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강지한의 반문에 성무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불필요한 말을 꺼냈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강지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예전엔 대표님이 심미연 씨를 원하지 않으셨던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지금은 심미연 씨에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걸까?’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강지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먼저 들어가. 내일 오전 회의는 네가 진행해. 난 회사에 나가지 않을 거야.” 성무진은 짧게 대답한 뒤 병실을 빠져나갔다. ‘심미연 씨가 다시 나타난 이후로 대표님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아.’성무진이 떠난 후 강지한은 흡연실로 향했다. 그 시간대의 흡연실은 뜻밖에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러 남자들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앉아 있었고 공기는 자욱한 연기로 가득했다. 강지한은 문 앞에서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본 한 남자가 자연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내밀며 말했다. “형님, 같이 태웁시다.” 강지한이 그를 흘끗 쳐다보자 그 남자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지난번에 한 대 빌려 가셨잖아요? 또 담배 안 가져오셨을까 봐 챙겨뒀습니다.” 강지한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더니 오히려 그에게 한 개비를 건넸다. “제가 드릴게요.” 남자는 순간 눈앞의 담배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 개비의 가격이 자신의 며칠 치 밥값에 맞먹는 담배였다. 그는 슬쩍 자신이 내밀었던 담배를 다시 집어넣고 강지한이 준 담배를 공손히 받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 굳이 허세 부릴 필요 없어요. 아껴 쓰세요.”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강지한에게 손을 뻗으며 말을 걸었다. “형님, 저도 한 대만요.” 그 남자는 비싼 담배라 구경만 했지 피워 본 적은 없었다. 강지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남자의 얼굴을 스쳐 보더니 말없이 담배
강지한은 고상한 눈빛으로 말을 건 남자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마치 구역질 나는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의 입꼬리에는 비웃음이 번지며 천천히 올라갔다. “심미연은 내 여자야. 너희 그 더럽고 추악한 생각은 접어둬. 감히 남의 여자를 탐내려고 해?” 강지한의 눈빛에서 위험한 불꽃이 번뜩였다. 마치 바로 그 순간 상대를 태워버릴 듯한 위협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모두가 그의 강렬한 기세에 압도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천박한 자들이 심미연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뭐, 뭐라고요...” 그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름다운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의 여자라니. 그래서 이 남자가 이렇게 화가 난 거였구나.’ 다른 남자가 그의 아내를 그렇게 더럽히려 했다면 그도 죽을 힘을 다해 싸웠을 것이다. “끌어내.” 강지한이 차갑게 명령했다. 경호원들이 남자들을 하나씩 잡아끌어 내자 그들은 강지한이 얼마나 강력한 인물인지 실감했다. 이렇게 많은 경호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분명히 대단한 인물일 거라 짐작했다. ‘망했다.’ ‘입을 가볍게 놀리지 말았어야 했어! 큰일을 벌였네.’ 강지한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정신을 차리고 담배불을 끄며 공허한 마음으로 비어 있는 흡연실을 빠져나갔다. 마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마음이 텅 비어 있었다.같은 시각, 심미연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 계란 하나를 들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박유진의 얼굴 위에 굴리고 있었다. 그녀의 집중된 다정한 표정은 주변의 공기마저 부드럽게 만드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심미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급격히 긴장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미연아, 감기 걸린 거야? 왜 갑자기 재채기한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심미연의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을 흔드는 듯했다. 심미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공기 중에 불꽃이 튕기는 듯한 긴장감과 뜨거움이 교차했다. 박유진의 숨이 가빠지며 눈빛에는 갈망과 확고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심미연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를 뼛속까지 담아두고 싶은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으며 마치 오랫동안 목마른 사막의 여행자가 간절히 물을 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애절하고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연아, 언제 나랑 결혼할 거야?” 심미연은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과 행동에 놀라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귀에 들릴 듯했다.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의 세계가 뒤집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박유진의 숨결이 그녀를 감싸며 숨이 막힐 듯했지만 그 따뜻함과 안전감을 갈망하는 마음도 함께 밀려왔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려 했다.박유진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고 그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그냥 우리 관계가 좀 더 확실했으면 좋겠어. 이렇게 같이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한테 뭐라고 할까 봐 걱정돼.” 심미연은 박유진의 깊은 눈을 응시하며 가슴속에서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마치 그 소리가 귀로 들릴 정도로 강하게 울리며 점점 빨라져 거의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심미연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금세 붉어졌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이 마른 채로 살짝 다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용기를 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먼저 혼인 신고하러 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긴장된 채로 두 손을 꼬며 힘을 줘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마음속에서는 불안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박유진과 부부로서의 삶을 잘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부부 사이의 갈등이 커질까 봐 두려웠다. 그런 결혼 생활은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박유진은 그 말을 듣고 눈빛이 잠깐 흔들
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서야 얼굴이 달아오른 걸 깨달았다. “나 먼저 전화 받을게.”박유진은 아쉬운 기색이 스쳤지만 조용히 손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먼저 받아.” 심미연은 순간 미안한 감정이 스쳤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도진혁의 다급함이 묻어나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큰일 났어요! 신 대표님이... 사라졌어요!] 그 말은 마치 묵직한 망치로 심미연의 가슴을 내리치는 듯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떨며 핸드폰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뭐라고요? 무슨 소리예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자세히 말해봐요!] 심미연은 몰아치는 불안을 애써 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신 대표님이 갑자기... 새우찜이 먹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급히 포장하러 다녀왔거든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까... 대표님이 안 계셨어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CCTV를 확인하려 했는데...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CCTV가 고장 나 있었어요.] 도진혁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책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순간, 서늘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불안이 척추를 타고 전신을 휘감았다.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일단 경찰에 신고하세요. 저도 바로 갈게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긴장과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도진혁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자 심미연은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 차가운 불안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박유진을 꽉 끌어안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최대한 또렷하게 말했다. “오빠... 하린이가 사라졌어. 미안해... 나 지금 당장 병원에 가봐야 해.” 심미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박유진이 조용히 핸들을 돌리며 차를 계속 몰았다. 심미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하린이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박유진이 차를 세우기도 전에 심미연은 문을 열고 급히 차에서 내렸다.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병실로 달려갔다. 숨을 헐떡이며 병실 문을 밀어젖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희미한 조명 아래 외롭게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그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적막한 병실 안에는 낮고 거칠게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남자가, 그토록 강해 보이던 사람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 마음을 놓고 울고 있었다. 끊어진 실처럼 떨어지는 눈물은 하얀 침대보 위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 작은 물방울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듯 공기마저 깊고 무겁게 슬픔에 잠긴 듯했다. 심미연은 그 모습을 보고 목이 칼칼하고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크게 놀랐다. 도진혁과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아는 도진혁은 언제나 냉철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이렇게까지 무너진 모습을 보니 심미연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린이를 얼마나 사랑하면 저렇게까지 울 수 있을까...’ 그녀는 문 앞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도진혁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예상치 못하게 심미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붉게 부은 눈에서는 놀람과 당황이 엇갈리고 있었다. 순간, 그는 서둘러 팔을 들어 옷소매로 얼굴에 묻은 눈물을 급히 닦아내며 예전의 차분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도진혁이 심미연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병실로 들어갔다. “심 대표님...”도진혁의 목소리는 깊고 낮으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순간 쌓여온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며 고통을 숨기려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심미연은 차분하게 응답하며 깊게 숨을 들
[유진 도련님께서 무슨 자격으로 그걸 물으시는 겁니까?] 이진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하고 게으른 기색이 역력했다. 박유진은 차갑게 웃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한밤중에 사람을 병원에서 몰래 데려가시는 겁니까? 그것도 말 한마디 없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강하게 울려 퍼졌다. 빈 복도를 가득 채우며 마치 망치질처럼 묵직한 메아리를 남겼다. 처음 심미연이 이진영을 의심했을 때 박유진은 혹시 오해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진영이야 원래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인간이지만 적어도 이렇게 무례하고 비합리적인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그가 보인 태도와 말투, 모든 게 박유진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신하린을 데려간 건 분명 이진영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잠시 적막이 흘렀다. 박유진이 이렇게까지 묻는 걸 보면 심미연이 이미 모든 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아마 곧 직접 날 찾아오겠지.’ 하지만... 신하린을 돌려줄 생각 따위, 애초부터 없었다. 그 여자는 평생 그의 곁에 있어야 하니까. 다시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신하린을 데려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박유진의 목소리는 낮고도 위협적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빨 사이로 스며 나오듯 묵직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진영은 비웃음을 흘리며 조롱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박유진 씨, 너무 간섭하는 거 아닌가요? 신하린은 제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 굳이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는 언제나 자유롭고 방종한 삶을 살아왔고 감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박유진은 복도 끝에 서서 도시의 불빛이 그의 차가운 얼굴을 스치듯 비추는 가운데 핸드폰을 단단히 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고는 더욱 날카로웠다. [이진영 씨, 정도껏 하시죠.] 그는 확신했다. 심미연이라면 자신이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곧바로 이진영의 위치
그는 문득 심미연의 정체에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심미연은 아무것도 모른 채 태연하게 노트북을 켜더니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도진혁의 시야에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화면에는 쉴 새 없이 복잡한 코드들이 펼쳐졌다. 도진혁은 순간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심 변호사님이... 단순히 변호사인 줄만 알았는데?’ ‘대체 정체가 뭐야?’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알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정말 예측 불가한 인물이었다. 한편, 박유진은 맞은편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진지하게 일하는 남자가 가장 멋있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진지하게 일하는 여자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 깊이 빠져들 것만 같았다. “됐다!” 심미연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생각에 잠겨 있던 두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찾아냈어요?” 도진혁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는 이미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지만 자신이 나갔던 시간대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심 대표님이 찾아냈다고?’ ‘대체... 이분 정체가 뭐야?’ 도진혁은 본능적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혹시 이미 자신의 모든 정보를 조사한 게 아닐까? 그는 이쯤 되니 고민이 밀려왔다. ‘지금이라도 신 대표님한테 솔직히 말해야 하나?’ ‘근데 사실을 털어놓으면 신 대표님이 화내겠지?’ 그녀를 속인 게 무려 3년이다. 도진혁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한편, 박유진은 자연스럽게 심미연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익숙한 듯 그녀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미연이 진짜 대단한데?” 심미연은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맑고 밝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퍼지자 주변까지 환
신하린은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부릅떴다. 그 눈빛에는 꺾이지 않는 의지와 자유를 향한 갈망이 서려 있었다. 마치 말없이 결심을 다지며 자신을 단단히 세우는 듯했다. “이렇게 한다고 내가 순순히 당신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해요?” 신하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약했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날 놓아주지 않으면 그냥 죽어버릴 거예요. 분명히 말했어요.” 이진영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릿하게 조여들었다. 그러나 곧 냉소를 머금으며 비웃듯 말했다. “신하린, 그 남자 때문에 절식하면서까지 죽겠다고 난리치는 거야? 그렇게까지 사랑해?” 그제야 그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한 신하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난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해요.” 도진혁이 한때 자신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하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망가진 자신은 그처럼 빛나는 사람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그저 그의 말에 맞춰 대답했을 뿐이지만 그 한마디가 오히려 이진영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신하린을 거칠게 밀쳐내더니 방 한쪽으로 가서 차가운 쇠사슬을 꺼냈다. 신하린은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이내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진영의 성격을 잘 아는 그녀는 그 앞에서 한 번이라도 약해지면 더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그녀는 폭풍이 더 거세게 몰아친다면 차라리 그것에 맞서 싸우자는 결심을 했다. “이렇게 해도 네가 어떻게 죽나 한번 보자.” 이진영은 차갑게 말하며 쇠사슬을 신하린의 가느다란 손목에 감고 ‘딸깍’ 소리와 함께 자물쇠를 잠갔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너 어릴 때 이미 남자한테 처음을 빼앗겼잖아. 그런데도 내 앞에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