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좀 도와…”
‘어?’
남자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걸 보고서야, 도현은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아… 은호 형, 설마 유진 누나 아직… 안 돌아온 거예요?”
이미 세 시간은 훌쩍 넘긴 뒤였다.
은호는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을 장난으로 하는 줄 알아?”
말을 마치고는 도현을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도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이번엔 진짜인가?’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가 괜히 오버하는 것 같았다.
은호가 말하면 바로 헤어질 수 있는 남자라는 건 믿었다. 하지만 유진은 아니었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에 동의할 수는 있어도, 그녀만큼은 아니었다.
이건 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은호, 왜 혼자야?”
승우가 팔짱을 낀 채, 구경 난 걸 즐기듯 웃었다.
“네가 건 세 시간, 지금은 하루가 다 지났는데?”
은호는 입꼬리를 올렸다.
“내기엔 승복해야지. 벌칙 뭐야?”
“오늘은 술 말고 다른 걸로.”
“?”
“유진한테 전화해서,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하하하하…”
주변에서 순식간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현은 아예 은호의 휴대폰을 낚아채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 뒤로 들려온 건 차가운 안내 멘트였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아…”
‘이건… 차단?’
은호는 잠시 멍해졌다.
웃음소리는 서서히 잦아들었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도현은 황급히 전화를 끊으며 휴대폰을 돌려줬다.
“아, 그게… 진짜 연결 안 된 걸 수도 있잖아요. 유진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지. 하늘에서 비가 빨갛게 내리지 않는 이상… 하하…”
말을 하다 보니, 본인도 민망해졌다.
승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이번엔… 유진이 진심일 수도 있겠는데.”
은호는 가볍게 비웃었다.
“헤어지면 헤어진 거지, 진짜니 가짜니, 그런 게 어딨어?”
“이런 게임, 이젠 안 해. 앞으로 누가 유진 얘기 꺼내면, 친구고 뭐고 없다.”
승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더니 말했다.
“후회만 하지 마.”
은호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그는 늘, 한 번 내린 결정은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효성이 분위기를 풀려 웃으며 나섰다.
“에이, 왜 이렇게 살벌해. 다들 친구잖아, 하하…”
……
아침 7시.
조깅을 마치고 들어온 태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밥 냄새를 맡았다.
유진이 뜨거운 죽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하운드투스 원피스에 희고 곧게 뻗은 다리가 드러났고, 화장기 하나 없는데도 눈부시게 예뻤다.
“빨리 씻어. 씻고 와서 아침 먹어.”
“어? 머리 바꿨네? 검은 생머리에 하이 포니테일? 이렇게 예쁘게 하고… 돌아갈 준비야? 아님 은호가 데리러 와?”
“하아… 제발 좋은 쪽으로 좀 생각해 줄래?”
“은호가 직접 온다는데 그게 좋은 거지.”
태리는 식탁으로 가더니 차려진 아침상을 보고 놀랐다.
“와, 이게 다 뭐야?”
“씻고 와.”
유진은 뻗어오는 손을 탁 쳤다.
“더러워.”
“너 진짜 이중잣대다! 은호가 손 쓸 때는 왜 안 쳤어?”
“응, 다음에 기회 있으면 꼭 칠게.”
“바보도 안 믿겠다…”
태리가 씻고 나왔을 땐 유진은 이미 보온 도시락을 들고 나간 뒤였다.
“하… 나 먹으라고 만든 아침이었으면서 남자 거 챙기는 건 또 잊지 않네. 이런 남자에 미친…”
시경 병원, 1인 병실.
“심 교수, 오늘 상태는 어때?”
수희는 논문을 내려놓고 노안 안경을 밀어 올렸다.
“허 교수? 네가 왜 여기 와?”
“움직이지 마.”
정우는 급히 베개를 받쳐줬다.
“상처 아직 안 아물었어.”
“맹장염이야 작은 수술인데, 나이가 있으니까 회복이 느려서 이렇게 오래 붙잡아 두는 거지. 그나저나 학교 올해 석사 정원은 나왔어?”
“나왔어. 너는 셋, 나는 넷.”
“셋이구나…”
수희가 중얼거렸다.
“뭐야? 설마 올해도 둘만 받을 생각이야?”
“응. 나 늙었잖아. 둘이 한계야.”
정우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 한 자리는 애초에 그녀 몫으로 남겨진 거란 걸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게 뻔했다.
“심 교수님! 어? 허 교수님도 계시네요?”
지석이 후배 둘을 데리고 들어와 과일과 꽃을 내려놓았다.
“교수님 병문안 왔습니다.”
이야기 도중 한 학생이 말했다.
“올해 1학년에 엄청난 신입생이 있다던데요. 본원 학-석-박사 통합 과정을 바로 땄대요.”
생명과학과대 최근 10년간 이런 경우는 세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작년에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랑 컴퓨터 경시대회에서 금메달 두 개를 한꺼번에 따고 바로 우리 학교로 추천 입학했다던데요.”
“금메달 두 개면 뭐, 대단하긴 하지. 근데 예전에 학부 입학할 때부터 금메달 네 개 들고 왔던 선배 있지 않았어? 심 교수님 제자였던가? 수학, 물리, 화학, 컴퓨터 전부 휩쓸었던… 이름이… 이… 이… 뭐였더라…? 이… 유진?”
“이제 됐다!”
정우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다들 학교로 돌아가.”
“아… 네. 그럼 저희 먼저 가겠습니다.”
병실 문이 닫히고, 밖에서 학생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석 선배, 저 말실수한 건가요? 두 교수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였어요…”
지석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병실 안.
“학생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수희는 손을 저었지만, 입술은 떨렸고, 눈가에는 결국 눈물이 맺혀 흘러내렸다.
“그 아이 같은 천재가… 그렇게 살면 안 됐는데… 왜, 왜 자기 재능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까…”
“진정해.”
“허 교수,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애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사랑을 하겠대… 하하, 사랑? 그 말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병실 문밖에 서 있던 유진은 보온 도시락을 움켜쥔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심수희 교수님…’
결국 그녀는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간호 스테이션에 도시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심수희 교수님께 드릴 건데요. 전달만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어? 정보 등록 안 하셨는데요! 어디 가세요?”
유진은 병동 밖으로 뛰쳐나와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 언니?”
키가 크고 화장이 정교한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다가왔다. 클래식한 레이디 디올 백을 들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재킷과 H라인 스커트, 어깨에 딱 떨어지는 생머리까지, 어디서 봐도 지적인 분위기가 흘러 넘쳤다.
은호의 친여동생, 장은아였다.
“정말 언니야? 집에 안 있고 병원엔 왜 온 거야?”
입원동이라는 표지판을 흘끗 보며, 그녀는 속으로 안도했다. 산부인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진이 임신이라도 해서 아이를 핑계로 결혼이라도 한다면, 어머니 차순희 여사는 분명 기절했을 것이다.
“은아.”
유진은 겨우 미소를 지었다.
“눈은 왜 이렇게 빨개? 울었어?”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또 오빠랑 싸운 거야?”
“아니.”
은아는 그저 그녀가 고집 부린다고 생각하며 연민 어린 눈빛을 보냈다.
사실 그녀는 유진을 꽤 좋아했다. 예쁘고, 성격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장씨 가문의 문턱을 넘기엔 조금 모자랐을 뿐이었다.
특히 차순희 여사는 학벌을 극도로 중시해 명문대 출신 며느리만 원했다.
“오빠랑 있으면 힘들지? 성격 안 좋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
유진이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헤어…”
“아, 나 바빠서.”
은아는 말을 끊고 시계를 봤다.
“다음에 보자, 언니.”
그녀 또한 심 교수를 찾아온 길이었다.
총명하고 얌전한 학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오늘 일부러 이렇게 꾸몄다.
박사 통합 과정 자리 하나를 얻을 수 있을지는 이번 방문에 달려 있었다.
“싫어요.”수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살짝 발끝을 들었다.“오빠랑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어요.”그녀가 더 다가오기 전에, 은호가 먼저 움직였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와아!”주변에서 환호와 탄성이 터졌다.“세상에! 얼마나 사랑하면 저럴까?”“완전 드라마네!”유진은 그 장면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책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아직도…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거의 무감각에 가까웠다.‘담배를 끊어도 금단 현상이 있는데, 하물며 6년을 사랑했던 사람인데.’유진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 공부해야 했다.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은호는 문득 무언가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어딘선가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 끝을 스쳤다.하지만 그 순간, 수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얽혔다.“뭘 보고 있었어요?”은호는 시선을 거두었다.“…아무것도 아니야.”수아를 기숙사 건물 아래까지 데려다준 뒤 돌아가려 했지만, 수아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아직 이른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요?”은호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주말에 데리러 올게.”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의 얼굴은 역광 속에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수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달콤한 유혹이 섞였다.“오빠… 오늘 저, 오빠 집에 가도 될까요?”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은호는 잠시 멈칫했다.“넌 아직 어려. 조금 더 기다리자.”수아는 놀랐지만 마음 한편이 오히려 따뜻해졌다.그가 자신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나 이제 가볼게. 할 일이 있어.”수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아침에 좁쌀죽 가져다줄게요.”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멍해진 듯 서 있을 뿐이었다.……방 안.컴퓨터 화면이 켜져 있었지만 유진의 타이핑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머릿속에 두 사람이
은호는 말을 끝내자마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가속 페달을 세게 밟아 그대로 떠나버렸다.남겨진 태리는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욕을 퍼부었다.“저게 사람이야? 사람이냐고!”“쓰레기 같은 자식! 잡놈! 개보다 못한 자식! 아, 진짜 열받아 죽겠네!”그녀는 옆에 서 있던 연하남의 옷깃을 붙잡았다.“내가 말하는데, 이번엔 유진 절대 안 돌아가! 절대!”남자는 연신 달래듯 말했다.“그래 그래, 맞아. 화 좀 가라앉혀…”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저 남자는 이미 결과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처럼 태연해 보였다.그는 슬쩍 태리를 바라봤다. 순간, 그녀도 유진처럼 한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헌신해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아니지… 아니야.’그는 고개를 저었다. 꿈에서도 감히 그런 걸 바라진 못했다.……차 안에서 은호는 전화를 받았다.기분이 좋지 않은 탓에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무슨 일이야.”“자기, 요즘 완전 보물 같은 가게 찾았어요! 게가 진짜 살이 꽉 찼대요. 마침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우리 가서 먹을까요? 응?”수아의 밝고 발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그가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취향에 맞춰 제안한 것이었다.게다가 은호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 침묵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예전에는 대부분 은호가 먼저 데이트를 제안했고, 그녀는 수줍게 한 번 사양한 뒤 받아들이면 됐다.하지만 요즘은 달랐다.그가 먼저 연락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메시지도 짧아졌다. 가끔은 읽고도 답을 하지 않았다.이유를 물어보면 늘 같은 대답뿐이었다.“바빠.”지금도 마찬가지였다.“토요일? 바빠. 시간 없어.”“토요일이 안 되면… 일요일은 어때…요?”그녀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시간 없다니까. 끊는다.”전화는 그대로 끊겼다.끊긴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수아의 가슴에 불안이 다시 파고들었다.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에게 음식이란 그저 에너지를 보충하는 수단일 뿐, 맛이 좋고 나쁨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다 씻었어요.”유진이 고개를 돌려 보니, 씻어 둔 붉은 피망과 청경채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누가 봐도 강박에 가까운 정리 습관의 소유자였다.“왜 웃어요?”민준은 이유를 몰라 물었다.유진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나가 계세요.”“네.”그는 물기를 닦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은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렸다.전체적으로 담백한 맛, 대부분이 심 교수가 좋아하고 또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심 교수는 감회에 젖어 중얼거렸다.식사가 끝나자, 유진은 먼저 그릇을 정리했다.민준도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와 도왔다.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 남자의 뒷모습이 길게 늘어졌다.유진의 시선에서 보이는 그의 옆얼굴은, 마치 고대 그리스 조각상처럼 선이 또렷하고 날카로웠다.심 교수가 문틀에 기대서서 물었다.“유진, 네 선배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니?”민준은 그녀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제자였고, 유진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아주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인연은 먼저 그들 스스로 이어져 있었다.그때, 현관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심 교수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심 교수는 거실로 나왔고, 소파에서 한 여자가 웃으며 일어섰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장은아예요. 전에 병원에 문병 갔었고, 올해 대학원 모집에 대해서도 여쭤봤었죠.”심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기억하고 있어요. 앉아요.”은아의 미소는 한층 더 밝아졌다.“요즘 집에서 요양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몸에 좋은 것들 좀 가져왔어요…”심 교수는 탁자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무심히 훑어보았다.인삼, 제비집, 동충하초…그녀의 미소는 자연스레 옅어졌다.“전에 말씀드린 대학원 정원 말인데요…”은아가 다시 말을 꺼냈다.
유진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남자는 반 걸음 뒤따랐다.어젯밤의 불안함에 비하면, 그녀는 눈에 띄게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민준이 차를 몰고 왔고, 유진은 조수석에 앉았다.가는 길에 과일 가게를 하나 지나치자,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 세워주실 수 있을까요? 3분이면 돼요. 과일 좀 사려고요.”“과일?”“네. 교수님 드릴 거예요.”민준은 핸들을 잡은 채,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굳이 그렇게 번거로울 필요가 있나요?”“…?”유진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설마 늘 빈손으로 남의 집에 가시는 건 아니죠?”민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은 말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하네, 정말.’‘아마도, 진짜 대단한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소한 건 신경을 안 쓰는 걸까?’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결국 길가에 차를 세웠다.……심수희 교수의 집은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한국식과 양식이 조화를 이룬 단독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고, 소박하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곳이었다.단풍나무 숲을 지나면서 아담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6년…’유진은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었다. 발치에 놓인 과일 바구니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민준은 그녀의 변화를 느꼈다.“안 내려요?”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잠깐만요. 조금만 있다가요.”남자는 그녀를 몇 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아무것도 묻지 않는 배려에, 유진은 마음속으로 감사했다.그가 먼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에야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계절은 온갖 꽃이 한창 피어나는 때였다.마당에 들어서자, 옅은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퍼져왔다.울타리 옆에는 푸릇푸릇한 채소들이 심어져 있었지만, 주인이 아파서 돌보지 못했는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의 심장이 살짝 떨렸고, 그녀는 서둘러 민준을 따라 들어갔다.“교수님.”심 교
유진은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해보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은호와 함께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손만 뻗으면 다 해결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육체적인 일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심지어 몇 년 전, 그가 막 창업을 시작해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집안의 주기적인 청소는 늘 시간제 도우미를 불러 맡겼다.페인트 한 통을 다 쓰고 나자, 유진은 뻐근해진 허리를 짚었다.편하게만 지내온 세월이 길어서인지, 몸이 금세 투덜거렸다.그녀는 복도로 나가 남은 페인트를 들여놓으려 했다.그런데 발이 조금 빨랐던 탓에, 그만 페인트 통을 걷어차고 말았다.재빨리 붙잡긴 했지만, 결국 옆집 현관 앞에 페인트가 조금 쏟아졌다.급히 걸레를 가져와 닦고 있는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고개를 들며 사과하려던 순간,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여기 사세요?”“왜 그쪽이 여기에…?”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민준은 바닥을 한 번 보고, 이내 그녀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그럼 오늘 이사 온 사람이 당신이었군요?”유진도 이렇게까지 우연일 줄은 몰랐다.“보시는 대로예요. 오늘부터 이웃이 됐네요.”민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연구실과 학교가 모두 가까워 학생들 수업과 실험을 오가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유진은 왜 이곳일까?누가 봐도 이 환경은 젊은 여성이 살기엔 썩 적합하지 않았다. 다른 걸 떠나,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건물은 보통 선택지에서 제외되기 마련이었다.유진은 그가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복도를 더럽힌 걸 신경 쓰는 줄 알았다.“죄송해요. 페인트가 좀 쏟아졌는데, 금방 다 치울게요.”그녀는 서둘러 마무리했고, 금세 바닥은 깨끗해졌다.아래층으로 내려가며, 그녀는 그의 옆에 놓인 쓰레기를 가리켰다.“마침 내려가는 길인데, 이것도 같이 버려드릴까요?”민준은 사양하지 않았다. 대신 집 안으로 들어가 접이식 사다리를 하나 꺼내왔다.“벽 칠할 거면 이
은호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아차렸다.여자의 아름답던 웨이브 머리는 말끔하게 펴져 있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도 다시 순수한 검은색으로 돌아가 있었다.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도 신지 않았다.하얀 티셔츠 한 장과 청바지. 지나칠 정도로 수수한 차림이었다.다만… 그 눈빛만은 예전보다 한층 더 또렷해 보였다. 실연의 그늘이나 침체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만약 이게 연기라면, 은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유진은 연기를 아주 잘하고 있었다.너무 잘해서, 그의 신경을 완벽히 건드려 버릴 정도로.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저 표정은 분노가 터지기 직전의 신호였다.“후.”남자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근데 안목이 진짜 별로네. 내 옆에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으면, 그래도 기준이라는 게 좀 있어야 하지 않아? 개나 소나 다 괜찮다는 식이면, 나 같은 전 남친 체면은 어디다 두라는 거지?”“체면?”유진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그 웃음 속엔, 희미한 비애가 스며 있었지만, 아쉽게도 은호는 그걸 보지 못했다.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유진이 다른 남자에게 옅게 웃어 보이던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 감정을 수컷의 ‘영역 본능’ 탓으로 돌렸다.유진이라는 이 영역은, 한때 자신이 점령했던 곳이었다. 이제 필요 없어진 땅일지라도, 하찮은 개나 소 따위가 와서 표시를 남기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나 바빠. 먼저 갈게.”유진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가긴 어딜 가? 태리 집 말고는 갈 데도 없잖아. 그래도 이번엔 제법 독해졌네? 수표랑 서류까지 다 챙겨서 나가고. 뭐야, 이제 장난 좀 쳐보겠다는 거야?”유진의 가슴이 찔끔 아려왔다.그의 성질이 고약하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비뚤어지고 난폭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상처가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는, 그녀가 그저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