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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차단

Author: 빵울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1-18 00:30:15

“자리 찾기 힘든가? 내가 나가서 좀 도와…”

‘어?’

남자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걸 보고서야, 도현은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아… 은호 형, 설마 유진 누나 아직… 안 돌아온 거예요?”

이미 세 시간은 훌쩍 넘긴 뒤였다.

은호는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뭘 돌아와? 이별을 장난으로 하는 줄 알아?”

말을 마치고는 도현을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도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이번엔 진짜인가?’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가 괜히 오버하는 것 같았다.

은호가 말하면 바로 헤어질 수 있는 남자라는 건 믿었다. 하지만 유진은 아니었다.

세상 모든 여자가 이별에 동의할 수는 있어도, 그녀만큼은 아니었다.

이건 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은호, 왜 혼자야?”

승우가 팔짱을 낀 채, 구경 난 걸 즐기듯 웃었다.

“네가 건 세 시간, 지금은 하루가 다 지났는데?”

은호는 입꼬리를 올렸다.

“내기엔 승복해야지. 벌칙 뭐야?”

“오늘은 술 말고 다른 걸로.”

“?”

“유진한테 전화해서,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하하하하…”

주변에서 순식간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현은 아예 은호의 휴대폰을 낚아채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 뒤로 들려온 건 차가운 안내 멘트였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아…”

‘이건… 차단?’

은호는 잠시 멍해졌다.

웃음소리는 서서히 잦아들었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도현은 황급히 전화를 끊으며 휴대폰을 돌려줬다.

“아, 그게… 진짜 연결 안 된 걸 수도 있잖아요. 유진 누나가 형을 차단할 리가 없지. 하늘에서 비가 빨갛게 내리지 않는 이상… 하하…”

말을 하다 보니, 본인도 민망해졌다.

승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이번엔… 유진이 진심일 수도 있겠는데.”

은호는 가볍게 비웃었다.

“헤어지면 헤어진 거지, 진짜니 가짜니, 그런 게 어딨어?”

“이런 게임, 이젠 안 해. 앞으로 누가 유진 얘기 꺼내면, 친구고 뭐고 없다.”

승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더니 말했다.

“후회만 하지 마.”

은호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그는 늘, 한 번 내린 결정은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효성이 분위기를 풀려 웃으며 나섰다.

“에이, 왜 이렇게 살벌해. 다들 친구잖아, 하하…”

……

아침 7시.

조깅을 마치고 들어온 태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밥 냄새를 맡았다.

유진이 뜨거운 죽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하운드투스 원피스에 희고 곧게 뻗은 다리가 드러났고, 화장기 하나 없는데도 눈부시게 예뻤다.

“빨리 씻어. 씻고 와서 아침 먹어.”

“어? 머리 바꿨네? 검은 생머리에 하이 포니테일? 이렇게 예쁘게 하고… 돌아갈 준비야? 아님 은호가 데리러 와?”

“하아… 제발 좋은 쪽으로 좀 생각해 줄래?”

“은호가 직접 온다는데 그게 좋은 거지.”

태리는 식탁으로 가더니 차려진 아침상을 보고 놀랐다.

“와, 이게 다 뭐야?”

“씻고 와.”

유진은 뻗어오는 손을 탁 쳤다.

“더러워.”

“너 진짜 이중잣대다! 은호가 손 쓸 때는 왜 안 쳤어?”

“응, 다음에 기회 있으면 꼭 칠게.”

“바보도 안 믿겠다…”

태리가 씻고 나왔을 땐 유진은 이미 보온 도시락을 들고 나간 뒤였다.

“하… 나 먹으라고 만든 아침이었으면서 남자 거 챙기는 건 또 잊지 않네. 이런 남자에 미친…”

시경 병원, 1인 병실.

“심 교수, 오늘 상태는 어때?”

수희는 논문을 내려놓고 노안 안경을 밀어 올렸다.

“허 교수? 네가 왜 여기 와?”

“움직이지 마.”

정우는 급히 베개를 받쳐줬다.

“상처 아직 안 아물었어.”

“맹장염이야 작은 수술인데, 나이가 있으니까 회복이 느려서 이렇게 오래 붙잡아 두는 거지. 그나저나 학교 올해 석사 정원은 나왔어?”

“나왔어. 너는 셋, 나는 넷.”

“셋이구나…”

수희가 중얼거렸다.

“뭐야? 설마 올해도 둘만 받을 생각이야?”

“응. 나 늙었잖아. 둘이 한계야.”

정우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 한 자리는 애초에 그녀 몫으로 남겨진 거란 걸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게 뻔했다.

“심 교수님! 어? 허 교수님도 계시네요?”

지석이 후배 둘을 데리고 들어와 과일과 꽃을 내려놓았다.

“교수님 병문안 왔습니다.”

이야기 도중 한 학생이 말했다.

“올해 1학년에 엄청난 신입생이 있다던데요. 본원 학-석-박사 통합 과정을 바로 땄대요.”

생명과학과대 최근 10년간 이런 경우는 세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작년에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랑 컴퓨터 경시대회에서 금메달 두 개를 한꺼번에 따고 바로 우리 학교로 추천 입학했다던데요.”

“금메달 두 개면 뭐, 대단하긴 하지. 근데 예전에 학부 입학할 때부터 금메달 네 개 들고 왔던 선배 있지 않았어? 심 교수님 제자였던가? 수학, 물리, 화학, 컴퓨터 전부 휩쓸었던… 이름이… 이… 이… 뭐였더라…? 이… 유진?”

“이제 됐다!”

정우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다들 학교로 돌아가.”

“아… 네. 그럼 저희 먼저 가겠습니다.”

병실 문이 닫히고, 밖에서 학생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석 선배, 저 말실수한 건가요? 두 교수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였어요…”

지석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병실 안.

“학생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수희는 손을 저었지만, 입술은 떨렸고, 눈가에는 결국 눈물이 맺혀 흘러내렸다.

“그 아이 같은 천재가… 그렇게 살면 안 됐는데… 왜, 왜 자기 재능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까…”

“진정해.”

“허 교수,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애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사랑을 하겠대… 하하, 사랑? 그 말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병실 문밖에 서 있던 유진은 보온 도시락을 움켜쥔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심수희 교수님…’

결국 그녀는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간호 스테이션에 도시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심수희 교수님께 드릴 건데요. 전달만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어? 정보 등록 안 하셨는데요! 어디 가세요?”

유진은 병동 밖으로 뛰쳐나와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 언니?”

키가 크고 화장이 정교한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다가왔다. 클래식한 레이디 디올 백을 들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재킷과 H라인 스커트, 어깨에 딱 떨어지는 생머리까지, 어디서 봐도 지적인 분위기가 흘러 넘쳤다.

은호의 친여동생, 장은아였다.

“정말 언니야? 집에 안 있고 병원엔 왜 온 거야?”

입원동이라는 표지판을 흘끗 보며, 그녀는 속으로 안도했다. 산부인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진이 임신이라도 해서 아이를 핑계로 결혼이라도 한다면, 어머니 차순희 여사는 분명 기절했을 것이다.

“은아.”

유진은 겨우 미소를 지었다.

“눈은 왜 이렇게 빨개? 울었어?”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또 오빠랑 싸운 거야?”

“아니.”

은아는 그저 그녀가 고집 부린다고 생각하며 연민 어린 눈빛을 보냈다.

사실 그녀는 유진을 꽤 좋아했다. 예쁘고, 성격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장씨 가문의 문턱을 넘기엔 조금 모자랐을 뿐이었다.

특히 차순희 여사는 학벌을 극도로 중시해 명문대 출신 며느리만 원했다.

“오빠랑 있으면 힘들지? 성격 안 좋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

유진이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헤어…”

“아, 나 바빠서.”

은아는 말을 끊고 시계를 봤다.

“다음에 보자, 언니.”

그녀 또한 심 교수를 찾아온 길이었다.

총명하고 얌전한 학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오늘 일부러 이렇게 꾸몄다.

박사 통합 과정 자리 하나를 얻을 수 있을지는 이번 방문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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