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보내졌던 2년 동안 외할머니는 항상 심미연을 ‘콩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해 주셨다. 집에서 키우는 닭과 오리가 낳은 달걀과 오리 알은 모두 심미연의 차지였다.그 당시 외할머니는 시골에 살면서도 여름과 겨울 할 것 없이 한복을 입으셨다.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기품이 있어서 심미연은 외할머니가 시골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콩이야, 이리 와. 얼굴 좀 보자!”외할머니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막 깨어난 터라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고 정신도 맑지 않았다. 분명 짧은 몇 마디였지만 양수청은 온 힘을 다해 말하고 나서 숨을 헐떡였다.심미연은 황급히 다가가 앉아서 외할머니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숨을 고르도록 도와주었다.외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야위어 있었지만 얼굴 윤곽이 아름다웠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젊었을 때는 분명 절세미인이었을 것이다.“우리 콩이 정말 예쁘구나.”양수청은 심미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틋함과 미안함을 느꼈다.이 몇 년 동안 자신의 목숨은 콩이가 돈을 들여 연명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콩이에게 자신은 짐일 뿐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죽으면 다 해결이 될 것을.콩이도 그녀 때문에 온갖 설움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양수청을 안으며 말했다.“외할머니, 어서 빨리 나으세요. 그럼 제가 여행 데려가 드릴게요. 평생소원이 오로라 보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약속을 어겼으니 제가 모시고 갈게요!”“오로라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봐야 하는데 그 사람이 약속을 어겼으니 나는 안 갈 거야.”양수청은 말이 느렸고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끊어서 말했다.“콩이야, 나 그냥 죽게 해 줘. 이렇게 너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이 망가진 몸뚱이는 너무 약해서 이제 흙에 들어갈 때도 된 듯했다.심장을 찢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고 곧 양수청의 환자복을 적셨다.“외할머니, 외할머니는 나으실 거예요! 안 돌아가실 거예
심미연은 흠칫 놀랐다.그녀는 할머니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할머니는 지한을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심미연의 반응은 양수청의 눈에 묵인으로 보였다.양수청은 마음이 무겁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다 그녀의 잘못이었다. 손녀를 힘들게 만들었으니.양수청은 심미연이 강지한과 결혼한 이유가 분명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매일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병원비가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심미연이 아무리 일을 해도 그 돈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콩이야, 만약 그가 널 사랑하지 않고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와 헤어지거라.”사람은 꼭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남자와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외할머니, 저 잘 지내요. 걱정 마세요. 그보다 아이 이름을 지어주시겠어요?”심미연은 강지한과의 결혼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외할머니가 슬퍼하실까 봐 걱정되었다.외할머니는 겉으로는 저렇게 말씀하셔도 속으로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길 바라실 것이었다.양수청은 심미연이 말하는 동안 눈빛에 생기가 없는 것을 보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짓말을 밝히지는 않고 그저 안쓰러워했다.자신이 죽으면 손녀는 그 사랑 없는 남자를 떠날 수 있겠지.순간, 양수청은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아이 이름은 아이 아빠가 짓도록 하렴. 이 나이에 무슨 좋은 이름을 생각해 내겠니!”“외할머니….”심미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그녀는 의사가 들어온 줄 알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그때 차가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미연아, 근무 시간에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화가 난 것이 분명한 말투였다.심미연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고 남자의 분노에 찬 눈과 마주쳤다.그녀는 그가 또 심한 말을 할까 봐 급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물었다.“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왔어?”강지한은 온몸에서 냉기를 뿜으며 들
심미연은 그가 침묵하자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결국 마음을 굳게 먹고 그의 손을 잡아끌고 병상으로 향했다.강지한은 두 사람이 잡은 손을 내려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침대 옆에 다다르자 심미연은 허리를 굽히고 양수청에게 부드럽게 말했다.“외할머니, 이쪽은 강지한이에요.”그러고는 강지한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강지한도 허리를 굽히며 양수청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외할머니, 안녕하세요, 이제야 시간을 내서 찾아뵈어 죄송합니다.”양수청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심미연을 보며 말했다.“너희 둘 다 이렇게 잘생겼으니, 아이를 낳으면 정말 예쁘겠구나!”그녀는 아주 천천히 말했지만 심미연의 심장은 꽉 조여드는 듯했다. 아까 외할머니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는데 어쩌다 말씀하신 걸까.“예전에는 미연이가 어려서 너무 일찍 아이를 낳는 게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아 2년 정도 기다렸어요. 이제는 저희도 임신 준비 중입니다. 내년에는 아이를 낳도록 노력하겠습니다.”강지한은 물샐 틈 없이 대답하며 심미연을 다정하고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심미연은 그가 살갑게 부르는 소리에 머릿속으로 아찔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며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남자의 깊은 애정과 여자의 수줍음, 이런 모습은 누가 봐도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었다.양수청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전에 어떤 여자가 보여준 로펌에서 찍힌 영상을 떠올렸다. 그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있는 다정한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고 자신의 손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보기에도 안타까웠다.그녀는 손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를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의 아이만큼은 낳아 곁에 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자신의 몸이 이렇게 약하지 않았다면 손녀에게 이런 식으로 아이를 갖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아이가 있어야만 자신이 죽고 나서도 손녀가 삶의
의료진은 재빨리 병실로 들어왔다.“지금 환자분 응급 처치를 해야 합니다. 보호자분은 나가주세요!”심미연은 병실에 남고 싶었지만 강지한에게 이끌려 나왔다.병실 밖에 서 있는 심미연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했다.외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강지한은 휴대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심미연에게 말했다.“의료팀을 먼저 보내 할머니를 치료하게 하고 무진에게 다른 전문의를 찾아 함께 진찰하게 할 거야. 외할머니는 분명히 나으실 거야.”심미연은 붉어진 눈으로 강지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마워!”강지한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눈물 좀 닦아. 미연아, 넌 내 와이프이니 내가 돕는 건 당연한 일이지. 만약 네가 내 와이프가 아니었다면 난 네 외할머니의 생사에 전혀 관심 없었을 거야!”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었다.서울에는 심미연의 외할머니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가 외부인에게 선심을 쓸 리는 없었다.심미연은 그의 말 속 암시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이런 조건으로 그녀를 억지로라도 얌전히 강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에 붙잡아 두려는 것이었다.일단 그녀가 미르 파크에서 나가 이혼을 요구하면 그는 바로 의료팀을 철수시키고 외할머니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게 뻔했다.그러나 이혼을 안 하자니 억울하고 답답했다...“당분간 휴가 내고 병원에서 외할머니 곁에 있어.”강지한이 담담하게 말했다.휴가라는 말에 심미연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지한 씨, 방금 병실에 들어왔을 때 한 말은 무슨 뜻이지?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는 원래 많이 좋아졌었는데, 오늘 온지유가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화가 나서 다시 기절하셨어. 전에도 온지유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갔었는데! 지한 씨, 온지유 제대로 관리해. 미친개처럼 뛰쳐나와 사람 물지 못하게!”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온지유은 얼굴도 그렇게 맞고 몸도 안좋은데 어떻게 네 외할머니를 찾아왔겠어! 네 외할머니가
그래서 임신은 일단 강지한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조금만 기다려. 지유의 일만 다 정리되면 더 이상 만나지 않을게. 알았지?”강지한은 온지유를 만나는 게 뭐가 문제인지 몰랐지만 심미연이 이런 요구를 제기했고 자신도 아이를 갖고 싶다는 전제에서는 들어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하지만 아직 온지유의 미용실 자리도 못 구했고 사준 집은 아직 인테리어 공사 중이었다...이것들만 해결되면 그도 온지유에게 더 이상 빚진 것이 없으니 그녀를 만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했다.하지만 심미연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온지유는 살아있는 한 사고를 칠 테고 이런저런 일로 강지한이 그녀를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자신은 외할머니 때문에 아직 강지한과 완전히 갈라설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심미연은 반박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그럼 온지유 일이 정리되고 나서 아이 얘기해.”그가 정말 온지유와 완전히 끝낸다면 임신 사실을 알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숨길 수밖에 없었다.강지한은 인상을 찌푸렸다.“미연아 왜 지유랑 잘 지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거야? 나를 이런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하지 말아줘.”그는 심미연과 온지유가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쁜지 꼭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나왔다.“그 말은 온지유한테 가서 해야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 그쪽인데!”물론, 강지한이 그 말을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좋아, 내가 물어볼게!”강지한은 즉시 대답했다.심미연은 그저 자신을 달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어쨌든 온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가 공정하게 행동할 거라고 순진하게 믿을 리 없었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타났다. 의사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지한이 먼저 말했다.“곧 의료진이 올 겁니다. 환자 차트랑 검사 결과 넘겨주세요.”의사는 심미연을 슬쩍 쳐다봤다.예전부터 그녀가 뭔가 특별해 보이긴 했지만 설마 서울에서 그렇게 유명한 강
휴대폰 벨 소리가 강지한의 생각을 끊었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온지유의 번호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지한 씨, 누가 병실에 뛰어 들어와서 나를 때렸어. 너무 무서워!”온지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일이야?”“나도 몰라. 갑자기 병실로 뛰어들어와서 나를 때리고 도망갔어!”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무진한테 전화해서 알아보라고 할게.”“여기 와서 나 좀 지켜주면 안 돼? 나 지금 너무 무섭단 말이야!”온지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는데 정말 무서운 것 같았다.“나 지금 일이 있어. 무진이를 보낼게.”그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수화기 너머 온지유는 병실 침대에 누워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빌어먹을 심미연이 대체 지한에게 무슨 약을 먹인 거야! 왜 나한테 이렇게 차가워진 거지? 안 되겠다. 심미연에게 꼭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야!’강지한은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 심미연을 찾아갔다.병실 안.지금 막 깨어난 양수청은 몹시 쇠약해져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심미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심미연은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외할머니, 몸 잘 추스르세요. 꼭 빨리 나으셔야 해요!”그녀는 입을 열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양수청은 입술만 뻐끔거릴 뿐 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다.심미연은 마음이 아파 외할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할머니, 무슨 말 하고 싶은지 다 알아요. 저도 잘살 거예요. 그리고 아이... 나도 꼭 있을 거예요!”양수청은 심미연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손을 들었지만 반도 못 들고 금세 힘없이 떨어졌다.심미연은 고개를 숙여 할머니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대었다.“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콩이야, 여길 떠나!”양수청은 온 힘을 다해 몇 마디를 내뱉었다.심미연이 양수청을 보니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그녀는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힘주어 끄덕였다.“할머니
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물었다.“내가 휴가를 내는 건 온지유의 뜻이야 아니면 어머니 뜻이야?”온지유가 했던 말들을 그녀는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내 뜻이야!”강지한은 그녀의 뺨을 꼬집었다.“집에서 임신 준비하라고!”심미연의 동공이 수축했다.“정말 아이를 갖고 싶어?”왠지 강지한이 자신을 떠보는 것 같았다.마음이 불안했다.“아까 이야기하지 않았어? 우리 아이 갖자고.”강지한은 단순히 심미연이 아이를 낳으면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굳건해질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이혼하고 싶지 않았고 다른 여자를 찾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심미연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평생 같이 살고 싶었다.“아까도 말했잖아. 애 낳으려면 당신이랑 온지유가 완전히 끝내야 한다고! 당신들 아직 계속 만나고 있는데 무슨 애를 낳아? 그리고 나 내일부터 하린의 작업실에 출근하기로 결정했으니까 임신 준비는 아직 급하지 않아!”심미연은 무덤덤한 표정에 차분한 말투였다.강지한이 떠보는 건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그녀는 아이를 낳겠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었다.첫째, 강지한과 온지유의 관계는 아직 애매했고 이대로라면 못 참고 이혼할 게 뻔했다.둘째, 강지한이 자신에게 휴가를 주려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장기 휴가라면 일자리를 구해야 할 것이고 임신 준비에 동의한다면 집에 있어야 할 텐데 그녀는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지유의 일을 다 정리하고 나면 안 만난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애 낳는 거로 나더러 지유의 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하는 거야?”강지한은 화가 나서 얼굴이 좋지 않았다.심미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 마음속에 아이는 단지 강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 낳기만 하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지?”“집에 가정부도 있고 아이가 태어나면 전문 육아 도우미, 영양사도 부를 거야... 네가 키우고 싶으면 키우고 싫으면 그들에게 맡기면 돼. 그때 네가 출근하고 싶다고 해도 난 말리지 않을 거야! 그런데 뭐가
심미연은 남자의 음흉한 눈동자를 보며 심장이 욱신거려 한참이 지나서야 조용히 소리를 냈다.“”온지유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이인데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해. 나는 낳고 싶지 않으니 내가 호의를 모르는 거로 생각해.”말이 끝나자 그녀는 남자를 힘껏 밀치고 엘리베이터를 나갔다.그는 온지유가 임신으로 고생한 것은 안타까워하면서 그녀를 출산의 기계로 여겼다.차이도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지유가 아이를 낳아 줄 수 있는데 또 구태여 그녀를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강지한은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고는 차갑게 웃었다.“네 마음대로 안 돼!”기분이 좋지 않은 심미연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을 덥석 물고 남자가 아파서 손을 놓은 틈을 타 달아났다.강지한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이 여자는 정말 갈수록 통제를 벗어나네?’휴대폰 벨 소리가 갑자기 울리자 강지한은 눈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지한 도련님, 우리 거래를 해.”스피커에서 남자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관심이 없어.”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당신 부인에 관한 일인데도 관심이 없어?”남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자 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심미연이 찾아갔나?’보아하니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당신이 관심이 없다면 이 거래는 그만두어야지.”강지한이 침묵하자 상대방은 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말해봐.”그는 심미연이 도대체 자기 몰래 무엇을 했는지 보려고 했다.“앉아서 이야기할 곳을 찾아. 두세 마디로 분명하게 말할 수 없으니.”“네가 찾아!”상대방이 곧 주소를 보내왔고 그는 심미연에 전화를 걸었다.여러 번 연속 걸어서야 심미연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말투가 귀찮게 들려왔다.“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어. 이따가 데리러 갈 테니 함께 밥 먹으러 가자.”강지한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저녁에 박유진과 심서연의 일을 이야기할 테니 그는 당연히 그녀를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