되는 것만큼 피하고 싶은 일도 없다. 프라이빗 커스텀은 그런 이들의 니즈를 정확히 꿰뚫는 전략이었다.
최고급 원단에 이름난 장인의 수작업 자수, 그리고 고객만을 위한 이니셜 각인까지,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유일무이한 가치는 이 계층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존 조건과도 같았다.
아버지가 운영할 당시의 [유진]도 하이엔드를 지향했지만, 결정적으로 희소성이라는 한 방이 부족했다.
고현아의 시선은 이미 두천 상류층 사회의 정점에 선 사모님들을 향해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현아 언니, 샘플 드레스 완성됐어요.”
그 말에 고현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얼른 봐봐.”
그것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작이자 반년 동안 수차례 수정을 거듭해 완성한 디자인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아이디어까지 더해져 완성도를 높인 것이기도 했다.
일주일 전 제작을 맡겼는데 생각보다 빨리 완성되어 돌아왔다.
고현아는 책상을 돌아 나와 조심스럽게 상자에서 달빛을 머금은 듯한 실크 드레스를 꺼냈다. 그러고는 아주 귀한 물건이라도 다루듯 정성껏 소파 위에 펼쳐 놓았다.
깃머리의 매화 자수가 사선으로 흘러내려 허리라인까지 이어졌다. 하얀 매화는 청아했고 앙상한 가지에는 섬세한 구슬 조각이 박혀 꽃술처럼 빛났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산새들이 나뭇가지 위에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실크 위로 고혹적이면서도 고결한 기품이 흘렀다. 햇살을 받자 마치 영롱한 빛을 머금은 듯 드레스 전체에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정말이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고현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실물이 훨씬 더 예쁘네. 기대 그 이상이야.”
옆에 있던 어시 현지우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럭셔리란 이런 거죠. 우리 조상님들께서 물려주신 이런 유산에서 나오는 고급스러움이 최고인 것 같아요.”
고현아는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접어 상자에 넣었다.
이제 완벽한 옷은 준비되었다. 남은 건 이 드레스를 세상에 알릴 가장 적절한 때와 장소를 찾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때, 카톡 알림음이 짧게 울렸는데 고하준이 보낸 문자였다.
[이거 한번 봐 봐.]
고현아가 전송된 링크를 클릭하자 대회 공고 페이지가 떴다.
[로이드, 동양 미학 디자인 공모전]
박물관과 디자인 진흥원, 그리고 두천 패션협회에서 공동 주최하는 공신력 있는 대회였다.
잇따라 고하준이 또 하나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심사위원단 확인해 봐.]
고현아는 스크롤을 내리다 한 이름에서 멈췄다.
‘조준기?’
그녀는 예전부터 아버지께 그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다. 두천대 디자인학과 교수인 조준기. 그는 일찍이 국립박물관의 초청을 받아 궁중 의상의 복원 및 연구 작업에 참여했던 권위자였다.
아버지는 과거 부영시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조준기를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그를 가리켜 평생 본받고 싶은 거장이라 칭하며 깊은 존경심을 내비치곤 하셨다.
고현아는 휴대폰 화면 위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브랜드를 다시 일으키려는 지금 그녀에게는 시장을 압도할 강력한 ‘입지’가 필요했다.
단순히 뛰어난 디자인과 장인정신만으로는 부족했다. 명예라는 이름의 확실한 보증 수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대회는 그녀가 간절히 원하던 최고의 기회였다.
고현아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야 낮게 깔린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현아야.”
그녀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더러 이 대회에 나가라는 거죠?”
“응. 이번 대회가 비물질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동양 미학을 선양한다는 취지지만 사실 다른 뜻이 하나 더 있어.”
“그게 뭔데요?”
고하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준기 교수님께서 이 대회를 통해 자신의 마지막 수제자를 뽑으실 예정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휴대폰을 쥔 고현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이에요?”
조준기 교수님은 전통 디자인 분야에서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을 동양 미학의 연구와 실천에 헌신해왔으니 만약 그의 마지막 제자가 될 수 있다면 어떠한 가르침보다 값진 진수를 얻게 될 터였다.
이는 단순히 고현아 개인의 디자인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 그녀의 브랜드를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화기 너머 고하준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덧붙였다.
“실은 나도 조 교수님과는 몇 번 안면이 있는데... 한번 부탁해볼까?”
“아니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고현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도움은 필요 없어요. 이번엔 제힘으로 해보고 싶어요.”
고하준은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줄 알았어.”
조준기 같은 거장에게 어설픈 인맥을 동원해 접근하는 건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브랜드 [유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고현아라는 사람 자체가 눈에 띄어야 했다.
고현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참가 신청 페이지를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정보를 하나하나 입력하는 그녀.
[제출] 버튼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 고현아는 잠시 호흡을 멈추고 2초간 머물렀다. 그리고 이내 단호하게 클릭했다.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을 뿐이었다.
...
원더힐에 도착하니 밤 아홉 시가 넘었다.
고현아는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주차를 마쳤다.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향하던 그때, 익숙한 실루엣이 차체에 기댄 채 붉은 불씨를 태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옅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로 그의 눈매가 한층 깊어 보였다. 평소보다 더 나른하고 서늘해진 분위기였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담배를 비벼 끄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이렇게 늦게까지 뭘 한 거야?”
방금 담배를 피운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유독 낮게 잠겨 있었다.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이 그가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음을 짐작게 했다.
고현아는 대답 대신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이에 주강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오면 안 돼?”
그 특유의 당연하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가 고현아의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불씨를 단숨에 끄집어냈다.
그녀가 차가운 시선으로 쏘아붙였다.
“사인했어요?”
주강인의 미간이 거칠게 일그러지고 이내 불만 섞인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나랑 할 말이 고작 그거야?”
“그럼 뭐가 더 있겠어요?”
고현아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이 시간에 성은지 아버지나 챙기지 왜 여기까지 와서 성가시게 구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녀는 더는 주강인을 거들떠보지 않고 열쇠를 쥔 채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주강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어섰다. 뜰에 가득한 꽃들을 둘러보며 ‘보기 좋네’라고 한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
고현아가 열쇠를 빼내며 너무나 태연하게 정원을 거니는 남자를 쏘아보았다.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곧장 터져 나왔다.
“용건이 뭔데요?”
주강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 남남이 될 남편이 아내의 거처를 둘러보는 게 그렇게 이상해?”
과연 그저 둘러볼 뿐일까? 자신을 떠나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갈지 구경하러 온 거겠지!
아쉽게도 그의 뜻대로 되진 않겠지만 말이다.
“마음대로 하세요.”
고현아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집 주소를 알아냈는지 묻는 것조차 귀찮았다. 주강인이라면 손만 까딱해도 알아낼 정보였으니까.
그녀는 이 남자를 지나쳐 제 갈 길을 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뒤, 불을 켜고 열쇠를 신발장 위 수납함에 대충 넣어두었다.
“여분 슬리퍼는 없어요. 어차피 내일 청소 아줌마가 오시니까 그냥 발 닿는 대로 대충 있어요.”
주강인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그녀가 거실로 들어서자 아무도 모르게 신발장을 흘긋 살폈다.
한결같은 여자 신발들뿐, 영락없는 그녀의 취향이었다.
“차 줄까요, 커피 줄까요?”
“물 한 잔만 줘.”
아메리칸 스타일의 깔끔한 거실,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정원 가득 만개한 덩굴장미가 한눈에 들어왔다.
주강인은 별다른 내색 없이 현관부터 거실, 계단까지 집 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다른 남자의 흔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느릿하게 소파에 앉았다. 짙은 눈동자를 굴리며 그가 넌지시 운을 뗐다.
“이 집은... 네가 산 거야?”
고현아가 물컵을 그의 앞에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혼합의서에 사인도 안 했고 재산 분할도 안 됐는데 내가 무슨 돈으로 집을 사요?”
그녀의 까칠한 반응에도 주강인은 화를 내긴커녕 물컵을 들고 비스듬히 곁눈질했다.
“그럼 누가 해줬는데? 고하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