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네가 말하는 그 오빠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의 엄마는 그의 엄마일 뿐이야. 네 엄마가 될 수는 없단다, 알겠지?” 아직 어린 상미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원하는 사람이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저릿하기도 했다. 강상미는 실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구나...” 강지한은 딸의 그런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다음에 그 오빠를 만나 그 오빠한테 직접 물어봐. 엄마를 너랑 나눠 쓸 수 있는지.” 강상미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바로 그때 강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시훈의 전화였다. 그는 조용히 병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그 명의가 드디어 요청을 받아들였어. 직접 병원에 와서 네 딸 상태부터 확인하겠다고 하더라.” “언제 오는데?” 강지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상미에게 드디여 희망이 생겼어!’ “약속한 시간은 오늘 오후 세 시. 병실로 직접 찾아간다고 했어.” “알겠어.” “내가 이렇게까지 힘 써서 의사를 찾아줬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냐?” 박시훈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불만이 묻어 있었다. 강지한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원하는 거 있으면 성 비서한테 말해.” 그리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핸드폰을 꽉 쥔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딸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수록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결국 그는 또 한번 흡연실로 향했다. 그는 담배를 한 개비 얻어 물고 벽에 기대어 연기를 내뿜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우리 상미가 살 수 있어.’‘정말 다행이야.’“형님, 지금 기분 좋은 거에요. 안 좋은 거야?”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눈앞에 있던 사람이 제자리에 굳었다. 이내 그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진찰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가족들은 나가 주세요.”“방해되지 않도록 할게요. 의사 선생님, 제 딸 좀 치료해 주세요.”강지한은 낯선 사람에게 강상미를 맡기는 게 도무지 불안한 듯했다.“끝까지 그렇게 나오실 건가요? 그럼 제가 돌아가겠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미간을 찌푸리던 강지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불안해서 그래요. 그쪽이 정말 명의가 맞긴 한지 저는 모르니까요.”‘이렇게 젊은데 명의라고? 사기 치는 거 아닌가?’“친구분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 계속 여기 있으실 거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바로 그때, 강지한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박시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마침 잘됐네.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지한아, 그 의사님은 만났어? 수염 가득한 노인 맞지?”박시훈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다.강지한은 그 의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방금 들은 목소리를 떠올려 보아도 그 의사는 여자가 확실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지한아, 왜 말이 없어?”박시훈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그럼 그 명의가 노인이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그래도 여자일 리는 없을 것 같은데...’“너 그 의사분한테 어떻게 말했어?”강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말? 그냥 네 딸이 입원해 있는 환자실 번호를 보내줬지. 그거면 된 거 아니야? 그 외에 뭘 더 말해야 해?”“지한아, 무슨 의미야?”박시훈이 서둘러 말했다.“그래, 명의님이신데 분명 못생겼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네 딸을 살릴 수 있다는 거 아냐? 그럼 된 거지. 뭐가 불만인데?”강지한은 안색이 더 어두워지더니 바로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박시훈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아빠, 잠깐만 나가 계시는 게 어때요? 이 예쁜 언니가 금방 검사해 주실 거예요!”그때, 병실에 누워있던 강상미가 입을 열었
심미연은 잠깐 눈앞의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 강상미의 눈동자는 심태하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아이는 그 정도로 닮아있었다.순간,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기억은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만나보지도 못한 채 작별 인사를 해야만 했던 아이에 대한 기억까지도 말이다. 이는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찔렀다.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딸을 떠올리며 그녀의 눈가가 서서히 촉촉해졌다.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심미연은 꾹 참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너무 약해 보일까 봐, 용감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아이가 혹시나 두려워할까 봐 걱정되었다.강상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했다. 의문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었다.강상미는 재빨리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고사리같이 작은 손을 심미연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그녀의 상처마저도 치유해 주려는 듯이 말이다.“언니, 제발 슬퍼하지 마요... 싫으시면 거절해도 좋아요. 괜찮으니까 울지 마세요...”어린아이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이 무심코 한 말이 그녀를 더 속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는 듯했다.방 안은 아주 조용했다. 두 사람의 가벼운 숨소리와 창밖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새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공기 속에는 왠지 모를 묘한 긴장감과 따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심미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강상미의 얼굴을 감싸더니 아이와 오랫동안 마주 보았다. 그녀는 따뜻하고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너는 엄마가 없니? 네 엄마는?”강상미의 나이는 3살이었다. 심태하보다 정확히 한 달 더 빠르게 태어난 아이였다.즉 이혼하기 전인 4년 전부터 강지한은 이미 다른 여자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강지한이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면 온지유 아니었나? 온지유는 아이를 유산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순식간에 심미연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엄마는 저를 사
심미연은 잠시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심태하에게서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공항 화장실 밖에서 만났다는 여자애 말이다. 심태하는 그 여자애의 엄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었다. 아주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지어는 심태하의 얼굴을 세게 꽉 잡고 팔을 잡아당겼다고 했다.그 여자애가 강상미라면 아마 평소에도 자주 맞고 혼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리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왜요? 제가 뭔가 잘못 말한 거라도 있나요?”강상미는 그녀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말을 잘못하면 심미연 마저 더 이상 자기와 놀아주지 않을까 걱정되는 듯했다.비록 심미연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강상미는 그녀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이 너무 예뻐서 그랬을지도 모른다.“상미야, 넌 잘못 한 게 없어!”심미연은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다.“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하지만... 언니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매우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강상미는 긴장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그 말에 심미연은 조금 놀랐다.“내가 그래 보였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강상미는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눈썹을 찡그리고 있어서요.”‘엄마도 기분이 나쁠 때면 항상 이렇게 눈썹을 찡그리셨는데...’심미연은 마음이 아팠다.‘이렇게 어린아이도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구나...’만약 강상미가 말했던 ‘엄마’의 정체가 바로 심서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린아이가 왜 이렇게까지 예민하고 눈치가 빠른지 그녀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언니, 제가 앓고 있는 병 말인데요. 고칠 수 있을까요?”강상미는 심미연이 잠시 말을 멈추자 조용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강상미는 자신의 병이 고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지한도 치료를 위해 아이를 데리고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내가 죽고 나면 앞으로 가문을 이어 나갈 아들을 낳을 거라고 엄마가 그랬는데...’
박유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미연아, 어떻게 돼가? 아이는 치료할 수 있겠어?”“치료할 수 있어. 치료하는 건 아무 문제 없다만 아이의 몸이 좋지 않아서 좀 더 회복이 필요해.”말을 마친 심미연은 화제를 들렸다.“태하가 햇살 유치원에 입학하게 됐어. 근데 건강 검진을 시켜야 한다는 걸 깜빡했지 뭐야. 지금 태하를 병원으로 데려올 수 있어? 기다리고 있을게.”“알겠어. 바로 갈게!”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은 심미연은 강상미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약간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그래?”“저도 햇살 유치원에 다니거든요. 계속 아파서 자주 가진 못하지만요.”강상미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언니, 오늘 제 병을 치료해 주시면 안 돼요? 그러면 저도 내일부터 유치원에 갈 수 있을 거니까요.”강상미가 유치원에 다녔을 적에는 항상 경호원 아저씨들이 그 뒤를 따라다녔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랑 놀 수조차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뒤에서 자기를 ‘병신’이라고 부르던 걸 들은 적도 있었다.강상미는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파서 유치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다 나을 수 있다는 심미연의 말에 강상미는 오늘 치료를 끝내면 내일부터 다른 아이들처럼 혼자 유치원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빨리 나으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밥 잘 먹고 편식하지 말고... 할 수 있겠어?”심미연은 아이의 작은 손을 쥐며 말했다. 강상미는 너무 말라 있었고 이렇게 약한 몸으로는 수술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좀 더 회복이 필요했다.“네!”강상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잘 먹을 거라고 약속했다.그녀는 아이를 병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해. 며칠 뒤에 다시 올 테니까 밥 잘 먹고 있어, 알겠지?”“약속이에요!”심미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예쁜 언니, 안녕!”강상미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녀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그 아이의 웃음은
심미연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환자분 몸이 너무 허약해요. 만약 지금 무리하게 수술한다면 큰 위험이 따를 수도 있어요. 우선 몸 상태가 회복된 후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을 듯싶네요.”그 말에 강지한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흐려졌다.“전에 상미를 담당하셨던 의사는 더 이상 수술을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심장 이식은 작은 수술이 아니에요. 환자의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 강제로 수술을 할 경우 실패할 위험이 너무 커요. 지금은 아이의 몸을 잘 회복시키는 게 우선이에요. 그리고 아직 심장 기증자도 나오지 않았고요. 그럼 며칠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심미연은 자기를 간절히 바라보는 강지한을 보며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그럼 제가 영양사라도 고용할게요.”그는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예전처럼 차갑지 않았고 분위기도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동안 정말 많이 변한 듯했다.심미연은 과거에 자신이 매우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의 변동도 없었다. 이미 완전히 미련을 버린 것이었다. 이젠 그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는 건 오직 아이뿐이었다.“의사 선생님, 그럼 전 뭘 더 해야 할까요?”강지한은 온통 딸의 상태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심미연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실례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내분과 아이의 관계는 어떠신가요?”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던 아이의 모습에 심미연은 강상미의 어머니가 그녀를 학대하거나 자주 때리거나 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강지한은 그녀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제 아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그에게 놓고 말하서 아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심미연뿐이었다. 강지한의 대답을 듣고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네?”‘상미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고? 어떻게 된 일일까?’“그럼 저는 이만 딸을 돌보러 가겠습니다.
심미연은 항상 박유진 앞에서만 화를 냈다. 박유진이 달래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점 더 그와 함께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다음엔 절대 안 그럴게!”박유진은 손을 들어 맹세했고 그 진지한 표정에 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아빠, 엄마, 빨리 검사나 받으러 가요. 또 사람들이 몰려들겠어요!”심태하는 박유진의 귀에 입술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의 말을 듣고 심미연은 주변 사람들이 이미 그들을 구경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빨리 가자!”“와... 선남선녀 가족이네. 연예인인가?”“이렇게 달달하게 지내는 거 너무 보기 좋다...”“아들도 너무 잘생겼어! 나도 저렇게 잘생긴 아들을 낳고 싶어...”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박유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심미연를 바라보며 말했다.“미연아, 너와 함께 있는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한 것 같아.”‘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심미연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장난치지 마!”‘지금 같은 상황에서 왜 저러는지...’“엄마, 아빠가 고백하는 거 안 들려요?”심태하는 예쁜 큰 눈을 반짝이며 심미연을 쳐다봤다.‘세 살짜리 아이도 이해하는데 엄마는 왜 아직도 모르는 거지?’박유진은 빨개진 심미연의 볼과 부드러운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를 째려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문득 이 3년 동안 매일 밤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꿈속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심미연은 팔을 그의 목에 감은 채, 그의 허벅지에 올라타 있었는데 그들의 몸은 꼭 붙어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박유진의 이름을 불렀다.“유진 오빠...”매번 꿈에서 깨어나면 그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그녀가 꿈속에서 했던 말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 꿈을 생각하니 박유진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오빠, 빨리 들어가자. 예약까지 했다면서 지각하면 안 되지...”그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심미연은 그를 살짝 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순간, 정신을 차린 박유진은 어색
“바로 앞에 있잖아요. 저기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와 손을 잡고 있는 여자가 바로 심미연을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에요! 행복해 보이지 않나요?”“빨리 가자!”한 여자가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데 그녀의 일행이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방금 질문했던 남자 말이야. 좀 섬뜩해 보이지 않았어? 아무리 봐도 심미연에게 복수하러 온 거 같은데... 너 너무 자세하게 말해준 거 아니야? 심미연을 위험에 빠뜨린 거면 어떡해?”“진짜? 나 제대로 못 봤어.”“빨리 가자, 아무 말도 하지 말고...”질문을 건넸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심미연의 뒷모습을 봤다. 그의 입꼬리에 미세하게 미소가 번졌다.‘심미연, 아직 살아있네. 저 여자를 이용해서 강지한을 무너뜨려야겠어. 그럼 이노 하이브를 내 걸로 만드는 것도 시간문제지...’심미연은 왠지 온몸에 한기가 도는 걸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박유진의 옆으로 조금 다가갔다.그녀의 불안한 기색을 눈치챈 그는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심미연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그냥 이상하게 한기가 돌길래...”박유진은 이마를 찡그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없었다.‘착각인 건가? 아니면 정말 누군가가 거기에 서 있었던 걸까? 진짜 사람이라면 왜 숨고 있었을까? 도대체 누구일까?’수많은 생각이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오빠, 왜 그래?”심미연은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불안하게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별거 아니야.”박유진은 시선을 돌렸다. 그는 심미연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방금 어떤 아저씨가 엄마에 대해서 물어봤어요. 손으로 엄마 뒷모습을 가리키면서요.”갑자기 들려오는 귀여운 목소리에 박유진은 미간을 좁혔다.그렇다면 방금 전에 그가 느낀 것도 착각이 아니라는 의미였다.심미연은 박유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방금 뭘 본 거야?”그녀는 방원호에게 조사를 시켜야겠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