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의 말은 그녀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온지유가 강지한을 좋아하든 말든, 나는 더 이상 이들 사이에 엮이고 싶지 않아.’이 메시지는 단순히 온지유를 향한 것이 아니라, 강지한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강준형은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속이 시원해졌다.‘미연이가 드디어 성장했구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잘 잡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그는 혹시라도 심미연이 속으로만 삭히며 대응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늘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히 자기 뜻을 밝히는 모습이 대견하게 느껴졌다.온지유는 심미연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예전 같았으면 이런 자리에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도대체 무슨 일이야?’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강지한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애처롭게 말했다.“지한 씨, 난...”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약했으며, 마치 세상이 자신을 괴롭히는 듯한 모습이었다.강지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그녀의 손에서 팔찌를 가져가더니, 심미연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그냥 성의 표시일 뿐이야. 네가 안 받으면, 그건 성의를 무시하는 거겠지.”심미연은 손에 들린 팔찌를 내려다보았다.차가운 감정이 온몸을 휘감으며 눈가가 뜨거워졌다.‘이 팔찌는 그저 성의라고? 온지유의 모욕을 눈감아 주는 것뿐 아니라, 나에게도 모욕을 주겠다는 거네.’강지한은 온지유의 기분만 신경 쓸 뿐, 이 상황이 그녀에게 어떤 상처를 남길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그 순간, 강준형이 심미연의 손에서 팔찌를 낚아채더니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너희 둘 다 당장 나가!”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온지유는 팔찌가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애원했다.“할아버지, 제발 화 푸세요. 제 잘못이에요! 다 제가 잘못했으니 지한 씨는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강준형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전에도 너더러 본가에 오지 말라고 했지? 네가 여기서 어떤 짓을 할지 뻔
온지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머릿속이 하얘졌다.온지유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얼굴에 계속 가져다 대며 스스로를 때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심미연은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강준형은 그 장면을 보며 속이 답답했지만, 한편으로는 심미연이 이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기를 바랐다.‘속이 조금이라도 시원해진다면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그는 이 상황을 일부러 막지 않았다.문소영은 강준형의 화살이 온지유에게 향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이 기회에 온지유가 제대로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그래서 그녀 역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방관했다.주변의 다른 가족들 또한 온지유의 행동을 어이없어하며, 심미연의 대응을 하나의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지켜봤다.그들은 이미 온지유의 얄팍한 행동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강준형이 심미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온지유를 변호하거나 심미연을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강지한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심미연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차갑고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연, 그만해라.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심미연은 손목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냈다.“아프잖아... 손 놔!”하지만 강지한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내려다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아까 네가 그녀를 때릴 땐 아플 거란 생각은 안 했나?”그의 차가운 말투와 날카로운 시선은 심미연의 마음을 무참히 찔렀다.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그녀는 비틀거렸고, 가까스로 의자를 붙잡아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봤잖아. 그녀가 내 손을 잡아서 자기 얼굴을 때린 거야. 그런데 내가 때렸다고? 강지한, 너 눈이 멀었어?”심미연의 목소리는 격해진 감정으로 떨렸다.‘늘 그렇듯, 강지한은 온지유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언제나 내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거야.’그녀는 자신이 어떤 증거를 내밀어도, 심지어 영상 자료를 보여줘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당장 나가!”문소영은 매서운 눈빛으로 온지유를 쏘아보며 차갑게 말했다.그러면서도 눈짓으로 그녀에게 빠져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문소영의 속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지만, 온지유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강지성의 아이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만약 오늘 강준형이 그녀를 때려 아이까지 잘못된다면, 아들을 잃은 데 이어 손주까지 잃게 될 것이었다.그런 비극은 문소영조차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김 집사가 부드러운 채찍을 들고 와 강준형에게 건네는 순간, 문소영은 속으로 매우 놀랐다.‘이번엔 정말로 강준형이 손을 대겠다는 거야!’온지유가 지금 나가지 않으면 정말로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문소영은 다급히 그녀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나가라니까! 못 알아듣겠어?”온지유는 강지한의 손을 붙잡고 간청하기 시작했다.“지한 씨, 제발 손 놔. 다 내 잘못이야. 미연 씨를 벌주지 마!”그녀는 문소영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강지한 곁에 남아 함께 벌을 받는 척하며 그에게 동정과 미안함을 끌어내려 했다.그렇게 하면 강지한이 자신에게 더 잘해 줄 것이고,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거라 믿었다.강지한은 온지유의 울먹이는 목소리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대신 그는 심미연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가슴 한쪽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이게 뭐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억누르며 자신을 다잡았다.가족들 모두가 온지유의 뻔뻔한 행동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정말 뻔뻔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강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하더니, 이제는 우리의 상식까지 무너뜨리는구나.’강준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채찍을 높이 들어 그녀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강씨 가문에 너 같은 뻔뻔한 사람은 필요 없어! 당장 나가! 그리고 잘 들어라. 앞으로 이 집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 누구 집에도 네가 들어오지 못하게 할
강씨 가문의 둘째 부인은 남편을 재빠르게 흘겨보며 눈치를 주었다.“아버님이 전화하라면 그냥 하라고 해요!”강준형은 이미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반항했다가는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둘째 부인은 셋째 부인을 향해 손짓하며 심미연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셋째 부인이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다가 실수로 구겨진 휴지까지 함께 끌어내고 말았다.휴지가 풀리면서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흰 약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셋째 부인은 순간 얼굴이 새파래지며 황급히 사과했다.“아버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전화부터 걸고 약은 바로 치우겠습니다!”그녀는 급히 신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준형은 바닥에 떨어진 약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차갑게 강지한을 향해 물었다.“미연이 어디 아픈 거냐?”강지한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몰라요...”그의 대답은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강준형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넌 미연이의 남편이란 놈이면서, 아내의 상태를 전혀 모른단 말이냐? 강지한, 너 이혼할 준비가 다 된 거야?”강준형은 원래 두 사람이 계속 함께하길 바랐다. 그러나 오늘의 일을 겪으며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미연이 같은 예쁘고 착한 아이가 이런 결혼 생활 속에서 점점 망가지는 걸 더는 지켜볼 수 없어...’강지한은 대답하지 못했다.강준형의 말은 뼈아프게 와닿았고 심미연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예전에는 그녀가 집에 돌아오면 사건 이야기나 의뢰인들에 대해 종종 얘기하곤 했다.그러나 그는 늘 짜증스럽게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대화가 줄어들면서 그녀의 얼굴에서 기쁨이나 슬픔도 점차 사라졌고, 그는 그 변화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그저 일이 많고 항상 바빴기에, 집에서는 머리를 비우고 싶다는 이유로 그녀의 존재를 외면했을 뿐이었다.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관심했는
늙은이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빠르게 통증이 밀려왔고 순간 이 복수는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되었다.문소영은 온지유가 차에 앉자마자 담담하게 시동을 걸고 대문 쪽을 향해 운전하다가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지유야,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 봐. 지금 네 뱃속의 아이 아빠가 대체 누구야?”순간 깜짝 놀란 온지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했다.“제가 지성 씨 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설마 지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그녀의 대답에 문소영이 백미러로 보이는 온지유에게 차갑게 답했다.“지금 그 대답이 사실이어야 할 거야!”만약 저게 거짓말이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순간 온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속으로는 강지한이 먼저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와 결혼해야만 문소영뿐만 아니라 강준형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어르신은 지금 화가 단단히 난 상태니까 넌 잠시 병원에 있어. 어차피 이노하이브 산하라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나중에 어르신께서 화가 다 풀리면 다시 가서 말해 보고 허락받으면 내가 집에 데리고 갈게.”사실 문소영도 온지유가 썩 달갑지 않았지만 지금 뱃속에 자기 친손주를 품고 있기 때문에 따지더라도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어머니, 지한 씨가 제 명의로 집 한 채 마련해주겠다고 해서 이제 거기서 지내려고요. 어머니도 괜찮으시면 그 집에서 저랑 같이 살아요!”온지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구슬렸다.강지한이랑 결혼하기만 하면 문소영쯤이야 쉽게 구슬릴 수 있었다.“지한이가 사준 집에서 굳이 살겠다면 나도 말릴 생각 없어. 그리고 도우미도 두어 분 보내줄게. 난 지금 사는 집이 익숙해서 갈 필요 없을 것 같아.”문소영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었다.“어머니, 이 일은 제가 꼭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한 일인데요.”온지유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문소영의 반응을 살폈다.“무슨 일?”“제가 듣기로는 지금 심미연도 임신했다던데
그 모습을 본 강지한이 냉큼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중심을 잃고 금방에라도 넘어질 것 같은 느낌에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는데 무의식중에 의자를 잡으려다가 그만 강지한의 손을 잡게 되었다.순간 잠깐 멈칫하다가 그녀는 재빨리 다시 똑바로 앉았다.깜짝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지현정은 심미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사과했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혹시나 심미연이 화를 낼까 봐 매우 긴장한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렸다.심미연은 강지한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다정하게 답했다.“덕분에 살았는데 오히려 제가 고맙다고 해야죠. 감사합니다!”강씨 가문에서 지현정은 그 누구든 모두 살갑게 대해야 했다.또한 강형준이 심미연을 매우 아낀다는 사실을 지현정도 알고 있어서 더욱 함부로 대하지 못하기에 연신 손을 저으며 답했다.“별말씀을요.”심미연은 한눈에 봐도 부자연스러운 그녀의 태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진지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말했다.“제 생일에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로 식사 자리는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맙고 또 미안합니다!”말을 마친 뒤 가방과 핸드폰을 챙겨 신하린 쪽으로 걸어갔다.사실 심미연은 진작에 강지한이 지금 매우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오늘 일로 강지한에 대해 철저히 단념하게 되었다.또한 하루빨리 외할머니를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거나 병이 빨리 낫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만 이 지긋지긋한 경성을 떠나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신하린이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미연아, 괜찮아?”심미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괜찮아. 빨리 나가자.”그렇게 두 사람은 자리를 떴고 이진영도 강지한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떠나가
그저 혼자 평생 지내려고 했지, 심미연이랑 결혼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강준형이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난 미연이랑 십여 년 동안 알고 지냈고 또 내 목숨도 살려줬던 애야. 그래서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아주 잘 알아. 또한 너랑 함께 지낸 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내 앞에서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너에 대한 나쁜 말도 한 적이 없어!”강지한은 그의 말에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심미연이 그 일에 대해 고자질한 게 아니면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고 계시지?’‘설마 일부러 떠본 건 아닐 텐데?’“미연이가 나한테 일러바쳤다고 생각하지? 미르 파크에 우리 쪽 사람들이 있어서 너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내 귀에 흘러들어오게 되어있어. 그래서 저번에 미연이한테 혹시 이혼할 생각이냐고 물었는데 똑바로 대답해 주지 않더라. 그때 난 이미 그 애가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어.”강준형은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자꾸 그가 심미연을 억지로 불구덩이에 떠민 바람에 그녀가 지금처럼 불행하게 지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강지한은 강준형의 엄숙한 얼굴을 보고 그제야 그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걸 알아챘다.지금까지 줄곧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했던 심미연이 그저 온지유한테 질투심을 느껴 일부러 쇼한다고만 생각했다.하여 그녀의 이혼 제안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하지만 방금 강준형의 말을 들어보니 심미연은 진심으로 그와 이혼하고 싶어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돈이 부족한 사람이라 분명 이혼하게 되면 빈털터리로 집에서 나오게 되고 또한 외할머니는 더 이상 치료를 못 받게 되어 죽는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텐데 이 모든 걸 다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예전에 네가 미연이를 살갑게 대하지 않는 원인이 그저 억지로 결혼시킨 게 억울해서 일부러 심술부린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네. 네가 진짜 사랑하는 여자는 온지유란걸.”강준형은 너무 어이없는 나머
강지한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지면서 그에게 되물었다.“할아버지, 무슨 뜻이에요?”‘심미연과의 이혼?’그가 어떻게 심미연과 이혼한다는 말인가?더구나 온지유와 그런 사이도 아니기에 그녀와의 결혼도 더더욱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강준형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먼저 내 물음에 대답해!”지난번에 심미연에게도 똑같은 물음을 물었는데 그녀는 강지한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답했다.하지만 오늘 강지한의 행동은 누가 봐도 선을 넘었고 이에 따라 심미연이 혹시나 이혼하는 걸로 마음을 굳힌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단 한 번도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그런 비겁한 짓은 절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더구나 유일하게 잠자리에서 흥미를 돋게 하는 사람이 바로 심미연인데 혹시나 이혼하게 되면 혼자 해결해야 한다.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면 분명 심적으로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아무튼 절대 이혼은 말도 안 돼!’“하지만 너랑 온지유는 이미 형수와 시동생 사이를 넘어선 관계가 되었어. 또한 오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미연이를 구박한 행동은 누가 봐도 그 애한테 큰 상처였을 거야. 네가 이혼하기 싫다고 해도 미연이는 이미 마음을 굳혔을 거라고! 그 애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사실 강준형은 그가 이혼하기 싫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안심되었다.구제 불능한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미연이가 다시는 이혼에 대해 말도 못 꺼내고 제 옆에 꼭 붙어 있게 할 방법이 있으니까요.”어쨌든 지금 심미연의 외할머니가 자기 의료팀에서 치료받고 있기에 강지한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자기 앞에서 절대 이혼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그렇다면 한 번 더 믿어볼게. 그러나 오늘 미연이가 받은 수모를 보상해 주기 위해 난 이노하이브 주식 1%를 그 애한테 주기로 마음먹었어. 그리고 이 일은 네가 직접 처리해. 지난번처럼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무조건 넘겨. 안 그러면 내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