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아침, 고현아는 주강인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변호사가 공증을 마친 서류와 그의 서명, 그리고 지장이 찍힌 이혼합의서 사진 두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제 만족해?]
주강인의 문자를 보며 그녀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힘차게 휘갈겨 쓴 필체, 영락없는 그 남자의 글씨였다.
물론 변호사 공증을 받았지만 주강인이 마음만 먹으면 이 합의서를 뒤집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가 과연 그를 당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주강인이라면 굳이 자신 같은 사람을 붙잡고 시간을 허비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에 이 남자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 여자가 오직 그녀뿐인 것은 아니었으니.
성은지마저 돌아온 마당에 협력 관계였던 고현아는 이제 옆으로 물러날 차례였다.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네요.]
고현아가 답장을 보냈다.
[내일 점심에 기사 보낼게.]
[알았어요.]
화면 너머로 그녀의 쿨한 답장을 바라보며 주강인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
주씨 저택은 두천 남교 여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과 물을 끼고 앉은 이곳은 경치가 빼어난 데다 대지만 1만 2천 평에 달하는 정통 소한주식 정원이었다.
주호섭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골프를 즐겨 뒷산에는 개인 구장까지 마련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개를 산책시키는 용도로만 쓰였다.
주강인은 원래 고현아와 함께 가고 싶었으나 삼촌 주경섭 측에서 급히 상의할 일이 있다며 그를 먼저 불러들인 참이었다.
차가 도착하자 가정부들이 다급히 달려와 문을 열었다. 고현아는 하이힐을 신고 발을 내디뎠다.
깃을 높게 세운 자수 드레스가 그녀의 날씬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허리를 휘감은 꽃줄기와 가지 끝에 앉은 산새 문양, 그리고 달빛을 머금은 실크 원단이 햇살 아래서 영롱하게 빛을 뿜어냈다.
단정하게 올려 묶은 머리는 자스민 꽃 모양의 비녀로 고정했고 귓가에는 심플한 진주 귀걸이를 매치했다.
본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청초한 미인이었던 터라 옅은 화장만으로도 충분했다. 길쭉하고 늘씬한 자태에 단아한 분위기까지 더해지니 마치 제국 시대의 문학 작품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대갓집 아가씨 같았다.
주변에 서 있던 가정부들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처럼 주강인의 뒤만 쫄쫄 따라다니며 눈치나 보던 ‘사모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가정부들의 경이로운 시선을 느끼며 고현아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바로 이거였다.
확실한 이미지 반전, 사람들의 시선을 온전히 자신에게 묶어두는 것. 그것이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명함 한 장을 건네기만 하면 될 터였다.
저택 앞마당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카드 게임을 즐기거나 바둑을 두는 사람들, 처마 밑에서 새를 돌보는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고현아의 등장은 단연 그들의 이목을 끌었다. 카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모님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던 참에 주강인의 그 ‘변변치 않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고현아는 그들의 웅성거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파 속을 유유히 거닐던 그녀의 시선이 마침내 안쪽 방에 있던 한 사람에게 멈췄다.
그녀는 곧장 그 사람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
주강인이 고개를 돌렸다. 역광을 받으며 문 안으로 들어선 그녀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남자의 눈동자에 찰나의 경이로움이 스쳤다.
그녀가 곁으로 다가와 능숙하게 팔짱을 꼈을 때까지도 멍하니 굳어 있었다.
한층 가까워진 고현아한테서 은은한 자스민 향이 풍겨 왔다. 복도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코끝을 파고드는 향기에 주강인은 아득해졌다.
이런 모습의 고현아는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본래 이목구비가 빼어난 여자였지만 좀처럼 자신을 꾸미는 법이 없었다. 늘 편안하고 수수한 차림을 선호했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지낼 때가 더 많았으니까.
고현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겉보기엔 세상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팔을 움켜쥔 손가락은 서늘할 만큼 꽉 조여들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너무 예뻐서 넋 놓았어요, 여보?”
‘여보’라는 단어를 유독 강하게 발음하는 여자, 살짝 올라간 목소리가 주강인의 귓가를 간질였다.
남자의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미묘하게 떨렸다.
이토록 듣기 좋은 호칭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꽉 쥐고 있는 고현아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쥐고 바짝 다가왔다.
“뭐, 나쁘진 않네.”
고현아는 피식 코웃음을 치고 그를 쏘아보았다.
“얼른 아버님께 인사드리러 가요.”
뒷마당 시원한 바람이 부는 정자 아래, 주호섭은 한창 사람들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단정하면서도 품격이 엿보이는 옷차림에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풍겼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치료를 받고 회복했지만, 여전히 다리에 후유증이 남아 휠체어를 사용하곤 하셨다.
주호섭은 손끝으로 바둑알을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느릿하게 수를 두었다. 단 한 수에 승부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상대가 몸을 숙여 바둑판을 살피다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바둑알을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역시 몇 년이 지나도 이길 수가 없군요.”
주변 사람들도 주호섭의 높은 바둑 실력을 칭찬하기 바빴다.
“아버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정자 안의 웃음소리를 끊었다. 주호섭이 고개를 돌리자 계단 아래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이에 고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님.”
주강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옆에 있던 손님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제 아내 고현아입니다.”
그녀 또한 당차고 예의 바르게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곤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주호섭에게 건넸다.
“생신 축하드려요, 아버님.”
상자를 열자 깃을 높게 세운 검은색 정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사슴과 학이 봄을 맞이하는 것만 같은 문양이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고 금색 실로 엮은 단추가 단정하게 정렬되었다. 소매 끝에 새겨진 금빛 구름 문양은 기품을 더해 그야말로 근엄하면서도 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주호섭은 옷을 꺼내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경 많이 썼구나. 네가 직접 만든 거니?”
고현아가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부족하지만 아버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주호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만드느라 고생 많았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강인의 시선이 고현아에게 고정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가 한 땀 한 땀 직접 만들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둘 사이의 불꽃 튀는 관계를 생각하면 이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팔리지 않은 옷 중 하나를 골라 얼렁뚱땅 때운 거겠지.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주경섭이 입을 열었다. 뼈가 있는 비아냥이었다.
“우리 조카며느리 참 대단하네. 누가 보면 영락없는 명문가 딸인 줄 알겠어.”
역시 예상대로였다. 주경섭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고현아의 미천한 집안 배경을 들먹이며 주호섭을 깎아내리려는 수작이었다. 주씨 가문에서 이런 볼품없는 며느리를 들였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 망신을 주려는 의도였다.
결국 다 주강인이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순조롭게 지분을 확보하고 자신을 경영권에서 내쫓았다는 분풀이였다.
하지만 이런 류의 비난은 그동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터라 고현아에게 타격감 제로였다.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오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차분하게 받아쳤다.
“삼촌,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출신이야 타고나는 것이지만 정성은 스스로 만드는 거죠. 아버님께 효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주씨 가문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 또한 고작 그런 허례허식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주경섭이 코웃음을 쳤다.
“뭐? 허례허식? 사업 판도에서 남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게 진짜 능력이지 집안일이나 하는 건 보잘것없어. 가정부도 아니고 말이야.”
대놓고 사람을 모욕하는 그 치졸한 처사를 보니 왜 주씨 가문의 주도권이 주경섭이 아닌 주호섭에게 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주경섭 저 인간은 지적 수준이 딱 그 정도였으니까.
고현아는 담담하게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뱉어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뼈가 있었다.
“삼촌 말씀이 맞아요. 큰 도움이 되는 게 진짜 능력이죠. 그런데...”
그녀가 주강인을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강인 씨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혼자서도 충분히 주성 그룹을 짊어질 만큼 강한 사람인데. 아버님께서 후계자로 선택하신 분이 설마 그 정도도 못 할까 봐요?”
곁에 있던 주호섭은 느긋하게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현아 말이 맞아. 우리 집안은 허울뿐인 배경 따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강인의 능력은 세상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고.”
고현아는 주경섭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논하자면 저는 오히려 사업장에서 화려하게 이름을 날리는 것보다 집안 어르신들께 효를 다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삼촌 생각은 어떠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저절로 과거 주강인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들인 주경섭이 얼굴도 내밀지 않았던 때를 떠올렸다.
예전 같았으면 고현아에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혹여라도 누군가의 비위를 거슬러 주강인의 귀에 안 좋은 소리가 들어갈까 봐 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이혼을 종용할 기세로 줄 서서 기다릴 판이었다.
주경섭의 얼굴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기억 속의 그녀는 분명 순한 양 같은 존재였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어쩌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강인아, 손아랫사람이 어른께 대놓고 토를 다는 게 무슨 경우냐 대체?”
그 말인즉슨 네 마누라가 예의범절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주강인은 고현아가 말을 시작한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눈빛 속의 감탄은 숨길 수가 없었다. 당연히 주경섭의 말은 귓가에 닿지도 않는 듯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설령 주강인이 그녀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기든 삼촌의 말에 곧이곧대로 따라 그녀를 탓할 리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현아 말이 일리 있는데요? 삼촌이 좀 예민하신 것 같네요.”
“뭐?”
주경섭은 분노로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