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한유나를 바라봤다. “미연아, 그 여자가 나를 거의 죽일 뻔 했어.” 그때 신하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심미연은 신하린의 목을 살펴보며 아무런 상처도 보지 못한 채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 여자는 내가 죽기를 바랐어.” 신하린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녀가 의식이 없었을 때 한유나가 멈추지 않았다면 그녀는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한유나는 내가 절대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심미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신하린을 부드럽게 안아 밖으로 향했다. 신하린은 매우 가벼웠지만 그녀를 오랫동안 안고 있자 심미연도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며 심미연은 발걸음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이진영이 다가와 그녀를 가로막았다. “하린이는 데려갈 수 없습니다.” 심미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요? 나한테서 뺏으려는 건가요?” 이진영은 신하린을 안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린아, 나한테 와. 다시는 한유나가 널 찾지 못할 거야.” 그는 한유나가 어떻게 집에 들어왔고 어떻게 2층으로 올라갔는지에 대해 계속 조사하고 있었다. 집안의 가정부에게 모두 물어봤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만약 내가 하린이를 당신에게 줄 수 없다면요?” 심미연은 신하린을 더 꽉 안으며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이진영은 사람을 강제로 빼앗으려 했다. 어차피 그는 두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더 악역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이진영 씨, 이렇게 계속 나오신다면 저도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심미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하린이는 내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어야 해요.” 이진영은 강압적으로 말했다. 그는 신하린이 그를 떠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미워하든 말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진
“그 말은... 결국 나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거군요?”심미연이 차갑게 물었다. 신하린은 본능적으로 심미연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죽어서라도 이진영과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이진영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하린이를 남겨두면 심미연 씨는 나갈 수 있습니다.” 그의 눈은 신하린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동자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빨 사이로 겨우 빠져나온 듯한 그의 말은 반박할 여지 없이 강렬하게 전해졌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신하린이 그를 떠난다면 그것은 마치 끊어진 실처럼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 깊은 감정은 결국 무한한 후회와 고통으로 변할 터였다. ‘반드시 붙잡아야 해.’그 집착은 뜨겁게 불타듯 그의 가슴 속을 태웠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심미연은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의 집착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진영 씨가 하린이를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소와 경멸이 섞여 있었다. 그러곤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이 손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다. “들어와.”순식간에 문 밖에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일제히 들어왔다. 그들의 발걸음은 일사불란하게 맞춰져 있었고 마치 풀려난 맹수처럼 위압적이었다. 방 안은 긴장감이 감돌며 공기 속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팽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진영은 차가운 시선으로 경호원들을 훑어보며 비웃었다. 그의 입술에는 섬뜩한 냉소가 떠올랐다.마치 겨울의 날카로운 칼날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누가 강지한의 여자가 아니랄까 봐. 다르긴 다르네요. 지한이의 수단을 그대로 배워 오셨군요. 대단하시네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운 톤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겨우 끌어내듯 말했다. 차가운 콧김이 그의 코에서 터져 나오며 그 소리는 마치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 방 안을 진동시켰다. 심미
이진영이 멍하니 서 있는 틈을 타 심미연은 마치 질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신하린을 품에 안고 발걸음을 단단히 다잡고 밖으로 내달렸다. 경호원들은 마치 강철로 만든 성벽처럼 일렬로 서서 단단히 사람들로 이루어진 벽을 형성했고 격분한 이진영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이진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마치 분노한 사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심미연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심미연이 경호원들을 여기까지 데려올 정도라면 분명 완벽한 대책을 세운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손을 대면 심미연의 경호원들이 몰려오면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주위의 공기가 마치 얼어붙은 듯 고요해지고 심미연과 경호원들의 무거운 발걸음 소이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이진영의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며 매 걸음이 전례 없는 좌절과 무력감을 안겨 주었다. 한유나는 한쪽에서 심미연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 기울여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복잡하게 변화하며 질투가 독사처럼 마음속을 감쌌고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심미연은 두려움 없이 당당할 수 있는 걸까?’ 반면, 자신은 마치 쫓겨난 개처럼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심미연은 한유나가 지금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오직 신하린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기만을 생각했다. 그래야 신하린이 더 이상 이진영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될 테니까. 대문 앞에 쌓인 폐허를 보고 신하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대문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심미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시켜서 굴삭기로 밀어버렸어.” 그녀는 이곳에 올 때 이진영이 신하린을 안고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문이 폐허처럼 변한 모습을 보고 신하린은 마치 심장이 꽉 쥐어진 듯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감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깨달았다. 심미연처럼 좋은 친구를 만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미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도현 씨? 무슨 일이죠?” ‘지난번에 차에서 걷어찼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나?’ “같이 방 잡을려고요. 이 정도면 충분한 이유 아닌가?” 문도현의 느물거리는 목소리에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할 얘기 없으면 끊겠습니다.” 심미연은 정신 나간 사람이랑 엮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문도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당신 아들 찾고 싶지 않아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미연은 손끝이 떨렸지만 애써 감정을 다잡았다. “무슨 뜻이에요? 내 아들이 당신 손에 있어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녀는 거듭 물었다. “지금 어디예요?”조급한 마음이 앞서 자꾸만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한테 예쁘게 부탁하면 가르쳐 줄 수도 있죠.” 가벼운 웃음이 섞인 장난스러운 말투. 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장난치지 말고. 지금 당장 위치 알려줘요.” “그럼 내 카톡 추가 받아줘요.” 순간, 지난번에 그가 카톡 추가하자고 했을 때 단칼에 거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엔 그걸 핑계로 삼으려는 거였다. “좋아요. 아이만 찾을 수 있다면 추가할게요. 아이디 알려줘요.” 문도현이 키득 웃었다. “내 번호도 저장해 둬요. 다음번에도 안 받으면 가만 안 있을 겁니다.”“알겠어요.” 심미연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이부터 찾고 그다음에 번호를 삭제할 생각이었다. “삭제하지 말고. 알겠죠?” 대답도 하기 전에 마치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말이 들려왔다. 심미연은 말없이 침묵했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문도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내 생각이 맞았네요? 당신 나 찾고 나면 바로 번호 지울 생각이었죠? 그런 거라면...” 문도현은 목소리는 한층 낮아지며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당신 아들 다시 못 볼 줄 아세요.” 뇌리를 찌르는 듯한
전화기 너머로 낮고도 깊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심연에서 흘러나온 듯한 묵직한 울림이었고 단 한 마디만으로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겼다. “이제 믿겠어요?” 순간 심미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에 쥔 핸드폰이 한순간에 뜨겁게 달아오른 것만 같았고 목을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에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주변의 공기는 얼어붙었고 들려오는 건 오직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와 멀리서 간간이 울려 퍼지는 자동차 엔진 소리뿐이었다. “지금 당장 추가할게요.” 심미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바삐 움직였고 거의 반사적으로 ‘친구 추가’버튼을 눌렀다. “번호도 저장해요. 헷갈리게 만들지 말고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삭제하지 마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저음으로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묘하게 날카로운 위협이 섞여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한순간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대로 덮쳐올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또 다른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가 거쳐 온 여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고 직접 손에 쥐고 싶어진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는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면 언젠가는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여자는 결국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니까. 심미연은 급히 연락처 목록을 열어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남자의 속셈이 무엇인지 몰라도 지금은 순순히 따르는 게 최선이었다. 망설임 없이 번호를 저장한 뒤 곧바로 캡처를 떠서 그의 카톡으로 전송했다.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그녀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속 불안과 초조함이 얽혀드는 가운데 시간은 더더욱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톡 알림음이 적막을 깨듯 울려 퍼졌다. 문도현이 보낸 메시지는 단 하나. [실시간 위치 공유.] 정확한 좌표가 찍힌 지도
어두운 밤, 문도현의 모습이 희미하면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얼굴은 약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더욱 단단해 보였고 그 눈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숨겨져 있었으나 그것들이 곧바로 복잡한 감정으로 굳어졌다. 유리창 너머,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그 순간, 심미연은 문도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임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숨기지 않은 가식 없는 관심 그 자체였다. 시간이 이 순간에 마치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매 초마다 늘어나는 듯했다. 결국 문도현이 손을 들어 창문을 다시 두드리며 심미연을 불렀다. 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 깊게 숨을 쉬며 천천히 창문을 내렸다. 차 안으로 문도현의 낯선 기운이 섞인 바람이 들어왔다. “왔어요? 대담하시네요.” 문도현은 심미연이 혼자 온 것을 보고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마음속으로는 심미연의 용기에 대한 감탄이 있긴 했지만 그가 내뱉은 말은 여전히 도발적이고 귀찮게 들렸다. 심미연은 차를 안정적으로 멈추고 차 문을 열었다. 긴 다리를 내딛고 이어서 몸을 날렵하게 차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 아래, 그녀의 모습은 가로등 불빛에 의해 길게 드리워졌다. “문도현 씨, 이제는 제 아들을 데려갈 수 있나요?” 심미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문도현을 향한 눈빛은 마치 두 자루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심장을 겨냥하는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고 단지 눈앞의 남자를 평범한 사람처럼 대했다. 문도현은 피식 웃으며 심미연에게 다가가 귀에 가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으세요?” 말을 마친 후, 그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심미연의 뺨을 가볍게 스쳤다. 그 행동은 경솔하고 무례함이 가득했다. 심미연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지며 그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그녀는 문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그 사람의 손에 있기에 그녀는 그와의
“왜요? 무서운 건가요?”앞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두운 밤공기 속에서 더욱 깊고 오싹하게 들렸다. 심미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앞에 있는 남자에게 돌진했다. 그녀의 충동적인 행동에 문도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열정적이네요. 내 품에 안기고 싶었어요?” 문도현은 쾌활하게 웃으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손을 뻗어 그녀를 가볍게 품에 안고 붉어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 여자는 정말로 자극적이었고 조금만 건드려도 언제든지 반응할 것 같았다. “이거 놔요!”심미연은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심미연 씨, 지금 내가 당신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나중엔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문도현의 목소리는 갑자기 무겁고 진지해졌다. 그의 말은 마치 심미연이 그와 잠자리를 갖지 않는 것이 인생에서 놓칠 수 없는 기회인 것처럼 들렸다. 심미연은 그의 말에 더 이상 참지 않고 힘껏 그를 밀쳐냈다. “경성에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른 여자나 찾아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문도현 같은 남자와 하룻밤 관계를 맺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관계는 명예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을 안겨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지금은 당신한테만 관심 있다고요. 다른 여자는 상관없어요.” 문도현은 여자들을 자주 만나지만 그렇다고 모두와 자는 건 아니다. 그의 말에 심미연은 잠시 멍해지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예요?”심미연의 목소리에는 어이가 없다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내가 왜 너랑 잠자리를 가져야 돼?’‘사람을 뭐로 보고... 정말 어이없네.’ “그렇게 생각해도 나쁘진 않죠.” 문도현은 달빛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은밀하게 빛났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붉어지고
“내 아들은 어디 있어요?” 심미연의 표정은 심각했다. 문도현은 일반적인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그와 엮인다는 건 곧 크게 골치 아픈 일을 떠안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심미연은 그를 최대한 피하려고 애썼다. “당신 아들은 방 안에 있어요. 들어가서 찾으면 됩니다.” 문도현은 미소를 띤 채 심미연을 바라보았다. “그 방에 들어갈 용기 있어요?” 심미연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아들이 안에 있으니 누가 뭐래도 들어갈 거예요!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요.” 문도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럼 내가 속인 거면 어떻게 할 건데요?” 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런 짓 못 해요.” 그녀는 이미 사람들을 불러놓았다. 만약 자신이 한 시간 내에 이 집을 떠나지 않으면 굴착기를 보내 문도현의 집을 밀어버릴 테니까. 그때가 되면 관계는 완전히 틀어질 수밖에 없다. 심미연의 자신감에 찬 표정을 보고 문도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그녀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무 계단은 어두운 불빛 아래서 쿵쿵 소리를 내며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듯했다. 2층 복도.발을 디디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심미연을 소름 끼치게 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작은 그림자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속도는 마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처럼 빠르고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충격을 안고 있었다. 문도현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자신의 뒤로 잡아당기며 그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 그림자는 거의 충돌할 듯 가까워졌으나 그 직전 멈춰서 빠르게 몸을 돌려 그들 앞에 서게 되었다. “엄마, 왔어요? 평생 엄마를 다시 못 볼 줄 알았어요...” 심미연은 급히 문도현을 밀쳐내고 아이 앞에 섰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보자 심미연은 가슴이 먹먹하고 심장이 쪼여 오는 듯했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그녀는 그 말을 끝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울지 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