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거면 어때? 그 여자는 진영 씨에게 약혼녀가 있는 걸 알면서도 뻔뻔하게 다가갔잖아. 우리 사이를 망쳐 놓은 건 신하린이야.”“그 여자, 죽어 마땅해.” 한석훈이 물러난 뒤 한씨 가문은 몰락했고 한유나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으며 그녀는 연구소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그 이후로 한유나는 점점 더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해져 갔다. 이진영 앞에서는 예전 한씨 가문의 고상한 아가씨처럼 온순하고 점잖은 척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 우아함은 사라지고 본능적인 거칠음만 드러났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고 남은 건 비난과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다 잃었는데 우아함과 점잖음이 무슨 소용이야?’ 심미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하린이가 건드린 게 아니라 오히려 이진영 씨가 하린이에게 매달린 걸 수도 있잖아. 넌 그냥 이진영 씨를 차지하지 못한 원망을 하린이에게 떠넘기고 있는 거야. 그게 하린이한테 공평하다고 생각해?” “그 여자가 진영 씨를 건드린 게 아니라면 왜 자꾸 만나고 다니는 거야? 그 여자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진영 씨와 부부였을 거야.”한유나는 이진영 얘기만 나오면 감정이 격해졌다. “나는 한씨 가문의 아가씨야. 학식도 있고 배경도 좋다고. 그런데 진영 씨는 그런 나와는 잠자리를 안 가지면서 이미 더럽혀진 신하린과는 계속 관계를 이어갔어.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뭔데?”한유나는 모든 불행이 신하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겪은 고통이 신하린 때문에 생긴 일이라 여겼고 그로 인해 자신이 겪은 아픔만큼 신하린도 반드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건 너를 아내로 맞지 않는 이진영 씨한테나 물어봐야겠지.”심미연은 눈을 날카롭게 좁히며 차갑게 말했다. “왜 아무 죄 없는 하린이에게 그런 짓을 한 거야? 대체 왜 하린이를 건드린 거냐고!”그녀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그 어떤 말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세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한유나는 갑자기 웃
그녀는 지금 한씨 가문을 구할 수 있는 강력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임지혜가 그런 남자를 소개해줄 수 있다고 했었다. 임지혜가 먼저 전화를 걸어 만남을 제안한 것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가서 상황을 보고 괜찮다면 그 남자와 만나볼 생각이었다. 지금 한석훈과 그녀의 처지에서는 선택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한유나가 로얄하임 백화점에 도착하자 임지혜는 옷을 입어 보고 있었다. 명품 브랜드, 한 벌에 최소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예전에 그녀도 이런 옷을 자주 샀었지만 지금은 한 벌을 사는 것조차 그녀에겐 큰 부담이 되었다. “유나야, 잠깐 앉아 있어. 두 벌 더 입어볼게.” 목소리의 주인은 키가 크고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그 얼굴은 영화 속에서 걸어나온 국제적인 스타처럼 어디서 봐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한유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천천히 입어봐. 기다릴게.” 임지혜,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다. 7년 전, 갑자기 경성에서 사라졌고 얼마 전 다시 돌아왔다. 그동안 그녀가 무엇을 했고 어디에 있었는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하나 분명한 건, 임지혜가 돈이 많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녀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경성의 부유한 2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전에는 학력과 배경이 있었기에 그런 돈 많고 방탕한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하지만 이제 한씨 가문이 몰락하면서 그녀는 그 세계에 발을 들이려 애썼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한유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씁쓸함을 느꼈다. 그 간극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그래도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혼자 있는 밤이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신하린 탓이라고 여겼다. 만약 신하린이 이진영에게 그렇게 끈질기게 집착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다
한유나는 급히 한 발 물러섰다. 그때, 차 문이 열리며 운전기사가 내려서 임지혜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임지혜 씨, 차에 탑승해 주세요.” 임지혜는 차 뒷좌석 문을 열고 한유나를 밀어 넣었다. “강 도련님과 먼저 인사해.” 그 후 임지혜는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한유나가 자리에 앉자 옆에 가면을 쓴 남자가 앉아 있는 걸 보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무의식적으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움켜잡았다. 그 남자가 너무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차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 도련님, 안녕하세요. 이 분은 제 가장 친한 친구 한유나예요. 유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동경해 왔고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싶어 했어요.” 임지혜가 가면을 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남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차갑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임지혜는 한유나에게 눈을 깜빡이며 신호를 보냈다. “유나야, 강 도련님이랑 얘기 좀 해봐.”한유나는 온몸이 굳어버린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임지혜가 자신에게 이런 남자를 소개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 남자는 보기만 해도 그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나야, 빨리 말해.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이라도 얘기해 봐.”임지혜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한유나를 재촉했다. 한유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유나입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한씨 가문의 딸이고 이씨 가문의 미래 며느리죠.”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얼음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그 말이 귀에 닿자 한유나는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저...”한유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4년 전, 그녀는 한씨 가문의 고상한 아가씨였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경성에
남자는 지금 그 여자를 마음껏 괴롭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강지한, 왜 말이 없어? 말 좀 해봐.” 심미연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녀가 최대한 품위를 지키려 애쓰는 것이 들렸다. “박유진과 언제 이혼할 건지, 언제 내 곁으로 돌아올 건지만 말해. 그때 너랑 아들 다시 만나게 해줄게.” 강지한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벼워지며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네 말대로라면 내가 이혼하지 않고 네 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들을 영원히 못 볼 거라는 거야?” 심미연은 가슴이 뛰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강지한이 눈앞에 있었다면 그녀는 그의 얼굴에 한 대 날렸을 것이다. 정말 죽어 마땅한 남자였다.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해?” 강지한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알았어.” 심미연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강지한과 함께한 3년, 그녀는 강지한이 결정을 내리면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한 발 물러서서 차분히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강지한은 핸드폰을 들고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심미연은 예전에는 그에게 전화를 끊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다. 강지한은 여전히 지금의 심미연과 과거의 심미연을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과거의 기억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심미연은 이미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지한은 분명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그 고통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이를 이용해 심미연을 다시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바로 컴퓨터를 켜 강지한의 핸드폰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강지한은 서재에서 오랫동안 앉아 담배 두 갑을 피웠다. 상업계에서 냉혹한 수단을 써 온 그였지만 유독 한 여자를 상대할 때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새벽이 다가올 무렵, 심미연은 마침내 강지한의 핸드폰 위치를 추적했다. 컴퓨터를 가방에 넣고 옷을 갈아입은 후 심미연
심미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말했다. “승산이 100%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자신이 유리한 상황이라 해도 완벽한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만두겠습니다. 다른 변호사를 찾겠습니다.” 이진영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심했다. 심미연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결국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가 누구를 고용하든 상관없었다. 자신과 관련이 없다면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이진영은 그녀가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 몰랐는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심미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신호음에 이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심미연 씨가 이렇게 쉽게 동의하다니?’ 단 한 마디의 설득도 없었다. 만약 이다은의 이혼 사건에서 승소하면 그 변호사 비용만으로도 상당한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심미연이 이 사건을 놓치면 그만큼 많은 돈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며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 “지금 상황은 어때? 변호사는 찾았어?” “아니. 아직 찾고 있어.” “왜 심미연을 바꾼 거야?” “100% 승산을 확신하고 싶어서. 하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 “이건 이혼 소송이야. 물건 사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감히 100% 승리를 보장할 수 있겠어?” 상대방은 거의 미친 듯이 그를 비난했다. “상관없어. 난 이기기만 하면 돼. 절대 질 수 없어.” “변호사 하나 소개해줄게.” “누구?” “예전에 경성에서 유명한 변호사였어.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빨리 말해.” 이진영은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며 말을 끊었다. 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킨 뒤 무겁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운혁.” 이진영은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람... 몇 년 전에 죽었잖아? 지금 뭐 무서운 이야기 하는 거야?” 진운혁은 예전에 경성에서 정말
화면에 여러 통의 미수신 전화가 뜬 가운데 그 중 임현의 번호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심미연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솟구치며 깊이 생각할 시간도 없이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급하고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심 변호사님...’ “임현 씨, 무슨 일이에요?” 심미연은 급하게 물었다. “심 변호사님, 마을 사람들이 저희를 가둬버렸어요. 아예 나갈 수가 없어요. 제발 와서 도와주세요.” 임현의 목소리는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심미연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좁히며 긴장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뭔데요? 알았다고 말하세요. 지금 당장 갈게요.” 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대답했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아들 일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우선 임현을 구하는 일이 급했다. 그녀는 짐을 챙기며 전화를 걸었다. “보스, 무슨 일이에요?” “사람 몇 명 모아서 나한테 와줘요. 싸움 잘하는 사람들로, 알겠죠?” “네. 걱정 마세요. 바로 준비해서 출발할게요.” 짐을 다 챙긴 심미연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때, 다른 한쪽에서는 비가 갓 내린 마을의 길에 진흙이 고여 빗방울이 은침처럼 땅을 파고들며 불규칙한 물웅덩이를 남기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빛을 반사하는 웅덩이들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임현과 동료들은 그 초라한 작은 집 안에 갇혀 있었다. 작은 창문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겨우 몇 줄기 희미한 빛이 비쳐 들어오며 안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공기는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비가 내린 후 특유의 습기와 냉기가 섞여 사람의 폐 속까지 파고들었고 그녀는 참을 수 없이 기침을 하고 싶어졌다. 밖에서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소리는 끊임없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로 울려 퍼졌다. 전화를 끊은 후, 임현은 긴장한 몸이
심미연은 차 안에 앉아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외딴 마을로 가는 길을 어떻게 가장 빨리 수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비가 장막처럼 쏟아지며 차창을 세차게 두드렸고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그녀는 앞으로의 여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때, 갑자기 급하고 약간은 당황스러운 두드리는 소리가 차 안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심미연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잠시 후, 박 기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밖에... 사람 같아요...” 박 기사는 말을 하며 자꾸만 후방 거울을 힐끗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산속에 늑대가 출몰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지금 밖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심미연은 박 기사의 말을 듣고 갑자기 고개를 들며 빗물로 가득 찬 창밖을 응시했다. 그 순간, 한 쌍의 호박빛 눈동자가 마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비가 내리는 장막을 뚫고 마주친 그녀와 깊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 눈은 깊고 신비로웠으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한 빛을 발하며 끝없는 이야기와 비밀을 간직한 듯했다. 그는 조용히 심미연과 눈을 맞추었고 가까이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좁고 답답한 차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침묵에 휩싸였다. 심미연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그 눈빛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 기사는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가 된 듯했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심미연은 시선을 돌려 손을 뻗어 차 문을 열었다. 빗방울이 얼굴을 스치며 시원한 기운을 전했고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이 비에 젖었다. 그녀는 몸을 살짝 움직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세요.” 그녀의 말투는 단호하고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사람
문도현은 갑작스럽게 몸속 깊은 곳에서 일어난 뜨거운 열기에 의해 속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르며 그 열기가 순식간에 팔다리 끝까지 퍼져나갔다. 생리적인 반응에 당황한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수많은 여성들과 얽히며 살아왔다. 그들 중 누구도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지 않았다. 모든 친밀한 만남은 단지 욕망을 풀기 위한 일상적인 일이었고 예외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여성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명품 가방, 고급차, 그들이 원하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언제나 짧고 목적이 뚜렷했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로의 길을 갔다. 그는 여자를 향한 욕망 외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본 적이 없었고 애정이나 미련 따윈 일절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마치 번개처럼 그의 평온한 삶을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한 번의 시선, 한 번의 행동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까지 미묘한 여운을 남기는 듯했다. 문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혼란스러워하며 당황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감정은 그에게 전혀 낯선 것이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다듬고 물기가 떨어지는 수건을 가죽 시트 위에 올려 놓고는 차분히 몸을 낮춰 앉았다. 그의 동작은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이어졌다. “심미연 씨, 거래 하나 제안할게요.” 그의 눈은 심미연을 깊이 응시하며 그 속에 장난기와 계산된 의도가 섞여 있었다. 목소리에는 미묘한 가벼움이 섞여 있었고 마치 어두운 밤 속에서 은밀히 피어나는 매혹적인 꽃처럼 끌어당기고 싶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는 원래 이곳을 조사하려고 왔지만 뜻밖의 폭우가 그를 갇히게 만들었다. 더욱 안 좋은 건 함께 온 기사와 길이 엇갈려 혼란 속에서 헤매다 결국 나무 아래에 숨어 기사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외진 시골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