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5년간 편의점 야간 알바와 식당 설거지를 뛰며 7급 공시생 남친 민우를 뒷바라지한 지은. 어느 날, ‘35억 당첨 가짜 로또’를 본 민우는 100만 원만 던져 주고 새 여자와 달아난다. 복권이 3천 원짜리 장난감인 줄도 모르고 빚까지 끌어다 벼락부자 행세를 시작한 남자. 지은은 진실을 알려 주는 대신, 월요일 오전 아홉 시 은행 로비에서 그가 만든 결말을 지켜보기로 한다.
Ver mais금요일 저녁 6시, 강지은은 출근 가방을 메고도 냉장고 앞을 떠나지 못했다.
“찌개 데워 먹고. 밥 없으면 햇반 돌려. 새벽에 모의고사 본다며.”
책상에 엎드린 박민우는 대꾸도 없이 손만 휘저었다. 두 평 남짓한 원룸에는 문제집과 배달 용기, 벗어 던진 양말이 뒤섞여 있었다. 지은은 그중 양말만 집어 세탁기에 넣었다.
흔들리는 책상 다리 밑에는 지은의 세무사 1차 회계학 교재가 받침처럼 끼워져 있었다. 3년 전, 민우 학원비와 자기 시험 준비를 함께 감당할 수 없어 덮어 둔 책이었다. 지은은 먼지가 묻은 책 모서리를 한 번 쳐다보고도 꺼내지 못했다.
오늘은 편의점 야간 근무가 끝난 뒤 해장국집 설거지까지 가는 날이었다. 새벽 5시에 퇴근해서 6시 30분까지 식당으로 가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사흘 전 민우의 7급 종합반 수강료 180만 원을 결제했다.
“나 갔다 올게.”
“지은아.”
모처럼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 달 모의고사 특강비 30만 원 더 든대.”
“알았어. 점장님한테 하루 더 넣어 달라고 해 볼게.”
지은은 월요일까지 쓰라며 5만 원권 한 장도 놓았다. 냉장고에 도시락이 네 개나 있는데도 민우는 “사흘을 어떻게 버티냐”며 돈부터 집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그는 딱 1년만 도와 달라고 했다. 붙으면 월세며 학원비며 전부 갚겠다고 했다.
그 약속이 벌써 다섯 번째 겨울을 앞두고 있었다.
현관문이 닫히자 민우는 한숨부터 쉬었다.
“또 돈 얘기했다고 생색내겠네.”
냉장고를 열어 본 그는 지은이 만들어 둔 멸치볶음과 계란말이를 보고 문을 닫았다. 5만 원권으로 치킨과 맥주부터 주문했다. 지은이 오늘도 폐기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건 잠깐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발끝에 걸린 흰 봉투를 걷어찼다. 조금 전 다녀간 한수진이 두고 간 것이었다. 봉투 겉면에는 굵은 펜으로 ‘지은이 것. 손대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
손대지 말라니 더 궁금했다.
봉투 안에는 로또 용지 한 장이 들었다. 숫자 6개 옆에 금색 왕관이 찍혀 있었고, 아래에는 ‘1등 당첨 확인용 QR’이 붙어 있었다.
민우는 지난주 당첨 번호를 검색했다. 여섯 개가 전부 맞았다.
“미친.”
손가락이 떨려 QR을 두 번이나 헛찍었다. 세 번째에 연결된 화면에는 은행 로고와 함께 커다란 숫자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제1184회 1등 당첨]
[당첨금 3,521,480,000원] [1등 당첨금은 평일 오전 9시 이후 농현은행 본점에서 수령 가능합니다.]실제 당첨 번호와 금액이 일치했다. 아래로 한 번만 내려 봤어도 ‘실제 복권과 무관한 체험 페이지’라는 문장이 보였지만, 민우는 당첨금만 캡처하고 화면을 닫았다.
민우는 방문을 잠그고 용지를 형광등에 비춰 봤다. 은색 무늬와 홀로그램이 번쩍이자 더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책상 위에 놓인 공무원 기출문제가 갑자기 우스워졌다.
7급에 붙어 봤자 평생 벌어도 35억은 못 만진다. 무엇보다 복권은 지은의 이름이 적힌 봉투에서 나왔다. 주인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지은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5년이 억울해졌다. 좁은 방, 싼 반찬, 돈 벌어 온 유세. 자기가 합격하면 평생 지은 같은 여자와 살아야 한다는 사실까지.
민우는 서랍에 넣어 둔 지은의 통장 사본을 찾다가 생활비 공책을 발견했다. 월세, 강의료, 교재비가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 마지막 줄에는 ‘민우가 붙으면 천천히 돌려받기’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 갚는대.”
그는 붉은 펜으로 욕설을 끼적이고 공책을 몇 번 찢었다. 지금껏 빌붙어 산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까지 종이와 함께 없애고 싶었다.
민우는 복권을 지갑 깊숙이 넣었다. 짐 싸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캐리어에 옷과 노트북, 새 운동화를 쓸어 담았다. 지은이 채워 둔 자기 명의 생활비 통장에는 1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한 뒤 그 돈을 지은에게 송금했다.
받은 것 없이 떠났다는 모양새는 만들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낡은 커플링을 빼 바닥에 던지고 카카오톡을 열었다.
[그동안 고마웠고 솔직히 지긋지긋했다.]
[5년 동안 징징거린 값으로 100만 원 보냈다. 이걸로 끝내자.] [계좌 정리하고 방도 네가 빼. 내 수준에는 너 같은 흙수저 안 맞아.]전송하자마자 전화와 메신저를 전부 차단했다.
민우는 캐리어를 끌고 원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초라한 패딩 차림이 오늘따라 견딜 수 없이 촌스러워 보였다.
“월요일이면 다 바뀌어.”
그는 지갑을 두드리며 웃었다.
문구점에서 3천 원에 팔린 종이 한 장이, 그의 주머니 안에서 35억이 되어 있었다.
그날로부터 1년 8개월 뒤.세무사 최종 합격자 발표일, 지은은 수진과 나란히 노트북 앞에 앉았다. 수험번호를 입력하고도 결과 확인 버튼을 누르지 못해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수진이 답답하다는 듯 지은의 손등을 눌렀다.“가짜 당첨 화면은 잘만 보더니 진짜 합격 화면은 왜 못 봐?”“그때는 내 일이 아니었잖아.”“이번엔 네 일이니까 눌러.”지은이 버튼을 눌렀다.[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둘은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소리를 지른 건 수진이었다. 지은은 웃다가 울었고, 수진은 그런 지은을 끌어안은 채 등을 마구 두드렸다.“봤지? 박민우한테 쏟던 돈이랑 시간 반만 너한테 써도 이 정도야.”“반은 무슨. 너 없었으면 중간에 세 번은 때려치웠어.”“그럼 첫 월급으로 소고기.”“첫 월급 나오기 전에도 사 줄게.”지은은 모니터에 뜬 자기 이름을 오래 바라봤다. 민우 책상 한쪽을 차지하던 두꺼운 수험서는 5년 동안 늘 새것 같았다. 반면 지은의 회계학과 세법 책은 모서리가 닳고 페이지마다 색색의 표시가 붙어 있었다. 누구의 공부가 진짜였는지는 합격자 명단이 말해 주고 있었다.지은은 곧 세무법인 수습 자리를 구했다. 야간 편의점과 식당 설거지를 오가며 남의 월세 날짜부터 챙기던 삶은 끝났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던 버릇은 남았지만, 이제 그 시간은 지은의 경력과 통장에 쌓였다.수습 첫 주, 지은은 폐업을 앞둔 작은 식당의 세금 신고 자료를 정리했다. 식당 주인은 밀린 고지서를 무서워 봉투도 못 열었다며 연신 손을 비볐다. 지은은 납부 기한 연장과 분납 절차부터 하나씩 설명했다.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는 주방 안쪽 사정만 알았지만, 이제는 가게가 다시 일어설 방법까지 함께 찾을 수 있었다.민우에게서는 잠정조치 이후 연락이 오지 않았다.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다시 접근할 경우 처벌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고, 지은은 번호와 직장을 모두 바꿨다. 민우의 계좌와 확인된 일당 채권에는 집행을 이어 갔다. 실제로 들어오는 돈은 들쭉
민우는 엘리베이터 도착음을 듣자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도망칠지, 끝까지 문 앞에 버틸지 계산하는 얼굴이었다.지은은 인터폰으로 말했다.“지급명령 확정됐어. 네가 직접 등기 받고도 이의신청 안 했잖아.”“그건 같이 살면서 쓴 생활비야. 내가 왜 갚아?”“월세, 학원비, 교재비 빌려 달라고 네가 보낸 메시지 다 남아 있어. 차용금이라고 인정한 자필 확인서도 있고.”지은은 함께 먹은 밥값이나 데이트 비용까지 억지로 청구하지 않았다. 송금 메모와 문자, 민우의 자필 확인으로 대여 사실이 분명한 돈만 추렸다. 그렇게 남은 금액이 8천만 원이었다.민우가 다시 문으로 달려들었다.“그걸 진짜 법원에 냈어? 너 미쳤어?”“지급명령은 판결이랑 똑같이 집행할 수 있어. 네 계좌 압류·추심명령도 나갔고, 확인되는 급여나 다른 재산에도 집행할 거야.”“너 때문에 내 인생 망했다고!”민우가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에 복도 센서등이 켜졌다.지은은 문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잠금장치를 다시 확인했다. 목소리는 오히려 또렷해졌다.“내가 네 이름으로 돈 빌렸어? 차를 샀어? 호텔을 갔어? 네가 한 일이야.”“네가 가짜 로또를 놨잖아!”“내 이름이 적힌 봉투에서 네가 훔쳐 달아났지. 당첨 여부도 확인 안 하고 돈부터 당겼고.”민우는 대답하지 못했다.“그리고 착각했다고 해서, 네가 나한테 한 말까지 가짜가 되진 않아.”“취소해. 당장 취소하면 나도 다시는 안 찾아올게.”“이미 확정됐어. 취소할 단계도 지났고.”“그럼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아니. 일해서 갚으라는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문밖의 민우가 이를 갈았다.복도 끝에서 경찰 두 명이 걸어왔다. 한 명은 민우를 문에서 떼어 놓았고, 다른 한 명은 안에 있는 지은에게 신분을 밝힌 뒤 문을 계속 잠가 두라고 했다.“신고자분, 이 사람이 연락하거나 찾아온 게 오늘 처음입니까?”“아니요. 번호 바꿔 가며 연락했고 회사 앞에도 두 번 왔습니다. 오지 말라고 명확히 보낸 문자랑 전부 캡처해 뒀어요.
은행에서 가짜 복권이 들통난 지 4개월이 지났다.지은은 수진과 함께 보증금이 작은 투룸으로 이사했다. 야간 편의점은 그만뒀고, 낮에는 세무 사무실에서 일했다. 퇴근 뒤에는 책상에 앉아 오래전에 포기했던 세무사 시험을 준비했다.이사할 때 낡은 상자 하나가 나왔다. 3년 전 덮어 둔 회계학 기본서와 세법 문제집이었다. 민우의 학원비가 모자란다는 말을 들은 날, 지은은 자기 인터넷 강의를 환불했다. 책에는 당시 끼워 둔 수강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수진은 버리라고 했지만 지은은 먼지만 닦아 새 책상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았다. 지나간 시간을 되찾을 수는 없어도, 그때 포기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는 있었다.민우에게 쓰던 돈이 사라지자 월세 절반과 학원비를 내고도 통장에 돈이 남았다. 그 단순한 사실이 처음엔 허탈했다. 자신은 가난해서 꿈을 미룬 게 아니었다. 남의 꿈을 제 것보다 먼저 계산하느라 가난했던 것이다.문제는 민우가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처음에는 이메일이었다.[오해를 풀고 싶다.]답하지 않자 발신 번호가 다른 문자들이 왔다.[딱 한 번만 만나자.][수진이가 우리 사이 망친 거야.][네가 복권만 안 갖다 놨어도 이렇게 안 됐어.][그래도 5년인데 너무하잖아.]사과는 문장 앞에 잠깐 나타났다가 곧 원망으로 바뀌었다. 지은은 답장하지 않고 날짜별로 캡처했다. 민우는 회사 앞으로도 두 번 찾아왔다.첫 번째에는 편의점 커피를 들고 웃으며 다가왔다. 두 번째에는 지은이 피하자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오며 팔을 잡으려 했다. 회사 동료가 나오자 손을 놓고 물러났다. 지은은 혼자 참지 않고 회사 CCTV 보존을 요청했고, 경찰 상담도 받아 뒀다.[다시는 찾아오지 마. 연락도 하지 마. 한 번 더 오면 신고할게.]민우는 사흘 동안 잠잠했다.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금요일 밤, 현관 카메라 알림이 울렸다. 화면 속 남자는 젖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살이 빠져 광대가 튀어나왔고,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민우였다.
은행에서 나온 민우는 채권자들 앞에서 상환 계획서를 썼다. 그들은 기한이 지나면 절차대로 추심하겠다고 통보했다.그 말이 주먹보다 무서운 줄은 사흘 뒤에 알았다.카드사, 저축은행, 보험사, 대부업체에서 전화가 번갈아 왔다. 지인들의 독촉 문자도 쌓였다. 민우는 찜질방 구석에 앉아 계산기를 두드렸다.기존 마이너스 통장에서 꺼낸 2천만 원.카드론과 현금서비스 1,500만 원.주말 카드 결제 1,500만 원.보험계약대출 1,500만 원.등록 대부업체 2천만 원.친척과 스터디원들에게 전자차용증을 써 주고 빌린 3,500만 원.서린에게 빌리거나 대신 결제시킨 2천만 원.합계 1억 4천만 원.이자는 아직 넣지도 않은 금액이었다.금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사흘 동안 실제로 끌어다 쓴 원금이었다. 지은이 돌려받겠다고 나선 8천만 원은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다.“말이 안 되잖아.”몇 번을 더해도 숫자는 줄지 않았다.서린이 가져간 가방과 구두는 환불할 수 없었고, 민우가 찬 시계도 이미 사용한 제품이었다. 호텔비도 고스란히 남았다. 자동차 계약금 3천만 원은 빌린 현금에서 지출한 돈이었다. 돌려받지 못해도 같은 손실을 채무에 다시 더할 수는 없었다.서린에게 전화하자 곧장 끊겼다.[내 카드로 선결제한 거랑 네가 빌려 간 돈 2천만 원부터 보내. 나도 너 때문에 카드 막히게 생겼어. 다시 연락하면 신고할 거야.]그 한 줄 뒤로 차단됐다.민우는 경찰서에도 찾아갔다. 지은과 수진이 가짜 복권으로 자신을 속였으니 사기죄로 처벌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담당 경찰은 민우가 내민 장난감 복권 사진과 메시지를 한참 확인했다.“강지은 씨가 이걸 진짜 당첨 복권이라고 건넸습니까?”“같이 살던 방에 있었습니다.”“돈을 빌리라고 했거나 당첨금을 나눠 달라고 한 적은요?”“그건 아니지만, 사람이 보면 오해하게 생겼잖아요.”“뒷면에 장난감이라고 적혀 있고, 본인이 확인 없이 대출받아 쓴 겁니다. 현재 말씀만으로 상대방이 재산상 이익을 취한 사기라고 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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