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생각을 거두고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저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요.”임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대체 무슨 일이지? 미연 언니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로펌을 나서자마자 심미연은 눈물을 쏟아냈다.택시 기사는 넋이 나간 듯 우는 그녀를 보고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참지 못하고 위로했다.“슬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에요. 힘내세요.”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활짝 핀 베니 벚꽃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온지유가 좋아한다고 강지한은 온 서울 가로수를 베니 벚꽃으로 도배해 버렸다.‘온지유한테는 정말 잘해주네!’운전기사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삶이 힘들면 견뎌내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남편이 잠든 사이에 묶어놓고 실컷 두들겨 패서 화풀이하세요. 상간녀가 찾아와 도발하면 주거침입으로 신고해서 널리 알려지게 하고요. 손님만 떳떳하면 쪽팔리는 건 바람난 남편하고 그 여자뿐이에요!”슬픔에 잠겨 있던 심미연은 운전기사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운전 기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가족이 아프면 모든 걸 쏟아부어 치료해 주세요. 살릴 수 있든 없든 후회만 남기지 않으면 되거든요!”많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이 아플 때 돈이 아까워 제대로 치료해 주지 못하고, 결국 그들이 떠난 뒤에야 후회하곤 한다.인생은 한 번뿐이고, 돈은 없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사람은 떠나면 그걸로 끝이다.그러니 ‘그때 이렇게 할 걸’이라는 후회 속에서 남은 생을 보내기보다,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편이 낫다. 결과가 어떻든, 적어도 남은 삶은 후회 없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테니까.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아요, 고마워요.”이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운전기사는 말이 많아서 줄곧 이야기했다.차에서 내릴 때 심미연의 기분은 훨씬 나아져 있었다. 그녀는 기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위층으로 올라가 외할머니 병실 문 앞에 서니 의료
시골로 보내졌던 2년 동안 외할머니는 항상 심미연을 ‘콩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해 주셨다. 집에서 키우는 닭과 오리가 낳은 달걀과 오리 알은 모두 심미연의 차지였다.그 당시 외할머니는 시골에 살면서도 여름과 겨울 할 것 없이 한복을 입으셨다.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기품이 있어서 심미연은 외할머니가 시골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콩이야, 이리 와. 얼굴 좀 보자!”외할머니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막 깨어난 터라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고 정신도 맑지 않았다. 분명 짧은 몇 마디였지만 양수청은 온 힘을 다해 말하고 나서 숨을 헐떡였다.심미연은 황급히 다가가 앉아서 외할머니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숨을 고르도록 도와주었다.외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야위어 있었지만 얼굴 윤곽이 아름다웠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젊었을 때는 분명 절세미인이었을 것이다.“우리 콩이 정말 예쁘구나.”양수청은 심미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틋함과 미안함을 느꼈다.이 몇 년 동안 자신의 목숨은 콩이가 돈을 들여 연명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콩이에게 자신은 짐일 뿐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죽으면 다 해결이 될 것을.콩이도 그녀 때문에 온갖 설움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양수청을 안으며 말했다.“외할머니, 어서 빨리 나으세요. 그럼 제가 여행 데려가 드릴게요. 평생소원이 오로라 보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약속을 어겼으니 제가 모시고 갈게요!”“오로라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봐야 하는데 그 사람이 약속을 어겼으니 나는 안 갈 거야.”양수청은 말이 느렸고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끊어서 말했다.“콩이야, 나 그냥 죽게 해 줘. 이렇게 너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이 망가진 몸뚱이는 너무 약해서 이제 흙에 들어갈 때도 된 듯했다.심장을 찢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고 곧 양수청의 환자복을 적셨다.“외할머니, 외할머니는 나으실 거예요! 안 돌아가실 거예
심미연은 흠칫 놀랐다.그녀는 할머니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할머니는 지한을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심미연의 반응은 양수청의 눈에 묵인으로 보였다.양수청은 마음이 무겁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다 그녀의 잘못이었다. 손녀를 힘들게 만들었으니.양수청은 심미연이 강지한과 결혼한 이유가 분명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매일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병원비가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심미연이 아무리 일을 해도 그 돈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콩이야, 만약 그가 널 사랑하지 않고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와 헤어지거라.”사람은 꼭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남자와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외할머니, 저 잘 지내요. 걱정 마세요. 그보다 아이 이름을 지어주시겠어요?”심미연은 강지한과의 결혼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외할머니가 슬퍼하실까 봐 걱정되었다.외할머니는 겉으로는 저렇게 말씀하셔도 속으로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길 바라실 것이었다.양수청은 심미연이 말하는 동안 눈빛에 생기가 없는 것을 보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짓말을 밝히지는 않고 그저 안쓰러워했다.자신이 죽으면 손녀는 그 사랑 없는 남자를 떠날 수 있겠지.순간, 양수청은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아이 이름은 아이 아빠가 짓도록 하렴. 이 나이에 무슨 좋은 이름을 생각해 내겠니!”“외할머니….”심미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그녀는 의사가 들어온 줄 알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그때 차가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미연아, 근무 시간에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화가 난 것이 분명한 말투였다.심미연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고 남자의 분노에 찬 눈과 마주쳤다.그녀는 그가 또 심한 말을 할까 봐 급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물었다.“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왔어?”강지한은 온몸에서 냉기를 뿜으며 들
심미연은 그가 침묵하자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결국 마음을 굳게 먹고 그의 손을 잡아끌고 병상으로 향했다.강지한은 두 사람이 잡은 손을 내려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침대 옆에 다다르자 심미연은 허리를 굽히고 양수청에게 부드럽게 말했다.“외할머니, 이쪽은 강지한이에요.”그러고는 강지한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강지한도 허리를 굽히며 양수청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외할머니, 안녕하세요, 이제야 시간을 내서 찾아뵈어 죄송합니다.”양수청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심미연을 보며 말했다.“너희 둘 다 이렇게 잘생겼으니, 아이를 낳으면 정말 예쁘겠구나!”그녀는 아주 천천히 말했지만 심미연의 심장은 꽉 조여드는 듯했다. 아까 외할머니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는데 어쩌다 말씀하신 걸까.“예전에는 미연이가 어려서 너무 일찍 아이를 낳는 게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아 2년 정도 기다렸어요. 이제는 저희도 임신 준비 중입니다. 내년에는 아이를 낳도록 노력하겠습니다.”강지한은 물샐 틈 없이 대답하며 심미연을 다정하고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심미연은 그가 살갑게 부르는 소리에 머릿속으로 아찔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며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남자의 깊은 애정과 여자의 수줍음, 이런 모습은 누가 봐도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었다.양수청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전에 어떤 여자가 보여준 로펌에서 찍힌 영상을 떠올렸다. 그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있는 다정한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고 자신의 손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보기에도 안타까웠다.그녀는 손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를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의 아이만큼은 낳아 곁에 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자신의 몸이 이렇게 약하지 않았다면 손녀에게 이런 식으로 아이를 갖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아이가 있어야만 자신이 죽고 나서도 손녀가 삶의
의료진은 재빨리 병실로 들어왔다.“지금 환자분 응급 처치를 해야 합니다. 보호자분은 나가주세요!”심미연은 병실에 남고 싶었지만 강지한에게 이끌려 나왔다.병실 밖에 서 있는 심미연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했다.외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강지한은 휴대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심미연에게 말했다.“의료팀을 먼저 보내 할머니를 치료하게 하고 무진에게 다른 전문의를 찾아 함께 진찰하게 할 거야. 외할머니는 분명히 나으실 거야.”심미연은 붉어진 눈으로 강지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마워!”강지한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눈물 좀 닦아. 미연아, 넌 내 와이프이니 내가 돕는 건 당연한 일이지. 만약 네가 내 와이프가 아니었다면 난 네 외할머니의 생사에 전혀 관심 없었을 거야!”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었다.서울에는 심미연의 외할머니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가 외부인에게 선심을 쓸 리는 없었다.심미연은 그의 말 속 암시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이런 조건으로 그녀를 억지로라도 얌전히 강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에 붙잡아 두려는 것이었다.일단 그녀가 미르 파크에서 나가 이혼을 요구하면 그는 바로 의료팀을 철수시키고 외할머니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게 뻔했다.그러나 이혼을 안 하자니 억울하고 답답했다...“당분간 휴가 내고 병원에서 외할머니 곁에 있어.”강지한이 담담하게 말했다.휴가라는 말에 심미연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지한 씨, 방금 병실에 들어왔을 때 한 말은 무슨 뜻이지?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는 원래 많이 좋아졌었는데, 오늘 온지유가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화가 나서 다시 기절하셨어. 전에도 온지유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갔었는데! 지한 씨, 온지유 제대로 관리해. 미친개처럼 뛰쳐나와 사람 물지 못하게!”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온지유은 얼굴도 그렇게 맞고 몸도 안좋은데 어떻게 네 외할머니를 찾아왔겠어! 네 외할머니가
그래서 임신은 일단 강지한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조금만 기다려. 지유의 일만 다 정리되면 더 이상 만나지 않을게. 알았지?”강지한은 온지유를 만나는 게 뭐가 문제인지 몰랐지만 심미연이 이런 요구를 제기했고 자신도 아이를 갖고 싶다는 전제에서는 들어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하지만 아직 온지유의 미용실 자리도 못 구했고 사준 집은 아직 인테리어 공사 중이었다...이것들만 해결되면 그도 온지유에게 더 이상 빚진 것이 없으니 그녀를 만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했다.하지만 심미연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온지유는 살아있는 한 사고를 칠 테고 이런저런 일로 강지한이 그녀를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자신은 외할머니 때문에 아직 강지한과 완전히 갈라설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심미연은 반박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그럼 온지유 일이 정리되고 나서 아이 얘기해.”그가 정말 온지유와 완전히 끝낸다면 임신 사실을 알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숨길 수밖에 없었다.강지한은 인상을 찌푸렸다.“미연아 왜 지유랑 잘 지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거야? 나를 이런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하지 말아줘.”그는 심미연과 온지유가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쁜지 꼭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나왔다.“그 말은 온지유한테 가서 해야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 그쪽인데!”물론, 강지한이 그 말을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좋아, 내가 물어볼게!”강지한은 즉시 대답했다.심미연은 그저 자신을 달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어쨌든 온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가 공정하게 행동할 거라고 순진하게 믿을 리 없었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타났다. 의사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지한이 먼저 말했다.“곧 의료진이 올 겁니다. 환자 차트랑 검사 결과 넘겨주세요.”의사는 심미연을 슬쩍 쳐다봤다.예전부터 그녀가 뭔가 특별해 보이긴 했지만 설마 서울에서 그렇게 유명한 강
휴대폰 벨 소리가 강지한의 생각을 끊었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온지유의 번호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지한 씨, 누가 병실에 뛰어 들어와서 나를 때렸어. 너무 무서워!”온지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일이야?”“나도 몰라. 갑자기 병실로 뛰어들어와서 나를 때리고 도망갔어!”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무진한테 전화해서 알아보라고 할게.”“여기 와서 나 좀 지켜주면 안 돼? 나 지금 너무 무섭단 말이야!”온지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는데 정말 무서운 것 같았다.“나 지금 일이 있어. 무진이를 보낼게.”그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수화기 너머 온지유는 병실 침대에 누워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빌어먹을 심미연이 대체 지한에게 무슨 약을 먹인 거야! 왜 나한테 이렇게 차가워진 거지? 안 되겠다. 심미연에게 꼭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야!’강지한은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 심미연을 찾아갔다.병실 안.지금 막 깨어난 양수청은 몹시 쇠약해져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심미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심미연은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외할머니, 몸 잘 추스르세요. 꼭 빨리 나으셔야 해요!”그녀는 입을 열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양수청은 입술만 뻐끔거릴 뿐 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다.심미연은 마음이 아파 외할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할머니, 무슨 말 하고 싶은지 다 알아요. 저도 잘살 거예요. 그리고 아이... 나도 꼭 있을 거예요!”양수청은 심미연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손을 들었지만 반도 못 들고 금세 힘없이 떨어졌다.심미연은 고개를 숙여 할머니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대었다.“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콩이야, 여길 떠나!”양수청은 온 힘을 다해 몇 마디를 내뱉었다.심미연이 양수청을 보니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그녀는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힘주어 끄덕였다.“할머니
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물었다.“내가 휴가를 내는 건 온지유의 뜻이야 아니면 어머니 뜻이야?”온지유가 했던 말들을 그녀는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내 뜻이야!”강지한은 그녀의 뺨을 꼬집었다.“집에서 임신 준비하라고!”심미연의 동공이 수축했다.“정말 아이를 갖고 싶어?”왠지 강지한이 자신을 떠보는 것 같았다.마음이 불안했다.“아까 이야기하지 않았어? 우리 아이 갖자고.”강지한은 단순히 심미연이 아이를 낳으면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굳건해질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이혼하고 싶지 않았고 다른 여자를 찾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심미연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평생 같이 살고 싶었다.“아까도 말했잖아. 애 낳으려면 당신이랑 온지유가 완전히 끝내야 한다고! 당신들 아직 계속 만나고 있는데 무슨 애를 낳아? 그리고 나 내일부터 하린의 작업실에 출근하기로 결정했으니까 임신 준비는 아직 급하지 않아!”심미연은 무덤덤한 표정에 차분한 말투였다.강지한이 떠보는 건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그녀는 아이를 낳겠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었다.첫째, 강지한과 온지유의 관계는 아직 애매했고 이대로라면 못 참고 이혼할 게 뻔했다.둘째, 강지한이 자신에게 휴가를 주려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장기 휴가라면 일자리를 구해야 할 것이고 임신 준비에 동의한다면 집에 있어야 할 텐데 그녀는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지유의 일을 다 정리하고 나면 안 만난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애 낳는 거로 나더러 지유의 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하는 거야?”강지한은 화가 나서 얼굴이 좋지 않았다.심미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 마음속에 아이는 단지 강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 낳기만 하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지?”“집에 가정부도 있고 아이가 태어나면 전문 육아 도우미, 영양사도 부를 거야... 네가 키우고 싶으면 키우고 싫으면 그들에게 맡기면 돼. 그때 네가 출근하고 싶다고 해도 난 말리지 않을 거야! 그런데 뭐가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