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던 조씨는 씩씩거리며 송진초를 노려보았다.
주변 공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송연이는 갑자기 송진초 앞에 무릎을 꿇더니 울먹였다.
“진초야, 네가 어머니를 오해하셨다. 사실 어머니에겐 말 못 할 사정이 있단다.”
“연이야!”
조씨 부인은 송연이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송연이가 고개를 쳐들고 또박또박 말했다.
“대감께서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께서 큰 병을 앓으셨는데 의원 말로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지난 삼 년간 내가 너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니 나를 벌하거라.”
송진초가 눈살을 찌푸렸다.
“진초야, 어머니께서 나를 친딸로 여기고 대하신 것은 맞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친딸이다. 네가 친딸이란다.”
송연이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약조했던 삼 년이 되어 어머니께서 너를 데리고 한성으로 돌아가려고 오셨다. 다만 방금 또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너를 몰라본 것이다. 어머니를 자극할 수 없어 아무 설명도 못 한 것이다.”
송연이의 말에는 빈틈이 없었다.
조씨 부인이 친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연유가 생긴 것도 모자라 송연이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연유도 생겼다.
두 사람에게 쏟아진 분노와 고함 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나를 친딸로 오해하신 것도 내가 너를 십 년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던 탓에 그리된 것이다.”
억울한 듯 눈물을 흘리는 송연이다.
조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람을 몰라봤구나. 어쩐지… 진초 너한테서 익숙한 느낌이 나더라.”
“진초야!”
조씨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걸음을 떼자마자 휘청거리며 쓰러지려 했다. 다행히 뒤에 있던 계집종이 조씨 부인을 부축한 덕에 넘어지지 않았다.
송연이는 다급한 듯 입을 열었다.
“진초야, 어머니의 병이 또 도진 것 같구나. 얼른 모시고 가서 치료하거라.”
육 대감은 난감한 얼굴로 송진초를 바라보았다.
“아씨, 혹 오해가 쌓이셨던 것은 아닐는지요?”
어찌 됐든 조씨 부인은 송진초의 생모이고 너무 상심한 나머지 사람까지 몰라볼 정도이니 쉬이 잡아들일 수 없었다.
송진초는 계집종의 품에 쓰러져있는 조씨 부인을 실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던 송진초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정말 편찮으셨던 거구나. 나는 또 계집종을 위해 자신의 친딸을 모함하는 줄 알았다.”
“아씨!”
유모가 황급히 그녀를 불렀다.
누가 봐도 함정이거늘 자신의 아씨가 진정으로 믿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송진초는 유모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유모, 우선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가. 차차 해결해도 늦지 않아.”
송진초는 방 유모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원수는 조씨 부인뿐만이 아니다. 오늘에 조씨 부인을 심판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송가 종택으로 옮겨진 조씨 부인은 손님방에 안치되었다.
송연이는 몇 마디 더 하려다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조씨 부인 때문에 말을 아꼈다.
송진초는 침상 앞에 서서 조씨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미인다운 눈매와 윤곽을 지닌 조씨 부인은 피부가 유난히 맑았고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풍채가 더해져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 때문에 계속 잠자는 척할 수 없었던 조씨 부인은 슬며시 눈을 떴다.
“진초야.”
조씨 부인은 짐짓 놀란 척 송진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왜 이리 야위었느냐.”
조씨 부인은 전생에 그녀에게 조금도 다정하지 않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부를 묻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가식적으로 구니 오히려 불편할 지경이었다.
“마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송연이가 재빨리 나섰다.
조씨 부인은 송연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일부러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요망한 것, 자신이 계집종인 것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어찌하여 진초로 가장한 것이냐? 내가 그간 너를 얼마나 아꼈는데.”
송연이는 즉시 잘못을 인정했다.
“마님, 어릴 적 부모님을 잃어 순간 잘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가서 꿇고 있어. 내 분부가 떨어지기 전까진 절대 일어나지 말거라.”
조씨 부인이 대노하여 외쳤고 송연이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예전에는 송연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마다 조씨 부인은 겉으론 몇 마디 엄하게 꾸짖곤 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어 버리곤 했다.
송진초는 이번에야말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었다.
“잠시만!”
송진초가 송연이를 잡았다.
“진초야?”
조씨 부인이 서둘러 그녀를 막아 세웠다.
“한낱 계집종일 뿐이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용서하면 안 된다.”
용서는커녕, 송진초는 당장이라도 송연이를 때려죽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큰 쓰임새가 있을 듯했다.
“어머니, 송연이는 몇 년간 저를 대신해서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이번에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곤장 스무 대로 해결하는 것이 어떤지요?”
송진초가 물었다.
조씨 부인은 짜증이 극에 달한 표정으로 애써 말했다.
“네 말대로 하자꾸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송연이는 추후를 도모하며 이를 악물고 억지로 참았다.
곧이어 문밖에서 곤장 소리와 함께 송연이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한편 조씨 부인은 방 안에서 건성으로 송진초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 미간을 찌푸리며 밖을 쳐다보곤 했다.
송진초도 이를 눈치챘다.
스무 곤장이 끝나자마자 밖에 있던 계집종 하나가 송연이가 기절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순간 안색이 어둡게 변한 조씨 부인은 고개를 숙이며 가슴 아파하더니 다시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지. 끌고 가거라, 우리 진초의 눈을 더럽히지 말고.”
“네.”
밤새 길을 재촉한 탓에 조씨 부인은 온몸에 피로가 쌓였다. 게다가 송진초와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 없었던 그녀는 눈을 비비며 피곤한 티를 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송진초는 조씨 부인의 이불을 정성껏 펴준 뒤 순진한 얼굴로 물러났다. 등을 돌려 걸어 나가는 그녀의 얼굴은 이미 어둡게 변해 있었다.
밖으로 나온 송진초를 마중 나온 유모는 얼른 그녀를 부축해 안채로 향했다.
“아씨, 조씨 부인의 의도가 불순해 보입니다. 절대 속으시면 안 됩니다.”
유모는 조씨 부인이 자신의 아씨를 바라보는 눈빛에 다정함과 애잔함은 온데간데없고 혐오감만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고 외행랑채에 선 그녀의 뺨으로 찬바람이 스치며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다. 의금부에 갇혀 매질을 당했을 때의 고통에는 비할 바가 안 되었지만.
“유모, 아직은 때가 아니야. 어찌 됐든 생모인 것을 인정했으니 벗어나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할 거야.”
조씨 부인이 꾀병을 부리는 이상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오면, 이대로 끝내시려고요?”
유모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송진초가 삼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송연이와 조씨 부인의 얼굴에는 윤기가 흘렀고 옷도 최상급으로 걸치고 있었다.
송진초는 말없이 다가오는 제소를 바라보았다.
빠르게 달려온 제소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취주 그 계집년이 전부 자백했습니다.”
위에는 취주가 언제 조씨 부인에게 매수되었는지가 적혀 있었고 조씨 부인이 그녀에게 당부한 일들이 매우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아재, 고생 많았어요.”
제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씨, 천만입니다.”
방금 조씨 부인이 기절하면서 현장이 엉망 된 틈에, 송진초는 제소에게 취주를 데려가라고 분부했고 취주는 매질 한 방에 자백했다.
“장자에 가둬두세요. 죽이진 말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이마 앞 잔머리를 휘날렸고, 눈보라가 눈에 들어갔다. 그러나 눈보라보다는 그녀의 섬뜩한 눈빛이 더욱 차가웠다.
그녀는 다시 제소를 바라보았다.
“아재, 선물 몇 가지를 준비해 주세요. 대감님 뵈러 갈까 합니다.”
제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건을 준비하러 갔다.
방 유모는 하룻밤 사이 어른이 된 듯, 세상사에 흔들림 없는 눈빛을 띠는 자신의 아씨를 바라보며 내심 놀랐다. 그 모습이 마치 대감 어르신의 살아생전 모습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쇤네가 손난로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송진초가 미소를 살짝 지었다.
방 유모는 송진초를 어릴 적부터 길러 온 유모로, 전생에는 한성 조씨 부인 댁에서 곤장에 맞아 죽었고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유모를 편안한 곳으로 보내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난 뒤, 제소는 마차를 마련했다.
그녀는 마차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당부했다.
“저들을 잘 지켜보세요.”
제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진초는 마차 안에서 손난로를 꼭 움켜쥔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육씨 대감 댁에 당도했고 사람을 보내 기별을 넣자,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아씨, 대감 어르신께서 안으로 모시라 하십니다.”
하얀 눈이 가득 덮인 뜰을 따라 한참을 돌아가고서야 정당에 다다랐다.
몸종 하나가 말했다.
“아씨, 잠시 기다리소서. 대감 어르신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서두를 것 없다.”
곧이어 몸종이 다과상을 내왔고 그녀는 자리에 앉아 차분히 기다렸다.
얼마 후, 육 대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 안으로 들어선 육 대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공손히 인사하자 육 대감은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
“예는 거두시지요.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두 사람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소첩이 염치없이 찾아온 것은 대감께 한 가지 청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육 대감이 눈썹을 살짝 치켜들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첩의 어머니께서 심신이 미약하여 정신이 흐릿한 중에 누군가의 꾐에 넘어가 송가의 가산을 헐값에 팔아넘겼습니다. 이 일에 대한 추문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전부 선친께서 생전에 손수 일구신 가산입니다. 이대로 타인의 손에 들어가게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허나 이미 벌어진 지 삼 년이나 지난 일인데 이제 와서 무엇 하러 추궁하려 하는 것인지요?”
육 대감이 탄식했다.
“더구나 가산을 팔아넘긴 것은 아씨의 모친입니다. 이 일에 대해 조사했다는 것을 조씨 가문에서 알게 되면 훗날 한성에 갔을 때 그들을 어찌 상대하려고 그러시는지요?”
육 대감이 이리 말하는 것도, 한때 송 대감과 막역했던 사이였기에 그녀에게 조언해 주는 것이었다.
“조씨 부인은 아씨의 친어미요, 장래 혼사 또한 그 손을 거쳐야 할 터인데, 세상사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본인에게 오히려 무해한 일이 수도 있답니다.”
육 대감은 관직에 오래 있었던지라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있었다.
조씨 부인이 참으로 병이 든 것인지, 일부러 그런 것인지 뻔히 보였으나, 한성의 조씨 가문의 권세가 워낙 크다 보니, 공연히 나설 생각이 없었다.
“대감님!”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소첩이 구태여 이 일에 대해 추궁한다면요?”
육 대감은 그녀의 결연한 표정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씨의 외갓댁입니다.”
송진초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의 대치가 잠시 이어졌고 육 대감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타협했다.
“송 대감을 봐서 이번 한 번만 도울 테니 앞으론 이리 난처한 일은 만들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관아를 나왔을 땐 이미 저녁이 된 뒤였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송진초는 눈보라를 뚫고 마차로 들어갔다.
손난로는 이미 차가워진 뒤였고 유모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가 따뜻하게 데워줬다.
두 사람이 종택으로 들어서자, 조씨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반겼다.
“진초야, 드디어 돌아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